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은 아무래도 암흑한 면을 많이 겪지 못한 듯싶다. 반면 임유진은 교도소에서 수많은 암흑한 장면을 봐왔고 가끔은 심지어 눈물을 흘릴 기운조차 없었다.“풉!”한지영은 채 삼키지 못한 푸딩을 내뱉더니 곧장 티슈로 입을 닦고 그녀에게 말했다.“유진아, 농담을 해도 내가 음식 먹기 전에 했어야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어디 있어?!”“나 진지해.”임유진이 말했다.둘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한참 후 한지영이 머쓱하게 웃었다.“설사 연신 씨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 해도 우린 아예 어울리지 않아. 백씨 일가가 어떤 집안인지 잘 생각해봐. 내가 진짜 연신 씨랑 잘 되면 평생 재벌가의 치열한 사투를 겪을 거야. 내 전투력으론 가차 없이 짓밟히겠지.”그러니 이런 일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답이다. 한지영이 백연신에게 진 ‘빚’만 청산한다면 그녀도 곧 자유를 얻을 테니까.“이 얘긴 됐고, 너 얼마 전에 새로운 직장 구했다고 하더니 어때? 좀 할 만해?”한지영이 화제를 돌렸다.“나름대로. 작은 식당이라 월급이 80만 원밖에 안 돼. 뭐 그래도 사모님도 좋으시고 다른 직원들과도 잘 지내고 있어.”임유진이 대답했다.“다행이네. 그렇지만 너 지금 하는 일 오래 하는 거 아니다. 공부도 잘했겠다, 다른 자격증 같은 건 딸 생각 안 해봤어? 미리 따놓으면 나중에 직업을 바꿀 수도 있잖아.”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었다.“난 지금 프런트도 할 수 없어. 진짜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을 거야.”한지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자면 결국 임유진이 전과 기록이 있어 이 사건을 뒤집는 것만이 가장 좋은 해결방안이다!“저번에 말한 그 증인은 내가 좀 더 지켜볼게. 개인 탐정이 말하길 시간이 좀 지나면 실질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대. 증거를 확보하거든 우리 함께 해성시로 가서 확실히 알아보자.”한지영이 말했다.“그래.”임유진은 자신에게 일이 생긴 그 순간부터 줄곧 함께해온 절친을 감격스럽게 바라봤다. 모두가 그녀를 범인으로 주목할 때
OK! 확인 완료.한지영은 앞으로 걸어갔다.“저기 혹시 장규현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한지영이에요.”“안녕하세요.”상대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답했다.“실은 제가...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한지영은 그에게 사과부터 하고 싶었다. 오늘은 진심으로 선보기 위해 나온 게 아니라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나왔으니 이따가 친구 사귀는 셈 치고 밥 한턱 쏘기로 했다.다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덥석 잘라버렸다.“그럼 일단 여기 한번 둘러볼까요? 마트 옆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던데 우리 그리로 가볼래요?”뭐? 공원?한지영은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이미 다섯 시를 넘긴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밥부터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녀는 단순히 좋은 뜻으로 일깨워주었다. 여긴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식사 시간이 되면 주변에 많은 식당들이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할 테니까. 만약 공원을 다 돌고 오면 마침 손님이 많이 밀려올 때라 더 오래 기다려야 할 듯싶다.“아직 배가 안 고파서 얘기 좀 나누다가 다시 정하죠.”장규현이 말했다.‘그래, 그럼 얘기 좀 나누지 뭐.’한지영은 상대와 함께 공원으로 향했고 이어서 그녀는 광풍과 폭우를 방불케 하는 폭격탄을 경험했다.상대는 그녀에게 오만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의 나이부터 집안, 직장, 학력까지 그리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는 어디 다녔는지 등등 없는 게 없었고 나중엔 그녀의 초등학교 성적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한지영은 문득 감개무량해졌다. 요즘 맞선은 원래 이렇게 많은 걸 물어보는 추세인가?“지영 씨, 전에 연애는 해봤어요?”장규현이 또 물었다.“저기 죄송한데 규현 씨,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규현이 덥석 이어받았다.“지영 씨, 저는 남자를 너무 많이 만나본 여자는 별로예요. 제 여자친구는 경험이 풍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지영 씨가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앞으로 우리가 불필요한
