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손을 더 가까이 끌어당겨 그녀의 손등에 아직 남아 있는 옅은 멍을 내려다보았다.그리고 그녀의 손등을 그의 입술에 가까이 대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임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눈앞의 강지혁이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불어주고 있는 걸 보았다.“불면 덜 아플 거야.”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손가락 마디로 그녀의 손등 멍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불면서 문지르는 모습이 마치 정중한 일을 하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심장이 심하게 뛰는 것 같았고, 목구멍에 뭔가 막힌 것 같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만약 혁이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녀는 자상하고 좋은 동생을 가졌다고 느꼈을 것이지만, 강지혁이라면……. 그녀를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리고 지금 강지혁 뒤에 서 있던 경호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강 대표님이 한 여자를 이렇게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가!아마 멀지 않아 이 여자는 곧 S시에서 유명해질 것이다!“좀 나아졌어?”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좀 나아졌어.”임유진은 세 번째로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다.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당기고 그녀의 손등의 멍든 곳을 조심스럽게 피했다.“아픈 줄 알면 착하게 있어야지. 안 그러면 내가 또 조심하지 않고 누나를 아프게 할지도 몰라.”임유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었다. 그는 애매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려 그의 벤틀리 차 앞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문을 열자 강지혁과 임유진이 차에 올랐다.“시간이 남았는데, 그렇게 일찍 돌아갈 필요는 없어. 누나 어디 구경하고 싶은 곳 있어?”강지혁이 물었다.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옆에 있으면 그녀가 어디 구경하고 싶은 곳이 있겠는가?“그럼 근처 어디 좀 둘러보자. 예전에 누나가 나를 데리고 야시장이나 쇼핑몰을 구경할 때가 그리웠어.”강지혁이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그것은 그녀가 한
그의 눈에는 잔잔한 물결이 겹쳐져 있었는데 마치 그녀가 무엇을 하든, 그녀를 감쌀 수 있는 것 같은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그 눈동자는 그의 입술 모서리에 띤 미소와 아울러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멋졌다.임유진은 갑자기 자신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메뉴에 있는 모든 요리를 주문해도 강지혁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그녀는 왜 그랬을까? 음식 주문이라는 바보 같은 방식으로 화풀이 하려고 했다니.임유진은 맥이 빠진 듯 손에 들고 있던 메뉴를 돌려주며 말했다.“됐어요.”“이 정도면 됐어?”강지혁이 웃으며 말했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만에 대답했다.“됐어.”“정말 다 드실 수 있겠어요? 이 음식들은 7, 8명이 먹기에도 충분한데, 두 분이서는 조금 많지 않을까요?”종업원이 귀띔했다.강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일단 그걸로 해요.”종업원은 그 말에 메뉴를 들고 돌아섰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가 부족하면 나중에 더 주문해도 돼.”그의 그런 말투는 그녀의 가슴을 또 갑자기 뛰게 했다.“방금 내가 억지를 부렸어. 다시 불러서 요리 몇 가지는 빼자.”임유진은 망설이다가 조금 전에 주문한 웨이터를 찾으러 일어나려 했다.강지혁이 갑자기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누나가 좋아하는 음식을 왜 빼.”“낭비하고 싶지 않아.”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너에게는 이 음식값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주문하고 못 먹을 낭비야.”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예전에 그녀도 한 끼에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주문했지만, 각각 조금씩만 맛보고,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된다거나, 살을 빼야 한다거나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하지만 생활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난 후에야 그녀는 배불리 먹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감옥에서 끼니마다 그녀는 다 먹어치웠다. 먹는 것만이 살아가는 기반이기 때문이다.때로는 누
그의 눈빛이 너무 직설적이고 숨김이 없어서였는지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넌 안 먹어?”“먹어, 근데 누나 먹는 거 보고 있으면 입맛이 좀 더 생겨.”그가 말했다.“…….” 그녀는 순간 어이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먹는 걸 보고 있으면 식욕이 더 생긴다니!“밥 먹는 걸 보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같아.”그가 중얼거렸다.“그건 네가 굶어본 적이 없어서 그래.”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만약 네가 며칠 동안 밥을 먹지 않았다면, 흰 쌀밥에 물만 말아도 맛있을 거야.”“배고파본 적 있어?”“응, 배고파본 적 있어.”그녀는 한때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일이 이제는 아주 평범한 일이 된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얇은 입술을 물었다.“감옥에서?”“응.”그녀가 대답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계속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몸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오늘 그녀는 여전히 값싼 옷을 입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 뺨에는 머리카락이 가늘게 몇 가닥 흐트러져 있다.