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주문에 매번 너무 기뻐하는 탁유미의 모습에 임유진은 싫은 내색도 못 한 채 말없이 스쿠터에 음식을 실었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배달 주문이 많아져서 탁유미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윤이도 하루빨리 인공와우를 착용할 수 있게 된다.임유진은 이제 윤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져 왔다.어린 나이에 듣지 못하게 된 것도 서러운데 임유진이 며칠을 지켜본 결과 윤이는 아버지도 없는 것 같았다. 윤이의 성이 탁 씨라는 걸 들었을 때 아마 탁유미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것이라고 대충 예상은 했었지만 말이다.임유진이 스쿠터를 타고 GH 그룹에 도착해 로비에 들어서니 경비원들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익숙한 듯 음식을 받아들고는 그녀를 도와 엘리베이터 층수까지 눌러주었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허리를 숙여 그녀를 반기기도 했다. 이러한 대접은 아마 배달원이 임유진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임유진 역시 이 모든 것이 강지혁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임유진이 배달음식을 한가득 들고 걸어 들어오자 강지혁의 비서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질서정연하게 음식을 하나하나 가져가더니 예의를 갖춰 인사까지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상관인 임유진이 부하직원들을 위해 음식을 하사하는 것처럼 보였다.임유진은 도시락 2인분을 손에 든 채 천천히 강지혁이 있는 대표이사실로 걸어갔다. 두 번 노크하니 강지혁의 ‘들어와’ 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익숙한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놀란 눈을 하고 말았다. 강지혁만 있어야 할 공간에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강지혁의 책상 앞에 있었으니까. 그중에는 빌딩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포스터에 걸려있던 임원들의 얼굴도 있었다.임유진은 양손에 도시락을 든 채 임원들과 눈을 마주쳤다."왔어? 거기 앉아."임유진은 천천히 소파에 앉은 후 음식을 내려놓고 또다시 임원들과 눈을 마주쳤다."먼저 먹고 있어. 이것만 끝내고 금방 갈게."강지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임유
임유진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강지혁은 맞은 편에 앉아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임유진이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자의적으로 자신의 곁에 영원히 붙어 있을지.그는 이제 임유진과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고 아무 말 없이 그저 식사만 해도 마냥 좋았다.지금 돌이켜보면 강지혁은 아마 자신이 ‘혁이’였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강지혁을 ‘혁아’라고 불렀을 때 임유진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향해 웃어 줬고 다정하게 머리도 말려주며 언제나 입이 닳도록 ‘혁아’라고 불러줬었다.마치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강지혁은 항상 임유진이 다시 한번 그를 향해 ‘혁아’라고 불러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식사를 끝마친 임유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았다.‘그럼 내가 밥 먹고 있는 동안 계속 나만 보고 있었던 거야?’임유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얼른 자리에 일어섰다."나... 나 이제 가볼게."임유진은 허리를 숙인 채 도시락을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등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누나, 나 한 번만 ‘혁아’하고 불러줄래?"강지혁은 마치 애원하듯 그녀를 절절하게 쳐다봤다. 임유진은 그의 부탁에 몸이 굳어버렸고 목구멍이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갑자기 왜...""‘혁아’라고 불러줘. 난 지금 누나가 나를 ‘혁아’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어."임유진이 난감한 얼굴을 하며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자 강지혁이 얼굴을 더 가까이 붙여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딱 한 번만, 응?"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술이 서서히 자신의 입술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다급하게 외쳤다."혁아!"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입술이 딱하고 멈추더니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듣기 좋네."그녀를 잡고 있던
"고마워요."임유진이 책을 건네받으며 말했다."내가 더 고맙죠.""윤이가 듣지 못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유진 씨가 이렇게 수어까지 배우겠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탁유미가 미소를 지었다."윤이는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나를 좋아해 줘서 너무 다행이고요. 윤이가 좋은 인연이라서 이렇게 일도 할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들어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 결국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그러게요... 정말 좋은 인연인가 봐요.""그럼 언니, 저 먼저 가볼게요.""그래요. 잘 가요."임유진이 퇴근한 후 탁유미는 가게 문을 닫고 가게 뒤편의 작은 집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탁유미의 엄마가 잠든 윤이를 옆에서 토닥토닥해주고 있었다."윤이 잠들었어요?"탁유미는 윤이가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리를 낮춰 물었다."응, 막 잠들었어."답을 한 탁유미의 엄마는 이내 임유진에 대해 물었다."임유진 씨, 정말로 수어가 배우고 싶대?""네, 진심으로 배우고 싶은 것 같아요. 아까 수어책을 선물해 주니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탁유미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그래, 사람은 좋아 보이더라. 윤이한테도 잘하는 것 같고."탁유미 엄마는 요 며칠 임유진을 다시 보게 되었다."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도 뭔가 누명을 쓴 것 같더라고요."탁유미가 말을 이었다."전에 우연히 유진 씨가 친구랑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사건을 뒤집는다는 소리를 했어요. 누명이라도 썼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 아닐까요?""너처럼 기구한 운명인가 보다."탁유미 엄마는 안타까운 듯하면서도 화난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억울하게 누명을 쓰지 않았더라면 감옥까지 가지도 않았어. 심지어!""엄마, 그만 해요."탁유미가 고개를 저으며 진정하라는 듯 타일렀다."