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왜 갑자기 포기한다는 건데요?”임유진은 별다른 인사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부터 승소할 확률도 낮았고... 유진 씨도 알다시피 나는 경제적으로 윤이한테 많은 지원을 못 해줘요. 앞으로 윤이가 크면 돈 들어갈 곳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텐데 그걸 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는 없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제일 최악만 면하게 해주는 것뿐이에요.”“그럼 내가 해주면 되잖아요!”임유진이 다급하게 외쳤다.“나는 윤이를 내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아깝지 않다고요!”“고마워요.”탁유미가 쓰게 웃었다.“그런데 유진 씨한테는 그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만약 윤이한테 정말 아버지가 없었다면 유진 씨한테 부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경빈이 있잖아요. 윤이한테 내가 주지 못하는 것을 다 줄 수 있는 아빠가 있는데 어떻게 유진 씨한테 도움을 청해요. 그러니 이게 맞아요.”“하지만 그러면... 언니는요? 언니는 윤이가 없어도 정말 괜찮아요?”임유진은 임신한 뒤로 아이와 엄마 사이의 유대를 확실히 느꼈다.이제 막 13주 조금 넘은 자신도 이런데 4년을 기른 탁유미는 더 할 것이 분명했다.“안 괜찮아요. 나도 윤이 보내고 싶지 않아요.”탁유미가 시선을 내린 채 중얼거렸다.“하지만 내 마음보다 윤이의 미래가 더 중요해요. 나는 윤이가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그건 언니가 생각하는 행복이죠. 윤이는 그 행복을 기꺼워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윤이는 알아요? 앞으로 이경빈과 함께 살게 될걸?”“아직 윤이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3개월 뒤에 이경빈한테 데려갈 때, 그때 얘기해주려고요.”이 3개월이 그녀에게는 윤이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유진 씨, 윤이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탁유미가 간절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언니한테는 얘기 안 했지만 사실 혁이한테 부탁해서 공수진을 수술해줬던 주치의를 찾고 있어요. 만약
“알았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자.”강지혁이 다시 임유진을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저기 혁아... 나 배고파.”“그래? 기다려. 도우미한테 뭐 먹을 것 좀 해오라고 할게.”강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러지 마. 늦은 시간이라 다 잠들었을 거야. 그리고 계란찜이 먹고 싶은 거라 내가 직접 해도 돼.”“그럼 내가 해줄게.”“네가?”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응. 금방 해줄 테니까 기다려.”결국 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식탁 의자에 앉힌 후 계란을 집어 들고 그릇에 하나둘 깼다. 그러고는 간을 하고 젓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진지하게 요리하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어쩐지 강지혁이 조금 더 가정적인 남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있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았다.임유진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는 강지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평화롭고 여느 부부 같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았다.임유진이 넋을 잃고 있던 그때 주문한 계란찜이 완성되고 강지혁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계란찜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뜨거울 테니까 후후 불어서 먹어.”“알았어.”임유진은 숟가락으로 큼직하게 한술 뜨고는 강지혁의 조언대로 후후 불었다.“참, 혁아, 너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강지혁이 몸을 움찔했다.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곧 그의 생일이었다.강지혁은 생일이라는 말에 임유진의 생일을 떠올렸다.그녀의 생일은 정말 최악이었고 그 최악을 만든 사람은 바로 강지혁 본인이었다.만약 강지혁이 그때 헤어짐을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임유진의 생일은 즐거움만 가득했을 것이고 다시 함께하기까지의 아프고 상처만 줬던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임유진은 시선을 계란찜에 고정한 채 계속 후후 불다가 강
“혁아, 남녀가 만나서 사귀는데 어떻게 좋은 순간만 있겠어. 가끔은 서로한테 속상하기도 하고 서로가 밉기도 하고 그런 거지. 너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건 아니지? 나는 내 생일이든 네 생일이든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단 말이야.”임유진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미안해.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면 안 됐어.”강지혁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럼 이제부터 절대 헤어지자는 얘기 꺼내지 않는 거로 하자. 우리 두 사람 다, 어때?”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점차 가시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응. 그러자...”“그래서 생일 선물로는 뭐 갖고 싶어?”“...”“떠오르는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준비한다? 대신 불만 없기야.”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계란찜을 후후 불어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조금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정말 더 이상의 헤어짐은 없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임유진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가 떠나는 걸 강지혁이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지키지를 강지혁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생일 선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은 부족한 게 없는 남자였으니까. 게다가 목도리나 장갑 같은 건 이미 선물로 준 적이 있어 마땅한 선물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한지영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간 뒤 강지혁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러 백화점으로 향했다.