진기태와 윤수경은 더이상 임유진 앞에서 거만을 떨었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땐 마치 임유진을 개미 새끼 쳐다보듯 한 손으로 가볍게 짓누를 기세였는데 지금은 되레 그들이 개미 새끼가 되었다!진세령은 연기자라 이 셋 중에서 표정을 가장 잘 숨기는 1인이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지혁 오빠, 우리 부모님이 오늘 백화점에서 임유진... 임유진 씨와 마주치고 한순간 홧김에 과격하게 행동했어요. 저희가 유진 씨한테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어요.”그녀는 임유진 씨라고 부르는 게 상당히 불편했다.어쨌거나 임유진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고 가치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인데 지금 그런 인간한테 존칭을 써가며 깍듯이 모셔야 한다니, 이건 그냥 자존심을 짓밟는 거나 다름없다.“그래? 홧김에 그랬어? 유진이가 대체 무슨 일로 당신들을 화나게 한 건지 말해봐 봐!”강지혁은 여유 있게 질문을 건넸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서 현재의 감정을 전혀 보아낼 수 없었다.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이게 바로 사람들이 S 시 빅 보스 강지혁에 대한 평가였다. S 시에서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지혁아, 그 아이는... 애령이를 죽인 범인이야! 이거면 다 된 거 아니야?”윤수경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그를 질책했다.“애초에 그 애가 우리 애령이를 해쳤어! 너 어떻게... 어떻게 그런 애랑 함께할 수 있는 건데? 너 이러는 거 애령이가 지켜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윤수경의 후반부 말에 진기태와 진세령은 안색이 확 돌변하며 얼른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윤수경은 모조리 입 밖으로 내뱉었다.한편 그들은 강지혁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걸 보더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건 영락없는 말실수이니까.진기태는 상업계에 오래 머물러 교활하기 그지없다 보니 사람 눈치를 살피는 데 아주 능숙하다.강지혁 같은 남자는 호감 가는 여자를 본인이 알아서 정한다. 진애령이 한때 그의 약혼녀였다고 해도, 아예 결혼
진기태는 자세를 한껏 낮추었다.“그럴 필욘 없어요. 유진이도 당신들 안 보고 싶을 거예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진세령과 윤수경은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임유진을 마주 보며 사과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적어도 굴욕감을 덜 수 있으니까.한낱 개미 취급했던 사람에게 사과하라니, 두 모녀에게 굴욕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두 여자는 임유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진세령에겐 한때 연적이었다.한편 진기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일이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그래, 그럼 우린 이만 갈게. 방해해서 미안해.”윤수경은 남편에게 빨리 나가자고 곁눈질했다.그녀가 막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참, 빚진 건 갚고 가셔야죠.”“빚진 거라니?”윤수경은 뭘 빚졌다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오늘 유진의 뺨을 때린 횟수만큼 스스로 때려서 갚아야죠.”강지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윤수경은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지금 나보고 내 뺨을 치라는 거야? 고작 전에 유진의 뺨 좀 때렸다고?’“내가 뭘 빚졌어? 그 여잔 뺨 맞아도 싸! 고작 뺨 좀 맞았다고 이 난리야!”윤수경이 막말을 내뱉었다.강지혁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경 앞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싸대기를 날렸고 정통으로 맞은 윤수경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댈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윤수경은 얼얼한 뺨을 감싸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강지혁은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당신이 유진이 때릴 자격 있어? 당신네 집안은 유진이 털끝도 못 건드려. 앞으로 두 번 다시 유진이 건드리면 그땐 집안 전체를 아작낼 줄 알아.”강한 압박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진기태와 진세령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두 사람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강지혁이 그들을 싹 다 내쫓았다.진기태는 한숨
