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문득 어제 강현수가 대신 신발 끈을 묶어준 일이 떠올랐다.‘지금 이거 질투 맞나? 지혁이가 질투를 해?’임유진은 예전 같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 내심 마음이 흐뭇했다.햇빛?탁유미는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는데 오늘은 날이 흐려 태양이 아예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아 참, 윤이 곧 수술해서 나랑 엄마는 병원 가서 며칠 동안 아이를 돌봐야 할 것 같아요. 가게는 며칠 문 닫을 예정이에요, 걱정 마요, 유진 씨 월급은 그대로 줄 테니까.”탁유미가 말했다.“출근 날짜는 나중에 문자로 알려드릴게요.”“네.”임유진이 대답했다.“윤이 수술 마치면 나한테도 알려줘요. 나도 윤이가 수술 성공했다는 소식을 빨리 듣고 싶거든요.”“알겠어요.”탁유미가 웃으며 답했다. 며칠 동안 가게 문을 닫아서 장사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녀에겐 아들의 청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윤이가 인공와우를 끼면 더 많은 일들을 마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듣고 말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알아듣기’ 만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하지만 탁유미는 이미 곤란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있다.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윤이가 보통 아이들처럼 잘 듣고 잘 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울 것이다. 그래야만 아이의 인생길이 험난하지 않을 테니까.오후 장사에 텀이 생기자 탁유미는 식당 뒤에 있는 방으로 돌아갔는데 윤이는 한창 외할머니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탁유미 엄마는 조심스럽게 윤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왜 들어 와?”탁유미 엄마가 물었다.“마침 시간이 비어서 윤이 보러 왔어요.”탁유미가 말했다.“너도 참, 매일 보는데도 또 보고 싶어? 내일이면 윤이 입원하니까 24시간 내내 실컷 지켜봐.”탁유미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도 다음날 외손주의 수술을 몹시 기대하는 듯싶었다.탁유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다 나 때문이에요. 만약 그때 약을 잘못 먹지 않았더라면 윤이도 이렇게 되지
“유진 씨는 가게에 없어요?”강현수가 물었다.“유진 씨 배달 나갔어요... 돌아오려면 한참 걸릴 거예요.”탁유미가 대답했다.강현수도 더 묻지 않고 가게에서 커피 한 잔 시킨 후 의자에 앉아 천천히 음미했다.다만 강현수 같은 사람이 가게에 앉아있는 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이 시간대에 가게에 사람도 많지 않고 강현수가 연예계 황태자란 걸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그의 외모와 몸매, 몸에서 내뿜는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적잖은 손님들이 그에게 시선이 쏠렸다.임유진은 대체 언제쯤 돌아올는지, 탁유미가 속으로 중얼거릴 때 가게 앞에 불쑥 또 한 대의 고급 차가 도착했다.‘또’라고 말하는 건 포르쉐가 이미 가게 앞에 세워졌기 때문이다.새로 도착한 벤틀리에서 훤칠한 체구의 남자가 내렸고 탁유미는 순간 두 눈이 반짝였다.라이트 그레이 정장 차림에 정교한 이목구비, 앞머리는 뒤로 넘기고 훤칠한 이마를 드러냈으며 새하얀 피부에 매우 젊어 보였다. 다만 그의 몸에서 내뿜는 진중한 분위기는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올 때야 탁유미는 발견했다. 남자의 가장 아름다운 부위는 맑고 영롱한 두 눈이란 것을. 그의 눈에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지만 시선을 올릴 땐 숨길 수 없는 요염함이 비쳤다.이 남자는... 연예인인가? 대체 정체가 뭘까?탁유미는 혼자 생각하다가 이제 막 다가가 물어보려는데 뜻밖에도 그 남자는 강현수 앞에 멈춰 섰다.훤칠한 체구의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뒤에 들어온 남자가 의자를 빼내고 강현수 옆에 앉았다.탁유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는 사이인가?뭐 그렇다 해도 딱히 놀랄 건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여기서 널 보게 될 줄은 몰랐네.”강지혁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건넸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상대를 훑어보는 것만 같았다.“그러게, 나도 생각지 못했어.”