한지영의 상태는 꽤 양호한 편으로 의사의 말에 따르면 수치가 다 정상이라 얼마 안 가 금방 깨어날 거라고 했다.이에 임유진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었다.백화점을 돌아보는 중에도 임유진의 옆에는 여전히 황채린이라는 여경호원이 따라붙었다.강지혁의 선물을 고르는 것이기에 임유진은 남성 코너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어디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강현수의 싸늘한 얼굴이 그 한마디로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배여진은 그저 임유진의 행세를 한 것뿐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강현수는 평생을 기다리던 여자를 놓쳐버렸다.“다시 한번 말해봐.”강현수가 셋째 이모를 노려보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이 지금은 꼭 저승사자 같았다.셋째 이모는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겁에 질려 몸을 움찔 떨었다.“저... 저는 그냥 이게... 고소까지 갈 일인가 싶어서요. 그동안 여진이가 쓴 돈은 현, 현수 씨한테는 껌값이잖아요... 다른 흉악범에 비해서는 큰일도 아닌데...”“하! 하하하하하.”그 말에 강현수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먹을 쥐고 셋째 이모 쪽으로 날렸다.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이한이 강현수의 팔을 잡으며 얼른 그를 말렸다.“현수야, 진정해! 이런 인간이 하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뭐가 있어. 안 그래?”“한아, 너도 이 여자가 하는 말 들었잖아. 너는 이 말이 안 웃겨? 큰일이 아니라잖아. 내 인생을 망쳐놓고 큰일이 아니라잖아. 하하하.”강현수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어댔다.“현수야, 네 맘 다 아니까 진정해...”이한이 강현수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그런데 그때 강현수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멎었다.이에 의아해진 이한이 강현수를 바라보자 강현수가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임유진이 서 있었다.이한은 임유진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현수가 하루라도 빨리 임유진을 잊을 수 있게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와 쇼핑을 했더니 배여진의 엄마 때문에 앞길이 막히고 이제는 임유진까지 만나버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집에서 게임이나 함께 하자고 할 것을 그랬다며 이한은 이 순간 무척이나 후회했다.한편 강현수는 넋을 잃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헛것일까 봐, 너무나도
그 말에 셋째 이모가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우리는 사촌이잖아. 만약 네가 여진이를 도와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네가 정 없는 애라고 욕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니?”“가해자도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마당에 피해자인 내가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임유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나는 언니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 해하려 했을 때부터 이미 사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그 말에 셋째 이모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임유진의 뺨이라도 때릴 모양이었다.하지만 셋째 이모가 뺨을 내리치기 전에 황채린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손목을 꽉 잡아버렸다.셋째 이모는 손목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저한테 손을 올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제가 이렇게 경고했음에도 또다시 손을 올리면 그때는 그 손목, 완전히 부러질지도 몰라요.”임유진의 말에 셋째 이모가 씩씩거리며 황채린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얼른 손목을 뺐다.그러고는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노려보았다.“이제는 경호원까지 달고 다녀? 좋아. 네가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한 번만 더 유진이한테 입을 놀리거나 함부로 손을 올리면 그때는 배여진은 물론이고 당신들 가족 전부 다 감방에 보내버릴 거야.”강현수의 말에 셋째 이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바로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갔다.강현수는 방해물이 사라진 후 임유진을 향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잘... 지내고 있어?”“네, 잘 지내고 있어요.”임유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볼이 핑크색으로 물들고 편안하게 웃는 것이 확실히 전과 달리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정말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이 행복하다는 건 강지혁에게로 돌아간 것이 정답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와 함께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뜻이다.아니, 어쩌면
옆에 있던 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천하의 강현수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볼품없어질지를.만약 상대가 임유진이 아닌 다른 여자였으면 다시 쟁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상대는 하필이면 강지혁의 여자였고 임유진은 이미 강지혁과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다.즉 강현수의 사랑은 여기서 끝이라는 뜻이다.이한은 강현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현수야, 세상에 여자는 많아. 임유진 씨를 내려놓으면 그때는...”“한아, 넌 아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지?”강현수가 이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이에 이한이 어리둥절해 하자 강현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있으면 절대 그런 말 못 할 거야. 