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강지혁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봤지만, 거기에도 강지혁은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대체 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까지 강지혁을 찾고 있는지 임유진 자신도 몰랐다.강씨 저택은 강지혁과 임유진이 있는 본채를 제외하고 사용인들이 묵는 방, 정원, 그리고 연못에 정자까지 있었다.이 저택에 살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태껏 임유진은 집을 둘러본다거나 하지 않았던지라 저택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있었다.시간은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저 멀리 길가에서 은은히 비추는 가로등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다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쌀쌀한 바람에 임유진은 옷을 여미며 자기 자신에게 대체 왜 이 시간에 밖에까지 나온 건지 물었다. 대체 강지혁을 왜 찾고 있는 거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여기가 강지혁 집인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고민 끝에 오늘 강지혁이 구해주러 와서 자신이 지금 이러는 거라고 자기 멋대로 합리화를 했다.그때 본채 옆 멀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빛 한 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고 이에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작은 별채가 있었다.임유진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는 한 남성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잘생긴 얼굴에 따듯함까지 보이는 남성은 강지혁과 많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눈을 한 강지혁과는 달리 굳이 말하자면 강문철의 눈과 더 닮아있었다.임유진은 금세 사진 속의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분일 줄은 몰랐지만.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그의 엄마가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동요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유사한 사건들을 변호사로 있었을 때 많이 접해봤기 때문에.다만 이토록 다정한 얼굴을 한 남자를 대체
임유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별 건 아니고, 아까 나 데려다주고 나서 네가 다른 데로 가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그냥... 그냥 잠도 안 온 김에 이리저리 둘러본 거야. 별일 없어 보이니 난 그만 갈게..."임유진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등을 보이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래서, 내가 걱정됐다는 거지?"임유진은 강지혁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온몸이 굳어버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강지혁을 걱정했다고?’임유진은 오늘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 그를 강지혁이 아닌 ‘혁이’로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걱정까지 했던 걸까?그때 임유진을 안고 있던 강지혁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 같더니 이내 신음을 내며 그녀를 안고 있던 팔도 점점 풀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뒤를 돌아보자 강지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는 한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전에도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너 설마 또 위가 아파?""기억하고 있었네."강지혁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강지혁의 약해진 모습에 당황한 임유진이 주위를 둘러보다 옆방 안에 소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그를 소파까지 부축해주었다."갑자기 아픈 거야?"임유진이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강지혁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사실은 아까 전부터 살짝 아프기 시작했는데 금방 괜찮을 줄 알고 가만히 내버려 뒀었거든. 근데 누나, 나 아픈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내가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나 봐?"임유진은 그의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약은 있어?""나 약 먹는 거 싫어해.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약 먹는 걸 싫어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때 약 사줬을 때는...""그건 누나가 사준 거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이 사준 약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때는 주위
"약 먹어야지. 여기서 더 아프면 어떡하려고."임유진은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핸드폰으로 근처 비대면 진료 약 배달이 가능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제일 가까운 약국까지도 차로 20분은 걸리지만, 퀵 서비스를 이용하면 경호원이 갔다 오는 것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다.생각을 마친 임유진은 일전 강지혁이 먹었던 약을 사 오도록 주문을 넣었다.강지혁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작게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질끈 감은 눈은 속눈썹 때문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S 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가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강지혁의 모습에 임유진은 마음이 저릿해 났다. 자신이 제일 걱정하지 말아야 할 남자가 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이 방을 다시 자세히 둘러보자, 이 별채는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곳처럼 스산하기 그지없었다.지금 두 사람이 있는 방에도 역시 처음 별채로 들어왔을 때 봤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강선우’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상 위에는 향도 피워져 있었고 위패도 놓여져 있었다.