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았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자.”강지혁이 다시 임유진을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저기 혁아... 나 배고파.”“그래? 기다려. 도우미한테 뭐 먹을 것 좀 해오라고 할게.”강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러지 마. 늦은 시간이라 다 잠들었을 거야. 그리고 계란찜이 먹고 싶은 거라 내가 직접 해도 돼.”“그럼 내가 해줄게.”“네가?”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응. 금방 해줄 테니까 기다려.”결국 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식탁 의자에 앉힌 후 계란을 집어 들고 그릇에 하나둘 깼다. 그러고는 간을 하고 젓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진지하게 요리하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어쩐지 강지혁이 조금 더 가정적인 남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있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았다.임유진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는 강지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평화롭고 여느 부부 같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았다.임유진이 넋을 잃고 있던 그때 주문한 계란찜이 완성되고 강지혁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계란찜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뜨거울 테니까 후후 불어서 먹어.”“알았어.”임유진은 숟가락으로 큼직하게 한술 뜨고는 강지혁의 조언대로 후후 불었다.“참, 혁아, 너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강지혁이 몸을 움찔했다.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곧 그의 생일이었다.강지혁은 생일이라는 말에 임유진의 생일을 떠올렸다.그녀의 생일은 정말 최악이었고 그 최악을 만든 사람은 바로 강지혁 본인이었다.만약 강지혁이 그때 헤어짐을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임유진의 생일은 즐거움만 가득했을 것이고 다시 함께하기까지의 아프고 상처만 줬던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임유진은 시선을 계란찜에 고정한 채 계속 후후 불다가 강
“혁아, 남녀가 만나서 사귀는데 어떻게 좋은 순간만 있겠어. 가끔은 서로한테 속상하기도 하고 서로가 밉기도 하고 그런 거지. 너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건 아니지? 나는 내 생일이든 네 생일이든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단 말이야.”임유진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미안해.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면 안 됐어.”강지혁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럼 이제부터 절대 헤어지자는 얘기 꺼내지 않는 거로 하자. 우리 두 사람 다, 어때?”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점차 가시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응. 그러자...”“그래서 생일 선물로는 뭐 갖고 싶어?”“...”“떠오르는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준비한다? 대신 불만 없기야.”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계란찜을 후후 불어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조금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정말 더 이상의 헤어짐은 없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임유진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가 떠나는 걸 강지혁이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지키지를 강지혁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생일 선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은 부족한 게 없는 남자였으니까. 게다가 목도리나 장갑 같은 건 이미 선물로 준 적이 있어 마땅한 선물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한지영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간 뒤 강지혁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러 백화점으로 향했다.한지영의 상태는 꽤 양호한 편으로 의사의 말에 따르면 수치가 다 정상이라 얼마 안 가 금방 깨어날 거라고 했다.이에 임유진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었다.백화점을 돌아보는 중에도 임유진의 옆에는 여전히 황채린이라는 여경호원이 따라붙었다.강지혁의 선물을 고르는 것이기에 임유진은 남성 코너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어디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강현수의 싸늘한 얼굴이 그 한마디로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배여진은 그저 임유진의 행세를 한 것뿐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강현수는 평생을 기다리던 여자를 놓쳐버렸다.“다시 한번 말해봐.”강현수가 셋째 이모를 노려보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이 지금은 꼭 저승사자 같았다.셋째 이모는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겁에 질려 몸을 움찔 떨었다.“저... 저는 그냥 이게... 고소까지 갈 일인가 싶어서요. 그동안 여진이가 쓴 돈은 현, 현수 씨한테는 껌값이잖아요... 다른 흉악범에 비해서는 큰일도 아닌데...”“하! 하하하하하.”그 말에 강현수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먹을 쥐고 셋째 이모 쪽으로 날렸다.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이한이 강현수의 팔을 잡으며 얼른 그를 말렸다.“현수야, 진정해! 이런 인간이 하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뭐가 있어. 안 그래?”“한아, 너도 이 여자가 하는 말 들었잖아. 너는 이 말이 안 웃겨? 큰일이 아니라잖아. 내 인생을 망쳐놓고 큰일이 아니라잖아. 하하하.”강현수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어댔다.“현수야, 네 맘 다 아니까 진정해...”이한이 강현수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그런데 그때 강현수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멎었다.이에 의아해진 이한이 강현수를 바라보자 강현수가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임유진이 서 있었다.이한은 임유진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현수가 하루라도 빨리 임유진을 잊을 수 있게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와 쇼핑을 했더니 배여진의 엄마 때문에 앞길이 막히고 이제는 임유진까지 만나버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집에서 게임이나 함께 하자고 할 것을 그랬다며 이한은 이 순간 무척이나 후회했다.한편 강현수는 넋을 잃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헛것일까 봐, 너무나도
