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의 남자는 꽤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소년과 남자 그사이의 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지금 여자아이들이 보면 환장할 아이돌 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방금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달까.그런 남자가 지금 그녀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화를 내는 듯했다.‘화를 내고 있다고?’임유진이 의아함에 다시 한번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 봐도 역시 그가 지금 화가 나 있는 상대는 우리 쪽의..."유진아, 내 말 듣고 있어?!"한지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다시 홱 하고 돌렸다."미안, 뭐라고 했지?"임유진이 한지영을 보며 물었다."네 손 완치되려면 얼마나 걸리냐고.""일주일 정도 걸린대, 그 뒤로는 피부가 점점 회복되길 기다리면 되는 거고."임유진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번 뒤를 돌아 그 남자 쪽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뭘 보는 거야?"한지영이 임유진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도로에 뭐 있어?""아니야."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잘못 본 건가? 그래, 그럴 거야. 이쪽을 보고 화를 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우리를 향한 건지는 모르는 거잖아.’"참, 너 이제 강지혁 씨랑 같이 사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임유진의 전화를 두 번이나 다 강지혁이 받은 걸 의문스럽게 여긴 한지영이 드디어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뭐... 그렇지.""그래서... 동거라고?"임유진의 확실치 않은 답변에 한지영이 확실하게 물었다.‘동거’라는 두 글자에 임유진이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잠시 같이 사는 것뿐이야. 나 손 다 나으면 그때는 다시 나올 수 있을 거야."임유진이 얼른 해명했다."나올 수 있다고?"그 말에 한지영이 얼굴을 찌푸렸다."그럼 지금은 강제로 같이 살고 있다는 거야?"지금 생각해 보면 임유진이 고통스럽게 옥살이를 하게 된 것도 거의 절반 이상이 강지혁 때문이었고, 심지어
이 반응은 분명히 뭔가 있다는 생각에 임유진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한지영을 바라봤다."누구 있는 거지?""뭐..."한지영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딱 한 명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긴 했었는데 얼굴이 너무 어려 보여서 그 남자랑 같이 있으면 내가 꼭 돈으로 어린애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아름다운 만난 정도였지 뭐...""..."돈으로 어린애를 사는 것 같다는 말에 임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한지영도 이제 고작 27살인데 누가 누구한테 어리다고 하는 건지."많이 어려?""뭐…. 좀 어려."그녀가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그때 해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그 뒤로... 아, 됐어. 그 사람은 아마 지금 나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일 거야."‘그렇게 잘생긴 남자 주위에는 예쁘고 어린 여자들이 차고 넘치겠는데 고작 며칠 알고 지낸 나 같은 걸 기억할 리가 없잖아.’한지영은 그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인생에서 그런 만남이 있었다는 거에 만족했다.임유진은 한지영의 입에서 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얼굴이 삽시에 어두워졌다. 한지영이 해외로 나간 건 딱 한 번뿐이었고 임유진의 일이 터지기 전에 해외에서 더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에 학교 쪽에 면접 신청을 보냈었다.하지만 한지영이 출국하고 곧바로 임유진의 일이 터졌고 그에 한지영은 면접을 포기한 채 서둘러 귀국했었다.임유진은 돌이켜 보면 모두 자신 때문에 한지영이 공부할 기회도 잃었고 그로 인해 한지영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지영의 부모님이 아까워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친구인 나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아까워 미칠 것 같으니까.임유진의 표정을 본 한지영은 바로 그녀가 또 자신이 해외로 가서 공부하지 못하게 된 것이 그녀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괜한 생각 하지 마. 내가 해외로 나가지 못하게 된 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나 성적도 너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면접을 봤다고 해도 통과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였어.