여자가 아무리 차고 넘쳐도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그 여자뿐이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머리가 온통 그 여자뿐이라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야. 그 여자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라고.”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건 자기 심장을 꺼내 주는 것과 같다. 즉 심장의 주인이 이미 생겨버렸다는 뜻이다.강현수는 어릴 때 만났던 여자아이를 찾는 것에 오랜 시간을 들였고 오로지 한 여자만을 그리워해 왔다.이 마음은 쉽게 없어질 마음이 아니며 이제 와서 쉽게 잊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그러니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임유진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강지혁이 소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은 일찍 들어왔네?”“처리할 일이 별로 없어서 일찍 들어왔어.”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히더니 그녀의 발을 잡고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의 손길을 한껏 만끽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요 며칠 임유진은 다리와 발이 붓기 시작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종이 더 심해질 거라고 했다.그래서 강지혁은 일전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에서 배웠던 마사지 기술로
“백연신 씨가 네가 보낸 사람들과 컨택하는 걸 거절했다고?”임유진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응. 백연신 얼굴은 며칠 뒤 뉴스로 보게 될 거야. 그때는 백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은 뒤겠지. 물론 그 모든 건 고씨 가문의 도움 아래 가능한 일일 거고.”사실 강지혁은 백연신과 고은채가 무슨 사이인지 확실하게 알아낸 뒤에 임유진에게 얘기해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백연신과 고씨 가문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움직임이 빨랐던 건 다 백연신의 계모가 백연신이 실종된 후 멍청한 짓을 연달아서 해버린 덕이었다.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무너지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그래서 뭐가 예전의 백연신 씨가 아니라는 건데?”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백씨 가문을 다시 손에 넣는 건 좋은 일이잖아. 고씨 가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고유정이 지영이를 해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기는 하지만 지영이도 상황을 전해 들으면 이해해줄 거야.”“만약 백연신이 다른 여자랑 잘돼가고 있다면?”강지혁이 물었다.어차피 지금 얘기해주지 않아도 며칠 뒤 뉴스로 전 국민이 다 알 수 있게 보도될 테니까.“뭐?!”임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야? 백연신 씨가...?”“그럴 수도 있고 고씨 가문을 이용하기 위해 그런 척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뭐가 됐든 한지영이 깨어나면 백연신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충격으로 다시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 다 알아보고 난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아.”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놀란 마음은 여전히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만약 백연신이 정말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면 한지영은 어떡하지?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임유진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그만 생각해. 백연신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가정이야. 그리고 네가 전에 그랬잖아. 백연신은 한지영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맞아. 백연신
“응, 행복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해.”임유진이 답했다.“그래서 가끔은 무섭기도 해.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또 사라질까 봐. 유미 언니랑 지영이 일만 해도...”“그럴 리 없어!”강지혁이 임유진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얘기했다.“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절대 헤어질 일 없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너는 영원히 나랑 함께 있을 거야.”강지혁의 눈빛은 꼭 임유진을 이대로 제 안에 가둬놓으려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그의 뜨거운 눈빛에 그대로 녹아들었다.“응,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새벽 3시경, 탁유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 바로 약상자에 있는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입에 넣었다.그녀가 먹는 약은 총 8개로 상당히 많았다.탁유미는 약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약만이 그녀의 살길이었다.그때 마침 침실에서 나온 김수영이 딸이 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유미야, 그러지 말고 이제 일 그만둬. 차라리 내가 가정부 일을 할게. 그러니까 너는 집에서 윤이 옆에 있어 줘.”탁유미는 마지막 남은 약 두 알까지 다 먹은 후 고개를 돌려 김수영을 바라보았다.“허리도 안 좋으시면서 가정부 일을 어떻게 해요.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딱 한 달만 더 벌게요. 한 달 뒤에는 꼼짝하지 않고 윤이 옆에 있을게요.”김수영은 애써 웃어 보이는 탁유미의 얼굴에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해졌다.“병원에서 정말 제대로 검사한 거 맞아? 정말 네가...”“벌써 병원을 두 곳이나 갔잖아요. 두 병원 모두 결과가 똑같았어요.”탁유미가 김수영의 말을 끊고 답했다.“그럼 유진 씨한테 부탁해보면 어때? 유진 씨, 강지혁이랑 결혼했다며? 강지혁이라면 제일 좋은 의사를 소개해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희망이 생길 수도 있잖아.”김수영의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유진 씨한테는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임신도 했는데 내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