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친한데요.”한지영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지혁이 왜 그녀를 찾으러 왔는지 대개 추측이 가능했다. 임유진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안 친한데 이 밤에 이렇게 당신을 찾으러 온다고?”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S시에서 강지혁이 이렇게 신경 쓸 여자가 어딨어. 아니면 지금까지 나 찾으러 오지 않은 게 이 사람 때문이야?”백연신의 목소리에서 은연중에 잘 티 나지 않는 질투가 느껴졌다.‘아니, 그러려고 해도 내가 강지혁 마음에 들어야 그럴수 있는 거지! 강지혁이 좋아하는 건 임유진이라고!’한지영은 어이가 없었다.“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찾을 생각을 안 한 것뿐이지.”한지영이 대답했다. 귀국 후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닥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게다가 한지영은 이 모든 걸 타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했고 그날 밤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했기에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갈 심산이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임유진에게도 비밀로 했다.백연신의 표정을 보니 화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앙다문 채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진짜 사람 화병 나게 하는 재주가 있네.”어릴 때부터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잘 컨트롤하는 데에 능했다. 숨겨둔 자식이기에 늘 참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상황이 충분히 파악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기분을 잘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지영은 늘 그의 감정을 잘 끌어올렸다. 그는 그녀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정서를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었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그해 그녀와 지낸 그 시간은 그에게 달콤함 뿐만 아니라 고통이기도 했다. 그 후 3년간 틈만 나면 그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이 행복했던 것만큼 그녀가 말도 없이 떠난게 아프게 다가왔다.누군가 방문을 두드리자, 백연신이 표정을 수습하더니 말했다.“들어와요.”밖을 지키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는 강지혁과 임유진이 따라서 들어왔다.한지영은 자기 친구를 보자마자 눈빛이
“당신이 임유진이군요.”백연신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날 길에서 우연히 한지영을 만난 그날부터 그는 한지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알아본 자료에는 당연히 임유진도 포함되어 있었다.임유진은 한지영의 친구였다. 그때도 한지영은 임유진의 재판을 도와주기 위해 갑자기 제일 빠른 비행기로 귀국했고 온 힘을 다해 임유진에게 변호사와 각종 증거까지 찾아주었다.다시 말하면 애초에 한지영이 그렇게 빨리 백연신을 떠난 것도 임유진을 위해서였다.여기까지 생각하니 백연신은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졌다.임유진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백연신은 아마 이 사람을 연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네, 맞아요.”임유진이 머리를 살짝 쳐들며 말했다.“임유진 씨, 당신은 나와 한지영 사이에 끼어들 자격이 없어요.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아요. 여자라고 안 봐주니까.”백연신이 차갑게 말했다.한지영이 발끈했다.“백연신 씨, 당신과 나 사이에 친구까지 끌어들이지 마요.”한지영이 조급해할수록 백연신은 눈앞의 이 장면이 점점 눈에 거슬렸다.이때 강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과 한지영 사이가 어떻든 관심 없는데, 임유진 건드리면 못 참아요.”백연신이 강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강 대표님이 이 밤에 이쪽으로 건너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백연신이 진짜 놀란 건 강지혁과 임유진의 관계였다. 그는 임유진을 조사하면서 임유진 사건을 알게 되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을 차로 치어 죽게 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임유진과 강지혁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누구든 보아낼 수 있었다.“오늘 밤 한지영 데려가야겠어요.”강지혁이 말했다.백연신의 미간이 구겨졌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까 강 대표님이 그러지 않았나요? 저랑 한지영 사이가 어떻든 관심 없다고요.”“이 밤이 지나면 당연히 관심 없죠. 근데 지금은 데려가야겠어요.”강지혁이 대답했다.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공기 속에 긴장한 기운이 감
백연신은 그제야 품에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빛바랜 메모지를 꺼냈다.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미안해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이 메모지는 그때 한지영이 남긴 그 메모지였다. 지금까지 그는 이 메모지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홧김에 여러 번 이 메모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다시 찾아냈다.이 메모지는 마치 백연신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뽑을 수도 없었고 뽑기도 아까웠다.이 메모지는 그녀가 백연신에게 남겨준 유일한 물건이라 이것마저도 없으면 그에겐 그녀의 물건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좋아졌다... 지금 그가 드디어 그녀를 찾아낸 것이었다!“지영... 한지영...”그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이고 되뇌며 미련이라도 남은 것처럼 입술을 그 메모지에 갖다댔다.____한지영은 임유진을 따라 강지혁의 차를 타더니 두 사람에게 말했다.“고마워요.”강지혁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데려다줄게요. 어디 살아요?”한지영이 바로 주소를 말했다. 임유진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는 듯 물었다.“그 백연신이라는 사람 진짜 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그냥 의자에 앉혀놓고 3시간 눈싸움했어.”