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래?”강지혁이 걸음을 멈추자 임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야, 아무것도.”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담담하게 말했다.두 사람이 본채로 돌아갈 때 임유진이 물었다.“지금은 좀 어때?”“많이 좋아졌어.”강지혁이 대답했다.“너 그 위통이 지병이라 해도 시간 내서 병원에 찾아가 치료 잘해야 해.”임유진이 말했다.“어떤 병은 작은 병일 때 신경 안 쓰다가 나중에 큰 병을 만들잖아.”“그러니까 누나 지금 날 관심하는 거야?”강지혁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물었다.그녀는 숨 막히고 난감하여 위층에 올라가려 했지만 강지혁이 손을 번쩍 들더니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알았어, 누나 말 들을게. 나중에 시간 내서 의사한테 보이고 몸조리도 잘할게. 오늘 누나가 사준 약도 얌전히 잘 먹을게. 누나 말 잘 들으면 누나도 날 조금은 좋아해 줄 거지?”“뭐라고?”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 말을 잘 듣겠다니? 세상에, 말도 안 돼. 강지혁 같은 남자애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냐고?’강지혁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내가 말 잘 들으면 누나는 날 좋아해 줄 거야? 난 누나가 좋아해 주길 바라는데.”그랬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가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는데 언제부턴가 욕심이 점점 커지고 갖고 싶은 게 더 많아졌다!이렇게 옆에 묶어두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원했다. 오직 그만 바라보고 모든 신경이 온통 그이길 바랐다.“그래 줄 수 있어?”악마의 화려한 유혹 같은 그 목소리는 상대의 허락을 갈구했다.임유진은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으로 돼버렸다.그녀는 당장이라도 허락해줄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밤새 침대를 뒤척이며 머릿속에 온통 강지혁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강지혁이 정말... 내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강지혁이 어떻게 그런 말을 내
한지영은 드디어 통화를 마쳤다. 이때 임유진이 물었다.“어머님이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이토록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 게다가 무슨 처벌이든 다 받겠다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뭐긴 뭐겠어, 선보라고 다그치는 거지.”한지영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엄마가 심지어 이번엔 아주 완벽한 상대라 다른 아줌마 손에서 겨우 뺏어왔대. 나보고 일단 만나는 보래.”한지영은 엄마가 이해되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녀의 엄마는 마치 그녀가 이 두 해에 시집 못 가면 평생 노처녀로 살 거라고 단정한 듯싶다.“그럼 일단 만나봐. 기회라 셈 치면 되잖아.”임유진이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멈춰, 나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선까지 보면 이대로 폭발해버릴지도 몰라.”한지영은 엄마가 종일 선보라고 다그치는 것만 생각하면 피를 토할 충동이 생겨날 지경이다.“왜? 또 뭔 일 있구나!”임유진이 말했다.한지영은 절친을 힐긋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만약에 내가 지금 백연신 씨랑 사귀는 중이라면 넌 엄청 놀랄 거지?”임유진은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너 백연신 씨랑 사귄다고? 전까지만 해도 백연신 씨가 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했잖아!”“맞아. 복수하는 거야.”한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그럼에도...”“일단 사귀고 나서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그때 다시 나를 뻥 차버릴 거야.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어떤 건지 나 맛 좀 보라고 그런 거겠지. 드라마에서 다 그렇게 나오잖아!”한지영이 대답했다.하지만 백연신이 정말 이토록 유치한 방식으로 복수할까? 임유진은 심히 의심스러웠다. 강지혁은 전에 그녀에게 백연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생아 신분으로 백씨 일가를 물려받고 백씨 일가의 오너가 될 수 있겠는가.게다가 백씨 일가의 본처와 그녀의 두 아들도 백연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임유진이 물었다.“아니면 뭔데? 또 다른 가능성이 더