뭐가 어떻게 됐든, 나는 지금 윤이랑 엄마랑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병실은 조용했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임유진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강문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강문철이 그녀를 혐오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강문철의 옆에는 간병인 한 명과 임유진을 여기로 데려온 강문철의 비서가 서 있었다."내가 왜 아가씨를 여기로 불렀는지 아나?"오랜 정적을 깨고 강문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강지혁 때문이잖아요."병원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임유진은 긴장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지만, 강문철의 혐오가 담긴 눈빛을 본 후로는 이상하게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다.아마 이보다 더한 상황도 많이 겪어봤는데 고작 혐오감쯤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임유진의 대답에 강문철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알긴 아는구먼.""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거죠?"임유진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지혁이가 아가씨를 우리 집안까지 들일 줄은 몰랐네. 아가씨는 자신이 우리 집안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강문철이 차갑게 물었다.강문철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겁주려는 것임을 알아챈 임유진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한들 강문철이 믿어주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임유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그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비서를 보며 말했다."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 손자가 대체 이 아가씨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 것 같나?""글쎄요. 강 대표님 마음에 들만한 뭔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비서가 딱딱하게 대답하자 강문철이 혀를 차며 말했다."얼굴이 좀 예쁘장하게 생긴 것 빼고는 특별한 뭔가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그럼 저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되겠네. 우리 지혁이가 그 모습을 보고도 저 아가씨를 좋아하는지 보고 싶군.""알겠습니다."임유진이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강문철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의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겠다니, 강문철은 저녁 식사 메뉴를
애초에 그녀가 법조계를 택한 이유는 정의구현을 위해서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리조차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똑똑하네."비서가 피식 웃었다.임유진은 주먹을 꽉 쥔 채 남에게 휘둘리는 삶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금 느꼈다.비서가 든 칼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자 임유진도 서서히 몸이 떨려오며 두려워 났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숙이고는 빠르게 비서의 팔을 스쳐지나 병실 문 쪽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금세 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경호원들에 의해 제압을 당했다.비서가 천천히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난 또 아가씨가 대단한 강심장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요. 단지 도망가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인데, 그렇죠? 아가씨는 여기서 도망갈 수 없을 것입니다."임유진도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반항 한번 못 해본 채 억울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임유진은 경호원들에 의해 다시 한번 병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비서의 칼이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때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단숨에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눈 깜짝할 새에 비서의 손에 들린 칼을 뺏어 들고는 발을 올려 비서를 구석 쪽으로 차버렸다."할아버지,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강지혁이 뺏어 든 칼을 돌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강문철을 향해 말했다."이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강문철은 강지혁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너와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야.""그건 내가 정하는 거지, 할아버지가 정하는 게 아니죠."강지혁은 고개를 돌려 임유진에게 물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강지혁이 제때 나타나 준 덕에 임유진은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그때 강지혁에 의해 나가떨어진 비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걸 본 강지혁이 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차
강지혁은 매년 이날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씨 저택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곁을 지켰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강지혁 손에 이끌린 채 병원 밖에 나와보니 거기에는 검은색 세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후 임유진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아까는 악몽이 되려던 순간 강지혁이 나타나 솔직히 많이 놀랐다."무서워?"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물었다. 임유진은 아직도 손을 떨고 있었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운명이 남들 손에 쥐어진 채 어떠한 반항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았는데. 그녀는 아까 마치 제 죽음까지도 다른 사람의 한마디에 쉽게 결정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내가 방심했어. 노인네가 아무리 급했어도 그렇지... 하필 오늘 누나를 건드릴 줄은 몰랐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물었다."오늘이... 무슨 중요한 날이야?"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의 얼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예쁜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는 듯했다.