평상시 상류층에서 남들에게 대접만 받던 그녀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 화날 만도 했다.“안돼, 임유진 그년 반드시 따끔하게 혼낼 거야. 그년이 강지혁 찾아가서 이간질한 게 틀림없어. 지혁이가 예전엔 나 이렇게 대하지 않았다고.”윤수경은 또다시 모든 책임을 임유진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그만해!”진기태가 입을 열었다.“앞으로 두 번 다시 임유진 찾아가지 마. 이번 일은 이쯤에서 끝내.”윤수경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뭐라고요? 임유진 그년은 우리 딸 죽인 범인이에요!”진기태의 눈가에 복잡한 기운이 스쳤지만 곧바로 머리를 홱 돌리며 아내의 시선을 피하려 했다.“우리 집안 전체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거든 어서 내 말 들어!”윤수경이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진세령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엄마, 이번엔 아빠 말 들어요. 적어도 지금은... 임유진 상대하지 말아요.”강지혁이 그녀에게 감정이 식을 때, 그때 다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된다.윤수경은 썩 내키지 않았다. 뺨까지 얻어맞았는데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니 그녀는 달가울 리가 없다!‘임유진, 이 빌어먹을 년!’...강씨 저택 거실에서 임유진이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좀 전에 줄곧 계단 뒤에 숨어 있었다.거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지켜보았고 몇몇 사람들의 대화도 들었다.강지혁이 자신을 위해 화풀이해주니 오늘 오전에 당했던 그 수모가 조금씩 가셨다. 그가 앞장 서주며 했던 말들과 함께 그녀의 응어리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임유진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강지혁은 계단 쪽으로 고개 돌리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그의 제스처는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마치 언제 어디서나 손 내밀어 그녀를 도와줄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손바닥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강지혁은 큰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왜 내려왔어?”강지혁이 물었다.“실은... 아까 계단 입구에서 다 보고 있었어. 고마워...”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
점점 기대면 서서히 습관으로 돼버리겠지...강지혁은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부은 얼굴에 가볍게 키스했다. 깃털이 스치듯 가벼운 키스였다.“그럼 기대면 되지. 난 누나가 기대기만을 바라고 있어.”그녀가 기댈 수 있는 건 강지혁이 오매불망 그리던 일이다. 그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기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30분 남짓 지난 후 의사가 도착해 임유진의 붉게 멍든 얼굴을 진찰하고는 붓기 내리는 약을 처방했다.의사가 떠나고 임유진이 약을 바르려 할 때 강지혁이 선뜻 약을 채갔다.“내가 발라줄게.”“그래.”그녀도 순순히 대답했다.강지혁은 긴 손가락으로 약을 발라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문질러주었는데 부드러운 그의 제스처와 살짝 차가운 약까지 더하니 얼굴에 따끔거리는 느낌도 많이 줄어들었다.“진짜 사람 걱정시킨다니까. 왜 자꾸 다쳐.”강지혁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문지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임유진은 문득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그의 말처럼 둘이 알고 지낸 이후로 그녀는 줄곧 여러가지 작은 상처를 입었으니까.“누나를 집에 숨겨뒀으면 좋겠어. 그럼 아무도 다치게 못 할 거잖아. 누나도 더는 상처를 입지 않을 테고.”강지혁은 매번 그녀의 몸에 난 상처를 보면 심장을 쿡쿡 찌르듯이 아팠다.“어떻게 집에만 숨어 있어?”임유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강지혁은 손에 묻은 잔여물을 티슈로 닦은 후 몸을 기울이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만약 계속 더 상처 입는다면 그땐 정말 누나를 집에 가둘지도 몰라. 누나는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싫어. 누나 몸에 흉터 생기는 일 보고 싶지 않아.”강지혁의 짙은 눈동자에 진지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임유진은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농담이 아니었어. 진지하게 말하고 있잖아!’“먼저 방에 가서 쉬어. 그리고 피곤할 테니까 일찍 자.”