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 안돼!엄마랑 내 동생 돌려줘!임유진이 힘껏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이때,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그녀를 이 악몽에서 꺼내주었다.임유진이 천천히 눈을 뜨자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깼어?"아직 비몽사몽인 상태였지만 남자의 잘생긴 얼굴만은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흘러나왔다."응..."그녀는 아직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럼 전화부터 받아."강지혁이 핸드폰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이니? 유진아, 일어났어?"한지영의 목소리에 임유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지영아!""그래, 너 지금 어디야? 강지혁 씨랑 같이 있는 거야? 어젯밤에 전화했을 때도 강지혁 씨가 받더니 지금도 또 그 사람이 전화를 받았네."두 번의 전화 모두 강지혁이 받았기 때문에 한지영도 미칠 노릇이었다."어젯밤에도 전화했었어?"임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그래, 어제 전화했더니 너 자고 있대.""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둘이 같이 사는 거야?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 건데?"한지영은 참아왔던 궁금증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에 임유진이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위해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강지혁을 보며 말했다."얘기하자면 좀 길어... 다음에 만나면 그때 다 말해줄게. 그보다 너 무슨 일 있어?""그게 말이지. 내가 어쩌다 발견하게 됐는데, 당시 사건의 증인이었던 사람이 지금 해성시에 있어. 그래서 너한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이 잠깐 멈칫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알겠어. 그럼... 너 언제 시간 돼? 우리 만나자.""그럼 나 오늘 퇴근하고 볼까?"한지영이 말을 이었다."너 오늘 환경위생과로 출근해? 내가 퇴근하고 데리러 갈까?""아니야, 계속 만나던 곳으로 와. 거기서 보자.""그래, 알았어."통화가 끝나고 임유진이 몸을 일으키려 양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자 고
그 앨범은 그녀의 추억이 가득 담긴 물건이었다.강지혁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앨범 하나 때문에 목숨도 잃은 뻔한 거 알아? 어제는 운이 좋아서 손에 화상만 입은 정도였지, 만약 불길이 더 커졌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봤어?""그 앨범 나한테 엄청 소중한 거야!"임유진이 말했다."그게 누나 손보다 중요해? 그깟 앨범 하나 지키겠다고 평생 손 못 쓰고 싶어?"강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중요해. 내 두 손이 다 타버릴지라도 난 그게 더 소중해."임유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한테 있어서 그 앨범은 그리움이고 일종의 집착이었다. 또한, 유일하게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물건이고 자신의 행복했던 시절을 담아 둔 물건이었다.임유진의 대답에 강지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는 거에 화가 났고 그녀보다 더 그녀의 몸을 걱정하는 자신한테도 화가 났다.그녀는 자신의 손이 불구가 돼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것이 싫었다."내 앨범은?"임유진이 고집스럽게 물었고 강지혁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서랍에서 앨범을 꺼내 그녀한테 넘겨주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안심이 됐고 조심스럽게 앨범을 한 장 한 장 보고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불길로 인해 절반 정도가 타버린 사진도 있었지만 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사진들도 있었다.그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고통을 삼키는 듯했다. 앨범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인 듯 보였다.앨범을 덮은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뭐?""나 병원에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리고 어젯밤에는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지."어젯밤 일을 기억해 낸 임유진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그냥 운 것도 아니고 강지혁의 품에서 엉엉 울었으니."이제부터 그런 감정적인 모습은 내 앞에서만 보이는 거로 해."강지혁이 몸을 숙여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강