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는 어느새 그녀를 억압하듯 감싸 안았다. 그에 임유진이 움찔하며 강지혁에게서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이 더 빠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고 그렇게 한참을 더 그녀를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아까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때 임유진은 마치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두 사람을 태운 차가 서서히 강씨 저택 앞에 멈춰 섰고 임유진도 강지혁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노인네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 이제는 누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겁먹지 않아도 돼."역시 강문철의 핏줄이라 그런가? 강지혁은 오는 길에 강문철이 굳이 임유진을 데려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눈치챘다."알겠어."강지혁은 임유진을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
그럼 강지혁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봤지만, 거기에도 강지혁은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대체 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까지 강지혁을 찾고 있는지 임유진 자신도 몰랐다.강씨 저택은 강지혁과 임유진이 있는 본채를 제외하고 사용인들이 묵는 방, 정원, 그리고 연못에 정자까지 있었다.이 저택에 살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태껏 임유진은 집을 둘러본다거나 하지 않았던지라 저택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있었다.시간은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저 멀리 길가에서 은은히 비추는 가로등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다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쌀쌀한 바람에 임유진은 옷을 여미며 자기 자신에게 대체 왜 이 시간에 밖에까지 나온 건지 물었다. 대체 강지혁을 왜 찾고 있는 거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여기가 강지혁 집인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고민 끝에 오늘 강지혁이 구해주러 와서 자신이 지금 이러는 거라고 자기 멋대로 합리화를 했다.그때 본채 옆 멀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빛 한 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고 이에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작은 별채가 있었다.임유진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는 한 남성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잘생긴 얼굴에 따듯함까지 보이는 남성은 강지혁과 많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눈을 한 강지혁과는 달리 굳이 말하자면 강문철의 눈과 더 닮아있었다.임유진은 금세 사진 속의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분일 줄은 몰랐지만.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그의 엄마가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동요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유사한 사건들을 변호사로 있었을 때 많이 접해봤기 때문에.다만 이토록 다정한 얼굴을 한 남자를 대체
임유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별 건 아니고, 아까 나 데려다주고 나서 네가 다른 데로 가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그냥... 그냥 잠도 안 온 김에 이리저리 둘러본 거야. 별일 없어 보이니 난 그만 갈게..."임유진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등을 보이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래서, 내가 걱정됐다는 거지?"임유진은 강지혁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온몸이 굳어버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강지혁을 걱정했다고?’임유진은 오늘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 그를 강지혁이 아닌 ‘혁이’로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걱정까지 했던 걸까?그때 임유진을 안고 있던 강지혁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 같더니 이내 신음을 내며 그녀를 안고 있던 팔도 점점 풀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뒤를 돌아보자 강지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는 한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전에도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너 설마 또 위가 아파?""기억하고 있었네."강지혁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강지혁의 약해진 모습에 당황한 임유진이 주위를 둘러보다 옆방 안에 소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그를 소파까지 부축해주었다."갑자기 아픈 거야?"임유진이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강지혁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사실은 아까 전부터 살짝 아프기 시작했는데 금방 괜찮을 줄 알고 가만히 내버려 뒀었거든. 근데 누나, 나 아픈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내가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나 봐?"임유진은 그의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약은 있어?""나 약 먹는 거 싫어해.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약 먹는 걸 싫어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때 약 사줬을 때는...""그건 누나가 사준 거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이 사준 약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때는 주위
