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별 건 아니고, 아까 나 데려다주고 나서 네가 다른 데로 가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그냥... 그냥 잠도 안 온 김에 이리저리 둘러본 거야. 별일 없어 보이니 난 그만 갈게..."임유진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등을 보이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래서, 내가 걱정됐다는 거지?"임유진은 강지혁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온몸이 굳어버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강지혁을 걱정했다고?’임유진은 오늘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 그를 강지혁이 아닌 ‘혁이’로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걱정까지 했던 걸까?그때 임유진을 안고 있던 강지혁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 같더니 이내 신음을 내며 그녀를 안고 있던 팔도 점점 풀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뒤를 돌아보자 강지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는 한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전에도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너 설마 또 위가 아파?""기억하고 있었네."강지혁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강지혁의 약해진 모습에 당황한 임유진이 주위를 둘러보다 옆방 안에 소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그를 소파까지 부축해주었다."갑자기 아픈 거야?"임유진이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강지혁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사실은 아까 전부터 살짝 아프기 시작했는데 금방 괜찮을 줄 알고 가만히 내버려 뒀었거든. 근데 누나, 나 아픈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내가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나 봐?"임유진은 그의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약은 있어?""나 약 먹는 거 싫어해.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약 먹는 걸 싫어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때 약 사줬을 때는...""그건 누나가 사준 거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이 사준 약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때는 주위
"약 먹어야지. 여기서 더 아프면 어떡하려고."임유진은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핸드폰으로 근처 비대면 진료 약 배달이 가능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제일 가까운 약국까지도 차로 20분은 걸리지만, 퀵 서비스를 이용하면 경호원이 갔다 오는 것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다.생각을 마친 임유진은 일전 강지혁이 먹었던 약을 사 오도록 주문을 넣었다.강지혁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작게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질끈 감은 눈은 속눈썹 때문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S 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가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강지혁의 모습에 임유진은 마음이 저릿해 났다. 자신이 제일 걱정하지 말아야 할 남자가 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이 방을 다시 자세히 둘러보자, 이 별채는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곳처럼 스산하기 그지없었다.지금 두 사람이 있는 방에도 역시 처음 별채로 들어왔을 때 봤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강선우’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상 위에는 향도 피워져 있었고 위패도 놓여져 있었다.강지혁의 아버지는 참으로 자신의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졌다. 강선우 사진 옆에는 어떤 여성의 사진도 있었다. 검은색 웨이브 머리를 한 여성은 매우 아름다웠고 눈동자가 매우 매혹적인 것이 꼭 강지혁의 눈동자와 닮아있었다.‘그럼 이분이... 강지혁의 어머니인 건가?’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임유진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다 마침 탁자 위에 있는 정수기를 발견하고 얼른 미지근한 물을 받아와 강지혁에게 건네주었다."자, 이거 마시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이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임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내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임유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일으켜 컵을 강지혁의 입가에 갖다 댔다. 천천히 그녀가 준 물을 다 마신 강지혁은 다시 눈을 감으며 소파에 기댔다."난 이대로 좀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약 가지고 올게."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이 한마디를 남긴 채 부랴부랴 별채를 나왔다.강지혁은 소파에 누워서 임유진이 방금 한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늦은 시간이었고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똑같은 말을 남긴 채 약을 사러 떠났다.강지혁은 그 말에 얌전히 그녀를 기다렸고 지금도 역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임유진은 황급히 저택 대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길가의 가로등 덕에 지금, 이 시각에 부잣집에 약을 배달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배달원의 황당한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약 시키셨죠? 여기요.""네, 맞아요. 감사합니다."임유진은 배달원의 손에서 약을 받아든 후 얼른 몸을 돌려 다시 별채로 향했다.