강지혁의 아버지는 참으로 자신의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졌다. 강선우 사진 옆에는 어떤 여성의 사진도 있었다. 검은색 웨이브 머리를 한 여성은 매우 아름다웠고 눈동자가 매우 매혹적인 것이 꼭 강지혁의 눈동자와 닮아있었다.‘그럼 이분이... 강지혁의 어머니인 건가?’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임유진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다 마침 탁자 위에 있는 정수기를 발견하고 얼른 미지근한 물을 받아와 강지혁에게 건네주었다."자, 이거 마시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이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임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내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임유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일으켜 컵을 강지혁의 입가에 갖다 댔다. 천천히 그녀가 준 물을 다 마신 강지혁은 다시 눈을 감으며 소파에 기댔다."난 이대로 좀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약 가지고 올게."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이 한마디를 남긴 채 부랴부랴 별채를 나왔다.강지혁은 소파에 누워서 임유진이 방금 한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늦은 시간이었고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똑같은 말을 남긴 채 약을 사러 떠났다.강지혁은 그 말에 얌전히 그녀를 기다렸고 지금도 역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임유진은 황급히 저택 대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길가의 가로등 덕에 지금, 이 시각에 부잣집에 약을 배달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배달원의 황당한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약 시키셨죠? 여기요.""네, 맞아요. 감사합니다."임유진은 배달원의 손에서 약을 받아든 후 얼른 몸을 돌려 다시 별채로 향했다.배달원은 그녀가 들어간 대저택을 바라보며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이때 강씨 저택 보안실에서 CCTV를 보고 있던 경호원들도 임유진이 별채에서 황급히 나와 물건을 가지고 다시 별채로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했다."허, 저기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고?""그리고 저건 배달음식인 건가...?"내용물이 봉투에 담겨 있던 탓에 그것이 약인 것까지는 몰랐다."대표님이 내쫓지 않는 거로도 모자라... 같이 야식이라도 드시려는 건가?"경호원들은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은 임유진이라는 여자가 강씨 저택에 발을 들인 만큼 강지혁이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 별채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강씨 저택에서 몇십 년을 일해 온 사용인이 청소를 위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저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강지혁과 강문철뿐이었다.경호원들은 아까 임유진이 모르고 별채에 발을 들였을 때 금방 강지혁에 의해 내쫓겨질 줄 알았다. 그리고 아마 날이 밝는 대로 이대로 영영 강씨 저택에 발도 못들이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계속 CCTV를 보다가 여자가 급하게 나오는 모습에 드디어 쫓겨났나 싶었지만 이게 웬걸, 이제는 배달음식으로 보이는 물
강지혁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는 그때처럼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지혁을 아무리 무서워하고 미워한들 그가 아픈 것은 못 보겠는 사람처럼 임유진은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강지혁은 그 생각에 아픈 것도 조금은 나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고는 예전처럼 순순히 임유진이 건네주는 약과 물을 받아먹고 다시 누웠다.극심한 고통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는 생각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자꾸 나 그렇게 보면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란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다급하게 변명했다."난! 난 그냥 네 입술이 피가 났길래 본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다른 뜻이 있대도 상관없어. 누나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키스해도 돼."강지혁은 여전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는 땀이 범벅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편해진 듯 보였다.임유진은 은근슬쩍 플러팅하는 강지혁의 말에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강선우와 강지혁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아버지... 보러 온 거야?""응."강지혁은 짧게 대답한 후 사진이 걸려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유진은 살짝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강선우의 사진이 놓인 앞쪽으로 자리했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강선우를 향해 예의를 갖춰 절을 했다.한 번, 두 번, 강지혁은 자신의 아버지한테 절을 올리고 있는 임유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녀가 지금 충분히 예의를 갖춘 채 절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도 느껴졌다.강지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선우를 바라보았다. 강지혁의 눈은 마치 이 여자가 바로 아버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이 여자를 평생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자신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
