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온 S시의 많은 사람이 진세령과 소민준이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하필이면 한세리가 소민준을 언급할 때 ‘옛 남자친구'라고 하며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한세리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한세리는 임유진의 시선을 마주보며 얼굴에는 오히려 불편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방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이내 꿰뚫어 보면 또 어찌할 거냐고 스스로 말했다. 임유진은 지금 이미 그 당시 업계의 샛별이 아닌데 말이다.그녀는 임유진과 함께 사무실에 들어갔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임유진만 존재했고, 그녀는 단지 들러리에 불과했다.다들 임유진은 일과 사랑을 다 가졌다고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선적인 변호사가 될 것 같다고 했는데, 그녀는 옆에서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그녀의 일이 잘못될 때마다 사무실의 선배님은 그녀에게 더 배우라고 해서 그녀를 화나게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임유진은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는 큰 산과 같았다. 임유진이 사무실에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은 항상 두 사람을 비교했다.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임유진의 그늘에서 사는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에게 일이 생겼을 때, 한세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심지어 이게 하늘이 그녀를 도와줘서 임유진에게 일이 생긴 거로 생각하기도 했다.아니나 다를까, 임유진이 감옥에 간 후, 아무도 그녀와 임유진을 비교하지 않았다.“유진아, 신경 쓰지 마, 나도 네가 걱정돼서 그래. 환경미화원은 힘든 일이잖아.”한세리는 동정하듯 말했다.“다행히 힘들지 않아.”임유진이 말했다. 적어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것이 감옥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세리는 임유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가 있어. 너는 환경미화원이니까, 매일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정리해야 하잖아. 환경미화원 짓을 오래 하면,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한세리는 말하면서 눈에는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야, 됐어.”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밖에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 먼저 갈게.”“야, 뭐가 급해.”한세리가 또 말했다.“너 아직 남자친구 없지, 내 남자친구는 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일하고 있어. 아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소개해 줄까?”그러면서 임유진을 따라 화장실을 나왔다.그리고 한세리가 화장실 밖에 서 있는 중간 키의 남자를 향해 소리치자 상대방이 바로 이쪽으로 다가왔다.임유진은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외모는 중간 정도, 나이는 좀 있어 보였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 사람이 한세리의 남자친구일 것이다.“용준 씨, 이쪽은 내 예전 동료인 임유진이에요. 오늘 우연히 화장실에서 만났어요.”한세리가 말했다.“유진아, 여기는 내 남자친구 하용준 씨, 용준 씨는 UE 대학의 교수야.”한세리의 말투에는 자랑이 가득했다.오히려 하용준이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부교수일 뿐이지 아직 교수는 아니에요.”“2년 뒤면 교수잖아요.”한세리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가 임유진에게 말했다.“밖에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다면서? 누구야?”임유진은 고개를 들었지만 강지혁을 보지 못했다.설마 그가 먼저 갔단 말인가? 그녀는 마음속으로 추측했다.하지만 한세리는 전에 상대방이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이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한마디 했다.“그럼 우리 어디 좀 가서 앉자. 내 남자친구에게 주변에 너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있는지 보여줄 겸 말이야. 지난번에 그들 학교 지원 노동자들의 결혼문제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하던데 너랑 나이가 맞는 사람이 있을 거야.”한세리는 어색한 듯 말했다.“노동자와 소개팅을 해도 괜찮지? 사실 나는 그들 학교의 싱글 선생님들을 소개해주고 싶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선생님들은 보통 상대방의 과거가 깨끗한 것을 요구하는데 넌 이쪽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하지만 걱정하지 마, 비록 노동자라 월급이 높지 않고 학력도 낮지만, 모두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상냥하게 잘 대해줘.”