한지영이 말했다.“원래 전화하려고 했는데 핸드폰을 몰수당하는 바람에 못...”핸드폰 얘기가 나오니 한지영은 갑자기 생각난 게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이 아직 백연신 손에 있었다! 그 핸드폰에 그녀의 업무와 관련된 자료도 들어 있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한지영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백연신을 찾아서 핸드폰을 돌려받을지 아니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할지,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였다.“왜?”임유진이 물었다.“아니야.”한지영이 고개를 저으며 앞에서 운전하는 강지혁을 쳐다봤다. 강지혁의 차에 타다니 진짜 신기한 일이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러 온 건 임유진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걱정하게 해서 미안해.”한지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자기 친구를 바라보았다.“아무 일
게다가 강지혁과 같은 사람도 위험해지면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그녀가 무릎을 꿇든 말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두 다리가 부러지도록 꿇는다 해도 그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한지영의 침묵에 강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차 안의 공기가 침묵 속에서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____임유진은 이튿날 한지영을 찾으러 갔다. 두 사람은 한지영의 집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한지영의 짙은 다크서클을 보고 임유진은 그녀가 어젯밤 잠을 설쳤음을 알 수 있었다.“어제 집에 간 다음은 어땠어?”임유진이 물었다.“말도 마. 엄마 아빠 협상금까지 준비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니까 엄청 뭐라 하더라고. 등짝 나갈 뻔했어.”한지영이 말했다.“왜? 백연신과 있었던 일 말씀 안 드린 거야?”“음, 되게 오래 못 만난 친구가 농담했는데 내가 너한테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그래서 이런 사달이 났네.”한지영이 말했다. 그녀는 자기 부모님에게 사실대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때 외국에서 남자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면 어젯밤 잔소리 폭격으로 끝나지 않고 아빠한테 몽둥이세례를 받아야 할 판이었다.“백연신이랑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제 왜 너를 그렇게 끌고 간 거래?”임유진이 제일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임유진은 어제 백연신을 보고 나서야 그 남자가 전에 한지영이랑 같이 밥 먹을 때 유리창으로 보고 있던 남자라는 걸 알아챘다.그러면 그때 백연신이 보고 있던 게 한지영이라는 말이다.한지영의 얼굴이 약간 빨개지더니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보였다.“말하기 그러면...”“아, 말하기 불편한 건 아니야.”한지영이 이렇게 말하더니 그해에 있었던 일을 대략 임유진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다 네 전화를 받고 귀국했거든. 나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기도 했고 그런 부분에서 개방적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음, 나를 나
“만약에 정리가 잘 안되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임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지영이 끊어버렸다.“유진아, 어제 이미 너무 큰 도움을 줬어. 만약 네가 아니라면 강지혁이 나 구해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 백연신 씨와의 일은 내가 저지른 거야. 정 안되면 화풀이 한번 하라고 하지 뭐.”한지영이 큰 문제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임유진은 계속 걱정이 되었다. 진짜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맞나 싶었다.“아, 걱정하지 마. 내가 백연신 씨한테 말도 없이 떠난 건 맞지만 불을 지른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뭐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그냥... 하루밤 보낸 것뿐인데 너무 심하게 나오진 않을 거야.”한지영이 친구를 위로하며 말했다.게다가 임유진은 지금 강지혁만으로도 꽤 난처한 상황인데 자기 일 때문에 더 걱정하는 건 싫었다.“근데 진짜 무슨 어려운 일 생기면 꼭 말해줘야 해!”임유진이 말을 이어갔다.“지금의 나로서는 너를 도와줄 능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강지혁한테 빌면 도와줄 수도 있거든.”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빈다고 할 때 목소리가 티 나게 우울하고 난처해 보였다.한지영은 어제 임유진이 자신을 찾기 위해서 강지혁한테 부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강지혁한테 빌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한지영도 모를 리가 없었다.임유진에게 강지혁은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지독한 고통은 전부 강지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하지만 임유진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한지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알겠어.”한지영이 이렇게 대답한 것도 그저 친구가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백연신과의 일은 한지영이 알아서 처리할 생각이었다.둘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임유진의 면접 시간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배달 면접 보러 간다고?”한지영이 물었다.“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전에 이력서 보냈는데 오늘 면접 보러 오라고 전화가 왔더라고.”“화이팅해! 성공을 빌게!”한지영이 말했다.임유진이 가고 한지영은 버스를