그 말에 셋째 이모가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우리는 사촌이잖아. 만약 네가 여진이를 도와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네가 정 없는 애라고 욕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니?”“가해자도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마당에 피해자인 내가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임유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나는 언니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 해하려 했을 때부터 이미 사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그 말에 셋째 이모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임유진의 뺨이라도 때릴 모양이었다.하지만 셋째 이모가 뺨을 내리치기 전에 황채린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손목을 꽉 잡아버렸다.셋째 이모는 손목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저한테 손을 올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제가 이렇게 경고했음에도 또다시 손을 올리면 그때는 그 손목, 완전히 부러질지도 몰라요.”임유진의 말에 셋째 이모가 씩씩거리며 황채린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얼른 손목을 뺐다.그러고는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노려보았다.“이제는 경호원까지 달고 다녀? 좋아. 네가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한 번만 더 유진이한테 입을 놀리거나 함부로 손을 올리면 그때는 배여진은 물론이고 당신들 가족 전부 다 감방에 보내버릴 거야.”강현수의 말에 셋째 이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바로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갔다.강현수는 방해물이 사라진 후 임유진을 향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잘... 지내고 있어?”“네, 잘 지내고 있어요.”임유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볼이 핑크색으로 물들고 편안하게 웃는 것이 확실히 전과 달리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정말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이 행복하다는 건 강지혁에게로 돌아간 것이 정답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와 함께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뜻이다.아니, 어쩌면
옆에 있던 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천하의 강현수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볼품없어질지를.만약 상대가 임유진이 아닌 다른 여자였으면 다시 쟁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상대는 하필이면 강지혁의 여자였고 임유진은 이미 강지혁과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다.즉 강현수의 사랑은 여기서 끝이라는 뜻이다.이한은 강현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현수야, 세상에 여자는 많아. 임유진 씨를 내려놓으면 그때는...”“한아, 넌 아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지?”강현수가 이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이에 이한이 어리둥절해 하자 강현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있으면 절대 그런 말 못 할 거야. 여자가 아무리 차고 넘쳐도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그 여자뿐이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머리가 온통 그 여자뿐이라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야. 그 여자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라고.”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건 자기 심장을 꺼내 주는 것과 같다. 즉 심장의 주인이 이미 생겨버렸다는 뜻이다.강현수는 어릴 때 만났던 여자아이를 찾는 것에 오랜 시간을 들였고 오로지 한 여자만을 그리워해 왔다.이 마음은 쉽게 없어질 마음이 아니며 이제 와서 쉽게 잊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그러니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임유진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강지혁이 소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은 일찍 들어왔네?”“처리할 일이 별로 없어서 일찍 들어왔어.”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히더니 그녀의 발을 잡고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의 손길을 한껏 만끽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요 며칠 임유진은 다리와 발이 붓기 시작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종이 더 심해질 거라고 했다.그래서 강지혁은 일전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에서 배웠던 마사지 기술로
“백연신 씨가 네가 보낸 사람들과 컨택하는 걸 거절했다고?”임유진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응. 백연신 얼굴은 며칠 뒤 뉴스로 보게 될 거야. 그때는 백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은 뒤겠지. 물론 그 모든 건 고씨 가문의 도움 아래 가능한 일일 거고.”사실 강지혁은 백연신과 고은채가 무슨 사이인지 확실하게 알아낸 뒤에 임유진에게 얘기해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백연신과 고씨 가문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움직임이 빨랐던 건 다 백연신의 계모가 백연신이 실종된 후 멍청한 짓을 연달아서 해버린 덕이었다.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무너지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그래서 뭐가 예전의 백연신 씨가 아니라는 건데?”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백씨 가문을 다시 손에 넣는 건 좋은 일이잖아. 고씨 가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고유정이 지영이를 해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기는 하지만 지영이도 상황을 전해 들으면 이해해줄 거야.”“만약 백연신이 다른 여자랑 잘돼가고 있다면?”강지혁이 물었다.어차피 지금 얘기해주지 않아도 며칠 뒤 뉴스로 전 국민이 다 알 수 있게 보도될 테니까.“뭐?!”임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야? 백연신 씨가...?”“그럴 수도 있고 고씨 가문을 이용하기 위해 그런 척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뭐가 됐든 한지영이 깨어나면 백연신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충격으로 다시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 다 알아보고 난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아.”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놀란 마음은 여전히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만약 백연신이 정말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면 한지영은 어떡하지?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임유진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그만 생각해. 백연신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가정이야. 그리고 네가 전에 그랬잖아. 백연신은 한지영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맞아. 백연신