결국, 다음번이 되기 전에, 그는 더는 혁이가 아니라 강지혁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지금 처음 한 말을 그가 기억할 줄은 몰랐다.“유진아…… 이 사람 누구야?”한세리는 강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아하게 물었다.‘이 귀하고 고상해 보이는 남자는 임유진…… 친구인가?!’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임유진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강지혁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소개팅 상대를 소개해 주려는 거야? 설마 이 여자에게 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한세리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이 남자…… 정말 임유진의 친구인가? 심지어…… 남자친구?!외모만으로도 소민준을 바로 이길 수 있었는데 그녀의 남자친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한세리는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친구 하용준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녀는 남자친구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비록 나이가 10살 더 많지만 어쨌든 부교수이고 몇 년만 지나면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 임유진과 함께 있는 이분…… 이 친구와 비교해보니 한세리는 갑자기 자신의 남자친구를 데리고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임유진은 이때 강지혁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옆에 있던 하용준은 강지혁에게 먼저 다가가 말했다.“내 여자친구가 임유진 씨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생각해주세요. 전 하용준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여자친구 한 세리예요.”“전 강 씨 성을 쓰고 있어요.”강지혁은 자신의 성만 말하고 이름은 생략했다.하용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오해해서 정말 미안해요, 다들 어디 가서 앉으시죠?”“좋아요.”강지혁은 대답한 후 임유진에게 말했다.“어디 가서 밀크티를 마시자.”임유진은 좀 이상했다. 평소 강지혁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다른 사람과 동행하는 것에 동의한 거지?하지만 강지혁은 이미 그녀의 손을 잡았다.결국 네 사람은 한 카페에 도착했고, 하용준은 먼저 강지혁과 임유진에게 메뉴를 건네며 물었다
세 사람이 커피를 주문하자 한세리는 일부러 임유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임유진이 지금 하는 일이 어떠냐고 물었다. 사실 임유진이 지금 얼마나 비참하게 지내는지 더 듣고 싶었을 뿐이고 강지혁이 이것을 들은 후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기도 했다.그러나 강지현은 아무렇지 않은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유진아, 사무실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 사무실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청소한다고 해도, 네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낫잖아.”한세리는 착한 척 말했다.임유진은 눈을 들었지만 한세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난 일자리를 바꿀 생각이 없어.”“그래?”한세리는 입을 삐죽거렸다.“사무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면, 월급을 환경미화원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정말 생각 없어?”“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안다고 생각해.”임유진의 말투도 점점 차가워졌다.한세리는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용준에게 끌려갔고, 마침 웨이터가 커피를 들고나와 화제가 일단락되었다.“자, 이 커피는 비싼 커피예요, 따뜻할 때 더 맛있어요.”한세리가 말했다.강지혁은 자세를 바로잡고 우아하게 커피를 들고 향기를 맡으며 한 모금 마셨다.한세리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그가 아이돌 스타처럼 느껴졌고, 커피 한 잔 마시는 모습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했다.“강지혁 씨, 유진이와는 어떻게 만났어요?”한세리가 궁금해서 물었다.“눈이 올 때 그녀가 먼저 찾아와 말을 걸어와 알게 됐어요.”강지혁이 웃으며 대답했다.‘겨우 이렇게?! 이건 너무 쉬운 거 같은데!’“그렇다면 유진이가 먼저 강지혁 씨를 좋아한 거네요?”한세리가 또 물었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 밀크티를 마시고 있는 임유진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렇죠.”임유진은 밀크티를 뿜을 뻔했다. 그럴 리가!하지만 이때 한세리가 스스로 그녀와 강지혁의 관계를 오해한 거니, 임유진도 뭐라고 설명
임유진은 움찔하더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강지혁의 눈빛을 바라보았다.그러자 한세리는 얼굴빛이 변하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지혁 씨 몰라봤는데…… 유진이를 정말 사랑하네요. 그럼 결혼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가 시집가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결혼해야죠.”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지혁을 쳐다보았다.“그럴 리가요?!”한세리가 불쑥 말했다.강지혁은 시큰둥하게 한세리를 힐끗 보았다.“안 될 게 뭐가 있어요?”강지혁의 눈빛이 하도 서늘하여 한세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자, 가자, 유진아.”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일어섰고 임유진도 아무 말 없이 강지혁을 따라 떠났다.하용준은 한세리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세리야, 너 방금 네 친구가 감옥에 있었다는 얘기를 왜 꺼냈어? 강지혁 씨가 알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만약 몰랐다면, 오히려 그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지 않았겠어? 심지어 헤어질 수도 있었을 거야.”그녀는 일부러 그런 거다! 한세리는 이를 갈며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남겨진 강지혁의 커피잔을 본 그녀는 그제야 이렇게 비싼 커피를 그가 단지 한 모금 마셨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흥, 남자친구가 허울뿐인 것 같아, 커피 한 모금만 마시고 안 마셨어. 아마 평소에 좋은 커피는 전혀 안 마시나 봐. 이렇게 좋은 커피도 즐기지 못하는 걸 보면.”한세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측이 옳다고 생각했다.여자가 감옥에 가는 것을 개의치 않고 환경미화원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아마 찌질이일 뿐이고, 취할 수 있는 점은 얼굴만 잘생겼다는 것 같았다.“세리야, 너도 그런 말 하지 마.”하용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친구가 친구 얘기를 그렇게 하는 것에 못마땅했다.한세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하려 했지만 웨이터의 한마디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모두 마음에 두는 게 좋을 거야.”