“타.”그는 얇은 입술로 이 한 글자를 내뱉었다.한지영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핸드폰값도 꽤 나가긴 했지만, 그 값에 비기면 자유가 더 소중했다. 한지영은 어제처럼 방에 몇 시간 갇혀 있긴 싫었다.어제 임유진과 강지혁이 그녀를 데리고 나오지만 않았으면 언제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괜찮아요. 핸드폰 바꾸고 싶었는데 그 핸드폰은 안 돌려줘도 돼요.”한지영이 멋쩍게 말했다.“그럼, 전화에 있는 사진도, 여러 사이트에 등록된 계정도 필요 없다는 거지? 맞다, 일부는 회사 자료인 것 같던데.”백연신이 담담하게 말했다.“뭐 가져가기 싫다면 좋을 대로 해.”이건 그냥 협박이었다.‘핸드폰에는 분명 비밀번호가 걸려 있을 텐데 백연신이 내 핸드폰 잠금을 푼 건가? 그리고 핸드폰에 있던 사진과 자료를 다 봤겠지? 그럼... 내 각종 소셜 앱 계정의 비밀번호도 푼 건가?’한지영이 이를 갈았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한지영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래서 탈 거야 말 거야?”백연신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다시 캐물었다.그녀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삼키지도 뱉지도 못했다. 그해의 그는 친절하고 귀엽기만 했는데 몇 년 사이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 한지영은 그저 머리를 숙인 채 고분고분 뒤쪽 차 문을 열고 백연신의 옆에 앉았다. 차에 타보니 백연신이 가지고 노는 건 한지영의 핸드폰이었다.“내 핸드폰!”한지영이 소리를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가져오려고 했다.하지만 핸드폰에 손이 닿기도 전에 백연신은 한지영의 팔을 잡았다. “몇 년간 잘 지냈나 본데?”그가 유유히 말하며 그녀의 사진첩을 꾹 눌렀다. 사진첩에는 그녀가 웃고 있는 사진들이 있었다. 어떤 건 여행 사진, 어떤 건 일상 사진,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진도 있었다... 그 사진으로만 보면 그녀의 생활이 행복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쁠 때 사진을 찍지, 슬플 때 사진을 찍는
‘뭐지? 지금 핸드폰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한지영은 눈을 끔뻑였다.“돈 줄까요?”이 말을 한 한지영도 자기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연신이 어떤 사람인데 그녀의 푼돈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고는 마치 바보를 보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봤다.“그럼 뭘 원하는데요?”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한지영은 백연신이 핸드폰을 빌미로 3년간 참았던 화를 그녀에게 푸는 거로 생각했다.뭐 어차피 화풀이만 하면 된다.“3년간 연애는 했어?”백연신이 물었다.한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어?”백연신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그건... 좀 많은 것 같은데. 좋아하는 연예인까지 합치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텐데.’하지만 지금 백연신의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을 보고 한지영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그러고 보니 그때 나한테 그런 적 있었지. 나 같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고.”그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었다.한지영은 하마터면 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건 그냥 철없을 때 한 말일 뿐이었다. 임유진의 말로는 백연신이 백선 그룹 회장이자 백씨 집안의 수장이라고 했는데 한지영이 넘볼만한 사람은 아니었다.“허허, 아니에요. 난 그냥 일반인 남자친구면 돼요. 난 행복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거든요.”한지영이 뻘쭘한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백연신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인 채 계속 그녀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웹 브라우저를 열어 열람 기록을 살펴봤다.한지영은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번 주에 소설을 봤던 것 같은데, 제발 들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하지만 그녀의 작은 바람은 결국 무너졌다. 그는 이미 한 주 전의 열람 기록까지 뒤졌고 임의로 클릭해 들어가 보기
한지영의 얼굴이 빨갛던 데로부터 하얘졌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한마디 새어 나왔다.“미안해요.”이 말을 한 것도 그녀였고 지키지 못한 것도 그녀였다.“많이 미안해해야 되는 건 맞지.”백연신이 대답했다.차 안은 침묵이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멈춰 섰고 한지영은 백연신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제야 이곳은 어제 그녀가 왔던 별장이라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못 나오게 하던 상황이 떠올라 한지영은 발걸음을 멈췄다.“왜? 못 들어가겠어?”백연신이 머리를 돌려 한지영을 바라봤다. 한지영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할 말 있으며 밖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백연신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한지영, 너를 잡아두려면 방법은 많아. 근데 이번만큼은 내가 약속할게. 강지혁이 와서 널 다시 데려가려고 해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한지영이 멈칫하며 망설이더니 이를 악물었다. 무서워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만약 진짜 한지영한테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지금의 그녀로서는 막을 힘이 없었다.하지만 한지영은 마음을 다잡은 듯 발걸음을 내디뎠고 그렇게 앞으로 몇 발 다가섰다.백연신이 담담하게 웃더니 따라서 앞으로 걸어갔다.별장에 들어서자, 백연신이 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그러자 한지영은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고분고분 가서 앉았다. 백연신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술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지개색의 칵테일이 만들어졌다. 그는 술잔을 들고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마셔. 그때 이 술 좋아하는 것 같던데.”그때 일을 꺼내면 그녀는 마음이 켕겼다. 한지영은 그때 이 술이 과일주처럼 생겨서 그렇게 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취해서 그런 짓을 한 것이었다.그러지만 않았어도 한지영과 백연신은 지금처럼 난처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아니에요. 목마르지는 않아요.”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백연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이렇게 힘들게 만든 술인데 안 마신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