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임유진이군요.”백연신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날 길에서 우연히 한지영을 만난 그날부터 그는 한지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알아본 자료에는 당연히 임유진도 포함되어 있었다.임유진은 한지영의 친구였다. 그때도 한지영은 임유진의 재판을 도와주기 위해 갑자기 제일 빠른 비행기로 귀국했고 온 힘을 다해 임유진에게 변호사와 각종 증거까지 찾아주었다.다시 말하면 애초에 한지영이 그렇게 빨리 백연신을 떠난 것도 임유진을 위해서였다.여기까지 생각하니 백연신은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졌다.임유진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백연신은 아마 이 사람을 연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네, 맞아요.”임유진이 머리를 살짝 쳐들며 말했다.“임유진 씨, 당신은 나와 한지영 사이에 끼어들 자격이 없어요.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아요. 여자라고 안 봐주니까.”백연신이 차갑게 말했다.한지영이 발끈했다.“백연신 씨, 당신과 나 사이에 친구까지 끌어들이지 마요.”한지영이 조급해할수록 백연신은 눈앞의 이 장면이 점점 눈에 거슬렸다.이때 강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과 한지영 사이가 어떻든 관심 없는데, 임유진 건드리면 못 참아요.”백연신이 강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강 대표님이 이 밤에 이쪽으로 건너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백연신이 진짜 놀란 건 강지혁과 임유진의 관계였다. 그는 임유진을 조사하면서 임유진 사건을 알게 되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을 차로 치어 죽게 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임유진과 강지혁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누구든 보아낼 수 있었다.“오늘 밤 한지영 데려가야겠어요.”강지혁이 말했다.백연신의 미간이 구겨졌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까 강 대표님이 그러지 않았나요? 저랑 한지영 사이가 어떻든 관심 없다고요.”“이 밤이 지나면 당연히 관심 없죠. 근데 지금은 데려가야겠어요.”강지혁이 대답했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공기 속에 긴장한 기운이 감
백연신은 그제야 품에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빛바랜 메모지를 꺼냈다.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미안해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이 메모지는 그때 한지영이 남긴 그 메모지였다. 지금까지 그는 이 메모지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홧김에 여러 번 이 메모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다시 찾아냈다.이 메모지는 마치 백연신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뽑을 수도 없었고 뽑기도 아까웠다.이 메모지는 그녀가 백연신에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라 이것마저도 없으면 그에겐 그녀의 물건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좋아졌다... 지금 그가 드디어 그녀를 찾아낸 것이었다!“지영... 한지영...”그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이고 되뇌며 미련이라도 남은 것처럼 입술을 그 메모지에 갖다댔다.____한지영은 임유진을 따라 강지혁의 차를 타더니 두 사람에게 말했다.“고마워요.”강지혁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데려다줄게요. 어디 살아요?”한지영이 바로 주소를 말했다. 임유진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 듯 물었다.“그 백연신이라는 사람 진짜 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그냥 의자에 앉혀놓고 3시간 눈싸움했어.”한지영이 말했다.“원래 전화하려고 했는데 핸드폰을 몰수당하는 바람에 못...”핸드폰 얘기가 나오니 한지영은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이 아직 백연신 손에 있었다! 그 핸드폰에 그녀의 업무와 관련된 자료도 들어 있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한지영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백연신을 찾아서 핸드폰을 돌려받을지 아니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할지,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왜?”임유진이 물었다.“아니야.”한지영이 고개를 저으며 앞에서 운전하는 강지혁을 쳐다봤다. 강지혁의 차에 타다니 진짜 신기한 일이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러 온 건 임유진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걱정하게 해서 미안해.”한지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자기 친구를 바라보았다.“아무 일
게다가 강지혁과 같은 사람도 위험해지면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그녀가 무릎을 꿇든 말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두 다리가 부러지도록 꿇는다 해도 그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한지영의 침묵에 강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차 안의 공기가 침묵 속에서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____임유진은 이튿날 한지영을 찾으러 갔다. 두 사람은 한지영의 집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한지영의 짙은 다크서클을 보고 임유진은 그녀가 어젯밤 잠을 설쳤음을 알 수 있었다.“어제 집에 간 다음은 어땠어?”임유진이 물었다.“말도 마. 엄마 아빠 협상금까지 준비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까 엄청 뭐라 하더라고. 등짝 나갈 뻔했어.”한지영이 말했다.“왜? 백연신과 있었던 일 말씀 안 드린 거야?”“음, 되게 오래 못 만난 친구가 농담했는데 내가 너한테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그래서 이런 사달이 났네.”한지영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 부모님에게 사실대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때 외국에서 남자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어젯밤 잔소리 폭격으로 끝나지 않고 아빠한테 몽둥이세례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백연신이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왜 너를 그렇게 끌고 간 거래?”임유진이 제일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임유진은 어제 백연신을 보고 나서야 그 남자가 전에 한지영이랑 같이 밥 먹을 때 유리창으로 보고 있던 남자라는 걸 알아챘다.그러면 그때 백연신이 보고 있던 게 한지영이라는 말이다.한지영의 얼굴이 약간 빨개지더니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말하기 그러면...”“아, 말하기 불편한 건 아니야.”한지영이 이렇게 말하더니 그해에 있었던 일을 대략 임유진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다 네 전화를 받고 귀국했거든. 나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기도 했고 그런 부분에서 개방적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음, 나를 나
