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강지혁은 어느새 두 방 사이에 있는 문에 기대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었다.“누구 전화야?”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아버지.”임유진이 대답했다.“내일 저녁에 집에 갈 거니까 운전기사에 나 데리러 오지 말라고 해.”강지혁은 뭔가 고민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내가 같이 가줄까?”그녀는 오히려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함께 돌아간다고? 그는 어떤 신분으로 그녀와 함께 돌아가려는 거지? 게다가 그녀는 돌아가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을 처리해야 한다.“아니야, 나 혼자 가면 돼.”임유진이 말했다.“늦었어, 자고 싶어.”다시 말해 그가 가야 한다는 얘기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감았다.“이렇게 나를 거절할 거야?”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면 내가 뭘 해야 누나가 나한테 예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그는 숨을 내쉬며 그녀의 얼굴에 따뜻한 입김을 내뿜었다.그녀가 예전처럼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부드럽게 말해주며, 두 눈에는 온통 그의 모습으로 가득 차,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예전처럼?’임유진은 어리둥절했다.“예전의 넌 ‘혁이’였잖아.”그녀가 중얼거렸다.“그럼 난 이제 ‘혁이'가 될게. 누나 한 사람만의 ‘혁이'말이야.”강지혁이 말했다.그녀의 심장은 갑자기 심하게 뛰었다.그녀 혼자만의 ‘혁이'가 가능할까?그녀는 분명히 그를 두려워해야 하는데,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왜 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 걸까.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대고 말했다.“나는 이런 말을 누나한테만 했는데 누나는 나를 ‘혁이'로 생각하면 안 돼?”그녀와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 수 있는 ‘혁이’로……————임유진은 밤새 거의 자지 못한 채 강지혁의 말만 머릿속에 되뇌고 있었다.그녀 혼자만의 ‘혁이’라니? 설마 그들 남매 게임을 아직 충분히 하지 못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표정은
임유진이 그렇게 대단한 인물을 안다면, 환경위생소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심지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엑스트라까지 할 수 있을까?“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임유진은 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하지만 미옥 언니, 난 엑스트라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일은 앞으로 안 할 거예요. 이수호 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저 좀 이따 그룹채팅방에서 나갈게요.”어쨌든, 어제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은 많은 사람이 봤다. 연예계라는 이런 그룹에서 많은 사람이 오다가다 마주치게 될 텐데, 만약 그녀가 다시 엑스트라로 나간다면 어색하기만 할 뿐이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다만 수입을 올릴 방법이 하나 부족하다는 것이 오히려 좀 아쉬웠다. 다른 수단을 취해서 수입을 좀 늘릴 수 있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렇구나.”서미옥도 임유진이 어제 일에 대해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더는 묻지는 않았다.“그럼 나중에 내가 이수호 씨에게 얘기할게. 하지만 너 그룹채팅방에서 나가기 전에 이수호 씨에게 따로 인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알았어요.”임유진이 대답했다.마음속으로 또 돈 버는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영이에게서 빌린 돈을 빨리 갚아야 하고, 외할머니 쪽의 병원비도 나중에 늘어나게 되면 그녀에게는 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될 것이다.이런 생각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싶었다.예전에는 좋은 책을 읽고 훗날 지식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고 있다. 이전에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배운 각종 지식, 심지어 외운 각종 법률 조문은 그녀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이것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퇴근길에 임유진은 환경위생업소 인근 노점으로 가서 간단한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이 도시락은 강 씨 저택 셰프가 만든 저녁 식사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녀는 이 도시락을 먹으며 아무런 부담이나 구속을 느끼지 않았다.강씨 저택에서 강지혁과 함께 밥을 먹을 때
“자, 먼저 앉아.”임정호가 말했다.임유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엄마의 묘를 어디로 옮기려 해요?”“그건 급하지 않아.”임정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면 먼저 너와 네 여동생의 관해 얘기하자. 오늘 아빠는 너희 둘을 화해시키고 싶어. 예전과 상관없이 너희들은 여전히 자매잖아, 언니인 네가 동생을 많이 보호해야 한다.”임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전 우리 엄마 무덤을 어디로 옮길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임유진은 언짢았다.“아니, 이 일은 이따가 다시 얘기하고 너와 네 여동생에 대해 먼저 얘기하자.”“언니, 예전에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내가 사과할게.”임유라는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하지만 임유진은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임유라가 지금 그럴수록 더 문제가 있다는 얘기밖에 안 되니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임정호의 말에 임유진은 임유라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자, 너희들은 친자매인데 남자 때문에 싸우면 안 되지.”임정호가 큰딸에게 말했다.“유진아, 강현수는 네 여동생의 남자친구야, 너네 여동생의 인연을 망쳐서는 안 돼.그리고 지금 강지혁과 가까운 사이잖아? 그럼 더더욱 네 여동생과 강수현 사이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어.”임유진은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거겠지.“쟤와 강수현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관심 없어요. 다만 어머니의 묘를 어디로 옮길지 알고 싶어요.”임유진은 질문을 되풀이했다.“싫어? 설마 정말 임유라와 강수현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거야? 잘 들어, 만약 네가 감히 유라의 인연을 망친다면, 평생 네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 생각도 하지 마!”임유진은 차갑게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원하느냐 마느냐는 내 말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만약 강수현이 정말로 쟤를 좋아한다면,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을 거예요. 만약 강수현이 쟤에게 처음부터 진지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붙잡을 수 없을 거예요!”“무슨 소리야!”옆에 있는 방미령이 화를 버