"그 누구도 누나 함부로 해고 못 해."강지혁이 확신의 찬 말투로 말했다."일단 손부터 다 낫고 말해. 그 손을 하고 제대로 바닥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아?"임유진이 고개를 떨구며 침묵했다. 강지혁의 말처럼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손 다 나으면 그때는 뭘 하든 마음대로 해."그리고는 또 뭔가 생각이 난 듯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오늘 한지영 씨하고 만나기로 했었나? 손도 불편한데 날짜 바꾸는 게 어때?"강지혁을 오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이 말을 들었으면 아주 많이 경악했을 것이다. S 시에서 제일 속을 모르겠는 남자가 여인이 상처 하나에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은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 만약 임유진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지혁 앞에서 곧 죽을 듯이 숨을 헐떡거려도 관심 같은 건 받지 못했을 것이다."아니, 오늘 만나야 해."임유진이 확고하게 대답했다."지영이가 당시 사건의 증인에 관한 소식을 알고 있대. 그래서 만나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 해."임유진은 이때 강지혁 얼굴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살짝 주먹을 쥔 손 역시."증인이라고?""응.""자세한 건 지영이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어.""지금 혼자서 사건을 다시 파헤치겠다는 말이야?"강지혁이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내가 말했지. 그 사건은 내가 알아볼 수 있다고. 누나가 이렇게 힘들게 혼자서 애쓸 필요 없어.""하지만 누나가 사건을 다시 알아본다고 해도 차 사고를 낸 진범은 찾을 수 없는 거 아니야? 누가 나한테 누명을 씌웠는지도 모른 채 단지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내 죄를 없앤다고 해도 진범을 찾지 않는 이상 나는 사람들 눈에 여전히 살인자일 뿐이야.""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해?"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자 임유진이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이었다면 사람들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썼을 거야. 하지만 살인죄는... 아니야. 꼭 진실을 밝혀내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해."자신의
사진 속의 임유진은 조그마한 손에 통통한 볼살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까지 상당히 귀여웠다. 강지혁은 자신이 어린애의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마음이 풀어질 줄은 몰랐다. 사진 속에 그녀를 봐도 이렇게 사랑이 피어오르는데 만약 이 모습 이대로 눈앞에 있었으면 아마 물고 빨고 했을 것이다.임유진의 어린 시절이라 이렇게 귀엽다고 느끼는 걸까? 다른 아이들을 봤을 때는 이런 느낌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다.강지혁이 한 장 한 장 사진을 꺼내 보니 처음에는 두 사람이 찍혀있던 사진들이 점점 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엄마랑 같이 있을 때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였던 것 같다.혼자 찍은 사진은 엄마와 같이 찍은 사진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임유진은 이 사진들을 보며 추억에 젖어있었다."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랑 사진 찍는 걸 엄청 좋아했는데, 돌아가신 뒤로는 사진이 점점 줄었어."가끔 사진을 찍긴 했었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마치 아빠가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도 여전히 섞여 들지 못하는 것처럼.그때 강지혁의 눈길이 한 사진에 멈추었고 그 사진을 꺼내려는 손도 멈췄다."왜 그래?"임유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이 사진..."강지혁이 잠깐 멈칫하고는 말했다."이때 몇 살이었어?"임유진이 사진을 보니 거기에는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울타리 앞에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우거진 숲이 보였다. 사진을 본 임유진이 마치 추억이 되살아 나는 듯 말했다."아마 8살 9살 이쯤이었을 거야. 내가 이 꽃무늬 치마를 엄청 좋아했는데. 당시에는 엄청 비싸서 집 사정이 괜찮은 아이들만 입을 수 있는 거였어. 당연히 나도 할머니한테는 말도 못 꺼냈고. 그런데 할머니가 글쎄 내가 저 치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돈을 모아서 나한테 사주셨어."그녀는 외할머니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당시 이 치마를 사기까지 할머니가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지도 깨달았다. 그때 당시에는 아마 주변 모든 사람이 돈 아
"아파? 왜 아팠는데?"강지혁이 살짝은 긴장한 듯 물었다."그냥 열이 좀 났었어. 며칠은 꼼짝을 못 하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다시 회복이 됐지 뭐. 아끼던 치마를 더는 못 입게 된 게 아쉬웠을 뿐이야."그녀가 아쉬운 듯 말을 했지만, 당시 외할머니가 속상해하는 자신을 보며 반에서 1등하고 오면 다시 예쁜 치마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단지 1등을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외할머니 곁을 떠나 아빠 곁으로 가버렸을 뿐. 하지만 떠날 때 할머니가 몰래 그녀의 가방에 치마를 집어넣었다.임유진이 한창 옛 추억에 빠져 있을 때 강지혁의 손이 그녀의 이마로 다가왔다. 그에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나... 나 지금 열 안 나는데.""알아."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부터 사고 싶은 치마 있으면 내가 다 사줄게."그의 말에 임유진이 심장이 콩닥하고 뛰었다."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치마는 무슨."그녀는 강지혁을 바라보면 심장이 멋대로 뛰어서 눈을 애써 피하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래?"강지혁이 손을 내리고는 남은 사진까지 다 꺼낸 다음 꽃무늬 치마를 입은 사진을 손에 들었다."그럼 이 사진은 누나가 나한테 선물로 주는 게 어때?"