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그냥 제작팀에서 마침... 아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일을 해결해줬어요.”임유진이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유진 씨 친구분이요? 그럼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나중에 선물 사 올 테니 유진 씨가 대신 친구분께 드릴래요?”탁유미가 말했다.“괜찮아요.”임유진은 대답을 마치고 재빨리 화제를 돌려 윤이의 인공와우에 관해 물었다.“이틀 뒤면 병원 쪽에서 윤이의 건강검진 결과서가 나올 게예요. 그때 아무 문제 없으면 바로 인공와우를 착용할 수 있어요.”탁유미는 말하면서 얼굴에 희열을 금치 못했다.“병원 측에서 내 형편이 어려우니 비용을 일부 감면 신청할 수 있대요.”“정말 잘됐네요.”임유진이 말했다. 병원 측은 강지혁이 말을 꺼낸 덕분에 비용을 감면하는 게 틀림없다. 윤이가 이제 곧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임유진도 매우 기뻤다.점심 배달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처럼 지나가 버리는 듯했지만 저녁 무렵, 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가게에 돌아오자 탁유미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오늘 우리 가게를 도와 공갈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강현수 씨인가요?”임유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탁유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된 걸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반응을 살피더니 전부 사실이란 걸 알아챘다.“방금 가게에서 식사하던 손님이 오늘 점심 유진 씨가 배달 나갔다가 돈 뜯어내려던 사람들과 다투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더라고요. 뒤에 강현수 씨도 나오던데 나한테도 보여줬어요.”탁유미가 말하면서 살짝 의심 섞인 눈초리로 임유진을 쳐다봤다.비록 전에 강현수가 가게로 찾아와 임유진을 기다릴 때부터 둘 사이를 의심했지만 오늘 영상에서 강현수가 무릎 꿇고 그녀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에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의 인상 속에서 강현수는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라 여자친구도 수없이 바꿔가며 무자비함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었다.만났던 여자친구마다 전부 ‘살갑게’ 대해준다고는 하지만 고작 금전적인 방면이나 후원
다만... 이건 또 누가 그랬을까? 임유진은 가장 먼저 강현수가 떠올랐다.그 영상들은 강현수가 삭제할 이유가 가장 크니까. 게다가 이렇게 신속하게 관련 내용까지 전부 삭제됐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그 시각 강지혁은 노트북 앞에서 침울한 눈빛으로 영상을 지켜봤다.임유진이 이 영상을 봤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바로 탁유미가 말했던 그 영상 말이다. 다만 지금은 전부 말끔하게 삭제된 상태이다.강지혁은 묵묵히 영상을 지켜봤다. 강현수가 쪼그리고 앉아 임유진의 신발 끈을 묶어줄 때 강지혁의 눈빛은 더 짙어졌고 책상에 내려놓았던 손도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게 됐다.그는 강현수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다. 강씨 일가에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강현수와도 접촉했다.강지혁의 집안과 강현수의 집안은 서로 사이가 좋아 그와 강현수도 나름 잘 지냈다.이 바닥에서 이익 충돌이 없는 한 친구 한 명 더 사귀는 것은 원수 한 명 더 만드는 것보단 나은 법이니까.상대가 얼마만큼 진심인지는 바라지 않아도 최소한 겉으론 친구로 지낼 수 있다.하여 그와 강현수도 나름대로 친한 사이였고 강현수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자라면 아마 그의 마음속에 품은 그녀 말곤 전부 장식품이고 오직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담기 위한 대체품이다.그렇다면 강현수가 마음에 품은 그녀는... 강지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영상 속 강현수가 임유진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빤히 쳐다봤다.강현수는 아직 그녀가 바로 자신이 찾고 있는 소녀란 걸 모를 것이다! 만약 안다면 절대 여기서 멈추지 않을 테니까.애초에 임유진의 어릴 적 사진을 안 봤더라면 강지혁은 절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강현수가 수년간 애타게 찾고 있던 그 소녀란 것을.강지혁은 이 사실을 절대 강현수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임유진은 오직 강지혁의 여자일 뿐이니 이번 생에 오직 그와 함께해야 한다!옆에 있는 고이준