한지영은 아무래도 암흑한 면을 많이 겪지 못한 듯싶다. 반면 임유진은 교도소에서 수많은 암흑한 장면을 봐왔고 가끔은 심지어 눈물을 흘릴 기운조차 없었다.“풉!”한지영은 채 삼키지 못한 푸딩을 내뱉더니 곧장 티슈로 입을 닦고 그녀에게 말했다.“유진아, 농담을 해도 내가 음식 먹기 전에 했어야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어디 있어?!”“나 진지해.”임유진이 말했다.둘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한참 후 한지영이 머쓱하게 웃었다.“설사 연신 씨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 해도 우린 아예 어울리지 않아. 백씨 일가가 어떤 집안인지 잘 생각해봐. 내가 진짜 연신 씨랑 잘 되면 평생 재벌가의 치열한 사투를 겪을 거야. 내 전투력으론 가차 없이 짓밟히겠지.”그러니 이런 일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답이다. 한지영이 백연신에게 진 ‘빚’만 청산한다면 그녀도 곧 자유를 얻을 테니까.“이 얘긴 됐고, 너 얼마 전에 새로운 직장 구했다고 하더니 어때? 좀 할 만해?”한지영이 화제를 돌렸다.“나름대로. 작은 식당이라 월급이 80만 원밖에 안 돼. 뭐 그래도 사모님도 좋으시고 다른 직원들과도 잘 지내고 있어.”임유진이 대답했다.“다행이네. 그렇지만 너 지금 하는 일 오래 하는 거 아니다. 공부도 잘했겠다, 다른 자격증 같은 건 딸 생각 안 해봤어? 미리 따놓으면 나중에 직업을 바꿀 수도 있잖아.”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지금 프런트도 할 수 없어. 진짜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을 거야.”한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자면 결국 임유진이 전과 기록이 있어 이 사건을 뒤집는 것만이 가장 좋은 해결방안이다!“저번에 말한 그 증인은 내가 좀 더 지켜볼게. 개인 탐정이 말하길 시간이 좀 지나면 실질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대. 증거를 확보하거든 우리 함께 해성시로 가서 확실히 알아보자.”한지영이 말했다.“그래.”임유진은 자신에게 일이 생긴 그 순간부터 줄곧 함께해온 절친을 감격스럽게 바라봤다. 모두가 그녀를 범인으로 주목할 때
OK! 확인 완료.한지영은 앞으로 걸어갔다.“저기 혹시 장규현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한지영이에요.”“안녕하세요.”상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답했다.“실은 제가...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한지영은 그에게 사과부터 하고 싶었다. 오늘은 진심으로 선보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나왔으니 이따가 친구 사귀는 셈 치고 밥 한턱 쏘기로 했다.다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덥석 잘라버렸다.“그럼 일단 여기 한번 둘러볼까요? 마트 옆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던데 우리 그리로 가볼래요?”뭐? 공원?한지영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이미 다섯 시를 넘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밥부터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녀는 단순히 좋은 뜻으로 일깨워주었다. 여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식사 시간이 되면 주변에 많은 식당들이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할 테니까. 만약 공원을 다 돌고 오면 마침 손님이 많이 밀려올 때라 더 오래 기다려야 할 듯싶다.“아직 배가 안 고파서 얘기 좀 나누다가 다시 정하죠.”장규현이 말했다.‘그래, 그럼 얘기 좀 나누지 뭐.’한지영은 상대와 함께 공원으로 향했고 이어서 그녀는 광풍과 폭우를 방불케 하는 폭격탄을 경험했다.상대는 그녀에게 오만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의 나이부터 집안, 직장, 학력까지 그리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는 어디 다녔는지 등등 없는 게 없었고 나중엔 그녀의 초등학교 성적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한지영은 문득 감개무량해졌다. 요즘 맞선은 원래 이렇게 많은 걸 물어보는 추세인가?“지영 씨, 전에 연애는 해봤어요?”장규현이 또 물었다.“저기 죄송한데 규현 씨,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규현이 덥석 이어받았다.“지영 씨, 저는 남자를 너무 많이 만나본 여자는 별로예요. 제 여자친구는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지영 씨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앞으로 우리가 불필요한
