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제는 정말 그 어떤 말을 들어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과 남은 시간은 오직 윤이와 김수영을 위한 거니까.“알았어. 지금 써서 줄게.”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우악스럽게 잡혀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놔줄래?”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손을 놓았다.탁유미는 손을 뺀 후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이경빈은 어쩐지 손아귀가 공허해진 느낌에 어쩐지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그의 요구대로 계약서까지 써준다고 하는데 뭐가 이렇게 자꾸 답답하고 마음에 걸리는 걸까? 뭣 때문에 두려움까지 느끼는 걸까?탁유미는 이경빈과 함께 집으로 올라왔다.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탁유미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이경빈에게 물었다.“어떻게 쓸까?”그러자 이경빈이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양육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3개월 뒤에 윤이를 나한테 넘기겠다는 내용을 적어. 그리고 앞으로 윤이랑은 연락도 하지 않고 윤이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겠다는 것도. 물론 몰래 만나는 것도 안 돼. 만약 네가 계약서까지 썼음에도 허튼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 널 제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거야.”“걱정하지 마. 허튼짓할 거였으면 애초에 널 찾아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윤이와는 이 3개월이 마지막이야.”탁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이경빈이 원하는 요구들을 기재해 나갔다.윤이와는 이 3개월이 마지막이다. 윤이의 미래에 그녀가 함께할 일은 없다.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3개월이고 그녀는 이 3개월 동안 윤이와 마지막으로 원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이경빈은 탁유미의 평온한 답변에 눈살을 찌푸렸다.그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는 닿지 않는 것 같고 꼭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한때는 껌딱지처럼 옆에 달라붙어 작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며 나 좀 봐달라고, 네가 날 바라봐주는 게 좋다고 했던 여자였는
“그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이경빈이 갑자기 탁유미의 손을 낚아채더니 벽 쪽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언제는 윤이가 네 목숨이라며? 아이는 더 이상 낳고 싶지 않다며? 그런데 지금은 연애도 하고 싶고 이제는 그 남자의 애까지 낳고 싶어졌어?”손을 비틀며 이경빈에게서 벗어나려 힘을 줘봤지만 탁유미의 힘으로는 끄떡없었고 이경빈은 그녀가 반항하면 할수록 더 세게 힘을 가했다.“대답해. 넌 내 앞에서 유리잔을 들어 네 배까지 찔렀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은 아이 같은 건 다른 남자 사이에서 또 낳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래?”이경빈이 무서운 얼굴로 추궁하기 시작했다.이에 탁유미는 반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렇게도 사랑했는데, 가진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그 사랑도 기한이 다 되니 이토록 부질없게 느껴졌다.“좋아하는 남자랑 함께하고 그 남자랑 나를 닮은 아이를 내가 낳겠다는 게 왜? 뭐가 문제야? 걱정하지 마. 네 아이를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탁유미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어떤 희로애락도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에 이경빈의 얼굴은 무섭게 가라앉았다.“그래? 그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 윤이를 버리고 아이를 낳아줄 만큼? 날 좋아했을 때보다 더?”“널 좋아한 건 내 실수야.”실수.이경빈은 실수라는 그녀의 말에 이성을 잃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탁유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전부 다 먹어버리려는 듯 그는 그녀가 숨 술 공간조차 주지 않았다.탁유미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입술에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이내 모든 걸 다 포기한 듯 반항을 멈추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실수’라는 두 글자에 자극을 받아 홧김에 그녀에게 키스했지만 이경빈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의 키스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끝날 것 같지 않았던 키스가 끝이 나고 이경빈은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뗐다.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그녀와의 키스는 정신이 아득해
이경빈은 자신이 탁유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경빈 씨, 소는 왜 갑자기 취하한 거예요? 윤이 데려오겠다면서요.”공수진이 S 시까지 찾아와 이경빈에게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경빈이 당분간 S 시에 머물기로 한 순간부터 불안하고 또 초조했다. 꼭 자신이 모르는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탁유미는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분명하지만 그녀와 이경빈 사이에는 아이라는 유대가 남아있다. 아이라는 건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고 아이로 맺어진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그래서 공수진은 하루라도 빨리 이경빈과 결혼해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고 싶었다.“탁유미랑 합의 봤어. 3개월 뒤에 군말 없이 윤이를 보내주겠대. 그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윤이 앞에 나타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을 거래.”이경빈의 말에 공수진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이렇게 갑자기 양육권을 넘게 주는 게 뭔가 이상해요.”꿍꿍이라는 말에 이경빈은 순간 탁유미와 우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자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광경이 떠올랐다.이에 그는 어쩐지 화가 치밀어 조금 딱딱하게 말했다.“꿍꿍이는 무슨. 