“그럼 만약 아니라면? 내 여친이 아니면 강현수를 좋아할 것 같아?”강지혁은 집요하게 되물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고이준은 죽을 맛이지만 상사의 물음에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제가 볼 때 임유진 씨는... 감정에 비교적 보수적인 편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쉽게 마음이 안 바뀔 거예요.”“그래? 전에는 소민준과도 사귀었는데?”강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고이준은 울상이 되었다.‘비서 하기 참 힘드네. 이런 극한직업이 또 어디 있냐고.’“임유진 씨와 소민준 씨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애초에 임유진 씨는 소민준 씨에게 그런 식으로 배신을 당했으니 당연히 미련 따위 없을 겁니다.”“배신?”강지혁이 눈썹을 살짝 치켰다.“그렇다니까요. 소민준 씨는 임유진 씨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이별을 고했어요. 이게 배신이 아니면 뭐겠어요?”고이준이 말을 이었다.“임유진 씨 성격상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강지혁은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올라갔던 입꼬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소민준이 그렇게 대한 것이 배신이라면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했던 짓은 또 뭐란 말인가?그는 무언가로 가슴팍을 꽉 짓누르듯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강지혁이 손을 들어 옆에 있던 물컵을 가져와 물 한 모금 마시려 했지만 손을 든 순간 정처 없이 팔을 떨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아니, 팔이 아니라 그는 지금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하여 물컵도 제대로 잡지 못해 손끝에서 미끄러져 책상에 떨어트렸고 안에 있던 물이 책상에 그대로 쏟아졌다.고이준은 화들짝 놀라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걱정에 휩싸인 표정으로 돌변했다.강지혁은 시선을 떨구고 눈앞에 쏟아진 물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불쑥 말을 꺼냈다.“나가봐, 고 비서!”“네.”고이준은 대답을 마치고 곧게 사무실을 나섰다.강지혁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의자 등받이에 축 처진 몸을 기대고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로막았는데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는 가볍게 웃다가 더 크
“왜 불을 안 켜?”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보고 싶었어.”강지혁이 생뚱맞게 대답했다.순간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 불을 안 켜 주위가 어두운 덕에 강지혁은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볼 수 없었다.“누나는? 오늘 내 생각했어?”그의 목소리가 계속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고 목깃까지 간지럽혔다.임유진은 온몸의 신경이 목에 쏠린 것처럼 간지러웠고 심지어 뜨거운 숨결을 느낀 후 그의 입술이 곧 귀에 닿을 것만 같았고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아예 그녀의 귀에 입 맞출 것만 같았다.그녀가 한창 넋 놓고 있을 때 귀가 이따금 아파졌다. 흠칫 놀란 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데... 결국 얼굴이 더 빨개졌다.강지혁은 지금... 그녀의 귀를 깨물고 있었다.“했어, 내 생각?”그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응...”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저기... 일단 나 좀 놔줘. 가방 좀 내려놓게.”임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이 분위기가 너무 애틋해 숨 막힐 지경이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그럼 누나도 날 사랑해?”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사랑이라... 이런 감정은 너무 깊이 파고드는 거라 그녀는 정말 강지혁을 ‘사랑’ 하고 있을까?“좋아해... 너를.”임유진 숨을 깊게 몰아쉬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랬다. 지금은 단지 좋아하는 마음일 뿐 ‘사랑’에 이르는 정도는 아니었다.그녀에게 사랑은 거룩하고 유일하며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굳이 강지혁 앞에서 억지로 본의 아닌 사랑을 논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이 대답이 그가 원하는 해답이 아닐지언정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임유진은 그가 이 대답을 들은 후 불쾌해하거나 단호하게 다시 대답하라고 강요할 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묵묵히 그녀를 안고 가라앉을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난 누나를 사랑해. 그 언젠가 누나를 잃게 되는 날엔 어떻게 해야