강지혁은 그녀의 의사를 묻는 듯하면서 이미 손은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그 사진으로 뭐하게?"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귀여워서 소장 좀 하려고."전에 둘이 같이 살았을 때는 뛰어노는 아이들한테 관심도 없던 사람이 왜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은 이렇게 소중히 다루는지 모르겠는 임유진이었다."하지만 그 치마 입고 찍은 사진은 나도 그거 하나라."그녀한테도 추억이 많은 사진이고 더군다나 외할머니가 선물해 준 치마였기에 강지혁의 말에 상당히 난감했다."잘됐네."강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럼 더 가치 있는 사진이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다른 사진으로 하면 안 돼?"그녀가 다른 사진을 보여 주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아니, 난,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
강지혁이라면 귀여운 사람 같은 건 수도 없이 봤을 텐데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이 그의 소장 욕구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인가?강지혁에 대한 의문이 아직 가시질 않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한지영과 만나는 일이었다. 그녀가 외출하려고 하자 강지혁이 기사님을 붙여줬다. 몇 번의 경험으로 한번 정한 일은 다시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임유진은 강지혁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기사님한테 목적지를 말해줬다. 덕분에 1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반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임유진은 패스트 푸드점에 자리를 잡고 마실 것을 주문한 다음 한지영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친구를 기다리며 유리창을 통해 배달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배달... 전과가 있는 그녀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배달 일을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꽤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지금 있는 환경위생과는 자신이 만약 연차를 쓰게 되면 서미옥 씨가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 결국에는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게 된다. 그리고 거기는 고정 수입이기에 현재 할머니의 치료비의 1/4이나 부담해야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한지영의 목소리에 임유진이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친구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냥, 배달 일이나 해볼까 하고."그러자 한지영이 깜짝 놀라 말했다."뭐? 배달일이 얼마나 힘든데, 클레임이 좀 들어오는 줄 알아? 그리고 여성 배달원은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배달원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지는 않잖아."임유진이 말을 이었다."잘하든 못하든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잖아. 환경위생과처럼 내가 휴가를 내면 다른 사람이 내 몫까지 해줘야 하지도 않고.""그건 그래."한지영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맞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도착했어? 연차 쓴 거야?"임유진이 퇴근 시간이 자신보다 늦다는 걸 아주 잘 알았기에 웬일인지 먼저 도착해
"손은 괜찮아? 많이 아파?"한지영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괜찮아.""붕대로 감아서 심각해 보이는 것뿐이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이제 물건도 집을 수 있어."한지영이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 주문하러 갔다.두 사람은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눴고 임유진은 그제야 한지영이 그 증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지영의 직장 동료가 회사 동료들 대화방에 한 개의 동영상을 올렸는데 한지영이 그 동영상을 보고 당시 사건의 증인을 알아본 것이었다.그 남자는 직장 동료의 친척의 딸의 새 남편이었고 현재 해성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지영이 직장 동료에게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까지는 모르고 성이 ‘갈’이였다고 했다.특이한 성에서 한지영은 거의 확신을 했지만, 혹시 몰라 임유진한테도 해당 동영상을 보여주었다.해당 동영상은 신혼 방 집들이하는 영상이었는데 모두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임유진은 영상 중에서 새신랑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이윽고 발견한 새신랑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주위 사람들의 환호 속에 신부와 행복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임유진은 영상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임유진은 아직도 당시 이 남성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냉정한 얼굴로 임유진을 가리키며 그녀가 술을 마셨다고 했고 거기에 더해 자신도 옆에서 말리려고 시도했었지만 임유진이 고집을 피우며 차를 몰아 자리를 떴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임유진과 이 남자는 그저 같은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이 남자가 마침 자신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것뿐이었다.그녀는 지금까지 왜 이 남자가 법정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증언하라고 시킨 걸까? 자신한테 누명을 씌우려고?하지만 증인과 임유진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기에 판사는 증인의 말을 믿어주었다. 또한, 이러한 증인이 이 사람뿐이 아니었으니…"이 사람 맞아?"
