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입만 열면 네 엄마인데, 네 여동생은 안중에도 없어? 좋아, 정말 네 엄마의 좋은 딸이야!”임정호는 화가 나서 곧장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이윽고 앨범 한 권을 꺼냈다.임유진은 경직됐다. 이 앨범은…… 어머니의 앨범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도 많다!임정호는 라이터를 꺼내 앨범에 불을 붙였다.“너 여동생을 이렇게 볼 수 없다면, 이 앨범을 줄 필요도 없어. 너의 어머니도 너 같은 딸을 원하지 않을 거야!”앨범이 불타오르자 임정호는 타일 바닥에 불붙은 앨범을 그대로 내던졌다.임유진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서 두 소매를 걷고 필사적으로 그 타오르는 불꽃을 내리쳤다.‘태우면 안 돼, 안 돼!’이것은 어머니가 그녀에게 준 추억이고! 그녀의 그리움이기에 이렇게 태우면 안 된다.임유진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비명을 지르는지조차 몰랐다. 그녀는 단지 두 손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계속 내리칠 뿐, 심지어 불이 손을 데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다.미친 사람처럼 말이다.그녀의 이런 모습에 임정호, 방미령과 임유라는 깜짝 놀랐다.마침내, 불이 꺼졌을 때, 임유진은 너덜너덜해진 앨범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얼굴이 온통 눈물투성이 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앨범을 품에 안은 채 눈을 들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이 남자는,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아내의 유품까지도……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다니,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녀의 어머니가 전혀 없었다.사랑이란 시간이 흐르면 그리움도 남지 않는 법이다.청초하고 우아한 얼굴에는 눈물에 젖은 낭패로 가득 찼지만 예쁜 두 눈은 차갑게 임정호를 바라보았다.임정호는 딸의 눈빛에 조금 놀랐지만, 억지로 체면을 세워 한마디 했다.“너…… 누가 아버지를 그렇게 보라고 했어. 이 앨범을 내가 태우고 싶으면 태우는 거야!”임유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더 차가워진 눈빛으로 말했다.“엄마가 지금 살아 계셨다면, 분명 자신이
만약 임유진 얼굴을 태웠다면, 그녀에게도 걱정을 덜었을 것이다. 적어도 강현수가 얼굴을 망가뜨린 여자를 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아쉽다!————임유진은 자신이 어떻게 계단을 내려갔는지 몰랐다. 자신의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온 힘을 다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앨범을 움켜쥔 두 손은 감정이 북받쳐 떨리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이 앨범을 뒤지고 안에 있는 사진들이 얼마나 타버렸는지 볼 용기조차 없었다.이것들은 모두 그녀의 추억이고 그녀와 어머니의 추억이다!그녀가 비틀거리며 동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그림자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그 초조한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걱정으로 그녀의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왜 그래?”그녀는 자신이 마치 그림자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곧 상대방이 두 팔로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누가, 누가 그러는 거지?’임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눈이었다. 마치 예쁜 복숭아꽃처럼,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칠흑 같은 눈동자는 마치 흑요석처럼 그렇게도 투명했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누나 왜 그래?”그는 긴 눈썹을 찌푸리고, 그녀의 눈물 자국을 보며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혁아…….”그녀가 중얼거리며 이 이름을 불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까?겨우 한 달 남짓인데 벌써 오래된 것 같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단지 혁이만 있는 것 같았다. 한때 그녀와 함께 의지하며 살았던 혁이, 서로 기대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던 혁이다.그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여기 있어.”“혁아, 나…… 나 너무 힘들어…….”그녀는 지쳐서 걸을 힘도 없고 울 힘도 없어졌다.그는 허리를 숙여 갑자기 그녀를 안아 들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한 차 옆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마치 얌전한 인형처럼 그의 품에서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없이 조용했는데, 마치 그녀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의사가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앨범을 빼내려고 할 때, 그녀는 문득 정신이 든 듯, 두 손을 꼭 잡아당겼다.“안돼요!”“가져가려는 게 아니라 손의 상처를 보고 싶었을 뿐이야.”강지혁이 유유히 말했다.“누나, 이거 이리 줘. 의사한테 손의 상처를 잘 검사하라고 하자, 알았지?”누나라는 이 한마디에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혁…… 아.”그녀가 중얼거렸다.“나야.”그가 대답했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그녀의 입술이 떨렸고, 겨우 그친 눈물이 또 한 번 쏟아졌다.“다 탔어. 엄마랑 함께했던 앨범이 다 타버렸어.”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곱게 말아 올린 속눈썹은 움직일 때마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강지혁은 멍하니 있었다. 이 반쯤 검게 그을린 앨범…… 이것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앨범인 건가?그들이 함께 생활한 그 시간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깨달았다.그제야 의사는 마침내 임유진의 두 손을 볼 수 있었다. 상처를 살피던 의사는 곧 화상을 입은 부분을 처리하고 상처 표면을 깨끗이 씻은 다음 붕대를 감았다.그녀의 손등에 난 지난번 멍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상처가 덧나 양손의 손끝을 모두 가제로 감쌌다.그 과정에서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아픔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다.강지혁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임유진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울지 마…….”그녀의 눈물은 그를 괴롭히고 그를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 설령 그가 S 시를 뒤엎을 수 있다고 해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앨범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리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눈물을 닦는 것뿐이었다…….“화상을 입긴 했지만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양손에 물이 묻히면 안 되고 하루에 한
