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회식이 끝날 때쯤이면 임유진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동료들을 향해 운전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 후 직접 대리기사님을 불러주곤 했었다. 그런 그녀가 음주운전에 사람을 죽였다니.하진우는 임유진만큼은 절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었다.하지만 그의 확고한 믿음도 강지혁이라는 두려움을 이기진 못했고 구린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건에 자신마저 휘말리게 될까 봐 끝내는 몸을 사렸다. 그러고는 S 시에서 강지혁을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임유진이 잘 못 걸린 것뿐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했다....요 며칠 동안 점심시간만 되면 강지혁네 회사의 비서는 윤이 식당에서 음식을 시켰고 그걸 임유진이 배달을 했다. 그러고는 매번 강지혁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임유진은 이미 몇 번이나 강지혁한테 이러지 말아 달라고 눈치를 줬지만, 강지혁은 그럴 때면 그녀를 향해 예쁜 얼굴을 들이밀고는 물었다."누나는 나와 같이 점심을 먹는 게 싫어? 난 우리가 같이 식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사람을 홀리는 듯한 얼굴로 저런 말을 내뱉는 건 반칙이었다.임유진은 요즘 강지혁을 보면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런 마음을 메시지로 한지영한테 토로했더니 한지영이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결론을 내렸다.「그야 당연히 네가 강지혁 씨의 플러팅에 넘어가서 그런 거겠지.」「플러팅이라고?」임유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한지영을 향해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지금 연예계를 봐봐. 솔직히 강지혁 씨처럼 잘생긴 남자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그런데 너는 매일매일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거잖아. 당연히 홀릴 수밖에 없지.」임유진이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그보다 너 대체 강지혁 씨랑 지금 어떤 관계인 건데? 난 왜 자꾸 강지혁 씨가 너한테 진심인 것처럼 느껴지지? 단순히 너랑 누나 동생 놀이를 하려는 거면 네 말 한마디에 그 난리를 치며 나를 찾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거잖아. 백연신 씨하고도 부딪
단체주문에 매번 너무 기뻐하는 탁유미의 모습에 임유진은 싫은 내색도 못 한 채 말없이 스쿠터에 음식을 실었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배달 주문이 많아져서 탁유미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윤이도 하루빨리 인공와우를 착용할 수 있게 된다.임유진은 이제 윤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져 왔다.어린 나이에 듣지 못하게 된 것도 서러운데 임유진이 며칠을 지켜본 결과 윤이는 아버지도 없는 것 같았다. 윤이의 성이 탁 씨라는 걸 들었을 때 아마 탁유미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라고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말이다.임유진이 스쿠터를 타고 GH 그룹에 도착해 로비에 들어서니 경비원들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익숙한 듯 음식을 받아들고는 그녀를 도와 엘리베이터 층수까지 눌러주었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반기기도 했다. 이러한 대접은 아마 배달원이 임유진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임유진 역시 이 모든 것이 강지혁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임유진이 배달음식을 한가득 들고 걸어 들어오자 강지혁의 비서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질서정연하게 음식을 하나하나 가져가더니 예의를 갖춰 인사까지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상관인 임유진이 부하직원들을 위해 음식을 하사하는 것처럼 보였다.임유진은 도시락 2인분을 손에 든 채 천천히 강지혁이 있는 대표이사실로 걸어갔다. 두 번 노크하니 강지혁의 ‘들어와’ 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익숙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놀란 눈을 하고 말았다. 강지혁만 있어야 할 공간에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강지혁의 책상 앞에 있었으니까. 그중에는 빌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포스터에 걸려있던 임원들의 얼굴도 있었다.임유진은 양손에 도시락을 든 채 임원들과 눈을 마주쳤다."왔어? 거기 앉아."임유진은 천천히 소파에 앉은 후 음식을 내려놓고 또다시 임원들과 눈을 마주쳤다."먼저 먹고 있어. 이것만 끝내고 금방 갈게."강지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임유
임유진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강지혁은 맞은 편에 앉아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임유진이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곁에 영원히 붙어 있을지.그는 이제 임유진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식사만 해도 마냥 좋았다.지금 돌이켜보면 강지혁은 아마 자신이 ‘혁이’였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강지혁을 ‘혁아’라고 불렀을 때 임유진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향해 웃어 줬고 다정하게 머리도 말려주며 언제나 입이 닳도록 ‘혁아’라고 불러줬었다.마치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강지혁은 항상 임유진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혁아’라고 불러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식사를 끝마친 임유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았다.‘그럼 내가 밥 먹고 있는 동안 계속 나만 보고 있었던 거야?’임유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얼른 자리에 일어섰다."나... 나 이제 가볼게."임유진은 허리를 숙인 채 도시락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등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누나, 나 한 번만 ‘혁아’하고 불러줄래?"강지혁은 마치 애원하듯 그녀를 절절하게 쳐다봤다. 임유진은 그의 부탁에 몸이 굳어버렸고 목구멍이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갑자기 왜...""‘혁아’라고 불러줘. 난 지금 누나가 나를 ‘혁아’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어."임유진이 난감한 얼굴을 하며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자 강지혁이 얼굴을 더 가까이 붙여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딱 한 번만, 응?"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술이 서서히 자신의 입술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다급하게 외쳤다."혁아!"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입술이 딱하고 멈추더니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듣기 좋네."그녀를 잡고 있던