“그럼 다른 경호원들을 물려줘. 전처럼 채린 씨만 곁에 있게 해줘. 솔직히 매번 내 뒤에 여러 명이 따라다니는 거, 나 불편해.”임유진은 그 상황이 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 돼.”강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왜? 왜 안 되는데?”“뭐가 됐든 안 돼. 넌 지금 경호가 필요한 몸이야. 그러니까 사람 물리는 건 안 돼.”강지혁은 김재호 일도 그렇고 진세령이 탈옥한 일도 그렇고 아직 임유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불안의 근원 중 어떤 것은 단지 그의 의심과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출산 예정일까지는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그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임유진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러는 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믿음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어줄래?”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강지혁은 마치 임유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뭐?”갑작스러운 요구에 임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나한테 키스하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입을 맞추면 그때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줄게.”강지혁은 단지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안정감을 원했다.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확신할만한 안정감을 원했다.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기만 하는데 임유진은 꼭 아닌 것 같아서,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실제로 임유진이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미 생겨버린 아이들과 병원에 누워있는 한지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임유진은 어쩔 수 없게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마음속으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아무
강지혁은 샤워를 마친 후 가운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부터 떨어져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얼굴 전체를 뒤덮은 물방울들은 꼭 그의 눈물 같기도 했다.“할아버지가 얘기한 그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예요. 유진이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고 나도 아버지처럼 목숨을 끊을 생각 없어요. 나와 유진이는 곧 태어날 아이들과 함께 평생 잘 살 거예요.”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속에는 견고한 다짐이 섞여 있었다....그 뒤로 며칠간 임유진과 강지혁은 거의 저택에만 있다시피 했다.임유진은 간혹 심심하거나 할 때 한지영과 탁유미에게 전화를 해 무료함을 달랬다.한지영과 탁유미는 임유진과 강지혁의 사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 잘 됐다며 기뻐해 주었다.탁유미는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바가 없지만 뭐가 됐든 잘 해결됐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그리고 다 알고 있는 한지영은 다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내려놓기로 한 거야? 괜찮겠어?”그녀는 임유진의 당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 임유진이 감방에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것과 괴롭힘에 지쳐 하마터면 자살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기에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응. 한번 노력해보려고. 진심이야.”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그럼 다행이고. 참, 엄마랑 아빠가 명절 겸 너희 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데 시간 괜찮아? 나 구해줘서 고맙다고 꼭 한번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시대.”“고마운 거로 따지면 내가 더 고맙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테니까.”임유진은 한지영에게만큼은 뭘 줘도 아깝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지영의 집으로 가는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방금 지영이랑 통화했는데 내일 우리더러 자기
다만 전과 다른 게 있다면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임유진이 씻고 나왔을 때 강지혁은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나는 소파에서 잘게. 내가 침대에서 자야 네가 편할 거야.”강지혁은 그녀가 그로 인해 또다시 토를 하고 반응을 일으킬까 봐 자진해서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다음날.임유진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윗몸을 일으켰다. 앞을 바라보니 강지혁은 소파에 누운 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이상한 일이었다.강지혁은 단 한 번도 그녀보다 늦게 눈을 뜬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아침 9시였다.‘아직도 잔다고?’임유진은 의문을 품으며 조용히 강지혁의 잠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어제도 느꼈지만 그는 확실히 살이 빠져 있었다. 잠자는 모습에서도 살이 빠진 게 확 티가 날 정도였다.게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그의 눈 밑에는 옅은 다크서클도 있었다.그때 강지혁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평온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두려움에 잠식되고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강지혁의 입이 살짝 열리며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다.“뭐가 그럴 리 없는데?”임유진은 그의 상태에 조금 당황한 듯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와 살이 맞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또다시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내가 내려놓겠다잖아. 과거 같은 거 이제는 잊어보겠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런 반응이냐고!’임유진은 몸이 점점 차가워지자 결국 손을 거두어들이고 큰소리로 강지혁을 향해 외쳤다.“혁아, 혁아! 일어나봐!”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강지혁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절망으로 가득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대체 꿈에서 뭘 봤길래 이래?”임유진이 호흡을 가다듬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잖아. 그러니 이제는 내려놓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지영이 말대로 이제는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려고.”임유진은 심호흡을 한번 내쉰 후 자신 안의 갈등과 모순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드디어 요 며칠 줄곧 고민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혁아, 널 용서할게. 그리고 널 떠나지 않을게. 그때 너한테 했던 약속, 지킬게.”그녀는 결정을 내렸다.