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황태자는 예전에 모든 계층의 여자친구를 다 만나봤었다. 물론 그녀들의 결말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기 마련이다.하지만 어찌 됐든 여전히 수많은 여자들이 강현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다.심지어 누군가는 인터넷에서 설사 강현수가 황태자가 아니더라도, 빈털터리가 될지언정 평생 그와 함께하겠다고 한다. 그러게 누가 이토록 잘생기라고 했냐고!지금 이 순간, 강현수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 한 여자를 위해 신발 끈을 묶어주는 모습에 주위 공기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놀라움에 숨을 몰아쉬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신발 끈을 다 묶은 후에야 강현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고마워요.”임유진은 살짝 어색한 듯 말하곤 머리를 푹 숙인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시각 촬영장 커피숍에서 임유라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이 장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정성껏 다듬은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왜... 임유진이 대체 왜 또 강현수 앞에 나타난 걸까? 게다가 강현수는 선뜻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건 마치 임유진을 섬기는 거나 다름없었다!임유라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질투가 활활 차올랐다.‘임유진이 바로 현수 씨가 찾고 있는 그 소녀란 사실을 절대 알려선 안 돼! 난 현수 씨를 잃을 수 없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한편 밖에서 임유진이 떠난 후 강현수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옆에 있는 감독과 스텝들을 힐긋 쳐다봤다.“이런 일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네요. 이 사람들 오늘부로 제작팀에서 해고해요.”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앞서 돈을 뜯어내려던 그 사람들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당장이라도 실랑이를 벌일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현수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금세 겁에 질렸다.“유진 씨가 이번 일을 크게 키우고 싶어하지 않으니 소원대로 해 줘야죠. 다들 유진 씨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앞으로 두 번 다시 유진 씨를 찾아가서 소란 피우면 당신들 평생 감방에서 보낼 줄 알아요!”어두
“아니요, 그냥 제작팀에서 마침... 아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일을 해결해줬어요.”임유진이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유진 씨 친구분이요? 그럼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나중에 선물 사 올 테니 유진 씨가 대신 친구분께 드릴래요?”탁유미가 말했다.“괜찮아요.”임유진은 대답을 마치고 재빨리 화제를 돌려 윤이의 인공와우에 관해 물었다.“이틀 뒤면 병원 쪽에서 윤이의 건강검진 결과서가 나올 게예요. 그때 아무 문제 없으면 바로 인공와우를 착용할 수 있어요.”탁유미는 말하면서 얼굴에 희열을 금치 못했다.“병원 측에서 내 형편이 어려우니 비용을 일부 감면 신청할 수 있대요.”“정말 잘됐네요.”임유진이 말했다. 병원 측은 강지혁이 말을 꺼낸 덕분에 비용을 감면하는 게 틀림없다. 윤이가 이제 곧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임유진도 매우 기뻤다.점심 배달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처럼 지나가 버리는 듯했지만 저녁 무렵, 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가게에 돌아오자 탁유미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오늘 우리 가게를 도와 공갈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강현수 씨인가요?”임유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탁유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된 걸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반응을 살피더니 전부 사실이란 걸 알아챘다.“방금 가게에서 식사하던 손님이 오늘 점심 유진 씨가 배달 나갔다가 돈 뜯어내려던 사람들과 다투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더라고요. 뒤에 강현수 씨도 나오던데 나한테도 보여줬어요.”탁유미가 말하면서 살짝 의심 섞인 눈초리로 임유진을 쳐다봤다.비록 전에 강현수가 가게로 찾아와 임유진을 기다릴 때부터 둘 사이를 의심했지만 오늘 영상에서 강현수가 무릎 꿇고 그녀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에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의 인상 속에서 강현수는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라 여자친구도 수없이 바꿔가며 무자비함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었다.만났던 여자친구마다 전부 ‘살갑게’ 대해준다고는 하지만 고작 금전적인 방면이나 후원