차 안의 남자는 꽤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년과 남자 그사이의 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지금 여자아이들이 보면 환장할 아이돌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방금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달까.그런 남자가 지금 그녀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화를 내는 듯했다.‘화를 내고 있다고?’임유진이 의아함에 다시 한번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 봐도 역시 그가 지금 화가 나 있는 상대는 우리 쪽의..."유진아, 내 말 듣고 있어?!"한지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다시 홱 하고 돌렸다."미안, 뭐라고 했지?"임유진이 한지영을 보며 물었다."네 손 완치되려면 얼마나 걸리냐고.""일주일 정도 걸린대, 그 뒤로는 피부가 점점 회복되길 기다리면 되는 거고."임유진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뒤를 돌아 그 남자 쪽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뭘 보는 거야?"한지영이 임유진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도로에 뭐 있어?""아니야."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잘못 본 건가? 그래, 그럴 거야. 이쪽을 보고 화를 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우리를 향한 건지는 모르는 거잖아.’"참, 너 이제 강지혁 씨랑 같이 사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임유진의 전화를 두 번이나 다 강지혁이 받은 걸 의문스럽게 여긴 한지영이 드디어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뭐... 그렇지.""그래서... 동거라고?"임유진의 확실치 않은 답변에 한지영이 확실하게 물었다.‘동거’라는 두 글자에 임유진이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잠시 같이 사는 것뿐이야. 나 손 다 나으면 그때는 다시 나올 수 있을 거야."임유진이 얼른 해명했다."나올 수 있다고?"그 말에 한지영이 얼굴을 찌푸렸다."그럼 지금은 강제로 같이 살고 있다는 거야?"지금 생각해 보면 임유진이 고통스럽게 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거의 절반 이상이 강지혁 때문이었고, 심지어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
아니, 꼭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게 그녀의 정보만 아니었지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L 시의 또 다른 ‘임유진’의 정보는 맞았기 때문이다.다만 그 ‘임유진’은 부모도 친인척도 없는 천애 고아였다.임유진은 당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기에 그 ‘임유진’의 모든 정보가 바로 그녀의 것이라고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그도 그럴 게 ‘임유진’의 집에 있던 사진이나 옷이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임유진의 것이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임유진’으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아무것도 기억이 나는 게 없는데 아이의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했던 그런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게다가 아이도 여자아이 한 명이 다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 뒤로 계속해서 ‘임유진’의 신분으로 살아가다 그녀는 근 2년간 꿈속에서 웬 남자와 웃기도 하고 포옹도 하고 서로 달콤한 말도 속삭이는 광경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직감으로 그 남자가 바로 현이의 아빠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얼굴이 줄곧 모호했기에 그녀는 어떤 얼굴이 자기 남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체격이 비슷하거나 얼굴 윤곽이 비슷한 남자만 보면 바로 달려가서 질문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번번이 실망만 했다.가끔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꿈 얘기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대답을 하지 못했기에 금방 쳐낼 수 있었다.그러다 드디어 일주일 전의 꿈에서 남자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굴이 선명해 짐과 동시에 남자의 신분 역시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강지혁!”그녀와 꿈에서 결혼하고 사랑을 속삭인 남자는 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이었다.기억을 잃은 채 라온시에서 살았어도 강지혁의 이름과 GH 그룹의 기사는 항상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매스컴에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정면 사진을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지금 딸이 보고 있는 사진