“응, 행복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해.”임유진이 답했다.“그래서 가끔은 무섭기도 해.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또 사라질까 봐. 유미 언니랑 지영이 일만 해도...”“그럴 리 없어!”강지혁이 임유진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얘기했다.“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절대 헤어질 일 없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너는 영원히 나랑 함께 있을 거야.”강지혁의 눈빛은 꼭 임유진을 이대로 제 안에 가둬놓으려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그의 뜨거운 눈빛에 그대로 녹아들었다.“응,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새벽 3시경, 탁유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 바로 약상자에 있는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입에 넣었다.그녀가 먹는 약은 총 8개로 상당히 많았다.탁유미는 약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약만이 그녀의 살길이었다.그때 마침 침실에서 나온 김수영이 딸이 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유미야, 그러지 말고 이제 일 그만둬. 차라리 내가 가정부 일을 할게. 그러니까 너는 집에서 윤이 옆에 있어 줘.”탁유미는 마지막 남은 약 두 알까지 다 먹은 후 고개를 돌려 김수영을 바라보았다.“허리도 안 좋으시면서 가정부 일을 어떻게 해요.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딱 한 달만 더 벌게요. 한 달 뒤에는 꼼짝하지 않고 윤이 옆에 있을게요.”김수영은 애써 웃어 보이는 탁유미의 얼굴에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해졌다.“병원에서 정말 제대로 검사한 거 맞아? 정말 네가...”“벌써 병원을 두 곳이나 갔잖아요. 두 병원 모두 결과가 똑같았어요.”탁유미가 김수영의 말을 끊고 답했다.“그럼 유진 씨한테 부탁해보면 어때? 유진 씨, 강지혁이랑 결혼했다며? 강지혁이라면 제일 좋은 의사를 소개해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희망이 생길 수도 있잖아.”김수영의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유진 씨한테는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임신도 했는데 내 일로 신경 쓰게 하고
그러다 결국 탁유미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마찬가지로 김수영을 꽉 안아주며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엄마, 울지 마요. 울지... 마요.”사실 탁유미가 제일 걱정되는 사람은 아들인 윤이가 아닌 어머니인 김수영이었다.딸로서 효도 한번 못했는데 마지막까지 불효를 저지르게 될 테니까....다음날.식자재 준비를 위해 근처 마트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탁유미는 마침 곽동현과 만나게 되었다.곽동현은 탁유미를 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집에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동현 씨,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근처에 일 보러 왔다가 장난감 좀 전해주려고 왔어요. 제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긴 한데 상태도 양호하고 전에 윤이랑 얘기했을 때 윤이도 관심 있어 했거든요. 아, 만약 윤이가 장난감이 질린다고 하면 그대로 버려도 돼요. 어차피 비싼 물건도 아니거든요.”“고마워요. 윤이가 좋아하겠네요.”탁유미가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이것들 집으로 옮기면 되죠? 제가 들어드릴게요.”곽동현은 탁유미가 차에 실은 식자재를 보더니 소매를 걷으며 다가왔다.이에 탁유미는 재차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곽동현과 함께 식자재를 집까지 옮겼다.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한 차량에 있는 남자가 무거운 눈길로 지켜봤다.곽동현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장난감을 전해주고 탁유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래까지 바래다줄게요.”그러자 탁유미도 함께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근처 편의점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거든요.”아래로 내려가는 길, 곽동현이 잠깐 뜸을 들이다 물었다.“유진 씨는... 잘 지내요?”“네, 강지혁 씨랑 잘 지내고 있어요. 몇 달 뒤면 아이도 태어나고요.”탁유미의 말에 곽동현의 얼굴이 잠깐 쓸쓸하게 변하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지낸다니 다행이네요. 솔직히 좀 걱정했거든요.”임유진은 그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여자기에 자신과 함께이지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고 말 테니까.”“응.”두 사람은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경호원 세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이 있었다.임유진은 몇 초과량 흐르고 나서야 그 중년남성이 바로 김재호라는 것을 알아챘다. 5년이나 지나 있어 그런지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주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흰머리도 나고 수염도 생겼으며 못 보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반 시민이었다.만약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났다면 아마 김재호인 걸 인지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김재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태연하게 미소를 띄웠다.“역시 회장님 곁으로 돌아오셨네요.”임유진은 천천히 자리에 멈춰서며 답했다.“네, 돌아왔어요.”5년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나가봐.”강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방에서 나갔다.“아이는 어디 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라면 보내드렸잖아요. 한 명은 회장님 곁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임유진 씨 곁으로.”“내가 어떤 아이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유진이 배 속에 있었던 건 세쌍둥이였어. 우리한테 한 명씩 보냈으면 나머지 한 명 또한 당연히 있어야지.”“회장님, 세쌍둥이 중에 두 명이나 생존했는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실제로 세쌍둥이 중에 세 명 다 태어나는 경우는 적어요.”김재호의 빈정거림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우리 아이... 살아있는 거죠? 그렇죠?”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설령 김재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