“너는 입만 열면 네 엄마인데, 네 여동생은 안중에도 없어? 좋아, 정말 네 엄마의 좋은 딸이야!”임정호는 화가 나서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이윽고 앨범 한 권을 꺼냈다.임유진은 경직됐다. 이 앨범은…… 어머니의 앨범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도 많다!임정호는 라이터를 꺼내 앨범에 불을 붙였다.“너 여동생을 이렇게 볼 수 없다면, 이 앨범을 줄 필요도 없어. 너의 어머니도 너 같은 딸을 원하지 않을 거야!”앨범이 불타오르자 임정호는 타일 바닥에 불붙은 앨범을 그대로 내던졌다.임유진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서 두 소매를 걷고 필사적으로 그 타오르는 불꽃을 내리쳤다.‘태우면 안 돼, 안 돼!’이것은 어머니가 그녀에게 준 추억이고! 그녀의 그리움이기에 이렇게 태우면 안 된다.임유진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지르는지조차 몰랐다. 그녀는 단지 두 손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계속 내리칠 뿐, 심지어 불이 손을 데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다.미친 사람처럼 말이다.그녀의 이런 모습에 임정호, 방미령과 임유라는 깜짝 놀랐다.마침내, 불이 꺼졌을 때, 임유진은 너덜너덜해진 앨범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얼굴이 온통 눈물투성이 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앨범을 품에 안은 채 눈을 들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이 남자는,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아내의 유품까지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다니,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녀의 어머니가 전혀 없었다.사랑이란 시간이 흐르면 그리움도 남지 않는 법이다.청초하고 우아한 얼굴에는 눈물에 젖은 낭패로 가득 찼지만 예쁜 두 눈은 차갑게 임정호를 바라보았다.임정호는 딸의 눈빛에 조금 놀랐지만, 억지로 체면을 세워 한마디 했다.“너…… 누가 아버지를 그렇게 보라고 했어. 이 앨범을 내가 태우고 싶으면 태우는 거야!”임유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더 차가워진 눈빛으로 말했다.“엄마가 지금 살아 계셨다면, 분명 자신이
만약 임유진 얼굴을 태웠다면, 그녀에게도 걱정을 덜었을 것이다. 적어도 강현수가 얼굴을 망가뜨린 여자를 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아쉽다!————임유진은 자신이 어떻게 계단을 내려갔는지 몰랐다. 자신의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온 힘을 다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앨범을 움켜쥔 두 손은 감정이 북받쳐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 앨범을 뒤지고 안에 있는 사진들이 얼마나 타버렸는지 볼 용기조차 없었다.이것들은 모두 그녀의 추억이고 그녀와 어머니의 추억이다!그녀가 비틀거리며 동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림자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그 초조한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걱정으로 그녀의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왜 그래?”그녀는 자신이 마치 그림자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곧 상대방이 두 팔로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누가, 누가 그러는 거지?’임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눈이었다. 마치 예쁜 복숭아꽃처럼,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칠흑 같은 눈동자는 마치 흑요석처럼 그렇게도 투명했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누나 왜 그래?”그는 긴 눈썹을 찌푸리고, 그녀의 눈물 자국을 보며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혁아…….”그녀가 중얼거리며 이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까?겨우 한 달 남짓인데 벌써 오래된 것 같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단지 혁이만 있는 것 같았다. 한때 그녀와 함께 의지하며 살았던 혁이, 서로 기대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던 혁이다.그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여기 있어.”“혁아, 나…… 나 너무 힘들어…….”그녀는 지쳐서 걸을 힘도 없고 울 힘도 없어졌다.그는 허리를 숙여 갑자기 그녀를 안아 들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한 차 옆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마치 얌전한 인형처럼 그의 품에서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없이 조용했는데, 마치 그녀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의사가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앨범을 빼내려고 할 때, 그녀는 문득 정신이 든 듯, 두 손을 꼭 잡아당겼다.“안돼요!”“가져가려는 게 아니라 손의 상처를 보고 싶었을 뿐이야.”강지혁이 유유히 말했다.“누나, 이거 이리 줘. 의사한테 손의 상처를 잘 검사하라고 하자, 알았지?”누나라는 이 한마디에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혁…… 아.”그녀가 중얼거렸다.“나야.”그가 대답했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그녀의 입술이 떨렸고, 겨우 그친 눈물이 또 한 번 쏟아졌다.“다 탔어. 엄마랑 함께했던 앨범이 다 타버렸어.”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곱게 말아 올린 속눈썹은 움직일 때마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강지혁은 멍하니 있었다. 