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은 조용했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임유진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강문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강문철이 그녀를 혐오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강문철의 옆에는 간병인 한 명과 임유진을 여기로 데려온 강문철의 비서가 서 있었다."내가 왜 아가씨를 여기로 불렀는지 아나?"오랜 정적을 깨고 강문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강지혁 때문이잖아요."병원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임유진은 긴장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지만, 강문철의 혐오가 담긴 눈빛을 본 후로는 이상하게 다시 평정심을 되찾게 되었다.아마 이보다 더한 상황도 많이 겪어봤는데 고작 혐오감쯤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임유진의 대답에 강문철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알긴 아는구먼.""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거죠?"임유진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지혁이가 아가씨를 우리 집안까지 들일 줄은 몰랐네. 아가씨는 자신이 우리 집안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강문철이 차갑게 물었다.강문철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겁주려는 것임을 알아챈 임유진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한들 강문철이 믿어주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임유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그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비서를 보며 말했다."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내 손자가 대체 이 아가씨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 것 같나?""글쎄요. 강 대표님 마음에 들만한 뭔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비서가 딱딱하게 대답하자 강문철이 혀를 차며 말했다."얼굴이 좀 예쁘장하게 생긴 것 빼고는 특별한 뭔가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그럼 저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면 되겠네. 우리 지혁이가 그 모습을 보고도 저 아가씨를 좋아하는지 보고 싶군.""알겠습니다."임유진이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강문철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의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리겠다니, 강문철은 저녁 식사 메뉴를
애초에 그녀가 법조계를 택한 이유는 정의구현을 위해서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리조차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똑똑하네."비서가 피식 웃었다.임유진은 주먹을 꽉 쥔 채 남에게 휘둘리는 삶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금 느꼈다.비서가 든 칼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자 임유진도 서서히 몸이 떨려오며 두려워 났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숙이고는 빠르게 비서의 팔을 스쳐지나 병실 문 쪽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그녀는 금세 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경호원들에 의해 제압을 당했다.비서가 천천히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난 또 아가씨가 대단한 강심장이라도 되는 줄 알았네요. 단지 도망가기 위한 수작이었을 뿐인데, 그렇죠? 아가씨는 여기서 도망갈 수 없을 것입니다."임유진도 자신이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반항 한번 못 해본 채 억울하게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임유진은 경호원들에 의해 다시 한번 병실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비서의 칼이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때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단숨에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눈 깜짝할 새에 비서의 손에 들린 칼을 뺏어 들고는 발을 올려 비서를 구석 쪽으로 차버렸다."할아버지,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강지혁이 뺏어 든 칼을 돌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강문철을 향해 말했다."이 여자 건드리지 말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강문철은 강지혁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너와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야.""그건 내가 정하는 거지, 할아버지가 정하는 게 아니죠."강지혁은 고개를 돌려 임유진에게 물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강지혁이 제때 나타나 준 덕에 임유진은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그때 강지혁에 의해 나가떨어진 비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걸 본 강지혁이 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차
강지혁은 매년 이날 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씨 저택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 곁을 지켰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강지혁 손에 이끌린 채 병원 밖에 나와보니 거기에는 검은색 세단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후 임유진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아까는 악몽이 되려던 순간 강지혁이 나타나 솔직히 많이 놀랐다."무서워?"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물었다. 임유진은 아직도 손을 떨고 있었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운명이 남들 손에 쥐어진 채 어떠한 반항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았는데. 그녀는 아까 마치 제 죽음까지도 다른 사람의 한마디에 쉽게 결정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내가 방심했어. 노인네가 아무리 급했어도 그렇지... 하필 오늘 누나를 건드릴 줄은 몰랐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물었다."오늘이... 무슨 중요한 날이야?"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의 얼굴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예쁜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마치 그녀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는 듯했다.