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 왜 아팠는데?"강지혁이 살짝은 긴장한 듯 물었다."그냥 열이 좀 났었어. 며칠은 꼼짝을 못 하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다시 회복이 됐지 뭐. 아끼던 치마를 더는 못 입게 된 게 아쉬웠을 뿐이야."그녀가 아쉬운 듯 말을 했지만, 당시 외할머니가 속상해하는 자신을 보며 반에서 1등하고 오면 다시 예쁜 치마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단지 1등을 했을 때 그녀는 이미 외할머니 곁을 떠나 아빠 곁으로 가버렸을 뿐. 하지만 떠날 때 할머니가 몰래 그녀의 가방에 치마를 집어넣었다.임유진이 한창 옛 추억에 빠져 있을 때 강지혁의 손이 그녀의 이마로 다가왔다. 그에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나... 나 지금 열 안 나는데.""알아."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부터 사고 싶은 치마 있으면 내가 다 사줄게."그의 말에 임유진이 심장이 콩닥하고 뛰었다."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치마는 무슨."그녀는 강지혁을 바라보면 심장이 멋대로 뛰어서 눈을 애써 피하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래?"강지혁이 손을 내리고는 남은 사진까지 다 꺼낸 다음 꽃무늬 치마를 입은 사진을 손에 들었다."그럼 이 사진은 누나가 나한테 선물로 주는 게 어때?"강지혁은 그녀의 의사를 묻는 듯하면서 이미 손은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그 사진으로 뭐하게?"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귀여워서 소장 좀 하려고."전에 둘이 같이 살았을 때는 뛰어노는 아이들한테 관심도 없던 사람이 왜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은 이렇게 소중히 다루는지 모르겠는 임유진이었다."하지만 그 치마 입고 찍은 사진은 나도 그거 하나라."그녀한테도 추억이 많은 사진이고 더군다나 외할머니가 선물해 준 치마였기에 강지혁의 말에 상당히 난감했다."잘됐네."강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럼 더 가치 있는 사진이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다른 사진으로 하면 안 돼?"그녀가 다른 사진을 보여 주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아니, 난,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
강지혁이라면 귀여운 사람 같은 건 수도 없이 봤을 텐데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이 그의 소장 욕구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인가?강지혁에 대한 의문이 아직 가시질 않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한지영과 만나는 일이었다. 그녀가 외출하려고 하자 강지혁이 기사님을 붙여줬다. 몇 번의 경험으로 한번 정한 일은 다시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임유진은 강지혁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기사님한테 목적지를 말해줬다. 덕분에 1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반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임유진은 패스트 푸드점에 자리를 잡고 마실 것을 주문한 다음 한지영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친구를 기다리며 유리창을 통해 배달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배달... 전과가 있는 그녀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배달 일을 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꽤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지금 있는 환경위생과는 자신이 만약 연차를 쓰게 되면 서미옥 씨가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나 결국에는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게 된다. 그리고 거기는 고정 수입이기에 현재 할머니의 치료비의 1/4이나 부담해야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한지영의 목소리에 임유진이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친구의 얼굴을 확인했다."그냥, 배달 일이나 해볼까 하고."그러자 한지영이 깜짝 놀라 말했다."뭐? 배달일이 얼마나 힘든데, 클레임이 좀 들어오는 줄 알아? 그리고 여성 배달원은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배달원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지는 않잖아."임유진이 말을 이었다."잘하든 못하든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잖아. 환경위생과처럼 내가 휴가를 내면 다른 사람이 내 몫까지 해줘야 하지도 않고.""그건 그래."한지영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맞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도착했어? 연차 쓴 거야?"임유진이 퇴근 시간이 자신보다 늦다는 걸 아주 잘 알았기에 웬일인지 먼저 도착해
"손은 괜찮아? 많이 아파?"한지영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괜찮아.""붕대로 감아서 심각해 보이는 것뿐이야.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이제 물건도 집을 수 있어."한지영이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 주문하러 갔다.두 사람은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눴고 임유진은 그제야 한지영이 그 증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지영의 직장 동료가 회사 동료들 대화방에 한 개의 동영상을 올렸는데 한지영이 그 동영상을 보고 당시 사건의 증인을 알아본 것이었다.그 남자는 직장 동료의 친척의 딸의 새 남편이었고 현재 해성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한지영이 직장 동료에게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까지는 모르고 성이 ‘갈’이였다고 했다.특이한 성에서 한지영은 거의 확신을 했지만, 혹시 몰라 임유진한테도 해당 동영상을 보여주었다.