강현수는 커피잔을 들고 있던 손에 살짝 힘주며 말했다.“내가 후회한다면?”그땐 임유진이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단지 그가 찾고 있는 그 소녀와 닮아서 신경이 쓰이는 거라고 여겼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깊이가 훨씬 깊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해치려 하고 때리려 할 때 강현수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움찔거리고 당장이라도 뛰쳐 갈 것만 같은 충동을 느꼈다.그녀가 조금만 다쳐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고 그녀가 떠나려 할 땐 너무 아쉬웠다. 잠시라도 곁에 더 머물렀으면, 아주 잠시만이라도 함께하면 얼마나 좋을까!강현수가 언제 여자에게 이토록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그해에 그를 구해줬던 그 소녀 말곤 오직 임유진뿐이다.심지어 임유진을 너무 쉽게 강지혁에게 양보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어린 소녀를 찾아 헤매던 그리움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간절하게 원하지만 늘 얻지 못하는 그 고통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강지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하더니 강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그럴 기회 없어. 내가 그럴 기회를 주지도 않을 거고.”“그래?”강현수도 그를 빤히 쳐다봤다.“그럼 어디 한번 시도해봐야겠는데. 내가 왜 그럴 기회가 없는지 말이야.”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고 카운터에 있던 탁유미마저 냉랭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비록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잘 듣진 못했지만 표정으로 볼 땐 결코 유쾌한 대화가 아니었다.강지혁이 불쑥 입꼬리를 올리고 가볍게 웃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미소와는 달리 맑고 영롱한 두 눈 속엔 야유가 가득 차 있었다.“난 네가 은팔찌 주인한테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뭐 설마 유진이한테도 설렜다는 거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감정이 헤펐냐?”강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한편 강지혁은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앞으로 그 은팔찌 주인을 찾게 되면 유진이는 어떻게
강지혁은 계속 여유만만하게 커피를 마셨다. 마치 조금 전 강현수와 담소만 나눴을 뿐 S 시를 발칵 뒤집을 폭탄 발언은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한가하게 커피를 음미했다.강현수도 눈가에 스친 싸늘한 기운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두 사람 사이엔 좀전의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친구 모임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탁유미는 한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가게에 있는 다른 손님들도 특히 여자 손님들이 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이 워낙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지니다 보니 여자 손님들의 시선이 자꾸만 이곳으로 쏠렸고 일부 여자 손님들은 심지어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촬영하고 싶었다.하여 이제 막 강현수와 강지혁을 촬영하려는데 시작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커다란 손에 의해 가로막혀버렸다.강지혁의 밀착 보호를 맡은 경호원이 여자 손님에게 바로 말했다.“저희 대표님은 사람들에게 몰래 촬영 당하는 걸 싫어하십니다. 계속 촬영하시겠다면 밖으로 ‘내쫓을’ 수밖에 없습니다.”여자 손님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이건... 협박인가?! 그러나 경호원의 무표정한 얼굴과 덩치 큰 체구를 본 순간 반박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결국 뱃속으로 깊게 삼켰다.머리가 말해주길 설사 반항한다 해도 나중에 굴욕을 당하는 건 자신뿐이라고 한다.여자 손님은 의기소침해져 계산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다른 손님들도 가망이 없어 보여 몰래 촬영하려던 생각을 접었다.바로 이때 임유진이 스쿠터를 타고 돌아왔다. 가게에 들어선 그녀는 한 테이블에 앉아있는 강지혁과 강현수를 보더니 넋을 놓고 말았다.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두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보아하니... 가게에서 커피를 마신 것 같은데?!그들같은 신분에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굳이 이런 곳에서 마실 필요는 없을 텐데.임유진은 한순간 뇌가 정지된 것만 같았다.이때 탁유미가 재빨리 다가오며 그녀를 잡아당겼다.“유진 씨, 강현수 씨가 유진 씨한테 볼일이 있대요.”강지혁은 용건을 말하지 않아