“만약에 정리가 잘 안되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임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지영이 끊어버렸다.“유진아, 어제 이미 너무 큰 도움을 줬어. 만약 네가 아니라면 강지혁이 나 구해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백연신 씨와의 일은 내가 저지른 거야. 정 안되면 화풀이 한번 하라고 하지 뭐.”한지영이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임유진은 계속 걱정이 되었다. 진짜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맞나 싶었다.“아, 걱정하지 마. 내가 백연신 씨한테 말도 없이 떠난 건 맞지만 불을 지른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뭐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그냥... 하루밤 보낸 것뿐인데 너무 심하게 나오진 않을 거야.”한지영이 친구를 위로하며 말했다.게다가 임유진은 지금 강지혁만으로도 꽤 난처한 상황인데 자기 일 때문에 더 걱정하는 건 싫었다.“근데 진짜 무슨 어려운 일 생기면 꼭 말해줘야 해!”임유진이 말을 이어갔다.“지금의 나로서는 너를 도와줄 능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강지혁한테 빌면 도와줄 수도 있거든.”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빈다고 할 때 목소리가 티 나게 우울하고 난처해 보였다.한지영은 어제 임유진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 강지혁한테 부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강지혁한테 빌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한지영도 모를 리가 없었다.임유진에게 강지혁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지독한 고통은 전부 강지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하지만 임유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한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알겠어.”한지영이 이렇게 대답한 것도 그저 친구가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백연신과의 일은 한지영이 알아서 처리할 생각이었다.둘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임유진의 면접 시간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배달 면접 보러 간다고?”한지영이 물었다.“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전에 이력서 보냈는데 오늘 면접 보러 오라고 전화가 왔더라고.”“화이팅해! 성공을 빌게!”한지영이 말했다.임유진이 가고 한지영은 버스를
“타.”그는 얇은 입술로 이 한 글자를 내뱉었다.한지영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핸드폰값도 꽤 나가긴 했지만, 그 값에 비기면 자유가 더 소중했다. 한지영은 어제처럼 방에 몇 시간 갇혀 있긴 싫었다.어제 임유진과 강지혁이 그녀를 데리고 나오지만 않았으면 언제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괜찮아요. 핸드폰 바꾸고 싶었는데 그 핸드폰은 안 돌려줘도 돼요.”한지영이 멋쩍게 말했다.“그럼, 전화에 있는 사진도, 여러 사이트에 등록된 계정도 필요 없다는 거지? 맞다, 일부는 회사 자료인 것 같던데.”백연신이 담담하게 말했다.“뭐 가져가기 싫다면 좋을 대로 해.”이건 그냥 협박이었다.‘핸드폰에는 분명 비밀번호가 걸려 있을 텐데 백연신이 내 핸드폰 잠금을 푼 건가? 그리고 핸드폰에 있던 사진과 자료를 다 봤겠지? 그럼... 내 각종 소셜 앱 계정의 비밀번호도 푼 건가?’한지영이 이를 갈았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한지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래서 탈 거야 말 거야?”백연신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다시 캐물었다.그녀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삼키지도 뱉지도 못했다. 그해의 그는 친절하고 귀엽기만 했는데 몇 년 사이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한지영은 그저 머리를 숙인 채 고분고분 뒤쪽 차 문을 열고 백연신의 옆에 앉았다. 차에 타보니 백연신이 가지고 노는 건 한지영의 핸드폰이었다.“내 핸드폰!”한지영이 소리를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했다.하지만 핸드폰에 손이 닿기도 전에 백연신은 한지영의 팔을 잡았다. “몇 년간 잘 지냈나 본데?”그가 유유히 말하며 그녀의 사진첩을 꾹 눌렀다. 사진첩에는 그녀가 웃고 있는 사진들이 있었다. 어떤 건 여행 사진, 어떤 건 일상 사진,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진도 있었다... 그 사진으로만 보면 그녀의 생활이 행복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쁠 때 사진을 찍지, 슬플 때 사진을 찍는