그 여자가 머리를 굴려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공수진은 이경빈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나긋나긋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알겠어요. 합의했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죠. 경빈 씨, 나 좋은 엄마가 될게요. 윤이를 내 아들처럼 잘 키워볼게요.”이경빈은 공수진의 말에 문득 그날 밤 탁유미가 호텔 방으로 찾아와 말했던 첫 번째 조건이 생각났다.“경빈 씨? 왜 그래요?”공수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저기 경빈 씨, 우리 결혼식 말이에요. 이 3개월 안에 빨리 진행해버리는 거 어때요? 결혼 준비도 거의 끝나가고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바로 윤이 데려올 수 있잖아요. 그때가 되면 나도 윤이를 돌봐줄 엄마라는 명분이 생기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탁유미는 공수진이 제 발로 또다시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공수진은 부잣집 사모님이라도 되는 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두르고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유치원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나요?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경빈 씨한테 들었어요. 양육권을 포기한다면서요?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길래 끝까지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꼬기를 내렸네요? 혹시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을 빌미로 다른 이익을 얻어갈 생각은 아니죠?”공수진은 포장마차 앞에 서서 음식을 조리하는 탁유미를 마치 패배자 보듯 바라보며 조롱했다.이에 탁유미는 가스 불을 끄고 공수진을 바라보았다.“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야?”“당연히 아니죠. 나랑 경빈 씨 3개월 안에 결혼해요. 3개월 뒤에 윤이를 우리한테 보낼 생각이죠? 걱정하지 마요. 윤이는 내가 아주 ‘잘’ 키워줄 테니까.”공수진은 일부러 ‘잘’이라는 글자를 강조하며 탁유미의 화를 돋우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이에 탁유미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 씨 때문에 유산까지 했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고 그 일로 탁유미 씨가 감옥살이까지 했으니 벌은 다 받았다고 생각할게요. 나는 그렇게 꽁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윤이도 내 친아들처럼 잘 키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공수진의 눈빛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탁유미는 공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공수진, 그 사건의 진상이 어땠는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알아. 네가 그때 날 모함하고 음해할 수 있었던 건 이경빈이 날 싫어해서 가만히 내버려 둔 덕이야. 하지만 상대가 윤이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윤이는 이경빈의 자식이야. 이경빈이 네가 윤이한테 손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이경빈이 정말 그렇게 멍청해 보여?”그 말에 공수진의 표정이 굳더니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닫았다.“만약 그 언젠가 너 때문에 윤이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날이 오면 이경빈은 네가 아닌 윤이를 선택할 거야. 자기 핏줄
공수진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탁유미,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두고 봐!”공수진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얼마 안 가 양아치 몇 명이 다가오더니 포장마차에 있던 손님을 쫓아내고 손님들이 앉았던 의자와 음식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엎어버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유독 공수진이 앉은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다.즉 이 양아치들은 공수진이 부른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양아치 중 한 명은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탁유미에게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가했다.탁유미도 반항을 해보고 주먹도 막아봤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결국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버렸고 양아치들은 쓰러진 그녀에게 욕을 퍼부으며 자비 없이 발길질을 해댔다.“미친년이 감히 누굴 건드려? 너 같은 년은 기어오르지 못하게 확실히 밟아버려야 해!”“독한 년, 입 꾹 다물고 있는 거 봐.”탁유미는 이를 꽉 깨문채 버티고 또 버텼다.공수진과 양아치들에게 살려달라는 말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그런데 그때 갑자기 발길질이 멈추더니 이내 양아치들의 비명과 깜짝 놀란 듯한 공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탁유미가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요?!”임유진이 서둘러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유진 씨가 왜...”“언니 보러 왔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양육권을 포기하려는 것을 말리려고 왔다가 양아치들이 날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임유진과 함께 온 황채린은 이미 진작 양아치들을 제압해 바닥에 무릎을 꿇렸고 몰래 도망가려는 공수진의 손도 낚아채 임유진의 앞으로 데려왔다.“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나한테 이딴 식으로 굴어?! 나 당신들 고소할 거야!”공수진은 큰소리로 외치며 황채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뿌리쳐봐도 끄떡없었다.“잘됐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강지혁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입을 열었다.“약혼녀 데리러 왔나 봐요?”“강 대표님도 아는 사람 데리러 왔나 보죠?”이경빈이 되물었다.“제 와이프랑 와이프 친구가 여기 있다고 해서요.”강지혁의 말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공수진은 아까 전화로 일이 좀 생겼다고 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해도 공수진이 울먹거리며 흐느끼는 바람에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그런데 지금 강지혁의 하는 말을 들으니 상황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설마... 탁유미도 경찰서에 있는 건가?