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아, 남녀가 만나서 사귀는데 어떻게 좋은 순간만 있겠어. 가끔은 서로한테 속상하기도 하고 서로가 밉기도 하고 그런 거지. 너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건 아니지? 나는 내 생일이든 네 생일이든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단 말이야.”임유진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미안해.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면 안 됐어.”강지혁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럼 이제부터 절대 헤어지자는 얘기 꺼내지 않는 거로 하자. 우리 두 사람 다, 어때?”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점차 가시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응. 그러자...”“그래서 생일 선물로는 뭐 갖고 싶어?”“...”“떠오르는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준비한다? 대신 불만 없기야.”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계란찜을 후후 불어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조금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정말 더 이상의 헤어짐은 없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임유진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가 떠나는 걸 강지혁이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지키지를 강지혁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생일 선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은 부족한 게 없는 남자였으니까. 게다가 목도리나 장갑 같은 건 이미 선물로 준 적이 있어 마땅한 선물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한지영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간 뒤 강지혁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러 백화점으로 향했다.한지영의 상태는 꽤 양호한 편으로 의사의 말에 따르면 수치가 다 정상이라 얼마 안 가 금방 깨어날 거라고 했다.이에 임유진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었다.백화점을 돌아보는 중에도 임유진의 옆에는 여전히 황채린이라는 여경호원이 따라붙었다.강지혁의 선물을 고르는 것이기에 임유진은 남성 코너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어디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강현수의 싸늘한 얼굴이 그 한마디로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배여진은 그저 임유진의 행세를 한 것뿐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강현수는 평생을 기다리던 여자를 놓쳐버렸다.“다시 한번 말해봐.”강현수가 셋째 이모를 노려보며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이 지금은 꼭 저승사자 같았다.셋째 이모는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겁에 질려 몸을 움찔 떨었다.“저... 저는 그냥 이게... 고소까지 갈 일인가 싶어서요. 그동안 여진이가 쓴 돈은 현, 현수 씨한테는 껌값이잖아요... 다른 흉악범에 비해서는 큰일도 아닌데...”“하! 하하하하하.”그 말에 강현수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주먹을 쥐고 셋째 이모 쪽으로 날렸다.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이한이 강현수의 팔을 잡으며 얼른 그를 말렸다.“현수야, 진정해! 이런 인간이 하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뭐가 있어. 안 그래?”“한아, 너도 이 여자가 하는 말 들었잖아. 너는 이 말이 안 웃겨? 큰일이 아니라잖아. 내 인생을 망쳐놓고 큰일이 아니라잖아. 하하하.”강현수가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어댔다.“현수야, 네 맘 다 아니까 진정해...”이한이 강현수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그런데 그때 강현수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멎었다.이에 의아해진 이한이 강현수를 바라보자 강현수가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임유진이 서 있었다.이한은 임유진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현수가 하루라도 빨리 임유진을 잊을 수 있게 억지로 밖으로 데리고 나와 쇼핑을 했더니 배여진의 엄마 때문에 앞길이 막히고 이제는 임유진까지 만나버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집에서 게임이나 함께 하자고 할 것을 그랬다며 이한은 이 순간 무척이나 후회했다.한편 강현수는 넋을 잃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헛것일까 봐, 너무나도
그 말에 셋째 이모가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우리는 사촌이잖아. 만약 네가 여진이를 도와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네가 정 없는 애라고 욕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니?”“가해자도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마당에 피해자인 내가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임유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나는 언니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날 해하려 했을 때부터 이미 사촌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그 말에 셋째 이모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임유진의 뺨이라도 때릴 모양이었다.하지만 셋째 이모가 뺨을 내리치기 전에 황채린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손목을 꽉 잡아버렸다.셋째 이모는 손목이 으스러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저한테 손을 올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만약 제가 이렇게 경고했음에도 또다시 손을 올리면 그때는 그 손목, 완전히 부러질지도 몰라요.”임유진의 말에 셋째 이모가 씩씩거리며 황채린의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얼른 손목을 뺐다.그러고는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노려보았다.“이제는 경호원까지 달고 다녀? 좋아. 