임유진은 두 볼이 빨개지고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결국 탁유미에게 말했다.“제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고요?!”탁유미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대화로 둘 사이가 어느 정도 애틋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남자친구라니?! 임유진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게다가 이렇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를!!!그랬다. 탁유미에게 강지혁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남자였다.방금 이 남자는 그토록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을 선보였지만 절대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직감이 말해주길 이 남자는 몹시 위험한 사람이라고 한다.이 남자는 마치 높은 자리에 앉아 은은하게 카리스마를 내뿜는 것만 같았다.“네, 제 남자친구예요.”임유진이 대답했다.“안녕...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사장 탁유미에요.”탁유미가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강지혁입니다.”탁유미는 잠시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두 눈에 담긴 충격이 점점 더 커졌다.‘강지혁... 설마... 내가 생각한 그 강지혁은 아니겠지!’탁유미는 눈앞이 아찔해 났다.윤이 식당에 강현수가 찾아왔고 곧바로 강지혁도 자리했다. 두 남자는 전부 임유진을 보러 온 것이다.임유진은 대체... 정체가 뭘까? 정말 이력서에 쓴 내용이 다인 걸까?강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강지혁에게 말했다.“난 아직 너와 등지고 싶진 않아.”이어서 임유진에게도 말했다.“어제 저희 회사 제작팀에서 유진 씨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잖아요. 그래서 오늘 제작팀을 대신해 사과드리러 온 거예요. 손해 보신 거 있다면 편히 말씀하세요. 제가 다 배상해드릴게요.”“그런 거 없으니 배상 안 해도 돼요. 그리고 어젠 너무 고마웠어요.”임유진이 얼른 대답했다.“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강현수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강지혁을 힐긋 쳐다보다가 가게를 나섰다.임유진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강지혁과 등질 정도로 중요하진 않았다.강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저 자신을 비웃었다.그는 임유진 때문에 강지혁과 원한
탁유미는 임유진을 한쪽 옆으로 끌고 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맞아요, 언니가 말한 GH 그룹 강지혁이에요.”임유진의 대답에 탁유미는 벼락에 머리라도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그녀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직원이 강지혁 여자친구라니?! 이걸 대체 누가 믿는단 말인가?심지어 임유진이 또 배달하러 나갈 때 강지혁은 이렇게 대답했다.“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차피 나 오늘 한가해.”결국 한 사람은 배달을 나가고 한 사람은 여기서... 흐음, 독서를 즐기는 중이다!탁유미는 자신이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고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임유진은 이런 남자친구가 있는데 왜 그녀 가게에서 일하는 걸까? 그리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정말 진심인 걸까?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모습을 되새겨보면 거짓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강지혁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외부인이 봐도 충분히 진지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으니까.강지혁이 커피 한 잔 거의 다 마시자 탁유미가 가까이 다가갔다.“주문 더 하시겠어요?”“냉수 한 잔만 부탁드려요.”강지혁이 대답했다.탁유미는 냉수 한 잔 그에게 건넨 후 막 자리를 뜨려는데 강지혁이 불쑥 입을 열었다.“잠깐만요.”“네? 또 도와드릴 거 있나요?”탁유미가 물었다.“이리 앉으세요.”강지혁이 옆에 놓인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유미 씨한테 드릴 말이 좀 있어서요.”탁유미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여전히 의자를 빼내고 자리에 앉았다.“유진이가 자립하고 싶어 하니 저도 말리진 않을 생각이에요. 유미 씨와 유미 씨 아드님에 관한 얘기도 많이 전해 들었어요. 유진이는 지금 하는 일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계속하고 싶다고 하면 저도 유진의 뜻을 따를 거예요. 유진이만 기쁘면 되니까요.”강지혁은 말하면서 예리한 눈길로 탁유미를 쳐다봤다.탁유미는 가슴이 움찔거리고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저랑 저희 아들도... 유진 씨를 매우 좋아해요.”“그렇