“지영 씨, 이분은 누구?”장규현이 물었다.“말해봐, 내가 누군지.”백연신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다.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나란히 그녀에게 꽂혔다. 한지영은 따가운 시선에 수천 개의 바늘로 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한 명은 엄마가 강제로 부추긴 맞선남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에게 빚을 독촉하는 금방 사귄 남자친구이다. 두 사람 모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다만 이 두 사람을 비교할 때 배후에 엄마를 둔 맞선남보다 백연신이 더 감당이 안 됐다.그녀는 곧장 배시시 웃으며 장규현에게 말했다.“제가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규현 씨, 이쪽은 제 남자친구예요. 음, 성은 백씨예요.”장규현은 낯빛이 돌변했다.“네? 지영 씨 남자친구가 있었어요?”“네... 그렇죠...”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려 겨우 대답했다. 좀 전까지 장규현이 얼마나 황당한 질문을 했던 간에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장규현은 화나서 몸을 벌벌 떨며 얼굴까지 벌게졌다. 그는 한지영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선보러 나왔는데 어떻게 남자친구가 있어요? 진짜 너무하시네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이딴 식으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장규현은 삿대질하면서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려 했다.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백연신이 덥석 손 내밀어 상대를 가로막았다.“내가 이 여자 함부로 건드리라고 했던가?”백연신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왜? 싸우기라도 하게?”장규현이 윽박질렀다.“이딴 여자는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당신 몰래 나랑 선봤으면 내일은 또 누구랑 몰래 섹스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여자는 겉보기엔 참해 보여도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어. 남몰래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고 다닐지도 모른다고...”상대가 점점 도가 지나치자 한지영은 소매를 걷고 막 때리려고 했는데 곧장 청아한 귀싸대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손을 툭툭 터는 백연신을 멍하니 쳐다봤다.
한지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다리라니?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정작 그녀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는데 말이다!다만 백연신 앞이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비위를 맞춰주며 해명했다.“그게 실은... 이게 다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가 나 선 안 보면 인연 끊겠다는 거예요. 아까 사실 규현 씨한테 남자친구 있다고 말하려 했는데 자꾸 내 말 잘라서 못하고 있었어요.”사실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없다.“당신 어머님이 맞선 보라고 협박하셨다고?”백연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네, 그렇다니까요!”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맞선에 관하여 늘 공격적인 태세이고 그녀는 거의 당하기만 하는 캐릭터이니까.“그럼 가족들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거네?”백연신의 눈가에 아찔한 기운이 스쳤다.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엄마, 아빠한테 어떻게 말하라는 거지? 뭐라고 말을 해? 백연신의 신분만으로도 충분히 부모님을 충격에 빠뜨릴 텐데. 게다가 중요한 건... 그녀와 백연신은 결과도 없는, 단지 연인인 척하는 것뿐인데 뭐라고 말하란 걸까?“우리가 너무 갑작스럽게 사귀게 됐잖아요. 부모님께 불쑥 말씀드렸다가 놀라기라도 할까 봐 적절한 기회를 봐가서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어요.”한지영은 애써 변명했지만 사실 그녀는 부모님께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진짜 말씀드릴 거야?”백연신이 짙은 눈빛으로 물었다.“맹세할게요.”그녀는 얼른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약속을 어기면 천벌을 받을 듯이 정중하게 대답했다.“알았어.”백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한 번만 더 맞선 보면 그땐 죽을 줄 알아, 한지영.”“...”이것도 협박일까? 다만 지금 처지를 생각해보니 그녀는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한편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아무리 시늉만 하는 연애라 해도 여자친구로서 이건 너무 비겁하잖아. 남들은 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극진히 보살피고 정성껏 잘해준다는데 왜 난 도리어 협박이나 당하고 있냐