해당 동영상은 신혼 방 집들이하는 영상이었는데 모두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임유진은 영상 중에서 새신랑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이윽고 발견한 새신랑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주위 사람들의 환호 속에 신부와 행복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임유진은 영상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임유진은 아직도 당시 이 남성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냉정한 얼굴로 임유진을 가리키며 그녀가 술을 마셨다고 했고 거기에 더해 자신도 옆에서 말리려고 시도했었지만 임유진이 고집을 피우며 차를 몰아 자리를 떴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임유진과 이 남자는 그저 같은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이 남자가 마침 자신의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것뿐이었다.그녀는 지금까지 왜 이 남자가 법정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증언하라고 시킨 걸까? 자신한테 누명을 씌우려고?하지만 증인과 임유진 사이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기에 판사는 증인의 말을 믿어주었다. 또한, 이러한 증인이 이 사람뿐이 아니었으니…"이 사람 맞아?"
차 안의 남자는 꽤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년과 남자 그사이의 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지금 여자아이들이 보면 환장할 아이돌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방금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달까.그런 남자가 지금 그녀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화를 내는 듯했다.‘화를 내고 있다고?’임유진이 의아함에 다시 한번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 봐도 역시 그가 지금 화가 나 있는 상대는 우리 쪽의..."유진아, 내 말 듣고 있어?!"한지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다시 홱 하고 돌렸다."미안, 뭐라고 했지?"임유진이 한지영을 보며 물었다."네 손 완치되려면 얼마나 걸리냐고.""일주일 정도 걸린대, 그 뒤로는 피부가 점점 회복되길 기다리면 되는 거고."임유진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뒤를 돌아 그 남자 쪽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뭘 보는 거야?"한지영이 임유진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도로에 뭐 있어?""아니야."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잘못 본 건가? 그래, 그럴 거야. 이쪽을 보고 화를 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우리를 향한 건지는 모르는 거잖아.’"참, 너 이제 강지혁 씨랑 같이 사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임유진의 전화를 두 번이나 다 강지혁이 받은 걸 의문스럽게 여긴 한지영이 드디어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뭐... 그렇지.""그래서... 동거라고?"임유진의 확실치 않은 답변에 한지영이 확실하게 물었다.‘동거’라는 두 글자에 임유진이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잠시 같이 사는 것뿐이야. 나 손 다 나으면 그때는 다시 나올 수 있을 거야."임유진이 얼른 해명했다."나올 수 있다고?"그 말에 한지영이 얼굴을 찌푸렸다."그럼 지금은 강제로 같이 살고 있다는 거야?"지금 생각해 보면 임유진이 고통스럽게 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거의 절반 이상이 강지혁 때문이었고, 심지어
이 반응은 분명히 뭔가 있다는 생각에 임유진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한지영을 바라봤다."누구 있는 거지?""뭐..."한지영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딱 한 명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긴 했었는데 얼굴이 너무 어려 보여서 그 남자랑 같이 있으면 내가 꼭 돈으로 어린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아름다운 만난 정도였지 뭐...""..."돈으로 어린애를 사는 것 같다는 말에 임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한지영도 이제 고작 27살인데 누가 누구한테 어리다고 하는 건지."많이 어려?""뭐…. 좀 어려."그녀가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그때 해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그 뒤로... 아, 됐어. 그 사람은 아마 지금 나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일 거야."‘그렇게 잘생긴 남자 주위에는 예쁘고 어린 여자들이 차고 넘치겠는데 고작 며칠 알고 지낸 나 같은 걸 기억할 리가 없잖아.’한지영은 그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만남이 있었다는 거에 만족했다.임유진은 한지영의 입에서 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얼굴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한지영이 해외로 나간 건 딱 한 번뿐이었고 임유진의 일이 터지기 전에 해외에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에 학교 쪽에 면접 신청을 보냈었다.하지만 한지영이 출국하고 곧바로 임유진의 일이 터졌고 그에 한지영은 면접을 포기한 채 서둘러 귀국했었다.임유진은 돌이켜 보면 모두 자신 때문에 한지영이 공부할 기회도 잃었고 그로 인해 한지영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지영의 부모님이 아까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친구인 나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아까워 미칠 것 같으니까.임유진의 표정을 본 한지영은 바로 그녀가 또 자신이 해외로 가서 공부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녀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괜한 생각 하지 마. 내가 해외로 나가지 못하게 된 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나 성적도 너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면접을 봤다고 해도 통과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였어.