그 말에 강지혁이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내가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해?"임유진이 그의 눈빛에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강지혁의 말대로 그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눈빛에 자신은 왜 그렇게 긴장했지?"나 먼저 올라갈게."임유진이 피하든 그를 지나쳤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강지혁이 갑자기 그녀의 팔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난 누나가 무죄라는 말 믿어."강지혁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하지만 누나 혼자 뭔가를 알아내려 한다는 건 불가능해. 벌써 3년이나 지난 사건이야. 지금 뭔가 찾는다고 해도 누나가 원하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그 말에 임유진이 맑은 눈동자로 강지혁을 보며 옅게 웃었다."너 같이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사람조차도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왜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언젠가는 꼭 내 결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을까?"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에게는 햇살처럼 눈 부셨고 가슴 한구석은 찔리기라도 한 듯 아프기 시작했다. 강지혁이 그렇게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 누나가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임유진이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어리둥절했다."만약 내가 누나한테 네가 원하는 진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계속 내 옆에서 나만 바라봐달라고 하면 누나는 어떻게 할 거야?"강지혁의 숨결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임유진의 심장이 현재 전례 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임유진이 만약 저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동안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던 죄를 씻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결백은 그녀의 자유를 대가로, 아니 그녀의 몸을 대가로 쟁취한 것이 된다. 이런 게 과연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일까?그녀도 이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라 제안을 수락하면 어
"누나가 그 여자애가 맞든 아니든 너는 평생 내 곁에만 있어야 해, 다른 사람은 안 돼."강지혁이 사진을 노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말에는 짙은 소유욕이 묻어 있었고 그녀를 쥔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과도 같았다....호화로운 클럽 룸 안, 임유라는 현재 온 힘을 다해 강현수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놓인 상황으로 봐서는 강현수한테 기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임유라가 룸에 들어서서부터 강현수는 줄곧 임유진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그녀의 어릴 적은 어땠는지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등과 같은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게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모두 물어보고 있다.‘뭐야 이게! 여자친구는 나잖아!’임유라는 속으로 엄청 짜증이 났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지으며 사이좋은 자매인 것처럼 그녀의 기억 속 임유진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기억을 회상한다고 해도 생활 속의 작은 일이 전부였지만 강현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임유라의 얘기를 경청했다.이윽고 임유진의 어릴 적 얘기를 일단락하고 임유라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현수 씨, 전에 일은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원래 하기로 했었던… 조연 자리도 지금은 없고, 다들 뒤에서 내 흉만 보고 있어요. 당신 전 여자친구는 모두 잘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고, 다 내가 제일 못났다고 그런단 말이에요..."강현수가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임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임유라는 자신의 연기가 이 남자 앞에서는 막히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나도 당신 옆자리에 어울릴 수 있는 여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 나한테 배역 하나만 주면 안 돼요? 나 진짜 잘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아무런 일도 벌이지 않을게요."임유라가 사정하듯 말했다."그래요? 어떤 배역이 하고 싶은데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물었다.‘당연히 유명한 감독이 연출한 영화나 드라마면 다 괜찮지!’임유라가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다는 것처럼 겸손하
"그럼 계속 당신 언니 얘기를 해볼까요?"강현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네? 이러고... 말하라고요?"임유라가 황당해하며 물었다."네, 이러고 하세요."강현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임유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신의 기억 속의 임유진 얘기를 하며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임유진은 그저 일개 환경미화원일 뿐인데, 심지어 전과도 있는데!’‘아무리 얼굴이 예쁘다고 한들 어떻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나보다 3년이나 옥살이를 하다 나온 임유진한테 더 관심이 있을 수 있냐고?’‘대체... 강현수는 임유진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고!’심지어 임유라는 강현수가 그녀와 연인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게 자신이 임유진의 동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임유라는 이런 불길한 생각은 금세 치워버렸다."그러다 언니가 소민준을 만나게 되고 소민준은 그 뒤로 계속 언니한테 구애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언니가 산을 타다 발이 삐끗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민준이 언니를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갔었거든요. 그러다 결국 언니도 소민준의 마음을 받아줬고요. 두 사람이 그때 얼마나 아름다운 연애를 했는지, 언니가 소민준한테 직접 한 도시락도 가져다 바쳤다니까요."임유라는 일부러 두 사람의 연애사를 구체적이고 달콤하게 묘사하며 강현수한테 임유진은 이미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음을 어필했다. 또한, 자신은 공식적인 남자친구가 당신이 처음이라는 것까지.임유라가 계속 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강현수의 손도 점점 내려가 드디어 그녀가 불빛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강현수는 임유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소민준이 자기를 업어줘서 소민준하고 연애했다는 거예요?"강현수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들었다."네... 네, 그렇죠..."강현수의 아우라에 잔뜩 겁먹은 임유라가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에 강현수가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더니 입을 열었다."이만 가보세요."‘뭐라고?’임유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그대로 가만히