다만... 이건 또 누가 그랬을까? 임유진은 가장 먼저 강현수가 떠올랐다.그 영상들은 강현수가 삭제할 이유가 가장 크니까. 게다가 이렇게 신속하게 관련 내용까지 전부 삭제됐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그 시각 강지혁은 노트북 앞에서 침울한 눈빛으로 영상을 지켜봤다.임유진이 이 영상을 봤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바로 탁유미가 말했던 그 영상 말이다. 다만 지금은 전부 말끔하게 삭제된 상태이다.강지혁은 묵묵히 영상을 지켜봤다. 강현수가 쪼그리고 앉아 임유진의 신발 끈을 묶어줄 때 강지혁의 눈빛은 더 짙어졌고 책상에 내려놓았던 손도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게 됐다.그는 강현수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다. 강씨 일가에 돌아와 가족들과 재회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강현수와도 접촉했다.강지혁의 집안과 강현수의 집안은 서로 사이가 좋아 그와 강현수도 나름 잘 지냈다.이 바닥에서 이익 충돌이 없는 한 친구 한 명 더 사귀는 것은 원수 한 명 더 만드는 것보단 나은 법이니까.상대가 얼마만큼 진심인지는 바라지 않아도 최소한 겉으론 친구로 지낼 수 있다.하여 그와 강현수도 나름대로 친한 사이였고 강현수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자라면 아마 그의 마음속에 품은 그녀 말곤 전부 장식품이고 오직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담기 위한 대체품이다.그렇다면 강현수가 마음에 품은 그녀는... 강지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영상 속 강현수가 임유진을 바라보는 그 눈빛을 빤히 쳐다봤다.강현수는 아직 그녀가 바로 자신이 찾고 있는 소녀란 걸 모를 것이다! 만약 안다면 절대 여기서 멈추지 않을 테니까.애초에 임유진의 어릴 적 사진을 안 봤더라면 강지혁은 절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바로 강현수가 수년간 애타게 찾고 있던 그 소녀란 것을.강지혁은 이 사실을 절대 강현수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임유진은 오직 강지혁의 여자일 뿐이니 이번 생에 오직 그와 함께해야 한다!옆에 있는 고이준
“그럼 만약 아니라면? 내 여친이 아니면 강현수를 좋아할 것 같아?”강지혁은 집요하게 되물었다.‘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고이준은 죽을 맛이지만 상사의 물음에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제가 볼 때 임유진 씨는... 감정에 비교적 보수적인 편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쉽게 마음이 안 바뀔 거예요.”“그래? 전에는 소민준과도 사귀었는데?”강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고이준은 울상이 되었다.‘비서 하기 참 힘드네. 이런 극한직업이 또 어디 있냐고.’“임유진 씨와 소민준 씨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애초에 임유진 씨는 소민준 씨에게 그런 식으로 배신을 당했으니 당연히 미련 따위 없을 겁니다.”“배신?”강지혁이 눈썹을 살짝 치켰다.“그렇다니까요. 소민준 씨는 임유진 씨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이별을 고했어요. 이게 배신이 아니면 뭐겠어요?”고이준이 말을 이었다.“임유진 씨 성격상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강지혁은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올라갔던 입꼬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소민준이 그렇게 대한 것이 배신이라면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했던 짓은 또 뭐란 말인가?그는 무언가로 가슴팍을 꽉 짓누르듯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강지혁이 손을 들어 옆에 있던 물컵을 가져와 물 한 모금 마시려 했지만 손을 든 순간 정처 없이 팔을 떨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아니, 팔이 아니라 그는 지금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하여 물컵도 제대로 잡지 못해 손끝에서 미끄러져 책상에 떨어트렸고 안에 있던 물이 책상에 그대로 쏟아졌다.고이준은 화들짝 놀라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걱정에 휩싸인 표정으로 돌변했다.강지혁은 시선을 떨구고 눈앞에 쏟아진 물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불쑥 말을 꺼냈다.“나가봐, 고 비서!”“네.”고이준은 대답을 마치고 곧게 사무실을 나섰다.강지혁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의자 등받이에 축 처진 몸을 기대고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로막았는데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는 가볍게 웃다가 더 크