배달원은 그녀가 들어간 대저택을 바라보며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이때 강씨 저택 보안실에서 CCTV를 보고 있던 경호원들도 임유진이 별채에서 황급히 나와 물건을 가지고 다시 별채로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했다."허, 저기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고?""그리고 저건 배달음식인 건가...?"내용물이 봉투에 담겨 있던 탓에 그것이 약인 것까지는 몰랐다."대표님이 내쫓지 않는 거로도 모자라... 같이 야식이라도 드시려는 건가?"경호원들은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은 임유진이라는 여자가 강씨 저택에 발을 들인 만큼 강지혁이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 별채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강씨 저택에서 몇십 년을 일해 온 사용인이 청소를 위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저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강지혁과 강문철뿐이었다.경호원들은 아까 임유진이 모르고 별채에 발을 들였을 때 금방 강지혁에 의해 내쫓겨질 줄 알았다. 그리고 아마 날이 밝는 대로 이대로 영영 강씨 저택에 발도 못들이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계속 CCTV를 보다가 여자가 급하게 나오는 모습에 드디어 쫓겨났나 싶었지만 이게 웬걸, 이제는 배달음식으로 보이는 물
강지혁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는 그때처럼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지혁을 아무리 무서워하고 미워한들 그가 아픈 것은 못 보겠는 사람처럼 임유진은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강지혁은 그 생각에 아픈 것도 조금은 나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고는 예전처럼 순순히 임유진이 건네주는 약과 물을 받아먹고 다시 누웠다.극심한 고통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는 생각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자꾸 나 그렇게 보면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란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다급하게 변명했다."난! 난 그냥 네 입술이 피가 났길래 본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다른 뜻이 있대도 상관없어. 누나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키스해도 돼."강지혁은 여전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는 땀이 범벅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편해진 듯 보였다.임유진은 은근슬쩍 플러팅하는 강지혁의 말에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강선우와 강지혁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아버지... 보러 온 거야?""응."강지혁은 짧게 대답한 후 사진이 걸려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유진은 살짝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강선우의 사진이 놓인 앞쪽으로 자리했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강선우를 향해 예의를 갖춰 절을 했다.한 번, 두 번, 강지혁은 자신의 아버지한테 절을 올리고 있는 임유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녀가 지금 충분히 예의를 갖춘 채 절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도 느껴졌다.강지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선우를 바라보았다. 강지혁의 눈은 마치 이 여자가 바로 아버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이 여자를 평생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자신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
그는 예전 같으면 이런 말들을 안 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아버지의 위패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곧장 자연스럽게 말했다.마치 그녀를 마주할 때만 마음속에 묻어둔 이런 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같았다.“말하자면 아빠도 그 당시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셨고 엄마보다 예쁜 여자도 분명 있었을 텐데 고작 엄마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다니, 참 바보 같은 짓이지.”강지혁이 나지막이 말했다.“아버님도 어머님이 예뻐서 좋아하신 것만은 아닐 거야. 한 사람이 누군가를 진정 좋아할 때 외모는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외모와 상관없이 결국... 다 좋아하게 돼 있어.”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어쩌면... 누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누군가를 진짜 좋아하게 되면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강지혁도 임유진보다 남자 마음을 더 잘 헤아리고 잘 맞춰주는 여자를 많이 봐왔지만 유독 임유진이 주는 그 느낌만 좋아했고 그녀한테 푹 빠져있는 것과 같았다.그녀가 그를 관심해줄 때 잔잔한 물결 같은 다정함과 말끝마다 ‘혁아’라고 불러주는 모습, 밤마다 그와 손잡고 자는 것까지 전부 다 좋았다...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그녀를 온통 뒤덮을 것만 같았고 그녀도 이 눈빛 속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지혁 아버지에게 올린 향이 다 타들어 간 후에야 강지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엄마의 사진을 불태워버린 후 촛불을 껐다.“어머님 사진을 왜 태워?”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매년 이맘때면 난 항상 사진을 태워.”강지혁이 대답했다.“다 됐으면 이만 돌아가자.”임유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막 0시를 넘기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왜 매년 이맘때 사진을 태워?”그녀는 궁금해하며 묻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재빨리 말했다.“음, 대답 안 해도 돼. 나 그냥... 그냥 물어본 거야.”사실 그녀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임유진은 속으로 끊임없이