가는 목과 가녀린 몸집, 지금의 그녀는 그가 수집한 자료 속에 넣어뒀던, 수용되기 전의 사진보다 훨씬 더 말랐는데 바람만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이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 입 또 한 입 그렇게 열심히 먹었다.하지만 그녀의 이 진지함은 그에게 쓰라리고 무거운 느낌을 주었다.그가 하는 몇 번째 후회인지 모른다. 만약 그가 그녀를 만나고 나서 그녀에게 신경 쓸 줄 알았다면, 그는 결코 그녀가 감옥에서 그런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그때…… 그는 절대 그녀가 그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음식을 먹었지만 음식은 입에서 떫은맛이 나는 듯했다.식사를 마친 임유진이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내가 같이 가 줄게.”그가 대답했다.“…….”화장실 가는데 같이 간다고?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여학생들이 화장실을 갈
하지만 지금 온 S시의 많은 사람이 진세령과 소민준이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하필이면 한세리가 소민준을 언급할 때 ‘옛 남자친구'라고 하며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한세리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한세리는 임유진의 시선을 마주보며 얼굴에는 오히려 불편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방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이내 꿰뚫어 보면 또 어찌할 거냐고 스스로 말했다. 임유진은 지금 이미 그 당시 업계의 샛별이 아닌데 말이다.그녀는 임유진과 함께 사무실에 들어갔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임유진만 존재했고, 그녀는 단지 들러리에 불과했다.다들 임유진은 일과 사랑을 다 가졌다고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선적인 변호사가 될 것 같다고 했는데, 그녀는 옆에서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그녀의 일이 잘못될 때마다 사무실의 선배님은 그녀에게 더 배우라고 해서 그녀를 화나게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임유진은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는 큰 산과 같았다. 임유진이 사무실에 있는 한, 다른 사람들은 항상 두 사람을 비교했다.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임유진의 그늘에서 사는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에게 일이 생겼을 때, 한세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심지어 이게 하늘이 그녀를 도와줘서 임유진에게 일이 생긴 거로 생각하기도 했다.아니나 다를까, 임유진이 감옥에 간 후, 아무도 그녀와 임유진을 비교하지 않았다.“유진아, 신경 쓰지 마, 나도 네가 걱정돼서 그래. 환경미화원은 힘든 일이잖아.”한세리는 동정하듯 말했다.“다행히 힘들지 않아.”임유진이 말했다. 적어도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것이 감옥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한세리는 임유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어떻게 힘들지 않을 수가 있어. 너는 환경미화원이니까, 매일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정리해야 하잖아. 환경미화원 짓을 오래 하면,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한세리는 말하면서 눈에는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야, 됐어.”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밖에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어, 먼저 갈게.”“야, 뭐가 급해.”한세리가 또 말했다.“너 아직 남자친구 없지, 내 남자친구는 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일하고 있어. 아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소개해 줄까?”그러면서 임유진을 따라 화장실을 나왔다.그리고 한세리가 화장실 밖에 서 있는 중간 키의 남자를 향해 소리치자 상대방이 바로 이쪽으로 다가왔다.임유진은 걸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외모는 중간 정도, 나이는 좀 있어 보였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 사람이 한세리의 남자친구일 것이다.“용준 씨, 이쪽은 내 예전 동료인 임유진이에요. 오늘 우연히 화장실에서 만났어요.”한세리가 말했다.“유진아, 여기는 내 남자친구 하용준 씨, 용준 씨는 UE 대학의 교수야.”한세리의 말투에는 자랑이 가득했다.오히려 하용준이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부교수일 뿐이지 아직 교수는 아니에요.”“2년 뒤면 교수잖아요.”한세리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가 임유진에게 말했다.“밖에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다면서? 누구야?”임유진은 고개를 들었지만 강지혁을 보지 못했다.설마 그가 먼저 갔단 말인가? 그녀는 마음속으로 추측했다.하지만 한세리는 전에 상대방이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이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한마디 했다.“그럼 우리 어디 좀 가서 앉자. 내 남자친구에게 주변에 너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있는지 보여줄 겸 말이야. 지난번에 그들 학교 지원 노동자들의 결혼문제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하던데 너랑 나이가 맞는 사람이 있을 거야.”한세리는 어색한 듯 말했다.“노동자와 소개팅을 해도 괜찮지? 사실 나는 그들 학교의 싱글 선생님들을 소개해주고 싶어.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 선생님들은 보통 상대방의 과거가 깨끗한 것을 요구하는데 넌 이쪽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 하지만 걱정하지 마, 비록 노동자라 월급이 높지 않고 학력도 낮지만, 모두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상냥하게 잘 대해줘.”