“왜 불을 안 켜?”임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보고 싶었어.”강지혁이 생뚱맞게 대답했다.순간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 불을 안 켜 주위가 어두운 덕에 강지혁은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볼 수 없었다.“누나는? 오늘 내 생각했어?”그의 목소리가 계속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고 목깃까지 간지럽혔다.임유진은 온몸의 신경이 목에 쏠린 것처럼 간지러웠고 심지어 뜨거운 숨결을 느낀 후 그의 입술이 곧 귀에 닿을 것만 같았고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아예 그녀의 귀에 입 맞출 것만 같았다.그녀가 한창 넋 놓고 있을 때 귀가 이따금 아파졌다. 흠칫 놀란 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데... 결국 얼굴이 더 빨개졌다.강지혁은 지금... 그녀의 귀를 깨물고 있었다.“했어, 내 생각?”그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응...”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저기... 일단 나 좀 놔줘. 가방 좀 내려놓게.”임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이 분위기가 너무 애틋해 숨 막힐 지경이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그럼 누나도 날 사랑해?”그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사랑이라... 이런 감정은 너무 깊이 파고드는 거라 그녀는 정말 강지혁을 ‘사랑’ 하고 있을까?“좋아해... 너를.”임유진 숨을 깊게 몰아쉬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랬다. 지금은 단지 좋아하는 마음일 뿐 ‘사랑’에 이르는 정도는 아니었다.그녀에게 사랑은 거룩하고 유일하며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굳이 강지혁 앞에서 억지로 본의 아닌 사랑을 논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이 대답이 그가 원하는 해답이 아닐지언정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임유진은 그가 이 대답을 들은 후 불쾌해하거나 단호하게 다시 대답하라고 강요할 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묵묵히 그녀를 안고 가라앉을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난 누나를 사랑해. 그 언젠가 누나를 잃게 되는 날엔 어떻게 해야
“지금 당장 사랑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야. 내게 마음을 활짝 여는 것도 바라지 않아. 단지 날 좋아하는 그 마음이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10분의 1이라도 돼주길 바라는 거야. 날 좀 더 많이 좋아해 달란 뜻이야.”강지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가벼울까 봐, 그 언젠가 다른 감정에 의해 대체될까 봐, 조만간 그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운 것이다!강지혁은 천천히 그녀의 몸을 돌리고 서로 정면으로 마주 봤다.거실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창밖의 은은한 달빛을 빌려 임유진은 어렴풋이 그의 얼굴이 보였다.다만 표정은 보이질 않았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서서히 손을 들어 두 손을 그의 얼굴에 갖다 대고 정중하게 말했다.“그래, 널 더 많이 좋아해 줄게.”처음에는 둘 사이의 관계가 막막하고 서로 사귀어도 미래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미래에 어떻게 되든 적어도 지금 그녀는 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싶었고 자신의 마음을 더 많이 표현하여 그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싶었다.말을 마친 그녀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선뜻 강지혁의 입술에 키스했다.임유진은 처음으로 맨정신에 이성을 다잡고 온 마음을 다해 그에게 키스했다.이 키스에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을 다 실은 것만 같았다.오직 그녀만이 강지혁을 이토록 애타게 한다.그는 임유진을 사랑한다. 이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깊어졌고 강지혁 본인조차 두려울 지경이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강지혁이 두 팔로 그녀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아마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이건 누나가 한 말이야. 날 많이 좋아해야 해... 그리고... 날 사랑해줘.”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졌다.임유진은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불을 안 켜길 참 다행이었다.“그리고... 나랑 약속해줘. 앞으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꼭 날 용서해줘야 해.”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임유진