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멍해졌다. 그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마음에 두라니…… 그가 전에 한 말들이라면…….그녀가 결혼하고 싶어 하면 그는 결혼하련다는 그 말, 그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까?두 사람이 차에 오를 때까지 임유진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었다. 차가 강 씨 저택에 도착하자 그녀는 강지혁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집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발걸음을 갑자기 멈췄다.“참, 나 배가 고파본 적이 없는 건 아니야.”강지혁이 말했다.“나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고플 때가 있었어.”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신이 화장된 후 홀로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작고 허름한 방에 계속 있을 때, 그는 몹시 배가 고팠다……. 배고파서 온몸에 힘이 거의 없어졌는데 그때 죽음과 스쳐 가는 것 같았다.결국 이웃이 와서 문을 두드려 먹을 것을 주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임유진은 멍해져서, 의외라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 말을 할 때의 담담한 말투는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옛날 그가 ‘혁'이었을 때 그녀에게 말했던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그의 어머니는 그와 그의 아버지를 두고 가셨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눈밭에서 죽었다…… 그러고 보면 강 씨 가문에 들어가기 전에 강지혁도 사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늘어뜨린 자신의 두 손을 살며시 모았다. 아까…… 그가 마지막 말을 할 때, 그녀는 심지어 예전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그가 ‘혁이'가 아니라, 강지혁이며, 그녀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 씨 저택, 임유라는 촬영장에서 받은 억울함을 부모에게 하소연하고 있다.“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언니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다니, 언니는 분명히 강지혁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그냥 내가 우
“임유진은 자신이 좋은 것을 얻지 못하니, 우리가 좋은 것을 얻는 게 싫은 거예요!”방미령이 화를 내며 말했다.“만약 유진이가 유라와 현수의 일을 망친다면, 내가 유진이를 혼내줄 거예요!”임정호가 입을 열었다.“무슨 오해가 있는 것 아니야?”어쨌거나 임유진도 그의 딸이고, 그에게 있어서 어떤 딸이 강현수와 함께하든지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중요한 건, 강현수의 장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무슨 오해가 있겠어요! 유진이가 주제를 모르는 거지!”방미령이 말했다.“아니면, 강지혁과 사귀면서 왜 또 강현수를 건드릴 수 있겠어요? 감옥살이했던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진지하게 대해줄까? 그냥 노는 거예요.”방미령은 의붓딸을 헐뜯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의붓딸이 정말 친딸의 좋은 인연을 뺏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유라는 달라요. 유라는 맑고 깨끗해요. 지금도 강현수의 진짜 여자친구인데, 장차 여배우가 되어 강 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방미령은 임유라가 당장 유명배우나 되고 강 씨 사모님이 된 듯 말했다.임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내가 유진이에게 집에 한번 오라고 해서 얘기해볼게. 유진이와 강현수가 거리를 두게 하여, 유라의 좋은 일을 망치지 않게 하지 뭐.”임유라와 방미령은 서로를 쳐다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고마워요, 아빠.”임유라는 말하고 나서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언니가 듣지 않으면 어떡하죠?”“나는 유진이의 아빠야. 유진이의 성이 아직 임 씨라면 내 말을 들어야 해.”임정호는 꿋꿋한 모습으로 말했다.고개를 살짝 숙인 임유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임유진은 저녁에 아버지 임정호의 전화를 받았다.“유진아, 너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구나. 돌아와서 네 어머니의 묘지 옮기는 일을 상의해 보는 게 좋겠어.”임정호가 말했다.“묘지를 옮긴 다고요?”임유진은 멍해졌다.“그래, 네 엄마는 처음에 남의 마을에 있는 묘지에 묻혔어. 그런데 지금은 그쪽이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강지혁은 어느새 두 방 사이에 있는 문에 기대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었다.“누구 전화야?”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아버지.”임유진이 대답했다.“내일 저녁에 집에 갈 거니까 운전기사에 나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해.”강지혁은 뭔가 고민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내가 같이 가줄까?”그녀는 오히려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함께 돌아간다고? 그는 어떤 신분으로 그녀와 함께 돌아가려는 거지? 게다가 그녀는 돌아가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을 처리해야 한다.“아니야, 나 혼자 가면 돼.”임유진이 말했다.“늦었어, 자고 싶어.”다시 말해 그가 가야 한다는 얘기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감았다.“이렇게 나를 거절할 거야?”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면 내가 뭘 해야 누나가 나한테 예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그는 숨을 내쉬며 그녀의 얼굴에 따뜻한 입김을 내뿜었다.그녀가 예전처럼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부드럽게 말해주며, 두 눈에는 온통 그의 모습으로 가득 차,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예전처럼?’임유진은 어리둥절했다.“예전의 넌 ‘혁이’였잖아.”그녀가 중얼거렸다.“그럼 난 이제 ‘혁이'가 될게. 누나 한 사람만의 ‘혁이'말이야.”강지혁이 말했다.그녀의 심장은 갑자기 심하게 뛰었다.그녀 혼자만의 ‘혁이'가 가능할까?그녀는 분명히 그를 두려워해야 하는데,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 걸까.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말했다.“나는 이런 말을 누나한테만 했는데 누나는 나를 ‘혁이'로 생각하면 안 돼?”그녀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 수 있는 ‘혁이’로……————임유진은 밤새 거의 자지 못한 채 강지혁의 말만 머릿속에 되뇌고 있었다.그녀 혼자만의 ‘혁이’라니? 설마 그들 남매 게임을 아직 충분히 하지 못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표정은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