결국, 다음번이 되기 전에, 그는 더는 혁이가 아니라 강지혁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지금 처음 한 말을 그가 기억할 줄은 몰랐다.“유진아…… 이 사람 누구야?”한세리는 강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아하게 물었다.‘이 귀하고 고상해 보이는 남자는 임유진…… 친구인가?!’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임유진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강지혁이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이 여자가 소개팅 상대를 소개해 주려는 거야? 설마 이 여자에게 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한세리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이 남자…… 정말 임유진의 친구인가? 심지어…… 남자친구?!외모만으로도 소민준을 바로 이길 수 있었는데 그녀의 남자친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한세리는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친구 하용준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녀는 남자친구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비록 나이가 10살 더 많지만 어쨌든 부교수이고 몇 년만 지나면 교수가 될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 임유진과 함께 있는 이분…… 이 친구와 비교해보니 한세리는 갑자기 자신의 남자친구를 데리고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임유진은 이때 강지혁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옆에 있던 하용준은 강지혁에게 먼저 다가가 말했다.“내 여자친구가 임유진 씨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생각해주세요. 전 하용준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여자친구 한 세리예요.”“전 강 씨 성을 쓰고 있어요.”강지혁은 자신의 성만 말하고 이름은 생략했다.하용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오해해서 정말 미안해요, 다들 어디 가서 앉으시죠?”“좋아요.”강지혁은 대답한 후 임유진에게 말했다.“어디 가서 밀크티를 마시자.”임유진은 좀 이상했다. 평소 강지혁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다른 사람과 동행하는 것에 동의한 거지?하지만 강지혁은 이미 그녀의 손을 잡았다.결국 네 사람은 한 카페에 도착했고, 하용준은 먼저 강지혁과 임유진에게 메뉴를 건네며 물었다
세 사람이 커피를 주문하자 한세리는 일부러 임유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임유진이 지금 하는 일이 어떠냐고 물었다. 사실 임유진이 지금 얼마나 비참하게 지내는지 더 듣고 싶었을 뿐이고 강지혁이 이것을 들은 후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기도 했다.그러나 강지현은 아무렇지 않은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유진아, 사무실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 사무실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청소한다고 해도, 네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낫잖아.”한세리는 착한 척 말했다.임유진은 눈을 들었지만 한세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난 일자리를 바꿀 생각이 없어.”“그래?”한세리는 입을 삐죽거렸다.“사무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면, 월급을 환경미화원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정말 생각 없어?”“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안다고 생각해.”임유진의 말투도 점점 차가워졌다.한세리는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용준에게 끌려갔고, 마침 웨이터가 커피를 들고나와 화제가 일단락되었다.“자, 이 커피는 비싼 커피예요, 따뜻할 때 더 맛있어요.”한세리가 말했다.강지혁은 자세를 바로잡고 우아하게 커피를 들고 향기를 맡으며 한 모금 마셨다.한세리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그가 아이돌 스타처럼 느껴졌고, 커피 한 잔 마시는 모습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했다.“강지혁 씨, 유진이와는 어떻게 만났어요?”한세리가 궁금해서 물었다.“눈이 올 때 그녀가 먼저 찾아와 말을 걸어와 알게 됐어요.”강지혁이 웃으며 대답했다.‘겨우 이렇게?! 이건 너무 쉬운 거 같은데!’“그렇다면 유진이가 먼저 강지혁 씨를 좋아한 거네요?”한세리가 또 물었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 밀크티를 마시고 있는 임유진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렇죠.”임유진은 밀크티를 뿜을 뻔했다. 그럴 리가!하지만 이때 한세리가 스스로 그녀와 강지혁의 관계를 오해한 거니, 임유진도 뭐라고 설명
임유진은 움찔하더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물결이 출렁이는 듯한 강지혁의 눈빛을 바라보았다.그러자 한세리는 얼굴빛이 변하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지혁 씨 몰라봤는데…… 유진이를 정말 사랑하네요. 그럼 결혼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그녀가 시집가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결혼해야죠.”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지혁을 쳐다보았다.“그럴 리가요?!”한세리가 불쑥 말했다.강지혁은 시큰둥하게 한세리를 힐끗 보았다.“안 될 게 뭐가 있어요?”강지혁의 눈빛이 하도 서늘하여 한세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랐다.“자, 가자, 유진아.”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일어섰고 임유진도 아무 말 없이 강지혁을 따라 떠났다.하용준은 한세리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세리야, 너 방금 네 친구가 감옥에 있었다는 얘기를 왜 꺼냈어? 강지혁 씨가 알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만약 몰랐다면, 오히려 그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지 않았겠어? 심지어 헤어질 수도 있었을 거야.”그녀는 일부러 그런 거다! 한세리는 이를 갈며 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남겨진 강지혁의 커피잔을 본 그녀는 그제야 이렇게 비싼 커피를 그가 단지 한 모금 마셨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흥, 남자친구가 허울뿐인 것 같아, 커피 한 모금만 마시고 안 마셨어. 아마 평소에 좋은 커피는 전혀 안 마시나 봐. 이렇게 좋은 커피도 즐기지 못하는 걸 보면.”한세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추측이 옳다고 생각했다.여자가 감옥에 가는 것을 개의치 않고 환경미화원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아마 찌질이일 뿐이고, 취할 수 있는 점은 얼굴만 잘생겼다는 것 같았다.“세리야, 너도 그런 말 하지 마.”하용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친구가 친구 얘기를 그렇게 하는 것에 못마땅했다.한세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하려 했지만 웨이터의 한마디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