“지금 당장 사랑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야. 내게 마음을 활짝 여는 것도 바라지 않아. 단지 날 좋아하는 그 마음이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10분의 1이라도 돼주길 바라는 거야. 날 좀 더 많이 좋아해 달란 뜻이야.”강지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가벼울까 봐, 그 언젠가 다른 감정에 의해 대체될까 봐, 조만간 그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운 것이다!강지혁은 천천히 그녀의 몸을 돌리고 서로 정면으로 마주 봤다.거실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창밖의 은은한 달빛을 빌려 임유진은 어렴풋이 그의 얼굴이 보였다.다만 표정은 보이질 않았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서서히 손을 들어 두 손을 그의 얼굴에 갖다 대고 정중하게 말했다.“그래, 널 더 많이 좋아해 줄게.”처음에는 둘 사이의 관계가 막막하고 서로 사귀어도 미래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미래에 어떻게 되든 적어도 지금 그녀는 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싶었고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표현하여 그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싶었다.말을 마친 그녀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선뜻 강지혁의 입술에 키스했다.임유진은 처음으로 맨정신에 이성을 다잡고 온 마음을 다해 그에게 키스했다.이 키스에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을 다 실은 것만 같았다.오직 그녀만이 강지혁을 이토록 애타게 한다.그는 임유진을 사랑한다. 이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깊어졌고 강지혁 본인조차 두려울 지경이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강지혁이 두 팔로 그녀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마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이건 누나가 한 말이야. 날 많이 좋아해야 해... 그리고... 날 사랑해줘.”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졌다.임유진은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불을 안 켜길 참 다행이었다.“그리고... 나랑 약속해줘. 앞으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꼭 날 용서해줘야 해.”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임유진
특히 지금처럼 강지혁 같은 남자는 높은 자리에 있어 주위에 유혹이 끊이지 않을것이다. 그가 방금 했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임유진은 알고 있다.하지만 이 감정이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나뿐이야. 다른 사람은 없어, 평생!”강지혁이 말했다.“그러니까 만약 다른 일로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누난 날 용서해줄 거지?”그는 애원과 애교가 살짝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응.”임유진이 대답했다.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바쁘게 강지혁은 또다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누나, 지금 한 말 절대 잊으면 안 돼. 영원히 기억해야 해!”마치 임유진이 아주 대단한 일을 맹세하기라도 한 듯 강지혁은 그녀에게 영원히 잊지도 말고 번복하지도 말라고 한다....욕실에서 임유진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방금 거실에서 강지혁과 포옹하고 키스한 지 한참 지났다 해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여전히 홍조기가 가시지 않았다.오늘 밤 강지혁은 어딘가 수상해 보였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수상한지는 또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너무 놀란 탓일까?여기까지 생각한 임유진은 마음에 달달한 전류가 흐를 것만 같아 입꼬리를 씩 올리고 흐뭇하게 웃었다.이런 느낌을 받아본 지 대체 얼마 만인가?!샤워를 마친 후 그녀는 잠옷을 입고 밖에 나왔는데 강지혁이 한창 그녀의 침대에 앉아 그녀가 침대 머리맡에 놔둔 사진첩을 보고 있었다.사진첩은 새로 샀지만 안에 있는 사진은 불에 타버린 사진첩에서 꺼낸 것들이고 그중 일부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타버렸다.그럼에도 그녀는 버리기 아까워 조심스럽게 사진을 정리하여 다시 새 사진첩에 넣어두었다.“누나 어릴 때 보면 볼수록 귀엽다니까.”강지혁이 고개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자꾸 이렇게 칭찬하면 난 진짜 내가 미인이라도 된 줄 안단 말이야.”임유진이 어쩌다가 장난치듯 말했다.“내 눈엔 누나 미인 맞아.”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쳐다봤다.“