그녀는 코가 시큰거리더니 멈췄던 눈물이 또다시 흐르기 시작했다."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 누나."강지혁이 그녀의 눈가를 어루만져주었다. ‘누나’라는 한 단어가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고통과 슬픔을 모두 무장 해제시켜버렸다.임유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소리 내어 운다고 한들,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한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신뿐이었고 눈물은 값어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누나’라고 부르자 갑자기 엄마 생각이 떠올랐고 한 번도 자신을 ‘누나’라고 부른 적 없는 남동생도 떠올랐다.그때 엄마와 남동생이 임유진 곁을 떠나지만 않았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외롭지는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녀도 진정한 가족이 생길 수 있었을까?임유진의 울음에 강지혁이 깜짝 놀랐다. 아까 입술을 깨물고 소리 내 울지도 못하는 그녀를 바라볼 때는 마음이 아팠는데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니 이제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강지혁은 마치 신경 하나하나가 다 마비된 사람처럼 그저 굳어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은 자신의 엄마가 자신과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을 때도, 아버지가 눈이 펑펑 내리던 곳에서 얼어 죽었을 때도 그저 가엽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이러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큰 소리로 우는 그녀를 앞에 두고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더는 고통 속에서 허덕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이때 임유진이 강지혁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물은 강지혁의 옷을 다 적셔버렸고 그의 심장까지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강지혁이 서서히 얼어붙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주었다.임유진이 이렇게도 고통스럽고 슬프다면 울어도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된다. 그녀의 이런 약해진 모습은 자신만 봐야 한다.임유진을 향한 강지혁의 소유욕은 날이 갈수록 짙
한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아마도...."혹시 강지혁 씨?""네."한지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강지혁은 짧게 대답하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지영이 어안이 벙벙한 채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유진이는 왜 잠들어 있고 왜 강지혁 씨가 전화를 받은 거지? 설마 지금 둘이 같이 있다는 거야?’‘그리고 집에 없으면 어디 있다는 건데?’한지영의 시선이 핸드폰에서 다시 방문을 향했다.‘설마... 유진이가 지금 강지혁 씨와 같이 살고 있는 건가? 진짜?’한편, 전화 통화를 끊은 강지혁은 품 안에서 곱게 잠이 든 여자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가는 길 그녀가 추워하기라도 할까 봐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한테 덮어주었다.저택으로 들어가는 길, 사용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임유진이라는 아가씨가 강씨 집안에 들어올 정도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강 대표가 이렇게까지 한 여성을 보물 다루듯이 다루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역시 행여 품에 안긴 여자가 깨기라도 할까 봐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집사인 한 씨 아저씨는 어릴 때부터 돌봐왔던 작은 도련님이 한 여성한테 이렇게 지극정성인 모습을 보고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애당초 강지혁의 아버지가 강지혁의 어머니를 집에 들였을 때도 역시 똑같이 아껴주고 또 아껴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는가? 목숨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때로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한테 지나치게 감정을 쏟아부으면 그건 독이 되어 결국에는 비극으로 끝난다.작은 도련님도 큰 도련님처럼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저 아가씨한테 쏟아붓는 건 아닌지... 자신이 지켜본 바로는 작은 도련님은 그 진씨 가문 아가씨한테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한 씨 아저씨는 작은 도련님이 감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분을 찾았으면 좋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 여성을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어 또다시