그녀는 강현수를 등에 업고 힘들게 걸어가면서도 끊임없이 그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경찰 아저씨 만날 때까지 계속 너를 업고 있어 줄 거니까."‘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라...’그녀의 몸은 두려움에 엄청나게 떨고 있었고 목소리도 이미 떨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매우 무서웠을 텐데 그녀는 끝까지 강현수를 다독여 주고 있었다."너 좀 무겁다..."가끔 참다못해 불평을 늘어놓긴 했지만."미안해"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었다."헤헤, 상처 다 나으면 너도 다 업어줘야 해. 알겠지?"그녀는 여전히 생긋생긋 웃으며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강현수는 자신이 자기보다 작은 여자애한테 보호받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그래, 앞으로는 내가 계속 업어줄게."이 말이 그녀한테 하는 얘기 같지만, 사실은 강현수가 자신한테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어떠한 힘든 일이 있어도 꼭 그녀를 업고 같이 나아가겠다는 일종의 다짐과도 같은 말이었다.‘대체, 어디 있는 거야...’몇 년간 강현수는 그날 그렇게 그녀의 손을 놓친 것을 끊임없이 후회했다. 당시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있었을까?강현수는 끊임없이 가정했고, 그에 대한 답변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임유진도 그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너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강현수가 나지막이 소리를 내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침묵뿐이었다.....임유진은 현재 환경위생과에 사직서를 내러 왔다. 그녀가 일을 그만두겠다는 소식을 들은 소장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그만두겠다고? 아니, 왜? 혹시 일이 많이 힘들어? 바닥 쓰는 일이 힘들면 사무직으로 바꿔줄 수도 있어."며칠 전 윗선에서 임유진이 휴가를 쓴다고 말이 왔을 때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전에도 직장 내에서 임유진과는 일을 하지 말라며 동료들이 그녀를 쫓아내려고 했을 때도 소장은 윗선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직장 내 따돌림은 바람직하지 못하니 알아서 잘
그러면 앞으로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차별 대우를 받을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이상한 시선으로 볼 것이다.“괜찮아요. 업무 환경을 좀 바꾸고 싶어서요.”임유진이 얘기했다.“그렇구나.”소장은 임유진 배후의 그분이 그녀를 위해 직업을 준비해 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더는 임유진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사직하겠다는 임유진을 말리지 않고 휴가를 맡았을 때의 월급도 깎지 않았다. 게다가 한 달의 월급을 더 지급하며 재무 쪽에 보내 처리하게 했다.환경위생과에서 나온 임유진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더 준 한 달의 월급은 아마도 소장이 좋은 뜻으로 준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강지혁과 상관있을 것이다.그녀가 올곧은 사람이라면, 그대로 거절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도 하지 못했다.외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저번에 한지영에게서 빌린 돈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나갈 돈이 많은데, 그렇게 되면 원래의 빚도 갚지 못하고 더 많은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할 것이다.임유진은 서미옥이 일하는 곳까지 걸어가 서미옥과 작별 인사를 했다.서미옥은 임유진이 사직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서 말했다.“네가 사직이라니,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항상 휴가를 쓰는 것도 안 좋잖아요.”그녀가 얘기했다.“그건 그냥 돌발 상황이야. 휴가를 맡으면 뭐 어때, 내가 좀 더 일하면 되지.”서미옥이 말하면서 여전히 붕대로 감싸져 있는 임유진의 손가락을 보았다.“손은 괜찮아?”“이틀 정도만 지나면 붕대 풀 수 있대요. 큰일은 아니에요.”임유진이 대답했다.“그럼 앞으로 어디에 취직하려고?”서미옥이 그녀를 걱정하며 물었다.“가서 배달이나 할까 봐요.”임유진이 대답했다.“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서미옥이 한숨을 쉬었다. 배달이라는 일은 오토바이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직업이었기에 웬만한 청소부보다 체력적으로 힘들었다.“힘든 건 두렵지 않아요.”임유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저 돈이 없는 것이 두려웠다.돈이 진정으로 필요할
“괜찮아, 내가 알아서 찾을게.”임유진이 거절하며 얘기했다.강지혁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살짝 더 주었다.“누나는 내가 누나를 도와서 일자리를 찾아주는 게 싫어?”임유진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몸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느껴졌다.“난 혼자 힘으로 취직하고 싶을 뿐이야.”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키고 시선을 들어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만약 강지혁이 임유진을 도와 일자리를 찾는다면 일이 쉬워질 것은 뻔했다. 게다가 그가 주는 일은 쉽고 돈도 많이 벌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자리를 언제까지 가질 수 있을까? 나중에 그가 이 게임에 질려서 임유진을 차버린다면,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또 혹은 이 걱정 때문 만이 아니라 그녀의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었다.오늘까지 굳세게 살아오면서, 잔혹한 현실과 고된 생활이 그녀의 자존심을 다 갉아먹었다.예전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꿇는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꿇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바닥에서 뒹굴던 음식을 주워 먹었고 또 다른 사람의 발밑에 짓밟힌 젓도 있었다.살아있는 것도 힘든데, 자존심을 지킬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예전의 그녀와 달리 자존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그저 조금 남은 자존심만 지키고 싶을 뿐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약과 붕대를 가져오던 고용인은 주변의 공기가 숨 막힐 듯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고용인은 손을 달달 떨며 물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고용주의 심기를 거스르게 될까 봐 빠르게 옆으로 물러났다. S시에서 감히 강지혁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강지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강지혁이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답던 두 눈에도 눈에 띄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말 못할 두려움이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긴, 임유진은 원래도 강지혁이라는 사람을 두려워했으니. 하지만 지금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