비록 지금은 모든 영상이 삭제됐지만... 그녀는 이 일을 강지혁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둘은 이미 연인 사이니까.“실은...”임유진은 오늘 점심에 빚은 갈등과 강현수가 자신을 도와 위기에서 벗어난 것까지 전부 강지혁에게 알렸다.다만 말을 마치고 강지혁을 쳐다봤는데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나 의외라는 표정은 전혀 없었다.“알고 있었어?”“응, 누나가 말한 그 사건에 관한 영상을 봤어.”그가 대답했다.순간 임유진이 되레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못 본 영상을 그가 어떻게... 볼 수 있었던 걸까?!“그 영상... 나랑 강현수 씨는 아무 일도 없었어.”임유진은 그가 오해할까 봐 일단 해명에 나섰다.유미 언니가 말하길 영상이 올라오자마자 그녀와 강현수 사이를 의심하는 댓글이 적지 않았다고 했으니 얼른 해명해야 할 듯싶었다.강지혁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턱을 살짝 치키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니까 누나는 강현수한테 설렌 적 없다는 거지?”“당연하지.”‘설레다니, 너야말로 얼마나 날 설레게 하는지 몰라서 물어?’강지혁은 지금 평소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그럼 만약 강현수가 누나한테 설렜다면?”그는 임유진을 빤히 쳐다보며 그윽한 눈길로 물었다.“뭐?”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담담하게 말했다.“강현수 씨는 임유라 남친이야. 게다가 설사 나한테 호감이 있다 해도 내가 그 사람 안 좋아해.”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안 좋아한다?’ 그러니까 강지혁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절대 강현수에게 호감 가질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고작 임유라 남친인 것 때문에?”“난 여자친구 자주 바꾸는 사람 별로야. 제 감정을 막 다루는 사람 같아. 여자는 어쩌면 강현수 씨에게 조제품일지도 몰라. 오늘 이 여자한테 관심 있고 내일은 또 저 여자한테 관심 가질 거잖아.”임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대체적으로 강현수를 플레이보이로 여기는
임유진은 문득 어제 강현수가 대신 신발 끈을 묶어준 일이 떠올랐다.‘지금 이거 질투 맞나? 지혁이가 질투를 해?’임유진은 예전 같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내심 마음이 흐뭇했다.햇빛?탁유미는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는데 오늘은 날이 흐려 태양이 아예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아 참, 윤이 곧 수술해서 나랑 엄마는 병원 가서 며칠 동안 아이를 돌봐야 할 것 같아요. 가게는 며칠 문 닫을 예정이에요, 걱정 마요, 유진 씨 월급은 그대로 줄 테니까.”탁유미가 말했다.“출근 날짜는 나중에 문자로 알려드릴게요.”“네.”임유진이 대답했다.“윤이 수술 마치면 나한테도 알려줘요. 나도 윤이가 수술 성공했다는 소식을 빨리 듣고 싶거든요.”“알겠어요.”탁유미가 웃으며 답했다. 며칠 동안 가게 문을 닫아서 장사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녀에겐 아들의 청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윤이가 인공와우를 끼면 더 많은 일들을 마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듣고 말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알아듣기’ 만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하지만 탁유미는 이미 곤란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있다.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윤이가 보통 아이들처럼 잘 듣고 잘 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 것이다. 그래야만 아이의 인생길이 험난하지 않을 테니까.오후 장사에 텀이 생기자 탁유미는 식당 뒤에 있는 방으로 돌아갔는데 윤이는 한창 외할머니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탁유미 엄마는 조심스럽게 윤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왜 들어 와?”탁유미 엄마가 물었다.“마침 시간이 비어서 윤이 보러 왔어요.”탁유미가 말했다.“너도 참, 매일 보는데도 또 보고 싶어? 내일이면 윤이 입원하니까 24시간 내내 실컷 지켜봐.”탁유미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도 다음날 외손주의 수술을 몹시 기대하는 듯싶었다.탁유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다 나 때문이에요. 만약 그때 약을 잘못 먹지 않았더라면 윤이도 이렇게 되지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