네가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한 번만 더 유진이한테 입을 놀리거나 함부로 손을 올리면 그때는 배여진은 물론이고 당신들 가족 전부 다 감방에 보내버릴 거야.”강현수의 말에 셋째 이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바로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갔다.강현수는 방해물이 사라진 후 임유진을 향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잘... 지내고 있어?”“네, 잘 지내고 있어요.”임유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볼이 핑크색으로 물들고 편안하게 웃는 것이 확실히 전과 달리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정말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욱신거렸다.임유진이 행복하다는 건 강지혁에게로 돌아간 것이 정답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와 함께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진다는 뜻이다.아니, 어쩌면
옆에 있던 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천하의 강현수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볼품없어질지를.만약 상대가 임유진이 아닌 다른 여자였으면 다시 쟁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상대는 하필이면 강지혁의 여자였고 임유진은 이미 강지혁과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다.즉 강현수의 사랑은 여기서 끝이라는 뜻이다.이한은 강현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현수야, 세상에 여자는 많아. 임유진 씨를 내려놓으면 그때는...”“한아, 넌 아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 없지?”강현수가 이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건넸다.이에 이한이 어리둥절해 하자 강현수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있으면 절대 그런 말 못 할 거야. 여자가 아무리 차고 넘쳐도 내 눈에 보이는 건 오직 그 여자뿐이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머리가 온통 그 여자뿐이라 그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야. 그 여자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라고.”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건 자기 심장을 꺼내 주는 것과 같다. 즉 심장의 주인이 이미 생겨버렸다는 뜻이다.강현수는 어릴 때 만났던 여자아이를 찾는 것에 오랜 시간을 들였고 오로지 한 여자만을 그리워해 왔다.이 마음은 쉽게 없어질 마음이 아니며 이제 와서 쉽게 잊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그러니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임유진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강지혁이 소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은 일찍 들어왔네?”“처리할 일이 별로 없어서 일찍 들어왔어.”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히더니 그녀의 발을 잡고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의 손길을 한껏 만끽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요 며칠 임유진은 다리와 발이 붓기 시작했다.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종이 더 심해질 거라고 했다.그래서 강지혁은 일전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에서 배웠던 마사지 기술로
“백연신 씨가 네가 보낸 사람들과 컨택하는 걸 거절했다고?”임유진이 조금 놀라며 물었다.“응. 백연신 얼굴은 며칠 뒤 뉴스로 보게 될 거야. 그때는 백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은 뒤겠지. 물론 그 모든 건 고씨 가문의 도움 아래 가능한 일일 거고.”사실 강지혁은 백연신과 고은채가 무슨 사이인지 확실하게 알아낸 뒤에 임유진에게 얘기해줄 생각이었다.하지만 백연신과 고씨 가문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움직임이 빨랐던 건 다 백연신의 계모가 백연신이 실종된 후 멍청한 짓을 연달아서 해버린 덕이었다.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무너지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그래서 뭐가 예전의 백연신 씨가 아니라는 건데?”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백씨 가문을 다시 손에 넣는 건 좋은 일이잖아. 고씨 가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고유정이 지영이를 해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기는 하지만 지영이도 상황을 전해 들으면 이해해줄 거야.”“만약 백연신이 다른 여자랑 잘돼가고 있다면?”강지혁이 물었다.어차피 지금 얘기해주지 않아도 며칠 뒤 뉴스로 전 국민이 다 알 수 있게 보도될 테니까.“뭐?!”임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거야? 백연신 씨가...?”“그럴 수도 있고 고씨 가문을 이용하기 위해 그런 척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뭐가 됐든 한지영이 깨어나면 백연신의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충격으로 다시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된 건지 다 알아보고 난 뒤에 얘기해도 늦지 않아.”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놀란 마음은 여전히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만약 백연신이 정말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면 한지영은 어떡하지?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임유진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그만 생각해. 백연신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가정이야. 그리고 네가 전에 그랬잖아. 백연신은 한지영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맞아. 백연신