“지영 씨, 이분은 누구?”장규현이 물었다.“말해봐, 내가 누군지.”백연신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다.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나란히 그녀에게 꽂혔다. 한지영은 따가운 시선에 수천 개의 바늘로 몸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한 명은 엄마가 강제로 부추긴 맞선남이고 다른 한 명은 그녀에게 빚을 독촉하는 금방 사귄 남자친구이다. 두 사람 모두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다만 이 두 사람을 비교할 때 배후에 엄마를 둔 맞선남보다 백연신이 더 감당이 안 됐다.그녀는 곧장 배시시 웃으며 장규현에게 말했다.“제가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규현 씨, 이쪽은 제 남자친구예요. 음, 성은 백씨예요.”장규현은 낯빛이 돌변했다.“네? 지영 씨 남자친구가 있었어요?”“네... 그렇죠...”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려 겨우 대답했다. 좀 전까지 장규현이 얼마나 황당한 질문을 했던 간에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장규현은 화나서 몸을 벌벌 떨며 얼굴까지 벌게졌다. 그는 한지영에게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선보러 나왔는데 어떻게 남자친구가 있어요? 진짜 너무하시네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이딴 식으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장규현은 삿대질하면서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려 했다.그녀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백연신이 덥석 손 내밀어 상대를 가로막았다.“내가 이 여자 함부로 건드리라고 했던가?”백연신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왜? 싸우기라도 하게?”장규현이 윽박질렀다.“이딴 여자는 당신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오늘 당신 몰래 나랑 선봤으면 내일은 또 누구랑 몰래 섹스할지도 모르니까. 이런 여자는 겉보기엔 참해 보여도 뒤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어. 남몰래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고 다닐지도 모른다고...”상대가 점점 도가 지나치자 한지영은 소매를 걷고 막 때리려고 했는데 곧장 청아한 귀싸대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손을 툭툭 터는 백연신을 멍하니 쳐다봤다.
한지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양다리라니?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지?! 정작 그녀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는데 말이다!다만 백연신 앞이라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비위를 맞춰주며 해명했다.“그게 실은... 이게 다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가 나 선 안 보면 인연 끊겠다는 거예요. 아까 사실 규현 씨한테 남자친구 있다고 말하려 했는데 자꾸 내 말 잘라서 못하고 있었어요.”사실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없다.“당신 어머님이 맞선 보라고 협박하셨다고?”백연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네, 그렇다니까요!”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맞선에 관하여 늘 공격적인 태세이고 그녀는 거의 당하기만 하는 캐릭터이니까.“그럼 가족들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거네?”백연신의 눈가에 아찔한 기운이 스쳤다.한지영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엄마, 아빠한테 어떻게 말하라는 거지? 뭐라고 말을 해? 백연신의 신분만으로도 충분히 부모님을 충격에 빠뜨릴 텐데. 게다가 중요한 건... 그녀와 백연신은 결과도 없는, 단지 연인인 척하는 것뿐인데 뭐라고 말하란 걸까?“우리가 너무 갑작스럽게 사귀게 됐잖아요. 부모님께 불쑥 말씀드렸다가 놀라기라도 할까 봐 적절한 기회를 봐가서 천천히 말씀드리려고 했어요.”한지영은 애써 변명했지만 사실 그녀는 부모님께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진짜 말씀드릴 거야?”백연신이 짙은 눈빛으로 물었다.“맹세할게요.”그녀는 얼른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약속을 어기면 천벌을 받을 듯이 정중하게 대답했다.“알았어.”백연신이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한 번만 더 맞선 보면 그땐 죽을 줄 알아, 한지영.”“...”이것도 협박일까? 다만 지금 처지를 생각해보니 그녀는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절대 그럴 일 없어요.”한편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아무리 시늉만 하는 연애라 해도 여자친구로서 이건 너무 비겁하잖아. 남들은 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극진히 보살피고 정성껏 잘해준다는데 왜 난 도리어 협박이나 당하고 있냐