이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임유진의 몸은 마치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라는 듯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어쩌면 임유진은 그간 그녀를 괴롭혔던 것들을 전부 다 내려놔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강지혁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를 놓쳐버린다면 평생 후회와 지금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떨리는 입술을 서서히 벌리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용서해줄 거야? 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응, 영원히 네 곁에 있을게.”강지혁의 어머니도 그를 떠났고 강지혁의 아버지도 그를 떠났고 이제는 강지혁의 할아버지마저 그를 떠났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임유진은 평생 강지혁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강지혁은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유진아...”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임유진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다 용서할 테니까 울지 마...”“응. 안 울게. 나 안 울어...”강지혁은 울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애써 눈물을 참아보며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는 강지혁의 모습은 정말 흔치 않은데 오늘 그는 그녀의 앞에서 두 번이나 펑펑 울어댔다.일전 병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를 이렇게 울보로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
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마치 이제야 생기가 돌아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입꼬리를 아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렸다.“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정말...?”강지혁은 감격에 찬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글썽였다.임유진은 생각보다 더 큰 그의 반응에 순간 심장이 움찔거렸다. 고작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그에게는 눈물까지 글썽일 일이었나?강지혁이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는 일이다.그리고 그녀 역시 강지혁 못지않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식으면 맛없어.”“응, 그럴게. 오늘이 우리가 함께 보내는 첫 설날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많을 거야.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아?”강지혁은 조금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질문을 빙자한 자신의 바람을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응. 앞으로는 매년 이렇게 함께 있을 거야.”그녀의 이 한마디로 그의 바람과 기대가 완전히 충족되었다.그때 강지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기쁜 듯 여전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그 웃음이 꼭 따뜻한 햇볕과도 같아 임유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우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찌릿하며 마음이 아파 났다....강지혁이 갑자기 울어버리는 바람에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이따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을 볼 건데 같이 볼래?”임유진이 물었다.그러고 보면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 프로를 안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어릴 때까지만 해도 외할머니 품에 안겨 늘 함께 예능 프로를 봤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가게 된 뒤로는 설날 특집으로 나오는 예능 프로든 설 특선 영화든 하나도 관심이 없어졌다.설날만 되면 티비 시청 권한은 언제나 임유라에게 있었으니까. 임유진은 진정한 가족 같은 임정호와 방미령, 그리고 임유라 사이
“언제부터 자고 있었습니까?”강지혁이 물었다.“주무신 지 1시간 정도 됐을 거예요.”이모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에게 곁을 양보했다.강지혁은 허리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그는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가 됐을 때만 그녀를 만질 수 있다. 또다시 그녀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토해서는 안 되니까.이모님은 강지혁의 행동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강지혁이 그 대신으로 고용한 사람이라 그간 강지혁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 사모님이지 임유진을 그저 엉겁결에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해 이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꿰찬 별 볼 일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강지혁이 그녀를 사랑할 거라고는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깨지는 유리구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임유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또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이 행동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었다.그때 임유진의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몽롱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혁아...”강지혁은 그 말에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아이처럼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였다.“미안, 내가 깨웠지? 졸리면 더 자도 돼.”“안 잘래. 지금 자면 저녁에 잘 수 없을 테니까.”임유진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강지혁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뻗은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더니 이모님더러 부축하라고 했다.“세수하고 나와. 그동안 식탁 세팅하고 있을 테니까.”“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배가 커진 탓에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세수를 다 하고 식탁 쪽으로 걸어가자 강지혁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은 채 고개를