“왜 그래?”강지혁이 걸음을 멈추자 임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이 본채로 돌아갈 때 임유진이 물었다.“지금은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강지혁이 대답했다.“너 그 위통이 지병이라 해도 시간 내서 병원에 찾아가 치료 잘해야 해.”임유진이 말했다.“어떤 병은 작은 병일 때 신경 안 쓰다가 나중에 큰 병을 만들잖아.”“그러니까 누나 지금 날 관심하는 거야?”강지혁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물었다.그녀는 숨 막히고 난감하여 위층에 올라가려 했지만 강지혁이 손을 번쩍 들더니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알았어, 누나 말 들을게. 나중에 시간 내서 의사한테 보이고 몸조리도 잘할게. 오늘 누나가 사준 약도 얌전히 잘 먹을게. 누나 말 잘 들으면 누나도 날 조금은 좋아해 줄 거지?”“뭐라고?”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말을 잘 듣겠다니? 세상에, 말도 안 돼. 강지혁 같은 남자애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냐고?’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말 잘 들으면 누나는 날 좋아해 줄 거야? 난 누나가 좋아해 주길 바라는데.”그랬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가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는데 언제부턴가 욕심이 점점 커지고 갖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이렇게 옆에 묶어두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모든 신경이 온통 그이길 바랐다.“그래 줄 수 있어?”악마의 화려한 유혹 같은 그 목소리는 상대의 허락을 갈구했다.임유진은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으로 돼버렸다.그녀는 당장이라도 허락해줄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밤새 침대를 뒤척이며 머릿속에 온통 강지혁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강지혁이 정말...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강지혁이 어떻게 그런 말을 내
한지영은 드디어 통화를 마쳤다. 이때 임유진이 물었다.“어머님이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이토록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 게다가 무슨 처벌이든 다 받겠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뭐긴 뭐겠어, 선보라고 다그치는 거지.”한지영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엄마가 심지어 이번엔 아주 완벽한 상대라 다른 아줌마 손에서 겨우 뺏어왔대. 나보고 일단 만나는 보래.”한지영은 엄마가 이해되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녀의 엄마는 마치 그녀가 이 두 해에 시집 못 가면 평생 노처녀로 살 거라고 단정한 듯싶다.“그럼 일단 만나봐. 기회라 셈 치면 되잖아.”임유진이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멈춰, 나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선까지 보면 이대로 폭발해버릴지도 몰라.”한지영은 엄마가 종일 선보라고 다그치는 것만 생각하면 피를 토할 충동이 생겨날 지경이다.“왜? 또 뭔 일 있구나!”임유진이 말했다.한지영은 절친을 힐긋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에 내가 지금 백연신 씨랑 사귀는 중이라면 넌 엄청 놀랄 거지?”임유진은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너 백연신 씨랑 사귄다고? 전까지만 해도 백연신 씨가 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맞아. 복수하는 거야.”한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럼에도...”“일단 사귀고 나서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 다시 나를 뻥 차버릴 거야.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나 맛 좀 보라고 그런 거겠지. 드라마에서 다 그렇게 나오잖아!”한지영이 대답했다.하지만 백연신이 정말 이토록 유치한 방식으로 복수할까? 임유진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강지혁은 전에 그녀에게 백연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생아 신분으로 백씨 일가를 물려받고 백씨 일가의 오너가 될 수 있겠는가.게다가 백씨 일가의 본처와 그녀의 두 아들도 백연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임유진이 물었다.“아니면 뭔데? 또 다른 가능성이 더
한지영은 아무래도 암흑한 면을 많이 겪지 못한 듯싶다. 반면 임유진은 교도소에서 수많은 암흑한 장면을 봐왔고 가끔은 심지어 눈물을 흘릴 기운조차 없었다.“풉!”한지영은 채 삼키지 못한 푸딩을 내뱉더니 곧장 티슈로 입을 닦고 그녀에게 말했다.“유진아, 농담을 해도 내가 음식 먹기 전에 했어야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어디 있어?!”“나 진지해.”임유진이 말했다.둘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한참 후 한지영이 머쓱하게 웃었다.“설사 연신 씨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 해도 우린 아예 어울리지 않아. 백씨 일가가 어떤 집안인지 잘 생각해봐. 내가 진짜 연신 씨랑 잘 되면 평생 재벌가의 치열한 사투를 겪을 거야. 내 전투력으론 가차 없이 짓밟히겠지.”그러니 이런 일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답이다. 한지영이 백연신에게 진 ‘빚’만 청산한다면 그녀도 곧 자유를 얻을 테니까.“이 얘긴 됐고, 너 얼마 전에 새로운 직장 구했다고 하더니 어때? 좀 할 만해?”한지영이 화제를 돌렸다.“나름대로. 작은 식당이라 월급이 80만 원밖에 안 돼. 뭐 그래도 사모님도 좋으시고 다른 직원들과도 잘 지내고 있어.”임유진이 대답했다.“다행이네. 그렇지만 너 지금 하는 일 오래 하는 거 아니다. 공부도 잘했겠다, 다른 자격증 같은 건 딸 생각 안 해봤어? 미리 따놓으면 나중에 직업을 바꿀 수도 있잖아.”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지금 프런트도 할 수 없어. 진짜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을 거야.”한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자면 결국 임유진이 전과 기록이 있어 이 사건을 뒤집는 것만이 가장 좋은 해결방안이다!“저번에 말한 그 증인은 내가 좀 더 지켜볼게. 개인 탐정이 말하길 시간이 좀 지나면 실질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대. 증거를 확보하거든 우리 함께 해성시로 가서 확실히 알아보자.”한지영이 말했다.“그래.”임유진은 자신에게 일이 생긴 그 순간부터 줄곧 함께해온 절친을 감격스럽게 바라봤다. 모두가 그녀를 범인으로 주목할 때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