특히 지금처럼 강지혁 같은 남자는 높은 자리에 있어 주위에 유혹이 끊이지 않을것이다. 그가 방금 했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임유진은 알고 있다.하지만 이 감정이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나뿐이야. 다른 사람은 없어, 평생!”강지혁이 말했다.“그러니까 만약 다른 일로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누난 날 용서해줄 거지?”그는 애원과 애교가 살짝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응.”임유진이 대답했다.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 바쁘게 강지혁은 또다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누나, 지금 한 말 절대 잊으면 안 돼. 영원히 기억해야 해!”마치 임유진이 아주 대단한 일을 맹세하기라도 한 듯 강지혁은 그녀에게 영원히 잊지도 말고 번복하지도 말라고 한다....욕실에서 임유진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방금 거실에서 강지혁과 포옹하고 키스한 지 한참 지났다 해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여전히 홍조기가 가시지 않았다.오늘 밤 강지혁은 어딘가 수상해 보였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수상한지는 또 딱히 설명할 수 없었다.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너무 놀란 탓일까?여기까지 생각한 임유진은 마음에 달달한 전류가 흐를 것만 같아 입꼬리를 씩 올리고 흐뭇하게 웃었다.이런 느낌을 받아본 지 대체 얼마 만인가?!샤워를 마친 후 그녀는 잠옷을 입고 밖에 나왔는데 강지혁이 한창 그녀의 침대에 앉아 그녀가 침대 머리맡에 놔둔 사진첩을 보고 있었다.사진첩은 새로 샀지만 안에 있는 사진은 불에 타버린 사진첩에서 꺼낸 것들이고 그중 일부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타버렸다.그럼에도 그녀는 버리기 아까워 조심스럽게 사진을 정리하여 다시 새 사진첩에 넣어두었다.“누나 어릴 때 보면 볼수록 귀엽다니까.”강지혁이 고개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자꾸 이렇게 칭찬하면 난 진짜 내가 미인이라도 된 줄 안단 말이야.”임유진이 어쩌다가 장난치듯 말했다.“내 눈엔 누나 미인 맞아.”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쳐다봤다.“
비록 지금은 모든 영상이 삭제됐지만... 그녀는 이 일을 강지혁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 둘은 이미 연인 사이니까.“실은...”임유진은 오늘 점심에 빚은 갈등과 강현수가 자신을 도와 위기에서 벗어난 것까지 전부 강지혁에게 알렸다.다만 말을 마치고 강지혁을 쳐다봤는데 그의 얼굴엔 놀라움이나 의외라는 표정은 전혀 없었다.“알고 있었어?”“응, 누나가 말한 그 사건에 관한 영상을 봤어.”그가 대답했다.순간 임유진이 되레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못 본 영상을 그가 어떻게... 볼 수 있었던 걸까?!“그 영상... 나랑 강현수 씨는 아무 일도 없었어.”임유진은 그가 오해할까 봐 일단 해명에 나섰다.유미 언니가 말하길 영상이 올라오자마자 그녀와 강현수 사이를 의심하는 댓글이 적지 않았다고 했으니 얼른 해명해야 할 듯싶었다.강지혁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양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턱을 살짝 치키며 그녀를 바라봤다.“그러니까 누나는 강현수한테 설렌 적 없다는 거지?”“당연하지.”‘설레다니, 너야말로 얼마나 날 설레게 하는지 몰라서 물어?’강지혁은 지금 평소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그럼 만약 강현수가 누나한테 설렜다면?”그는 임유진을 빤히 쳐다보며 그윽한 눈길로 물었다.“뭐?”임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담담하게 말했다.“강현수 씨는 임유라 남친이야. 게다가 설사 나한테 호감이 있다 해도 내가 그 사람 안 좋아해.”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안 좋아한다?’ 그러니까 강지혁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절대 강현수에게 호감 가질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고작 임유라 남친인 것 때문에?”“난 여자친구 자주 바꾸는 사람 별로야. 제 감정을 막 다루는 사람 같아. 여자는 어쩌면 강현수 씨에게 조제품일지도 몰라. 오늘 이 여자한테 관심 있고 내일은 또 저 여자한테 관심 가질 거잖아.”임유진이 말했다. 그녀는 대체적으로 강현수를 플레이보이로 여기는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