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는 그때처럼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지혁을 아무리 무서워하고 미워한들 그가 아픈 것은 못 보겠는 사람처럼 임유진은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강지혁은 그 생각에 아픈 것도 조금은 나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고는 예전처럼 순순히 임유진이 건네주는 약과 물을 받아먹고 다시 누웠다.극심한 고통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는 생각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자꾸 나 그렇게 보면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란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다급하게 변명했다."난! 난 그냥 네 입술이 피가 났길래 본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다른 뜻이 있대도 상관없어. 누나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키스해도 돼."강지혁은 여전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는 땀이 범벅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편해진 듯 보였다.임유진은 은근슬쩍 플러팅하는 강지혁의 말에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강선우와 강지혁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아버지... 보러 온 거야?""응."강지혁은 짧게 대답한 후 사진이 걸려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유진은 살짝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강선우의 사진이 놓인 앞쪽으로 자리했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강선우를 향해 예의를 갖춰 절을 했다.한 번, 두 번, 강지혁은 자신의 아버지한테 절을 올리고 있는 임유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녀가 지금 충분히 예의를 갖춘 채 절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도 느껴졌다.강지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선우를 바라보았다. 강지혁의 눈은 마치 이 여자가 바로 아버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이 여자를 평생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자신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
그는 예전 같으면 이런 말들을 안 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아버지의 위패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곧장 자연스럽게 말했다.마치 그녀를 마주할 때만 마음속에 묻어둔 이런 말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같았다.“말하자면 아빠도 그 당시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셨고 엄마보다 예쁜 여자도 분명 있었을 텐데 고작 엄마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다니, 참 바보 같은 짓이지.”강지혁이 나지막이 말했다.“아버님도 어머님이 예뻐서 좋아하신 것만은 아닐 거야. 한 사람이 누군가를 진정 좋아할 때 외모는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외모와 상관없이 결국... 다 좋아하게 돼 있어.”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어쩌면... 누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누군가를 진짜 좋아하게 되면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강지혁도 임유진보다 남자 마음을 더 잘 헤아리고 잘 맞춰주는 여자를 많이 봐왔지만 유독 임유진이 주는 그 느낌만 좋아했고 그녀한테 푹 빠져있는 것과 같았다.그녀가 그를 관심해줄 때 잔잔한 물결 같은 다정함과 말끝마다 ‘혁아’라고 불러주는 모습, 밤마다 그와 손잡고 자는 것까지 전부 다 좋았다...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그녀를 온통 뒤덮을 것만 같았고 그녀도 이 눈빛 속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지혁 아버지에게 올린 향이 다 타들어 간 후에야 강지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엄마의 사진을 불태워버린 후 촛불을 껐다.“어머님 사진을 왜 태워?”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매년 이맘때면 난 항상 사진을 태워.”강지혁이 대답했다.“다 됐으면 이만 돌아가자.”임유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막 0시를 넘기고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왜 매년 이맘때 사진을 태워?”그녀는 궁금해하며 묻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재빨리 말했다.“음, 대답 안 해도 돼. 나 그냥... 그냥 물어본 거야.”사실 그녀는 이런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임유진은 속으로 끊임없이
“왜 그래?”강지혁이 걸음을 멈추자 임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이 본채로 돌아갈 때 임유진이 물었다.“지금은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강지혁이 대답했다.“너 그 위통이 지병이라 해도 시간 내서 병원에 찾아가 치료 잘해야 해.”임유진이 말했다.“어떤 병은 작은 병일 때 신경 안 쓰다가 나중에 큰 병을 만들잖아.”“그러니까 누나 지금 날 관심하는 거야?”강지혁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물었다.그녀는 숨 막히고 난감하여 위층에 올라가려 했지만 강지혁이 손을 번쩍 들더니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알았어, 누나 말 들을게. 나중에 시간 내서 의사한테 보이고 몸조리도 잘할게. 오늘 누나가 사준 약도 얌전히 잘 먹을게. 누나 말 잘 들으면 누나도 날 조금은 좋아해 줄 거지?”“뭐라고?”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말을 잘 듣겠다니? 세상에, 말도 안 돼. 강지혁 같은 남자애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냐고?’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말 잘 들으면 누나는 날 좋아해 줄 거야? 난 누나가 좋아해 주길 바라는데.”그랬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가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는데 언제부턴가 욕심이 점점 커지고 갖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이렇게 옆에 묶어두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모든 신경이 온통 그이길 바랐다.“그래 줄 수 있어?”악마의 화려한 유혹 같은 그 목소리는 상대의 허락을 갈구했다.임유진은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으로 돼버렸다.그녀는 당장이라도 허락해줄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밤새 침대를 뒤척이며 머릿속에 온통 강지혁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강지혁이 정말...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강지혁이 어떻게 그런 말을 내