“알았어요... 유진 씨한테 아무 말 안 할게요.”탁유미는 잠시 머뭇거렸다.“비록 지금 유진 씨가 강지혁 씨 여자친구란 걸 알게 됐지만 저는 애초에 유진 씨를 이용할 마음 같은 건 없었어요. 앞으로도 당연히 없을 거고요. 유진 씨를 채용한 이유는 저처럼 감방 생활도 했고 측은지심이 들어서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어요.”강지혁의 눈가에 스친 싸늘함이 조금은 가셨다.“유미 씨랑 이경빈 씨 사이의 일은 간섭하지 않을게요. 저는 그저 유진이가 이곳에서 시름 놓고 일하기만 바랄 뿐이에요. 유진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저한테 연락 주세요.”말을 마친 강지혁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탁유미에게 알려줬다.탁유미는 냉큼 받아적었다. S 시에서 강지혁의 번호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탁유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의 번호를 얻게 됐다.강지혁은 그녀와 이경빈의 일을 간섭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행방도 이경빈에게 알리지 않겠다는 뜻이겠지.탁유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지혁은 줄곧 가게에 있었고 임유진과 함께 가게에서 저녁까지 먹었다.하루일과를 마친 후 식당 동료들은 임유진에게 기가 막힐 정도로 잘생긴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다 알게 됐다.동료들은 강지혁의 정체를 미처 몰랐다. 임유진이 그들 앞에서 ‘혁아’라고만 불렀으니까.동료들은 임유진이 돈 많은 남자친구를 만나서 부잣집 사모님이 될 운명이라고 장난치듯 수다를 떨었다.이에 임유진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만약 동료들이 그가 강지혁이란 걸 알게 돼도 계속 농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임유진과 강지혁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어 버릴까?강지혁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임유진에게 말했다.“누나네 가게 사장님 참 괜찮은 분이야.”“맞아, 유미 언니는 참 좋은 분이야.”임유진도 대답하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아참, 내일 윤이 수술 날이라 유미 언니랑 언니네 어머님이 병원 가서 윤이 병간호해야 해. 그럼 며칠 동안 가게 문 닫을 거라 나 출근 안 해도 돼.
요 며칠 강지혁은 계속 임유진의 방에서 그녀와 한 침대에 누워 잔다. 둘이 잠자리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어느새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진 듯 보였다.물론 임유진은 처음에 잘 때 불을 켜야 하는 버릇 때문에 거절하기도 했었다."계속 불을 켜야 해서 너 제대로 못 잘까 봐 그래. 그냥 네 방으로 가는 게 어때?""나는 누나랑 자면 불을 켜고 자도 괜찮아."강지혁의 괜찮다는 말에 임유진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잘 거야?"벌써 침대에 누운 강지혁은 임유진이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더니 물었다."응."임유진은 살짝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서 말했다. 그녀가 이불을 걷고 침대에 눕기도 전에 강지혁의 팔은 벌써 그녀의 허리를 감싸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마치 아이가 애교부리듯 얼굴을 그녀의 몸에 파묻었다.평소와는 다른, 조금은 아이 같은 강지혁이 모습이 임유진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좋아했다."참, 오늘 강현수 씨가 한 말 무슨 뜻이야?"임유진은 갑자기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 물었다."무슨 말?"강지혁이 되물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 더 집중하고 싶은 듯 보였다. 그는 이대로 임유진을 계속 끌어안은 채 그녀의 향기에 파묻히고 싶었다."아직 너와 등지고 싶지 않다고 했던 말 말이야."임유진은 강지혁과 강현수가 사이가 좋은 거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했던 그 말은 마치 두 사람이 곧 등질 수도 있는 사이처럼 들렸다.만약 강지혁과 강현수가 정말 적이 되어버린다면 아마 S 시의 금융권과 연예계를 포함한 모든 업계에서 한차례의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말 그대로야."강지혁이 답했다."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임유진은 호기심 가득해서 물었다."혹시 강현수 씨가 네 비즈니스를 뺏으려고 했어?""아니, 누나를 뺏으려고 했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강지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로 그녀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고이준은 말을 하면서 자꾸 목이 메고 코가 찡해 났다.“난 고이준 아저씨야. 아빠의 부하직원이지. 자, 그럼 이제 아저씨한테 이름이 뭔지 알려줄래?”“원래는 임현이었는데 엄마가 강선현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강선현이에요.”