생각을 마친 이경빈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강지혁이 갑자기 뒤에서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가 양육권을 이 대표님한테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이유...이경빈은 강지혁의 말에 전에 다른 남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던 탁유미의 말이 생각나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강 대표님이 남 일에 이토록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이 대표님의 증언으로 탁유미 씨를 감옥에 보낸 일,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한마디 건네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겨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는 타인의 일 따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경빈과 탁유미를 보고 있으면 그와 임유진의 일이 떠올라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탁유미는 이경빈의 증언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임유진은 강지혁의 방관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경빈은 후회하지 말라는 강지혁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후회라니, 그딴 걸 할 리가 없다.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고 3년 반이라는 형은 한 아이의 생명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자꾸 심장이 욱신거렸다.생각을 다잡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버린 탁
임유진은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지만 지금은 탁유미 때문에 화가 머리까지 치솟아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았다.그리고 이렇게 강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공수진이 또다시 양아치들을 데리고 탁유미를 괴롭히러 올지도 모른다.공수진은 임유진의 말에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저도 그 양아치들이 뭣 때문에 왔는지 궁금하네요!”임유진은 공수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더니 고개를 숙여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언니,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네, 괜찮아요.”탁유미가 애써 웃어 보이며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에 임유진이 탁유미를 부축하려고 하자 강지혁이 탁유미의 반대편 팔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내가 할게.”그러고는 그대로 탁유미의 팔을 잡아 부축하고는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경빈은 떠나는 세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혁은 탁유미를 좋아하지도 않고 탁유미를 부축한 건 단지 임유진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모습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또한 아까 이경빈의 곁을 스칠 때 탁유미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것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꼭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탁유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눈을 떼지 않았다.그리고 공수진은 탁유미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이경빈의 눈빛에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설마 탁유미가 신경 쓰이기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경빈이 탁유미를 신경 쓴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결국 이경빈과 결혼하는 건 그녀일 테고 결혼한 뒤에도 이경빈은 영원히 그녀의 것일 테니까....경찰서에서 나왔는데도 공수진은 여전히 자신은 억울하다며 울먹거렸다.“나는 그냥 앞으로 윤이를 잘 키우겠다고 한 것뿐인데... 그냥 탁유미 씨와는 이제 과거의 악감정을 다 풀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뺨을 맞을 줄은 몰랐어요. 나는 그때 유산까지 했는데 탁유미 씨는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건지
공수진은 이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가장 먼저 탁유미부터 제거할 생각이다. 그리고 윤이도 괴롭히고 또 괴롭혀 이윽고 제 발로 집을 나가게 할 생각이다....임유진과 강지혁은 탁유미를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검사 결과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탁유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유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씩씩거렸다.“난 유미 언니가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이경빈에게 윤이를 맡기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윤이가 이경빈한테로 간다는 건 공수진이 윤이의 새엄마가 된다는 건데, 그 공수진이 윤이를 제대로 키워줄 리가 없잖아!”“탁유미 씨도 생각이 있겠지.”강지혁이 임유진을 달래주며 말했다.“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으니까 너도 이제 그만 화 풀어. 화내면 몸에 안 좋아.”“옆에서 보는 게 답답해서 그래. 이경빈은 공수진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걸 수도 있어. 이경빈이 공수진을 옆에 둔 건 이씨 가문이 망하기 직전 이경빈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이 필요할 때 마침 골수 기증에 적합한 기증자가...”“공수진이었기 때문이라고?”“응.”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공수진이 골수를 기증해준 걸 알아버렸으니 이경빈 입장에서는 공수진에게 목숨을 빚진 것과 다름없지.”“그런데 보통은 기증자 이름을 알려주지 않지 않나? 이경빈은 공수진이 그 기증자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임유진이 의문을 제기했다.“당시 공수진한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이경빈이 입원해 있었던 병원의 의사였어. 아마 그 남자를 통해 어찌어찌 알게 된 게 아닐까 싶어.”강지혁이 답했다.“그런데 나도 네가 공수진 주치의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했을 때 고 비서가 건넨 자료로 우연히 알게 된 거라 자세하게는 몰라.”“참, 그 주치의는 어떻게 됐어? 찾았어?”“곧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거야.”“다행이네.”임유진은 불행 중 다행인 소식에 찌푸렸던 미간을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