그 말에 강지혁이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내가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해?"임유진이 그의 눈빛에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강지혁의 말대로 그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빛에 자신은 왜 그렇게 긴장했지?"나 먼저 올라갈게."임유진이 피하든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강지혁이 갑자기 그녀의 팔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난 누나가 무죄라는 말 믿어."강지혁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하지만 누나 혼자 뭔가를 알아내려 한다는 건 불가능해. 벌써 3년이나 지난 사건이야. 지금 뭔가 찾는다고 해도 누나가 원하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그 말에 임유진이 맑은 눈동자로 강지혁을 보며 옅게 웃었다."너 같이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사람조차도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왜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언젠가는 꼭 내 결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을까?"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에게는 햇살처럼 눈 부셨고 가슴 한구석은 찔리기라도 한 듯 아프기 시작했다. 강지혁이 그렇게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 누나가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임유진이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했다."만약 내가 누나한테 네가 원하는 진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계속 내 옆에서 나만 바라봐달라고 하면 누나는 어떻게 할 거야?"강지혁의 숨결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임유진의 심장이 현재 전례 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임유진이 만약 저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동안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던 죄를 씻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결백은 그녀의 자유를 대가로, 아니 그녀의 몸을 대가로 쟁취한 것이 된다. 이런 게 과연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일까?그녀도 이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라 제안을 수락하면 어
"누나가 그 여자애가 맞든 아니든 너는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해, 다른 사람은 안 돼."강지혁이 사진을 노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말에는 짙은 소유욕이 묻어 있었고 그녀를 쥔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과도 같았다....호화로운 클럽 룸 안, 임유라는 현재 온 힘을 다해 강현수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놓인 상황으로 봐서는 강현수한테 기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임유라가 룸에 들어서서부터 강현수는 줄곧 임유진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그녀의 어릴 적은 어땠는지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등과 같은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게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모두 물어보고 있다.‘뭐야 이게! 여자친구는 나잖아!’임유라는 속으로 엄청 짜증이 났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지으며 사이좋은 자매인 것처럼 그녀의 기억 속 임유진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기억을 회상한다고 해도 생활 속의 작은 일이 전부였지만 강현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임유라의 얘기를 경청했다.이윽고 임유진의 어릴 적 얘기를 일단락하고 임유라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현수 씨, 전에 일은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원래 하기로 했었던… 조연 자리도 지금은 없고, 다들 뒤에서 내 흉만 보고 있어요. 당신 전 여자친구는 모두 잘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고, 다 내가 제일 못났다고 그런단 말이에요..."강현수가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임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임유라는 자신의 연기가 이 남자 앞에서는 막히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나도 당신 옆자리에 어울릴 수 있는 여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 배역 하나만 주면 안 돼요? 나 진짜 잘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을게요."임유라가 사정하듯 말했다."그래요? 어떤 배역이 하고 싶은데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물었다.‘당연히 유명한 감독이 연출한 영화나 드라마면 다 괜찮지!’임유라가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겸손하
"그럼 계속 당신 언니 얘기를 해볼까요?"강현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네? 이러고... 말하라고요?"임유라가 황당해하며 물었다."네, 이러고 하세요."강현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임유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신의 기억 속의 임유진 얘기를 하며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임유진은 그저 일개 환경미화원일 뿐인데, 심지어 전과도 있는데!’‘아무리 얼굴이 예쁘다고 한들 어떻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보다 3년이나 옥살이를 하다 나온 임유진한테 더 관심이 있을 수 있냐고?’‘대체... 강현수는 임유진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고!’심지어 임유라는 강현수가 그녀와 연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게 자신이 임유진의 동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임유라는 이런 불길한 생각은 금세 치워버렸다."그러다 언니가 소민준을 만나게 되고 소민준은 그 뒤로 계속 언니한테 구애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언니가 산을 타다 발이 삐끗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민준이 언니를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갔었거든요. 