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이름을 일부러 선율 도련님과 비슷하게 맞춘 건가? 그리고 현... 혁이... 늘 회장님을 부르시던 호칭이 생각나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으신 건가?’임유진이 돌아온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강지혁은 지금 임유진과의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 심지어 그들은 당시 임유진의 사망을...고이준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사모님이 돌아왔으니 이제 회장님도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있는 건가? 드디어 그 묵은 상처에 매듭이 지어지는 건가?’고이준은 강지혁과 임유진의 사이를 처음부터 지켜봐 온 사람이기에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두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또한 곁에서 계속 지켜봤었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지금이 얼마나 값진 순간인지 알 수 있었다.한편 소민아는 고이준과 얘기하는 현이를 질투와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강지혁을 멋대로 아빠라고 불렀던 주제도 모르는 어린애가 정말 강지혁의 친딸일 줄은 아주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이제 그녀의 딸은 상황이 무척이나 난처해졌다.강씨 가문에 진정한 친딸이 돌아왔는데 누가 과연 입양 딸 따위를 신경 쓸까.소민아는 순간 자신의 딸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모든 게 갑자기 튀어나온 진짜 딸 때문에 빼앗겨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더 불안한 건 언젠가는 그녀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은 죽었을 때나 살아있는 지금이나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으니까.그녀는 그 강지혁의 두 눈에서 눈물까지 보이게 한 여자였으니까.이제 그녀가 꿈꾸던 재벌가의 안주인이 되는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같은 시각, 벤틀리 안.강지혁은 빨개진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예전에 이 여자에게 해줬던 말인가?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떨어져나왔다.이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지혁이 설마 만나자마자 이렇게 울 줄 몰랐으니까.그녀는 허둥지둥하며 자신의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혁아, 뚝. 울지 마.”하지만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그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나왔다.사람들은 조금 전 상황으로 이미 충분히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그 강지혁이 울다니,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지금껏 강지혁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오늘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자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오늘 본 이 광경을 멋대로 떠벌리고 다녀도 누구 하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게 분명했다.강지혁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는 분명히 이만 눈물을 멈추라고 하는데 몸은 통제를 잃은 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심해져만 갈 뿐이었다.왜일까...대체 왜 이 여자의 한마디에 이렇게도 눈물이 흐르는 걸까.왜 이 여자의 손길이 이렇게도 그립고 가슴이 아픈 걸까.이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라서?이미 세상에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온 그의 아내라서?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라서?사랑했다고 한들 그는 결국 그녀의 모든 걸 잊어버렸다. 그렇다는 건 고작 그만큼일 뿐인 사랑이라는 게 아닐까?강지혁은 갑자기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옆에 주차된 차량으로 향했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유진과 강지혁은 검은색 벤틀리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두 사람이 차에 타는 걸 봤음에도 그 누구도 차량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엄마랑 아빠는 왜 둘이서만 차에 탔어요?”순수한 호기심이 묻은 아이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이준은 눈앞에 서 있는 귀여운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