강지혁이 말하면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임유진은 숨을 깊게 몰아쉬곤 본능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아니야... 아무것도. 내일 외할머니 보러 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샀잖아.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그랬어.”실은 다 샀는데 진씨 일가 사람들이 그 다과 세트를 휴지통에 버렸다.“내가 이미 다 사놨어. 탁자에 있어.”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방안의 탁자를 보았는데 익숙한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이건... 그녀가 낮에 백화점에서 샀던 디저트 쇼핑백인데... 강지혁이 설마 똑같은 거로 산 걸까?“오늘 내가 산 거잖아?”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맞아, 거기에 내가 좀 더 보탰어.”“하지만 내가 뭘 샀는지 네가 어떻게 알고...”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영상을 봤다 해도 쇼핑백만 나왔을 뿐이니까.“백화점 영수증만 살짝 조회해봐도 누나가 뭘 샀는지 다 알아.”강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겐 어려운 일일지 몰라도 강지혁에겐 너무 쉬운 일이었다.“내가 갑자기 소리 질러서 너 방해한 건 아니지?”임유진이 물었다.“방해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강지혁은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았다.“언제 어디서든 누난 항상 내게 1순위야.”임유진은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강지혁은 거만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자세를 낮추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마치 그녀가 제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강지혁은 그녀를 데리고 아래층에 내려와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라고 준비했던 음식이 야식으로 돼버렸다. 강지혁은 두 눈이 서서히 짙어지더니 방금 그녀가 잠들었을 때 진기태한테 걸려온 전화가 생각났다.진기태는 그가 임유진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여전히 떠보고 싶었는지 말끝마다 그해 교통사고를 언급했다.그해... 만약 그해의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강지혁도 지금처럼 임유진 앞에서 불안할 리 없다! 그는 그녀가 그해의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늘 전전긍긍하고 있다.진씨 일가에서 임유진에게 준 상처는 강지혁이 반드시 돌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결백도 증명해줄 것이다. 왜냐하
뜻밖에도 강지혁이 기사더러 6천만 원짜리 차를 끌고 오게 했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평범한 차였으면 좋겠다면서?”그가 말했다.“그건 그렇지. 괜히 비싼 차 타고 갔다가 마을 사람들이 쉬쉬거리면 외할머니가 심란해 하실까 봐 그런 건데, 너 진짜 이 차 타고 가려고?”임유진이 물었다.“왜? 뭐 문제 돼?”강지혁은 히죽 웃었다.“타, 누나.”그녀는 차에 올라탄 후에야 기사 없이 강지혁이 직접 운전한다는 걸 알아챘다.“네가 운전하게?”그녀가 물었다.“응, 어차피 멀지도 않잖아. 누나 졸리면 좀 자. 가는 길 내가 잘 알아.”강지혁은 말하면서 시동을 걸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직접 운전해 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리는데 지칠 강지혁을 위해 그녀가 운전을 바꿔줄 수도 없다. 운전면허증이 취소되어 앞으로 영원히 차를 못 만지니까.그녀는 평생 운전 금지였다!하지만 언젠가 사건을 뒤집고 결백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가 잃었던 것들도 전부 돌려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증, 변호사 자격증, 기타 등등...뭐 물론 어떤 것들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 예를 들자면 그녀의 열정과 천진난만함, 한때 매사에 포부 넘치고 이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기대가 가득한 나날들, 제딴에는 훈훈할 것만 같은 가족애, 그리고 젊은 날의 모든 추억까지...임유진은 인제 28살이다. 아직 서른이 안 됐지만 마음이 늙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만약 강지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진짜 다 늙어가는 노인처럼 색바랜 마음을 안고 그렇게 늙어가고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혁을 본 순간 닳았던 마음이 새로운 활기라도 얻은 것처럼 삶에 대한 어떠한 희망이라는 게 생겨났다.한때 그녀는 출소 후 가장 불행한 일이 강지혁을 만나고 그에게 속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 또한 그녀의 행운이었다.강지혁만이 그녀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줬으니까.그의 사랑을 받는 건 그녀에게 너무나도 좋은 일인 듯싶다.임유진은 이