마치 식탐이 많은 아기 돼지 같았다.백연신은 이 일대에 어느 레스토랑이 음식을 맛있게 하는지 몰랐지만 한지영이 알아서 척척 자신이 원하는 맛집으로 끌고 갔다.“이 레스토랑은 특색 음식을 위주로 만들어서 다른 음식점에 없는 것들이 여기 다 있어요.”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한지영은 메뉴판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주문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발적으로 음식 소개까지 나섰다. 한창 말하던 와중에 백연신의 음침한 눈빛을 발견했다.“미안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그녀가 말했다.“아니야, 괜찮아. 계속해. 나 듣고 있으니까.”백연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한지영은 콧등을 쓰다듬으며 삽시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저기, 연신 씨는 오늘 여기 왜 왔어요?”도저히 할 말이 없어 대충 한마디 내뱉었는데 입밖에 떨어지자마자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맞선을 본 일을 이제 겨우 넘겼는데 왜 또다시 화제를 먼저 끌어오는 걸까?아니나 다를까 백연신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내가 안 오면 오늘은 그 남자랑 밥 먹을 생각이었어?”한지영은 말문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다.“아니요... 그럴 리가요.”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밥 한턱 쏘며 상대에게 미안함을 표하려 했으니 말이다.다행히 그녀는 밥을 사지 않았다. 좀 전에 맞선남이 맨 마지막에 했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되새기니 한지영은 문득 그에게 달려들어 때려놓지 못한 게 아쉬웠다.“당신 집에서 선 자리를 마련할 때 상대에 대한 요구가 뭐야?”백연신이 아무렇지 않은 듯 질문을 건넸다.“그냥 평범한 요구들이에요. 집 있고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키는 170 이상이고 뭐 이런 것들이죠.”사실 그녀는 집을 너무 고집하는 건 아니다. 셋방살이도 다 살림살이이니 나중에 결혼하고 부부가 함께 돈을 벌어 사면 되니까.하지만 엄마는 그녀가 지금 어리니 집 있는 남자를 요구할 수 있지만 이제 몇 해가 더 지나면 그럴 자본조차 없을 거라고 하신다.한지영은 엄마의 이론
“그냥...”그녀는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백연신을 빤히 쳐다봤다. 백연신은 현재 백씨 일가의 오너라 수중에 분명 넓은 인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임유진의 사건을 조사해줄 수만 있다면 한지영이 조사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유용한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한지영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마치 탐스러운 과일이라도 보는 것처럼 백연신을 바라봤다.“저기... 나도 알아요. 그땐 내가 연신 씨한테 미안한 짓을 저질렀어요. 뭐라 말해도 다 인정할게요. 앞으론 무조건 연신 씨 요구대로만 할게요. 다만... 우리가 사귀고 있을 때 나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어요?”한지영이 기대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무슨 일인데?”백연신은 살짝 의외였다.“무슨 부탁을 하려고?”그녀의 ‘앞잡이’같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부탁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됐다.“그게 실은 내 친구 유진이가, 바로 그날 강지혁 씨랑 함께 나 찾으러 온 애 말이에요. 걔가 전에 잘못된 소송에 휘말려서 3년이나 감방 생활을 했거든요. 하지만 유진이는 정말 억울하게 당한 거예요. 단지 우리가 아직 소송을 뒤엎을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이죠. 요즘 어렵게 단서를 구했는데 연신 씨가 이 단서 따라 조사해보면 안 될까요? 사건을 뒤엎을만한 유리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 말이에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꺼낸 부탁이 임유진을 도와달라는 부탁일 줄이야.“그분은 강지혁 씨랑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왜 강지혁 씨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네가 이렇게 빙빙 돌려서 겨우 말을 꺼내는 거야?”“어휴, 유진이는 내가 연신 씨한테 부탁하는 거 아예 몰라요. 그리고 걔가 강지혁 씨를 찾지 않는 이유는...”한지영은 머뭇거렸다. 어쨌거나 친구의 사생활에 관련된 일이고 게다가 지금 강지혁과 임유진의 관계가 딱히 해명하기 어렵다 보니 결국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아무튼 유진이는 강지혁 씨한테 사건 뒤엎는 일 부탁하지 않을 거예요. 애초에 그 사건은 유진이가 음주운전으로 강지혁