마치 식탐이 많은 아기 돼지 같았다.백연신은 이 일대에 어느 레스토랑이 음식을 맛있게 하는지 몰랐지만 한지영이 알아서 척척 자신이 원하는 맛집으로 끌고 갔다.“이 레스토랑은 특색 음식을 위주로 만들어서 다른 음식점에 없는 것들이 여기 다 있어요.”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한지영은 메뉴판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발적으로 음식 소개까지 나섰다. 한창 말하던 와중에 백연신의 음침한 눈빛을 발견했다.“미안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그녀가 말했다.“아니야, 괜찮아. 계속해. 나 듣고 있으니까.”백연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한지영은 콧등을 쓰다듬으며 삽시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저기, 연신 씨는 오늘 여기 왜 왔어요?”도저히 할 말이 없어 대충 한마디 내뱉었는데 입밖에 떨어지자마자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맞선을 본 일을 이제 겨우 넘겼는데 왜 또다시 화제를 먼저 끌어오는 걸까?아니나 다를까 백연신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안 오면 오늘은 그 남자랑 밥 먹을 생각이었어?”한지영은 말문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다.“아니요... 그럴 리가요.”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밥 한턱 쏘며 상대에게 미안함을 표하려 했으니 말이다.다행히 그녀는 밥을 사지 않았다. 좀 전에 맞선남이 맨 마지막에 했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되새기니 한지영은 문득 그에게 달려들어 때려놓지 못한 게 아쉬웠다.“당신 집에서 선 자리를 마련할 때 상대에 대한 요구가 뭐야?”백연신이 아무렇지 않은 듯 질문을 건넸다.“그냥 평범한 요구들이에요. 집 있고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키는 170 이상이고 뭐 이런 것들이죠.”사실 그녀는 집을 너무 고집하는 건 아니다. 셋방살이도 다 살림살이이니 나중에 결혼하고 부부가 함께 돈을 벌어 사면 되니까.하지만 엄마는 그녀가 지금 어리니 집 있는 남자를 요구할 수 있지만 이제 몇 해가 더 지나면 그럴 자본조차 없을 거라고 하신다.한지영은 엄마의 이론
“그냥...”그녀는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백연신을 빤히 쳐다봤다. 백연신은 현재 백씨 일가의 오너라 수중에 분명 넓은 인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임유진의 사건을 조사해줄 수만 있다면 한지영이 조사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유용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한지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마치 탐스러운 과일이라도 보는 것처럼 백연신을 바라봤다.“저기... 나도 알아요. 그땐 내가 연신 씨한테 미안한 짓을 저질렀어요. 뭐라 말해도 다 인정할게요. 앞으론 무조건 연신 씨 요구대로만 할게요. 다만... 우리가 사귀고 있을 때 나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어요?”한지영이 기대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무슨 일인데?”백연신은 살짝 의외였다.“무슨 부탁을 하려고?”그녀의 ‘앞잡이’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부탁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됐다.“그게 실은 내 친구 유진이가, 바로 그날 강지혁 씨랑 함께 나 찾으러 온 애 말이에요. 걔가 전에 잘못된 소송에 휘말려서 3년이나 감방 생활을 했거든요. 하지만 유진이는 정말 억울하게 당한 거예요. 단지 우리가 아직 소송을 뒤엎을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이죠. 요즘 어렵게 단서를 구했는데 연신 씨가 이 단서 따라 조사해보면 안 될까요? 사건을 뒤엎을만한 유리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 말이에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꺼낸 부탁이 임유진을 도와달라는 부탁일 줄이야.“그분은 강지혁 씨랑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왜 강지혁 씨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네가 이렇게 빙빙 돌려서 겨우 말을 꺼내는 거야?”“어휴, 유진이는 내가 연신 씨한테 부탁하는 거 아예 몰라요. 그리고 걔가 강지혁 씨를 찾지 않는 이유는...”한지영은 머뭇거렸다. 어쨌거나 친구의 사생활에 관련된 일이고 게다가 지금 강지혁과 임유진의 관계가 딱히 해명하기 어렵다 보니 결국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아무튼 유진이는 강지혁 씨한테 사건 뒤엎는 일 부탁하지 않을 거예요. 애초에 그 사건은 유진이가 음주운전으로 강지혁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