임유진이 먼저 식사 제안을 해왔다는 건 그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 틀림없었다.똑똑.그때 누군가가 조금은 조급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허락이 떨어지자 고이준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진세령이 탈옥했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경찰들 말로는 오늘 새벽 3시경에 탈옥했다고 합니다. CCTV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고요. 그래서 현재 상황으로는 누가 진세령을 도와준 건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한번 훑어 내려갔다.진씨 가문일까? 아니면 소씨 가문?진세령은 연예인이었으니까 뒷배가 있는 사생팬이 그녀를 꺼내줬을 수도 있다.만약 그것도 아니면...“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인간들한테 사람을 붙여.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그리고 최대한 빨리 김재호를 찾아내!”강지혁은 김재호가 꼭 시한폭탄 같았다. 그래서 그 시한폭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전에 하루빨리 찾고 싶었다.김재호의 실종이 정말 강문철의 지시와 연관이 있는 건지, 만약 있다고 하면 그 지시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김재호를 찾아내야만 알 수 있다....드디어 설 전날이 되고 임유진은 드디어 강지혁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강지혁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회색 스리피스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조금 핼쑥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또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였다.하지만 다 좋은데 두르고 있는 목도리와 장갑은 지금 그의 패션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임유진은 그가 하고 있는 목도리와 털장갑이 1년 전 자신이 그를 위해 뜬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당시 그녀는 오래된 스웨터의 올을 다 풀고 그것으로 그의 목도리와 장갑을 만들었다.“왜? 왜 그렇게 빤히 봐?”강지혁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아... 그냥 음.. 네가 그 목도리랑 장갑을
임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미안해. 미안해 지영아. 울지 마...”“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한지영은 코를 한번 훌쩍이더니 이내 씩씩하게 말을 내뱉었다.“유진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앞만 보며 나아갔으면 좋겠어. 진심이야.”임유진은 그녀의 웃음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그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 텐데도 한지영은 힘든 티 한번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주었다.“응, 행복해질게. 꼭 그럴게. 그리고 너도 하루빨리 나아서 원래의 한지영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낳으면 맨날 너한테 봐달라고 부탁할 테니까.”임유진의 진심 반 장난 반이 담긴 말에 한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임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백연신은 이제 잊겠다고,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보내주겠다고, 그와의 기억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겨주겠다고 말이다....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이제 이틀 뒤면 설날을 맞이하게 된다.임유진은 부드럽게 복부를 쓸어내리며 벌써 강지혁을 못 본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요 며칠 그녀는 줄곧 한지영과의 대화를 되뇌었다. 한지영은 그녀에게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말고 이제는 앞만 보며 살라고 했다.고통이라...만약 누군가가 강지혁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다’였다.강지혁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 잔인한 진실이 눈앞에 놓였을 때 그렇게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렇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감옥에 가는 걸 차가운 눈길로 그저 지켜보기만 한 남자를 그녀는 아직도 깊이 사랑하고 있다.임유진은 그때 강지혁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그녀는 절대 그의 어머니처럼 그의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휴대폰을 뒤척이며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그녀의 배
“대표님은 그저 사모님을 더 잘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고이준이 답했다.“보호요? 감시가 아니라?”임유진의 되물음에 고이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강지혁은 일전 그에게 김재호의 일에 관해서는 임유진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다. 곧 출산을 앞둔 사람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건 싫다면서 말이다.임유진은 고이준의 침묵에 더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볼록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아까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에 도착해보니 상당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한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치료에 잘 협조한 덕에 한지영은 이제 일상생활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퇴원하는 날도 이제는 멀지 않아졌다.“유진아, 왔어?”한지영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했다.“빨리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너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임산부란 말이야!”임유진은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몸은 좀 어때? 선생님은 뭐라셔?”“다음 주면 퇴원할 수 있대.”한지영이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더니 허전한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그녀는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전부 다 잘라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처럼 머리가 다 잘려있었다.퇴원하고 나면 아마 가장 먼저 가발을 사야 할 것이다.“어제 유미 언니가 나 보러 왔어. 언니는 이미 퇴원했대.”“너랑 언니랑 두 사람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언니는 착한 일을 한 보답을 받은 거고 나는 정말 운이 좋았지.”한지영은 새삼 자신이 살아난 것이 놀라웠다.“참, 그러고 보니 뉴스 봤어. 진애령을 죽인 게 진세령이었다면서?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는 줄곧 허재명이 진범인 줄 알고 있었잖아. 진세령도 참 대단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혁까지 속였지?”“속이지 못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응? 그게 무슨 말이야? 속이지 못했다니?”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