그는 한지영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백연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그녀의 두 손까지 기쁨을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그는 고개 들어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순간 질투가 살짝 났다. 그녀는 지금 백연신 때문에 웃는 게 아니라 임유진을 위해 기뻐하고 있으니.아마도 그녀 마음속에 임유진이 그보다 더 중요한 듯싶다!...차 안에서 강현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함께 타고 있던 비서가 한 통의 전화를 받은 후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임유라 씨가 쥬얼리샵에서 보고 계신 쥬얼리 세트 가격이 40억이라고 합니다. 임유라 씨한테 이 쥬얼리 세트를 드려도 될까요?”가격이 무려 40억이다 보니 쥬얼리샵 사장님도 일부러 전화해서 여쭤본 것이다.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이미 그걸로 정했다면 주라고 해.”“네.”비서는 곧바로 쥬얼리샵 사장님께 똑같이 전달해드렸지만 속으론 임유라가 견식이 너무 얕다고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상류사회에 비집고 들어가고 싶어 안달인지, 게다가 요즘엔 쥬얼리샵과 명품 매장에 자주 드나들며 자신을 재벌가 출신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마음에 드는 물건은 바로 집어가며 강현수의 장부에 적어놓으라고 한다.이런 여자는 마음이 너무 조급해 지금 더 높이 올라설수록 앞으로 더 비참하게 추락할 뿐이다.한편 비서는 조금 의아했다. 대표님은 예전 같으면 여자친구가 이토록 조급해하고 과시하고 다닐 때 한동안 상대를 냉랭하게 대할 텐데 아직은 임유라한테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설마 아직도 신선감을 유지한 걸까? 비서는 속으로 추측했지만 임유라가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 여자 스스로 액세서리를 고르게 하지 않을 것이고 사랑하는 여인을 언급할 때 이토록 무덤덤한 말투일 리도 없으니까.“임유라 씨가 요즘 지출이 매우 큽니다. 현재까지 무려 60억 원이 넘어요.”비서는 강현수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임유라 씨는 아마
애초에 그는 임유라를 그 어린 소녀의 대역으로 여겼는데 그녀 입술이 강현수가 기억하는 그 소녀의 입술과 닮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뒤로 점차 의도가 변했다. 가끔 기분이 우울할 때 임유라한테서 임유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임유진이 그해 강현수를 구한 그 소녀가 아닌데도 말이다.임유진의 외모가 어릴 때 그 소녀와 닮아서 특별하게 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진다.하지만... 그 여자는 강지혁이 원하고 있으니 굳이 여자 때문에 강지혁과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녀도 강현수가 진정으로 찾으려는 그 사람이 아니니까.차가 도로를 건널 때 강현수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길거리를 향했다. 그는 환경미화원 작업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이 바로 이 길을 청소하는 일을 맡고 있다.하지만 차가 이 길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강현수의 짙은 눈동자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오늘 그녀는 휴무일까? 아니면 다른 일이 생겨서 출근하지 않은 걸까?강현수는 한 여자를 보지 못한 것 때문에 이토록 많은 추측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기억 속의 그 소녀 말고 언제 또 이렇게 한 여자를 위해 수많은 생각을 하였던가?차가 빨간 신호등에서 멈추고 강현수도 이제 막 시선을 거두려 할 때 옆에 불쑥 스쿠터 한 대가 세워졌는데 그 모습이 강현수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가녀린 몸매의 여자가 남성용 스쿠터를 타고 있었고 뒤에 있는 트렁크에 커다란 배달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상자 위에는 ‘윤이 식당’이라는 네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강현수는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스쿠터도 오른쪽에서 쌩하고 달려갔다.“저 배달 스쿠터 따라가!”강현수가 곧바로 기사에게 분부했다.“하지만 대표님, 우린 지금 일방통행이라 유턴할 수 없어요.”기사가 황급히 말했다. 설사 유턴하려 해도 앞에 차가 있어 그 차를 들이받지 않는 한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