"고마워요."임유진이 책을 건네받으며 말했다."내가 더 고맙죠.""윤이가 듣지 못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유진 씨가 이렇게 수어까지 배우겠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탁유미가 미소를 지었다."윤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나를 좋아해 줘서 너무 다행이고요. 윤이가 좋은 인연이라서 이렇게 일도 할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들어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 결국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그러게요... 정말 좋은 인연인가 봐요.""그럼 언니, 저 먼저 가볼게요.""그래요. 잘 가요."임유진이 퇴근한 후 탁유미는 가게 문을 닫고 가게 뒤편의 작은 집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탁유미의 엄마가 잠든 윤이를 옆에서 토닥토닥해주고 있었다."윤이 잠들었어요?"탁유미는 윤이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리를 낮춰 물었다."응, 막 잠들었어."답을 한 탁유미의 엄마는 이내 임유진에 대해 물었다."임유진 씨, 정말로 수어가 배우고 싶대?""네, 진심으로 배우고 싶은 것 같아요. 아까 수어책을 선물해 주니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탁유미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그래, 사람은 좋아 보이더라. 윤이한테도 잘하는 것 같고."탁유미 엄마는 요 며칠 임유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도 뭔가 누명을 쓴 것 같더라고요."탁유미가 말을 이었다."전에 우연히 유진 씨가 친구랑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사건을 뒤집는다는 소리를 했어요. 누명이라도 썼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닐까요?""너처럼 기구한 운명인가 보다."탁유미 엄마는 안타까운 듯하면서도 화난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지 않았더라면 감옥까지 가지도 않았어. 심지어!""엄마, 그만 해요."탁유미가 고개를 저으며 진정하라는 듯 타일렀다."뭐가 어떻게 됐든, 나는 지금 윤이랑 엄마랑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병실은 조용했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임유진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강문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강문철이 그녀를 혐오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강문철의 옆에는 간병인 한 명과 임유진을 여기로 데려온 강문철의 비서가 서 있었다."내가 왜 아가씨를 여기로 불렀는지 아나?"오랜 정적을 깨고 강문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강지혁 때문이잖아요."병원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임유진은 긴장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지만, 강문철의 혐오가 담긴 눈빛을 본 후로는 이상하게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다.아마 이보다 더한 상황도 많이 겪어봤는데 고작 혐오감쯤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임유진의 대답에 강문철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알긴 아는구먼.""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거죠?"임유진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지혁이가 아가씨를 우리 집안까지 들일 줄은 몰랐네. 아가씨는 자신이 우리 집안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강문철이 차갑게 물었다.강문철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겁주려는 것임을 알아챈 임유진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한들 강문철이 믿어주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임유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그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비서를 보며 말했다."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 손자가 대체 이 아가씨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 것 같나?""글쎄요. 강 대표님 마음에 들만한 뭔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비서가 딱딱하게 대답하자 강문철이 혀를 차며 말했다."얼굴이 좀 예쁘장하게 생긴 것 빼고는 특별한 뭔가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그럼 저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되겠네. 우리 지혁이가 그 모습을 보고도 저 아가씨를 좋아하는지 보고 싶군.""알겠습니다."임유진이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강문철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의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겠다니, 강문철은 저녁 식사 메뉴를
애초에 그녀가 법조계를 택한 이유는 정의구현을 위해서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리조차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똑똑하네."비서가 피식 웃었다.임유진은 주먹을 꽉 쥔 채 남에게 휘둘리는 삶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금 느꼈다.비서가 든 칼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자 임유진도 서서히 몸이 떨려오며 두려워 났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숙이고는 빠르게 비서의 팔을 스쳐지나 병실 문 쪽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금세 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경호원들에 의해 제압을 당했다.비서가 천천히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난 또 아가씨가 대단한 강심장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요. 단지 도망가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인데, 그렇죠? 아가씨는 여기서 도망갈 수 없을 것입니다."