이 반쯤 검게 그을린 앨범…… 이것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앨범인 건가?그들이 함께 생활한 그 시간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깨달았다.그제야 의사는 마침내 임유진의 두 손을 볼 수 있었다. 상처를 살피던 의사는 곧 화상을 입은 부분을 처리하고 상처 표면을 깨끗이 씻은 다음 붕대를 감았다.그녀의 손등에 난 지난번 멍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상처가 덧나 양손의 손끝을 모두 가제로 감쌌다.그 과정에서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다.강지혁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임유진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울지 마…….”그녀의 눈물은 그를 괴롭히고 그를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 설령 그가 S 시를 뒤엎을 수 있다고 해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앨범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리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눈물을 닦는 것뿐이었다…….“화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양손에 물이 묻히면 안 되고 하루에 한
그녀는 코가 시큰거리더니 멈췄던 눈물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 누나."강지혁이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져주었다. ‘누나’라는 한 단어가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고통과 슬픔을 모두 무장 해제시켜버렸다.임유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소리 내어 운다고 한들,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한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뿐이었고 눈물은 값어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누나’라고 부르자 갑자기 엄마 생각이 떠올랐고 한 번도 자신을 ‘누나’라고 부른 적 없는 남동생도 떠올랐다.그때 엄마와 남동생이 임유진 곁을 떠나지만 않았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외롭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녀도 진정한 가족이 생길 수 있었을까?임유진의 울음에 강지혁이 깜짝 놀랐다. 아까 입술을 깨물고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그녀를 바라볼 때는 마음이 아팠는데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제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강지혁은 마치 신경 하나하나가 다 마비된 사람처럼 그저 굳어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은 자신의 엄마가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을 때도, 아버지가 눈이 펑펑 내리던 곳에서 얼어 죽었을 때도 그저 가엽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이러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큰 소리로 우는 그녀를 앞에 두고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더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이때 임유진이 강지혁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은 강지혁의 옷을 다 적셔버렸고 그의 심장까지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강지혁이 서서히 얼어붙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주었다.임유진이 이렇게도 고통스럽고 슬프다면 울어도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된다. 그녀의 이런 약해진 모습은 자신만 봐야 한다.임유진을 향한 강지혁의 소유욕은 날이 갈수록 짙
한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아마도...."혹시 강지혁 씨?""네."한지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강지혁은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지영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유진이는 왜 잠들어 있고 왜 강지혁 씨가 전화를 받은 거지? 설마 지금 둘이 같이 있다는 거야?’‘그리고 집에 없으면 어디 있다는 건데?’한지영의 시선이 핸드폰에서 다시 방문을 향했다.‘설마... 유진이가 지금 강지혁 씨와 같이 살고 있는 건가? 진짜?’한편, 전화 통화를 끊은 강지혁은 품 안에서 곱게 잠이 든 여자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가는 길 그녀가 추워하기라도 할까 봐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한테 덮어주었다.저택으로 들어가는 길, 사용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임유진이라는 아가씨가 강씨 집안에 들어올 정도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강 대표가 이렇게까지 한 여성을 보물 다루듯이 다루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역시 행여 품에 안긴 여자가 깨기라도 할까 봐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집사인 한 씨 아저씨는 어릴 때부터 돌봐왔던 작은 도련님이 한 여성한테 이렇게 지극정성인 모습을 보고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애당초 강지혁의 아버지가 강지혁의 어머니를 집에 들였을 때도 역시 똑같이 아껴주고 또 아껴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는가? 목숨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때로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한테 지나치게 감정을 쏟아부으면 그건 독이 되어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난다.작은 도련님도 큰 도련님처럼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저 아가씨한테 쏟아붓는 건 아닌지... 자신이 지켜본 바로는 작은 도련님은 그 진씨 가문 아가씨한테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한 씨 아저씨는 작은 도련님이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분을 찾았으면 좋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여성을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어 또다시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