임유진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왜?”“이따가 나 뭐라고 소개할지 생각 다 했어?”강지혁이 물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당연히 남자친구라고 해야지.”강지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들어가자.”차에서 내린 임유진은 문 앞에 다가가 노크했고 잠시 후 셋째 이모가 문 열어주러 나왔다.임유진을 본 이모는 음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유진이네, 이게 얼마 만이야! 어머, 이번엔 친구까지 데려왔어!”셋째 이모는 말하면서 밖을 힐긋 내다봤는데 문 앞에 세운 평범한 세단을 확인하곤 야유 섞인 눈빛으로 돌변했다.전에 다들 외조카 딸이 부자에게 들러붙었다고 떠들어댔다. 어쨌거나 그날 한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임유진을 박성호의 집에서 구해냈으니까!하지만 지금 저기 세운 차를 보니 고급 차는 아닌 듯싶었다. 고급 차의 로고는 그녀도 적잖게 알고 있으니 강지혁이 타고 온 차는 그저 평범한 차인 것 같았다.그래도 얼굴은 그럭저럭 잘생겼는데 남자가 잘생겨서 무슨 소용일까? 자칫하면 기생오라비일지도 모른다!또한 이 남자는 조카딸이 감방을 다녀온 것도 아직 모를 수 있다!“네.”임유진이 대답했다.“외할머니 보러 왔어요. 잘 계시죠 외할머니?”큰 외삼촌과 둘째 외삼촌, 셋째 이모가 돌아가면서 외할머니를 돌보고 있고 오늘 마침 셋째 이모 차례가 됐다.“그럼, 아주 잘 지내. 지금 방에서 쉬고 계셔.”셋째 이모가 말하는 동안 세 사람은 나란히 집 안 거실로 들어갔다.셋째 이모네 딸 배여진이 한창 거실에서 군것질하며 TV를 보다가 임유진이 들어오자 잔소리를 퍼부으려고 몸을 기울였는데 그녀 뒤에 서 있는 강지혁을 본 순간 흠칫 놀라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말했다.“여기 잠시 앉아있을래? 나 방에 가서 외할머니 뵙고 올게.”“그래.”강지혁이 대답하곤 흔쾌히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행동은 전혀 어색하거나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임유진이 외할머니 방으로 들어가자 배여진은 대놓고 강지혁을 아래위로
“할머니 다 뵈었어?”강지혁이 물었다.“쉬고 계셔서 먼저 나왔어.”임유진이 대답했다.이때 배여진이 차 두 잔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유진아, 차 마셔.”임유진의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올 땐 단 한 번도 차를 내준 적이 없으니까.“유진아, 함께 오신 분 우리한테 소개해줘야지.”셋째 이모가 입을 열었는데 말투가 살짝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이쪽은 ‘지혁’이고요, 내 남자친구예요.”임유진은 일부러 강지혁의 성을 공개하지 않았다. 괜히 친척들이 그의 신분을 알고 무슨 소란이라도 피울까 봐.그녀는 단지 외할머니가 노후를 잘 보내시길 바랄 뿐이다.“남자친구?”배여진이 비명을 질렀다.“말도 안 돼!”그녀는 마치 임유진이 가당치도 않은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혀를 내둘렀다.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배여진을 싸늘하게 쳐다봤다.순간 배여진은 살얼음장이라도 들어간 듯 온몸에 한기가 일고 심지어 내뱉는 숨조차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뭐 문제 되나요?”강지혁이 느긋하게 물었다.배여진은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아... 아니요. 저는 단지 유진이가 감방에 갔었고 이제 막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 너무 빨라서 그런 거예요...”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은 너무 명확했다. 임유진이 감방에 다녀온 일을 작정하고 끄집어내려는 것이다.임유진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건 상대가 절대 감방에 다녀왔다는 그녀의 과거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배여진은 굳게 믿었다.이런 꼼수를 임유진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감방 다녀온 일을 지적당하고도 전혀 난처하지 않은 적은 그녀도 이번이 처음이었다.아마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강지혁이라 그런 듯싶다. 그는 임유진에 대한 모든 일을 알고 있으니까.강지혁은 배여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짙어졌고 얼굴에 분노가 살짝 스쳤지만 곧장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게 왜요? 난 유진이가 내 여자친구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랐어요. 내 마음을 받아줘서 며칠이나 기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