그리고 예쁜 눈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도 예쁜 눈인데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감정이 담겨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아들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선율의 입에서 이런 헛소리가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얘기를 흘리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아니.”강지혁이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네, 알겠어요.”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리고 이것으로 부자의 대화는 끝이었다.도우미가 강선율을 씻겨주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자 강지혁은 발걸음을 옮겨 서재로 향했다.그는 한 서랍 앞에 멈춰서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당시 강지혁과 임유진이 혼인 신고하고 갔을 때 포토 부스에서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었다.강지혁은 사진 속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옅게 지은 미소는 온갖 짜증도 다 날려줄 만큼 온화하고 또 부드러웠다.다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단지 편안하게만 다가올 뿐이지 심장이 뛸 만큼의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게다가 깜짝 놀랄 만큼의 미모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무난하게만 느껴졌다.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그는 이토록 평범한 여자를 사랑까지 했고 심지어 이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나았다.사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따랐으면 이름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이런 집안도 변변찮고 심지어 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매번 이렇게 사진을 볼 때면 강지혁의 머릿속으로 파편 같은 짤막한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파편 속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모호했다.고이준은 그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고 강선율의 엄마라고 했다.강지혁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과 고이준이 그에게 얘기해준 그가 잊은 것들을 조합해 당시 그와 임유진이 어떤 사이였는지 대충 파악은 했다.하지만 그저 파악만 했을 뿐 여전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사람들이
“나가봐.”강지혁의 말에 선생님은 물건을 챙기고 방을 나갔다.그렇게 방안에는 오직 강지혁과 강선율 두 부자만 남게 되었다.강지혁은 천 피스는 족히 넘어 보이는 퍼즐을 하나하나 묵묵히 맞춰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렇게 큰 퍼즐은 어른이라도 최소 열흘을 있어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강선율을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도 아는 것처럼 퍼즐을 놓고 맞추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 퍼즐을 보고 잠깐 흠칫했다.퍼즐의 그림이 두 명의 남자아이와 한 명의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혹시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이 퍼즐을 고른 걸까?강지혁은 당시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후 고이준에게서 그에게는 임유진이라는 아내가 있고 그녀의 뱃속에 세쌍둥이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진 바람에 안타깝게도 세쌍둥이 중 오직 한 명만 살아남았다는 것도 들었다.그 뒤로 몇 년이 지나고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 강선율은 세쌍둥이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이에 아들에게 물었다.“그런데 왜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라고 하는 거지? 두 동생 모두 남동생일 수도 있고 여동생 두 명일 수도 있잖아.”“이유는 없어요.”아이는 강지혁의 의문에 이렇게만 대답해주었다.꼭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인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강지혁은 강선율의 옆에 앉아 아이가 퍼즐을 완성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남동생이 필요하면 아빠가 남동생도 입양해 올게.”애초에 소안나를 입양한 건 강선율이 길에서 괴롭힘당하고 있는 소씨 모녀를 보고 갑자기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강지혁은 아들의 한마디에 바로 사람을 시켜 소씨 모녀를 데려왔다. 그러고는 소민아에게 만약 딸을 양녀로 삼게 해주면 앞으로 소안나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필요한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다 해주겠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