그는 예전 같으면 이런 말들을 안 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아버지의 위패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곧장 자연스럽게 말했다.마치 그녀를 마주할 때만 마음속에 묻어둔 이런 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같았다.“말하자면 아빠도 그 당시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셨고 엄마보다 예쁜 여자도 분명 있었을 텐데 고작 엄마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다니, 참 바보 같은 짓이지.”강지혁이 나지막이 말했다.“아버님도 어머님이 예뻐서 좋아하신 것만은 아닐 거야. 한 사람이 누군가를 진정 좋아할 때 외모는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외모와 상관없이 결국... 다 좋아하게 돼 있어.”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어쩌면... 누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누군가를 진짜 좋아하게 되면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강지혁도 임유진보다 남자 마음을 더 잘 헤아리고 잘 맞춰주는 여자를 많이 봐왔지만 유독 임유진이 주는 그 느낌만 좋아했고 그녀한테 푹 빠져있는 것과 같았다.그녀가 그를 관심해줄 때 잔잔한 물결 같은 다정함과 말끝마다 ‘혁아’라고 불러주는 모습, 밤마다 그와 손잡고 자는 것까지 전부 다 좋았다...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그녀를 온통 뒤덮을 것만 같았고 그녀도 이 눈빛 속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지혁 아버지에게 올린 향이 다 타들어 간 후에야 강지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엄마의 사진을 불태워버린 후 촛불을 껐다.“어머님 사진을 왜 태워?”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매년 이맘때면 난 항상 사진을 태워.”강지혁이 대답했다.“다 됐으면 이만 돌아가자.”임유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막 0시를 넘기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왜 매년 이맘때 사진을 태워?”그녀는 궁금해하며 묻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재빨리 말했다.“음, 대답 안 해도 돼. 나 그냥... 그냥 물어본 거야.”사실 그녀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임유진은 속으로 끊임없이
“왜 그래?”강지혁이 걸음을 멈추자 임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이 본채로 돌아갈 때 임유진이 물었다.“지금은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강지혁이 대답했다.“너 그 위통이 지병이라 해도 시간 내서 병원에 찾아가 치료 잘해야 해.”임유진이 말했다.“어떤 병은 작은 병일 때 신경 안 쓰다가 나중에 큰 병을 만들잖아.”“그러니까 누나 지금 날 관심하는 거야?”강지혁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물었다.그녀는 숨 막히고 난감하여 위층에 올라가려 했지만 강지혁이 손을 번쩍 들더니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알았어, 누나 말 들을게. 나중에 시간 내서 의사한테 보이고 몸조리도 잘할게. 오늘 누나가 사준 약도 얌전히 잘 먹을게. 누나 말 잘 들으면 누나도 날 조금은 좋아해 줄 거지?”“뭐라고?”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말을 잘 듣겠다니? 세상에, 말도 안 돼. 강지혁 같은 남자애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냐고?’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말 잘 들으면 누나는 날 좋아해 줄 거야? 난 누나가 좋아해 주길 바라는데.”그랬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가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는데 언제부턴가 욕심이 점점 커지고 갖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이렇게 옆에 묶어두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모든 신경이 온통 그이길 바랐다.“그래 줄 수 있어?”악마의 화려한 유혹 같은 그 목소리는 상대의 허락을 갈구했다.임유진은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으로 돼버렸다.그녀는 당장이라도 허락해줄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밤새 침대를 뒤척이며 머릿속에 온통 강지혁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강지혁이 정말...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강지혁이 어떻게 그런 말을 내
한지영은 드디어 통화를 마쳤다. 이때 임유진이 물었다.“어머님이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이토록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 게다가 무슨 처벌이든 다 받겠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뭐긴 뭐겠어, 선보라고 다그치는 거지.”한지영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엄마가 심지어 이번엔 아주 완벽한 상대라 다른 아줌마 손에서 겨우 뺏어왔대. 나보고 일단 만나는 보래.”한지영은 엄마가 이해되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녀의 엄마는 마치 그녀가 이 두 해에 시집 못 가면 평생 노처녀로 살 거라고 단정한 듯싶다.“그럼 일단 만나봐. 기회라 셈 치면 되잖아.”임유진이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멈춰, 나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선까지 보면 이대로 폭발해버릴지도 몰라.”한지영은 엄마가 종일 선보라고 다그치는 것만 생각하면 피를 토할 충동이 생겨날 지경이다.“왜? 또 뭔 일 있구나!”임유진이 말했다.한지영은 절친을 힐긋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에 내가 지금 백연신 씨랑 사귀는 중이라면 넌 엄청 놀랄 거지?”임유진은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너 백연신 씨랑 사귄다고? 전까지만 해도 백연신 씨가 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맞아. 복수하는 거야.”한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럼에도...”“일단 사귀고 나서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 다시 나를 뻥 차버릴 거야.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나 맛 좀 보라고 그런 거겠지. 드라마에서 다 그렇게 나오잖아!”한지영이 대답했다.하지만 백연신이 정말 이토록 유치한 방식으로 복수할까? 임유진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강지혁은 전에 그녀에게 백연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생아 신분으로 백씨 일가를 물려받고 백씨 일가의 오너가 될 수 있겠는가.게다가 백씨 일가의 본처와 그녀의 두 아들도 백연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임유진이 물었다.“아니면 뭔데? 또 다른 가능성이 더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