한지영은 드디어 통화를 마쳤다. 이때 임유진이 물었다.“어머님이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이토록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 게다가 무슨 처벌이든 다 받겠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뭐긴 뭐겠어, 선보라고 다그치는 거지.”한지영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엄마가 심지어 이번엔 아주 완벽한 상대라 다른 아줌마 손에서 겨우 뺏어왔대. 나보고 일단 만나는 보래.”한지영은 엄마가 이해되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녀의 엄마는 마치 그녀가 이 두 해에 시집 못 가면 평생 노처녀로 살 거라고 단정한 듯싶다.“그럼 일단 만나봐. 기회라 셈 치면 되잖아.”임유진이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멈춰, 나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선까지 보면 이대로 폭발해버릴지도 몰라.”한지영은 엄마가 종일 선보라고 다그치는 것만 생각하면 피를 토할 충동이 생겨날 지경이다.“왜? 또 뭔 일 있구나!”임유진이 말했다.한지영은 절친을 힐긋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에 내가 지금 백연신 씨랑 사귀는 중이라면 넌 엄청 놀랄 거지?”임유진은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너 백연신 씨랑 사귄다고? 전까지만 해도 백연신 씨가 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맞아. 복수하는 거야.”한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럼에도...”“일단 사귀고 나서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 다시 나를 뻥 차버릴 거야.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나 맛 좀 보라고 그런 거겠지. 드라마에서 다 그렇게 나오잖아!”한지영이 대답했다.하지만 백연신이 정말 이토록 유치한 방식으로 복수할까? 임유진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강지혁은 전에 그녀에게 백연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생아 신분으로 백씨 일가를 물려받고 백씨 일가의 오너가 될 수 있겠는가.게다가 백씨 일가의 본처와 그녀의 두 아들도 백연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임유진이 물었다.“아니면 뭔데? 또 다른 가능성이 더
한지영은 아무래도 암흑한 면을 많이 겪지 못한 듯싶다. 반면 임유진은 교도소에서 수많은 암흑한 장면을 봐왔고 가끔은 심지어 눈물을 흘릴 기운조차 없었다.“풉!”한지영은 채 삼키지 못한 푸딩을 내뱉더니 곧장 티슈로 입을 닦고 그녀에게 말했다.“유진아, 농담을 해도 내가 음식 먹기 전에 했어야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어디 있어?!”“나 진지해.”임유진이 말했다.둘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한참 후 한지영이 머쓱하게 웃었다.“설사 연신 씨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 해도 우린 아예 어울리지 않아. 백씨 일가가 어떤 집안인지 잘 생각해봐. 내가 진짜 연신 씨랑 잘 되면 평생 재벌가의 치열한 사투를 겪을 거야. 내 전투력으론 가차 없이 짓밟히겠지.”그러니 이런 일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답이다. 한지영이 백연신에게 진 ‘빚’만 청산한다면 그녀도 곧 자유를 얻을 테니까.“이 얘긴 됐고, 너 얼마 전에 새로운 직장 구했다고 하더니 어때? 좀 할 만해?”한지영이 화제를 돌렸다.“나름대로. 작은 식당이라 월급이 80만 원밖에 안 돼. 뭐 그래도 사모님도 좋으시고 다른 직원들과도 잘 지내고 있어.”임유진이 대답했다.“다행이네. 그렇지만 너 지금 하는 일 오래 하는 거 아니다. 공부도 잘했겠다, 다른 자격증 같은 건 딸 생각 안 해봤어? 미리 따놓으면 나중에 직업을 바꿀 수도 있잖아.”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지금 프런트도 할 수 없어. 진짜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을 거야.”한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자면 결국 임유진이 전과 기록이 있어 이 사건을 뒤집는 것만이 가장 좋은 해결방안이다!“저번에 말한 그 증인은 내가 좀 더 지켜볼게. 개인 탐정이 말하길 시간이 좀 지나면 실질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대. 증거를 확보하거든 우리 함께 해성시로 가서 확실히 알아보자.”한지영이 말했다.“그래.”임유진은 자신에게 일이 생긴 그 순간부터 줄곧 함께해온 절친을 감격스럽게 바라봤다. 모두가 그녀를 범인으로 주목할 때
OK! 확인 완료.한지영은 앞으로 걸어갔다.“저기 혹시 장규현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한지영이에요.”“안녕하세요.”상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답했다.“실은 제가...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한지영은 그에게 사과부터 하고 싶었다. 오늘은 진심으로 선보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나왔으니 이따가 친구 사귀는 셈 치고 밥 한턱 쏘기로 했다.다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덥석 잘라버렸다.“그럼 일단 여기 한번 둘러볼까요? 마트 옆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던데 우리 그리로 가볼래요?”뭐? 공원?한지영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이미 다섯 시를 넘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밥부터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녀는 단순히 좋은 뜻으로 일깨워주었다. 