임유진도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반항 한번 못 해본 채 억울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임유진은 경호원들에 의해 다시 한번 병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비서의 칼이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때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단숨에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눈 깜짝할 새에 비서의 손에 들린 칼을 뺏어 들고는 발을 올려 비서를 구석 쪽으로 차버렸다."할아버지,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강지혁이 뺏어 든 칼을 돌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강문철을 향해 말했다."이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강문철은 강지혁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너와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야.""그건 내가 정하는 거지, 할아버지가 정하는 게 아니죠."강지혁은 고개를 돌려 임유진에게 물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강지혁이 제때 나타나 준 덕에 임유진은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그때 강지혁에 의해 나가떨어진 비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걸 본 강지혁이 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차
강지혁은 매년 이날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씨 저택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곁을 지켰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강지혁 손에 이끌린 채 병원 밖에 나와보니 거기에는 검은색 세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후 임유진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아까는 악몽이 되려던 순간 강지혁이 나타나 솔직히 많이 놀랐다."무서워?"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물었다. 임유진은 아직도 손을 떨고 있었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운명이 남들 손에 쥐어진 채 어떠한 반항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았는데. 그녀는 아까 마치 제 죽음까지도 다른 사람의 한마디에 쉽게 결정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내가 방심했어. 노인네가 아무리 급했어도 그렇지... 하필 오늘 누나를 건드릴 줄은 몰랐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물었다."오늘이... 무슨 중요한 날이야?"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의 얼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예쁜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는 듯했다.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는 어느새 그녀를 억압하듯 감싸 안았다. 그에 임유진이 움찔하며 강지혁에게서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이 더 빠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고 그렇게 한참을 더 그녀를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아까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때 임유진은 마치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두 사람을 태운 차가 서서히 강씨 저택 앞에 멈춰 섰고 임유진도 강지혁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노인네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 이제는 누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겁먹지 않아도 돼."역시 강문철의 핏줄이라 그런가? 강지혁은 오는 길에 강문철이 굳이 임유진을 데려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눈치챘다."알겠어."강지혁은 임유진을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
그럼 강지혁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봤지만, 거기에도 강지혁은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대체 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까지 강지혁을 찾고 있는지 임유진 자신도 몰랐다.강씨 저택은 강지혁과 임유진이 있는 본채를 제외하고 사용인들이 묵는 방, 정원, 그리고 연못에 정자까지 있었다.이 저택에 살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태껏 임유진은 집을 둘러본다거나 하지 않았던지라 저택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있었다.시간은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저 멀리 길가에서 은은히 비추는 가로등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다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쌀쌀한 바람에 임유진은 옷을 여미며 자기 자신에게 대체 왜 이 시간에 밖에까지 나온 건지 물었다. 대체 강지혁을 왜 찾고 있는 거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여기가 강지혁 집인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고민 끝에 오늘 강지혁이 구해주러 와서 자신이 지금 이러는 거라고 자기 멋대로 합리화를 했다.그때 본채 옆 멀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빛 한 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고 이에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작은 별채가 있었다.임유진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는 한 남성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잘생긴 얼굴에 따듯함까지 보이는 남성은 강지혁과 많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눈을 한 강지혁과는 달리 굳이 말하자면 강문철의 눈과 더 닮아있었다.임유진은 금세 사진 속의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분일 줄은 몰랐지만.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그의 엄마가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동요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유사한 사건들을 변호사로 있었을 때 많이 접해봤기 때문에.다만 이토록 다정한 얼굴을 한 남자를 대체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