‘뭐지? 지금 핸드폰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한지영은 눈을 끔뻑였다.“돈 줄까요?”이 말을 한 한지영도 자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연신이 어떤 사람인데 그녀의 푼돈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고는 마치 바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봤다.“그럼 뭘 원하는데요?”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한지영은 백연신이 핸드폰을 빌미로 3년간 참았던 화를 그녀에게 푸는 거로 생각했다.뭐 어차피 화풀이만 하면 된다.“3년간 연애는 했어?”백연신이 물었다.한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어?”백연신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그건... 좀 많은 것 같은데. 좋아하는 연예인까지 합치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텐데.’하지만 지금 백연신의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을 보고 한지영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그러고 보니 그때 나한테 그런 적 있었지. 나 같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그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었다.한지영은 하마터면 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건 그냥 철없을 때 한 말일 뿐이었다. 임유진의 말로는 백연신이 백선 그룹 회장이자 백씨 집안의 수장이라고 했는데 한지영이 넘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허허, 아니에요. 난 그냥 일반인 남자친구면 돼요. 난 행복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거든요.”한지영이 뻘쭘한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백연신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인 채 계속 그녀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웹 브라우저를 열어 열람 기록을 살펴봤다.한지영은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번 주에 소설을 봤던 것 같은데, 제발 들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하지만 그녀의 작은 바람은 결국 무너졌다. 그는 이미 한 주 전의 열람 기록까지 뒤졌고 임의로 클릭해 들어가 보기
한지영의 얼굴이 빨갛던 데로부터 하얘졌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한마디 새어 나왔다.“미안해요.”이 말을 한 것도 그녀였고 지키지 못한 것도 그녀였다.“많이 미안해해야 되는 건 맞지.”백연신이 대답했다.차 안은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멈춰 섰고 한지영은 백연신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제야 이곳은 어제 그녀가 왔던 별장이라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못 나오게 하던 상황이 떠올라 한지영은 발걸음을 멈췄다.“왜? 못 들어가겠어?”백연신이 머리를 돌려 한지영을 바라봤다. 한지영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할 말 있으며 밖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백연신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한지영, 너를 잡아두려면 방법은 많아. 근데 이번만큼은 내가 약속할게. 강지혁이 와서 널 다시 데려가려고 해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한지영이 멈칫하며 망설이더니 이를 악물었다. 무서워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만약 진짜 한지영한테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로서는 막을 힘이 없었다.하지만 한지영은 마음을 다잡은 듯 발걸음을 내디뎠고 그렇게 앞으로 몇 발 다가섰다.백연신이 담담하게 웃더니 따라서 앞으로 걸어갔다.별장에 들어서자, 백연신이 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그러자 한지영은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고분고분 가서 앉았다. 백연신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술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지개색의 칵테일이 만들어졌다. 그는 술잔을 들고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마셔. 그때 이 술 좋아하는 것 같던데.”그때 일을 꺼내면 그녀는 마음이 켕겼다. 한지영은 그때 이 술이 과일주처럼 생겨서 그렇게 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취해서 그런 짓을 한 것이었다.그러지만 않았어도 한지영과 백연신은 지금처럼 난처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에요. 목마르지는 않아요.”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백연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이렇게 힘들게 만든 술인데 안 마신
“마... 맛있어요.”한지영은 혀가 꼬여왔다. 입안에는 온통 칵테일 냄새였다.원래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 하는 술을 그녀는 이렇게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백연신 씨, 어떻게 해야 그때의 화가 풀릴 것 같아요? 말해 봐요!”술을 마셔서 그런지 담도 많이 커졌고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백연신의 까만 눈동자가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나한테 빚진 게 무엇이면 그걸 지금 갚으면 돼.”한지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빚진 게 뭐면 뭘 갚으면 된다고요?”“그래.”백연신이 대답했다.한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흔들었다. 아까 마신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었다.역시 이 술은 그때와 같이 뒤끝이 셌다.하지만 지금은 뒤끝이 세서 그런지 아니면 한지영이 대담해진 건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되었다.예를 들면 그녀는 지금 외투의 지퍼를 당겨 외투를 벗고 있다.백연신은 실눈을 뜨고 한지영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한지영은 외투를 벗더니 안에 입은 스웨터를 벗었고 스웨터를 벗더니 그 안에 입은 흰 티까지 벗기 시작했다.“왜? 내가 널 보고 싶어 할 줄 알고?”백연신이 차갑게 말했다.“그러게요. 원망하면 원망했지, 보고 싶지는 않겠네요... 그럼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되잖아요. 어차피 내가 빚진 것만... 끅, 돌려주면 된 거 아닌가.”한지영이 눈을 끔뻑이더니 대답했다. 혀가 말을 듣지 않아 말할 때마다 혀가 꼬여왔다.백연신의 표정이 점점 구겨지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왜, 누가 이런 짓을 하든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야?”“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면 되죠. 아니면... 어떻게 갚으라는 거예요? 근데... 약속은 지켜요... 우... 우리 부모님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엄마 아빠는 그저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살아가는 시민일 뿐이에요... 평생 나쁜 짓 한 적도 없고...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