“응, 행복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해.”임유진이 답했다.“그래서 가끔은 무섭기도 해.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또 사라질까 봐. 유미 언니랑 지영이 일만 해도...”“그럴 리 없어!”강지혁이 임유진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얘기했다.“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앞으로는 절대 헤어질 일 없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너는 영원히 나랑 함께 있을 거야.”강지혁의 눈빛은 꼭 임유진을 이대로 제 안에 가둬놓으려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그의 뜨거운 눈빛에 그대로 녹아들었다.“응,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새벽 3시경, 탁유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 바로 약상자에 있는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입에 넣었다.그녀가 먹는 약은 총 8개로 상당히 많았다.탁유미는 약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약만이 그녀의 살길이었다.그때 마침 침실에서 나온 김수영이 딸이 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유미야, 그러지 말고 이제 일 그만둬. 차라리 내가 가정부 일을 할게. 그러니까 너는 집에서 윤이 옆에 있어 줘.”탁유미는 마지막 남은 약 두 알까지 다 먹은 후 고개를 돌려 김수영을 바라보았다.“허리도 안 좋으시면서 가정부 일을 어떻게 해요.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딱 한 달만 더 벌게요. 한 달 뒤에는 꼼짝하지 않고 윤이 옆에 있을게요.”김수영은 애써 웃어 보이는 탁유미의 얼굴에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해졌다.“병원에서 정말 제대로 검사한 거 맞아? 정말 네가...”“벌써 병원을 두 곳이나 갔잖아요. 두 병원 모두 결과가 똑같았어요.”탁유미가 김수영의 말을 끊고 답했다.“그럼 유진 씨한테 부탁해보면 어때? 유진 씨, 강지혁이랑 결혼했다며? 강지혁이라면 제일 좋은 의사를 소개해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희망이 생길 수도 있잖아.”김수영의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유진 씨한테는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임신도 했는데 내 일로 신경 쓰게 하고
그러다 결국 탁유미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마찬가지로 김수영을 꽉 안아주며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엄마, 울지 마요. 울지... 마요.”사실 탁유미가 제일 걱정되는 사람은 아들인 윤이가 아닌 어머니인 김수영이었다.딸로서 효도 한번 못했는데 마지막까지 불효를 저지르게 될 테니까....다음날.식자재 준비를 위해 근처 마트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탁유미는 마침 곽동현과 만나게 되었다.곽동현은 탁유미를 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집에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동현 씨,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근처에 일 보러 왔다가 장난감 좀 전해주려고 왔어요. 제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긴 한데 상태도 양호하고 전에 윤이랑 얘기했을 때 윤이도 관심 있어 했거든요. 아, 만약 윤이가 장난감이 질린다고 하면 그대로 버려도 돼요. 어차피 비싼 물건도 아니거든요.”“고마워요. 윤이가 좋아하겠네요.”탁유미가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이것들 집으로 옮기면 되죠? 제가 들어드릴게요.”곽동현은 탁유미가 차에 실은 식자재를 보더니 소매를 걷으며 다가왔다.이에 탁유미는 재차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곽동현과 함께 식자재를 집까지 옮겼다.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한 차량에 있는 남자가 무거운 눈길로 지켜봤다.곽동현은 오래 머물지 않고 장난감을 전해주고 탁유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아래까지 바래다줄게요.”그러자 탁유미도 함께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근처 편의점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거든요.”아래로 내려가는 길, 곽동현이 잠깐 뜸을 들이다 물었다.“유진 씨는... 잘 지내요?”“네, 강지혁 씨랑 잘 지내고 있어요. 몇 달 뒤면 아이도 태어나고요.”탁유미의 말에 곽동현의 얼굴이 잠깐 쓸쓸하게 변하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지낸다니 다행이네요. 솔직히 좀 걱정했거든요.”임유진은 그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여자기에 자신과 함께이지
“고마워요.”곽동현이 뒤돌아 떠날 때 탁유미는 뭔가를 그리워하듯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곽동현의 뒷모습 바라보았다.그러다 곽동현이 차 운전석에 올라타고 단지를 벗어나서야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편의점 쪽으로 가기 위해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쪽 팔을 잡혀버렸고 그대로 발걸음이 멈춰버렸다.“저 남자인가 보지? 네가 새 삶을 시작하려는 남자가?”이경빈의 조롱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탁유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리고 곧바로 차갑고 어딘가 화가 나 보이는 얼굴도 시야에 들어왔다.탁유미는 정장 차림의 이경빈을 보더니 조금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왜,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이경빈은 싸늘한 말로 대꾸하며 불쾌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아까 탁유미가 흔하디흔하게 생긴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을 때 가슴이 욱신거려 미치는 줄 알았다.자신만 보면 얼굴을 굳히던 여자가 별 볼 일 없는 남자에게는 잘도 웃어줬다.그 남자 때문에 양육권을 포기하려는 건가?“탁유미, 너 이렇게 쉬운 여자였어? 남자가 좀 잘해주면 금세 아이도 포기하고 새살림 차리려는 그런 여자였냐고!”날카로운 말이 탁유미를 향해 날라왔다.탁유미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경빈에게 잡힌 손이 아닌 다른 손을 들어 자기 심장 쪽을 매만졌다.욱신거리지도 않고 따끔하지도 않다.이경빈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이경빈의 말이 아프지 않다는 건 탁유미가 진정으로 모든 걸 내려놨다는 증거였다.상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 그 상대가 하는 말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다.“그날 호텔 방에서 이미 약속한 거 아니었나? 너한테 윤이를 보내기 전까지의 3개월은 온전히 나랑 윤이 둘만의 시간이니까 앞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건 삼가줘. 3개월 후면 약속대로 너한테 윤이 보내고 더 이상 네 앞에도 윤이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