숨이 막힐 것 같은 분위기는 어느새 그녀를 억압하듯 감싸 안았다. 그에 임유진이 움찔하며 강지혁에게서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강지혁이 더 빠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고 그렇게 한참을 더 그녀를 쳐다보다 천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아까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을 때 임유진은 마치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두 사람을 태운 차가 서서히 강씨 저택 앞에 멈춰 섰고 임유진도 강지혁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늦었으니까 일찍 쉬어. 노인네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 이제는 누나를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겁먹지 않아도 돼."역시 강문철의 핏줄이라 그런가? 강지혁은 오는 길에 강문철이 굳이 임유진을 데려와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눈치챘다."알겠어."강지혁은 임유진을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
그럼 강지혁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봤지만, 거기에도 강지혁은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대체 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까지 강지혁을 찾고 있는지 임유진 자신도 몰랐다.강씨 저택은 강지혁과 임유진이 있는 본채를 제외하고 사용인들이 묵는 방, 정원, 그리고 연못에 정자까지 있었다.이 저택에 살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태껏 임유진은 집을 둘러본다거나 하지 않았던지라 저택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있었다.시간은 이미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저 멀리 길가에서 은은히 비추는 가로등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다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쌀쌀한 바람에 임유진은 옷을 여미며 자기 자신에게 대체 왜 이 시간에 밖에까지 나온 건지 물었다. 대체 강지혁을 왜 찾고 있는 거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여기가 강지혁 집인데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고민 끝에 오늘 강지혁이 구해주러 와서 자신이 지금 이러는 거라고 자기 멋대로 합리화를 했다.그때 본채 옆 멀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빛 한 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고 이에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작은 별채가 있었다.임유진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꽤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고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는 한 남성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잘생긴 얼굴에 따듯함까지 보이는 남성은 강지혁과 많이 닮아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눈을 한 강지혁과는 달리 굳이 말하자면 강문철의 눈과 더 닮아있었다.임유진은 금세 사진 속의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분일 줄은 몰랐지만.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그의 엄마가 그와 그의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동요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유사한 사건들을 변호사로 있었을 때 많이 접해봤기 때문에.다만 이토록 다정한 얼굴을 한 남자를 대체
임유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별 건 아니고, 아까 나 데려다주고 나서 네가 다른 데로 가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그냥... 그냥 잠도 안 온 김에 이리저리 둘러본 거야. 별일 없어 보이니 난 그만 갈게..."임유진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등을 보이자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래서, 내가 걱정됐다는 거지?"임유진은 강지혁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온몸이 굳어버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강지혁을 걱정했다고?’임유진은 오늘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 그를 강지혁이 아닌 ‘혁이’로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걱정까지 했던 걸까?그때 임유진을 안고 있던 강지혁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 같더니 이내 신음을 내며 그녀를 안고 있던 팔도 점점 풀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뒤를 돌아보자 강지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는 한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움켜쥐고 있었다.전에도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너 설마 또 위가 아파?""기억하고 있었네."강지혁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강지혁의 약해진 모습에 당황한 임유진이 주위를 둘러보다 옆방 안에 소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그를 소파까지 부축해주었다."갑자기 아픈 거야?"임유진이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강지혁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사실은 아까 전부터 살짝 아프기 시작했는데 금방 괜찮을 줄 알고 가만히 내버려 뒀었거든. 근데 누나, 나 아픈 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내가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나 봐?"임유진은 그의 말에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약은 있어?""나 약 먹는 거 싫어해.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약 먹는 걸 싫어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때 약 사줬을 때는...""그건 누나가 사준 거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이 사준 약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하지만 그때는 주위