안돼... 안돼!엄마랑 내 동생 돌려줘!임유진이 힘껏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이때,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그녀를 이 악몽에서 꺼내주었다.임유진이 천천히 눈을 뜨자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깼어?"아직 비몽사몽인 상태였지만 남자의 잘생긴 얼굴만은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함이 흘러나왔다."응..."그녀는 아직 꿈속에 있는 듯한 기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럼 전화부터 받아."강지혁이 핸드폰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이니? 유진아, 일어났어?"한지영의 목소리에 임유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지영아!""그래, 너 지금 어디야? 강지혁 씨랑 같이 있는 거야? 어젯밤에 전화했을 때도 강지혁 씨가 받더니 지금도 또 그 사람이 전화를 받았네."두 번의 전화 모두 강지혁이 받았기 때문에 한지영도 미칠 노릇이었다."어젯밤에도 전화했었어?"임유진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그래, 어제 전화했더니 너 자고 있대.""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둘이 같이 사는 거야?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 건데?"한지영은 참아왔던 궁금증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그에 임유진이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위해 핸드폰을 쥐고 있는 강지혁을 보며 말했다."얘기하자면 좀 길어... 다음에 만나면 그때 다 말해줄게. 그보다 너 무슨 일 있어?""그게 말이지. 내가 어쩌다 발견하게 됐는데, 당시 사건의 증인이었던 사람이 지금 해성시에 있어. 그래서 너한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이 잠깐 멈칫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알겠어. 그럼... 너 언제 시간 돼? 우리 만나자.""그럼 나 오늘 퇴근하고 볼까?"한지영이 말을 이었다."너 오늘 환경위생과로 출근해? 내가 퇴근하고 데리러 갈까?""아니야, 계속 만나던 곳으로 와. 거기서 보자.""그래, 알았어."통화가 끝나고 임유진이 몸을 일으키려 양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자 고
그 앨범은 그녀의 추억이 가득 담긴 물건이었다.강지혁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앨범 하나 때문에 목숨도 잃은 뻔한 거 알아? 어제는 운이 좋아서 손에 화상만 입은 정도였지, 만약 불길이 더 커졌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해봤어?""그 앨범 나한테 엄청 소중한 거야!"임유진이 말했다."그게 누나 손보다 중요해? 그깟 앨범 하나 지키겠다고 평생 손 못 쓰고 싶어?"강지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중요해. 내 두 손이 다 타버릴지라도 난 그게 더 소중해."임유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한테 있어서 그 앨범은 그리움이고 일종의 집착이었다. 또한, 유일하게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물건이고 자신의 행복했던 시절을 담아 둔 물건이었다.임유진의 대답에 강지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는 거에 화가 났고 그녀보다 더 그녀의 몸을 걱정하는 자신한테도 화가 났다.그녀는 자신의 손이 불구가 돼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는 것이 싫었다."내 앨범은?"임유진이 고집스럽게 물었고 강지혁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서랍에서 앨범을 꺼내 그녀한테 넘겨주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안심이 됐고 조심스럽게 앨범을 한 장 한 장 보고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불길로 인해 절반 정도가 타버린 사진도 있었지만 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사진들도 있었다.그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고통을 삼키는 듯했다. 앨범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인 듯 보였다.앨범을 덮은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뭐?""나 병원에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리고 어젯밤에는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지."어젯밤 일을 기억해 낸 임유진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그냥 운 것도 아니고 강지혁의 품에서 엉엉 울었으니."이제부터 그런 감정적인 모습은 내 앞에서만 보이는 거로 해."강지혁이 몸을 숙여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강
"그 누구도 누나 함부로 해고 못 해."강지혁이 확신의 찬 말투로 말했다."일단 손부터 다 낫고 말해. 그 손을 하고 제대로 바닥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아?"임유진이 고개를 떨구며 침묵했다. 강지혁의 말처럼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손 다 나으면 그때는 뭘 하든 마음대로 해."그리고는 또 뭔가 생각이 난 듯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오늘 한지영 씨하고 만나기로 했었나? 손도 불편한데 날짜 바꾸는 게 어때?"강지혁을 오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이 말을 들었으면 아주 많이 경악했을 것이다. S 시에서 제일 속을 모르겠는 남자가 여인이 상처 하나에 이렇게까지 신경 쓸 줄은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 만약 임유진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강지혁 앞에서 곧 죽을 듯이 숨을 헐떡거려도 관심 같은 건 받지 못했을 것이다."아니, 오늘 만나야 해."임유진이 확고하게 대답했다."지영이가 당시 사건의 증인에 관한 소식을 알고 있대. 그래서 만나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 해."임유진은 이때 강지혁 얼굴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살짝 주먹을 쥔 손 역시."증인이라고?""응.""자세한 건 지영이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어.""지금 혼자서 사건을 다시 파헤치겠다는 말이야?"강지혁이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내가 말했지. 그 사건은 내가 알아볼 수 있다고. 누나가 이렇게 힘들게 혼자서 애쓸 필요 없어.""하지만 누나가 사건을 다시 알아본다고 해도 차 사고를 낸 진범은 찾을 수 없는 거 아니야? 누가 나한테 누명을 씌웠는지도 모른 채 단지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내 죄를 없앤다고 해도 진범을 찾지 않는 이상 나는 사람들 눈에 여전히 살인자일 뿐이야.""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해?"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자 임유진이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이었다면 사람들 시선 따위는 신경도 안 썼을 거야. 하지만 살인죄는... 아니야. 꼭 진실을 밝혀내서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해."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