여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식사 시간이 되면 주변에 많은 식당들이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할 테니까. 만약 공원을 다 돌고 오면 마침 손님이 많이 밀려올 때라 더 오래 기다려야 할 듯싶다.“아직 배가 안 고파서 얘기 좀 나누다가 다시 정하죠.”장규현이 말했다.‘그래, 그럼 얘기 좀 나누지 뭐.’한지영은 상대와 함께 공원으로 향했고 이어서 그녀는 광풍과 폭우를 방불케 하는 폭격탄을 경험했다.상대는 그녀에게 오만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의 나이부터 집안, 직장, 학력까지 그리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는 어디 다녔는지 등등 없는 게 없었고 나중엔 그녀의 초등학교 성적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한지영은 문득 감개무량해졌다. 요즘 맞선은 원래 이렇게 많은 걸 물어보는 추세인가?“지영 씨, 전에 연애는 해봤어요?”장규현이 또 물었다.“저기 죄송한데 규현 씨,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규현이 덥석 이어받았다.“지영 씨, 저는 남자를 너무 많이 만나본 여자는 별로예요. 제 여자친구는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지영 씨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앞으로 우리가 불필요한
“지영 씨, 이분은 누구?”장규현이 물었다.“말해봐, 내가 누군지.”백연신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다.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나란히 그녀에게 꽂혔다. 한지영은 따가운 시선에 수천 개의 바늘로 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한 명은 엄마가 강제로 부추긴 맞선남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에게 빚을 독촉하는 금방 사귄 남자친구이다. 두 사람 모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다만 이 두 사람을 비교할 때 배후에 엄마를 둔 맞선남보다 백연신이 더 감당이 안 됐다.그녀는 곧장 배시시 웃으며 장규현에게 말했다.“제가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규현 씨, 이쪽은 제 남자친구예요. 음, 성은 백씨예요.”장규현은 낯빛이 돌변했다.“네? 지영 씨 남자친구가 있었어요?”“네... 그렇죠...”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려 겨우 대답했다. 좀 전까지 장규현이 얼마나 황당한 질문을 했던 간에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장규현은 화나서 몸을 벌벌 떨며 얼굴까지 벌게졌다. 그는 한지영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선보러 나왔는데 어떻게 남자친구가 있어요? 진짜 너무하시네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이딴 식으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장규현은 삿대질하면서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려 했다.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백연신이 덥석 손 내밀어 상대를 가로막았다.“내가 이 여자 함부로 건드리라고 했던가?”백연신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왜? 싸우기라도 하게?”장규현이 윽박질렀다.“이딴 여자는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당신 몰래 나랑 선봤으면 내일은 또 누구랑 몰래 섹스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여자는 겉보기엔 참해 보여도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어. 남몰래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고 다닐지도 모른다고...”상대가 점점 도가 지나치자 한지영은 소매를 걷고 막 때리려고 했는데 곧장 청아한 귀싸대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손을 툭툭 터는 백연신을 멍하니 쳐다봤다.
한지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다리라니?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정작 그녀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는데 말이다!다만 백연신 앞이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비위를 맞춰주며 해명했다.“그게 실은... 이게 다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가 나 선 안 보면 인연 끊겠다는 거예요. 아까 사실 규현 씨한테 남자친구 있다고 말하려 했는데 자꾸 내 말 잘라서 못하고 있었어요.”사실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없다.“당신 어머님이 맞선 보라고 협박하셨다고?”백연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네, 그렇다니까요!”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맞선에 관하여 늘 공격적인 태세이고 그녀는 거의 당하기만 하는 캐릭터이니까.“그럼 가족들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거네?”백연신의 눈가에 아찔한 기운이 스쳤다.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엄마, 아빠한테 어떻게 말하라는 거지? 뭐라고 말을 해? 백연신의 신분만으로도 충분히 부모님을 충격에 빠뜨릴 텐데. 게다가 중요한 건... 그녀와 백연신은 결과도 없는, 단지 연인인 척하는 것뿐인데 뭐라고 말하란 걸까?“우리가 너무 갑작스럽게 사귀게 됐잖아요. 부모님께 불쑥 말씀드렸다가 놀라기라도 할까 봐 적절한 기회를 봐가서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어요.”한지영은 애써 변명했지만 사실 그녀는 부모님께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진짜 말씀드릴 거야?”백연신이 짙은 눈빛으로 물었다.“맹세할게요.”그녀는 얼른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약속을 어기면 천벌을 받을 듯이 정중하게 대답했다.“알았어.”백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한 번만 더 맞선 보면 그땐 죽을 줄 알아, 한지영.”“...”이것도 협박일까? 다만 지금 처지를 생각해보니 그녀는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한편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아무리 시늉만 하는 연애라 해도 여자친구로서 이건 너무 비겁하잖아. 남들은 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극진히 보살피고 정성껏 잘해준다는데 왜 난 도리어 협박이나 당하고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