"약 먹어야지. 여기서 더 아프면 어떡하려고."임유진은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핸드폰으로 근처 비대면 진료 약 배달이 가능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제일 가까운 약국까지도 차로 20분은 걸리지만, 퀵 서비스를 이용하면 경호원이 갔다 오는 것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다.생각을 마친 임유진은 일전 강지혁이 먹었던 약을 사 오도록 주문을 넣었다.강지혁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작게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질끈 감은 눈은 속눈썹 때문에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S 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남자가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강지혁의 모습에 임유진은 마음이 저릿해 났다. 자신이 제일 걱정하지 말아야 할 남자가 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이 방을 다시 자세히 둘러보자, 이 별채는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곳처럼 스산하기 그지없었다.지금 두 사람이 있는 방에도 역시 처음 별채로 들어왔을 때 봤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있었고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강선우’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상 위에는 향도 피워져 있었고 위패도 놓여져 있었다.강지혁의 아버지는 참으로 자신의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졌다. 강선우 사진 옆에는 어떤 여성의 사진도 있었다. 검은색 웨이브 머리를 한 여성은 매우 아름다웠고 눈동자가 매우 매혹적인 것이 꼭 강지혁의 눈동자와 닮아있었다.‘그럼 이분이... 강지혁의 어머니인 건가?’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임유진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리다 마침 탁자 위에 있는 정수기를 발견하고 얼른 미지근한 물을 받아와 강지혁에게 건네주었다."자, 이거 마시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이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임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내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임유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일으켜 컵을 강지혁의 입가에 갖다 댔다. 천천히 그녀가 준 물을 다 마신 강지혁은 다시 눈을 감으며 소파에 기댔다."난 이대로 좀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약 가지고 올게."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이 한마디를 남긴 채 부랴부랴 별채를 나왔다.강지혁은 소파에 누워서 임유진이 방금 한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늦은 시간이었고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똑같은 말을 남긴 채 약을 사러 떠났다.강지혁은 그 말에 얌전히 그녀를 기다렸고 지금도 역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임유진은 황급히 저택 대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길가의 가로등 덕에 지금, 이 시각에 부잣집에 약을 배달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배달원의 황당한 얼굴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약 시키셨죠? 여기요.""네, 맞아요. 감사합니다."임유진은 배달원의 손에서 약을 받아든 후 얼른 몸을 돌려 다시 별채로 향했다.배달원은 그녀가 들어간 대저택을 바라보며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이때 강씨 저택 보안실에서 CCTV를 보고 있던 경호원들도 임유진이 별채에서 황급히 나와 물건을 가지고 다시 별채로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했다."허, 저기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고?""그리고 저건 배달음식인 건가...?"내용물이 봉투에 담겨 있던 탓에 그것이 약인 것까지는 몰랐다."대표님이 내쫓지 않는 거로도 모자라... 같이 야식이라도 드시려는 건가?"경호원들은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은 임유진이라는 여자가 강씨 저택에 발을 들인 만큼 강지혁이 그녀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저 별채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강씨 저택에서 몇십 년을 일해 온 사용인이 청소를 위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저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강지혁과 강문철뿐이었다.경호원들은 아까 임유진이 모르고 별채에 발을 들였을 때 금방 강지혁에 의해 내쫓겨질 줄 알았다. 그리고 아마 날이 밝는 대로 이대로 영영 강씨 저택에 발도 못들이게 될 줄 알았다. 그렇게 계속 CCTV를 보다가 여자가 급하게 나오는 모습에 드디어 쫓겨났나 싶었지만 이게 웬걸, 이제는 배달음식으로 보이는 물
강지혁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임유진을 바라보니 그녀는 그때처럼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강지혁을 아무리 무서워하고 미워한들 그가 아픈 것은 못 보겠는 사람처럼 임유진은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강지혁은 그 생각에 아픈 것도 조금은 나아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러고는 예전처럼 순순히 임유진이 건네주는 약과 물을 받아먹고 다시 누웠다.극심한 고통에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었다는 생각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자꾸 나 그렇게 보면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란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다급하게 변명했다."난! 난 그냥 네 입술이 피가 났길래 본 것뿐이야. 다른 뜻은 없어.""다른 뜻이 있대도 상관없어. 누나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키스해도 돼."강지혁은 여전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이마에는 땀이 범벅이었지만, 아까보다는 편해진 듯 보였다.임유진은 은근슬쩍 플러팅하는 강지혁의 말에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강선우와 강지혁 어머니의 사진이 있었다."아버지... 보러 온 거야?""응."강지혁은 짧게 대답한 후 사진이 걸려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유진은 살짝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강선우의 사진이 놓인 앞쪽으로 자리했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강선우를 향해 예의를 갖춰 절을 했다.한 번, 두 번, 강지혁은 자신의 아버지한테 절을 올리고 있는 임유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어도 그녀가 지금 충분히 예의를 갖춘 채 절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멀리서도 느껴졌다.강지혁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선우를 바라보았다. 강지혁의 눈은 마치 이 여자가 바로 아버지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이 여자를 평생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자신은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