그러다 결국 언니도 소민준의 마음을 받아줬고요. 두 사람이 그때 얼마나 아름다운 연애를 했는지, 언니가 소민준한테 직접 한 도시락도 가져다 바쳤다니까요."임유라는 일부러 두 사람의 연애사를 구체적이고 달콤하게 묘사하며 강현수한테 임유진은 이미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음을 어필했다. 또한, 자신은 공식적인 남자친구가 당신이 처음이라는 것까지.임유라가 계속 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강현수의 손도 점점 내려가 드디어 그녀가 불빛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강현수는 임유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소민준이 자기를 업어줘서 소민준하고 연애했다는 거예요?"강현수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다."네... 네, 그렇죠..."강현수의 아우라에 잔뜩 겁먹은 임유라가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에 강현수가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더니 입을 열었다."이만 가보세요."‘뭐라고?’임유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그대로 가만히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
아니, 꼭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게 그녀의 정보만 아니었지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L 시의 또 다른 ‘임유진’의 정보는 맞았기 때문이다.다만 그 ‘임유진’은 부모도 친인척도 없는 천애 고아였다.임유진은 당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기에 그 ‘임유진’의 모든 정보가 바로 그녀의 것이라고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그도 그럴 게 ‘임유진’의 집에 있던 사진이나 옷이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임유진의 것이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임유진’으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아무것도 기억이 나는 게 없는데 아이의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했던 그런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게다가 아이도 여자아이 한 명이 다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 뒤로 계속해서 ‘임유진’의 신분으로 살아가다 그녀는 근 2년간 꿈속에서 웬 남자와 웃기도 하고 포옹도 하고 서로 달콤한 말도 속삭이는 광경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직감으로 그 남자가 바로 현이의 아빠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얼굴이 줄곧 모호했기에 그녀는 어떤 얼굴이 자기 남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체격이 비슷하거나 얼굴 윤곽이 비슷한 남자만 보면 바로 달려가서 질문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번번이 실망만 했다.가끔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꿈 얘기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대답을 하지 못했기에 금방 쳐낼 수 있었다.그러다 드디어 일주일 전의 꿈에서 남자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굴이 선명해 짐과 동시에 남자의 신분 역시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강지혁!”그녀와 꿈에서 결혼하고 사랑을 속삭인 남자는 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이었다.기억을 잃은 채 라온시에서 살았어도 강지혁의 이름과 GH 그룹의 기사는 항상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매스컴에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정면 사진을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지금 딸이 보고 있는 사진
그리고 예쁜 눈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도 예쁜 눈인데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감정이 담겨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아들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선율의 입에서 이런 헛소리가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얘기를 흘리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아니.”강지혁이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네, 알겠어요.”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리고 이것으로 부자의 대화는 끝이었다.도우미가 강선율을 씻겨주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자 강지혁은 발걸음을 옮겨 서재로 향했다.그는 한 서랍 앞에 멈춰서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당시 강지혁과 임유진이 혼인 신고하고 갔을 때 포토 부스에서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었다.강지혁은 사진 속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옅게 지은 미소는 온갖 짜증도 다 날려줄 만큼 온화하고 또 부드러웠다.다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단지 편안하게만 다가올 뿐이지 심장이 뛸 만큼의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게다가 깜짝 놀랄 만큼의 미모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무난하게만 느껴졌다.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그는 이토록 평범한 여자를 사랑까지 했고 심지어 이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나았다.사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따랐으면 이름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이런 집안도 변변찮고 심지어 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매번 이렇게 사진을 볼 때면 강지혁의 머릿속으로 파편 같은 짤막한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파편 속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모호했다.고이준은 그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고 강선율의 엄마라고 했다.강지혁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과 고이준이 그에게 얘기해준 그가 잊은 것들을 조합해 당시 그와 임유진이 어떤 사이였는지 대충 파악은 했다.하지만 그저 파악만 했을 뿐 여전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