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간밤 이경빈은 잠이 들기 직전까지 탁유미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헝클어진 머리, 시퍼렇게 멍든 두 볼, 그리고 가녀리다 못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던 몸... 그녀의 모든 것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왜 이러는 걸까.왜 이렇게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그 여자 얼굴이 생각나는 걸까.3개월 뒤에 윤이만 건네받으면 앞으로 다시는 볼 일 없는 여자일 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대표님? 프로젝트는 이대로 진행할까요?”부하직원의 목소리에 이경빈은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이곳은 회의실이었고 그는 회의실 가운데 앉아있었다.“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는 거로 하죠.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다음 회의 때 다시 얘기합시다.”이경빈의 말에 임원진들은 너도나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주고받았다.오늘 회의 의제가 이 프로젝트의 진행 여부인데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니?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경빈의 얼굴색을 보고는 금세 고개를 숙이고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이경빈은 임원진들이 다 나간 후 옆에 있는 비서도 내보냈다.“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비서까지 나가고 이윽고 회의실에는 이경빈 혼자만 남게 되었다.이경빈은 사람들이 다 사라진 뒤에야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꾹꾹 주물렀다.“탁유미...”조용한 공간 속에서 탁유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그 시각 탁유미는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어제 병원에 가서 검사해본 결과 별다른 심한 상처는 없었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뼈 마디마디가, 근육 하나하나가 시큰하고 아파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힘들었다.그렇게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김수영이 외출할 때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물건이 있나 싶어 탁유미는 힘겹게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왔다.하지만 바닥에 발을 내디디고 움직이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몸이 하루가 다르게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뭐 하자는 건데? 네가 달라고 해서 계약서까지 써 줬잖아. 윤이랑 보내는 이 3개월 동안은 찾아오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그녀의 추궁에 이경빈은 입을 꾹 닫았다.사실 그조차도 자신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 어젯밤 경찰서에서 봤던 탁유미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달려왔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진이 뺨, 정말 네가 때렸어?”이경빈은 한참 뒤에야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탁유미는 어젯밤 일을 추궁하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결국 공수진 때문에 왔다는 건가?“그래, 내가 때렸어. 그래서 뭐 복수라도 해주게?”탁유미가 싸늘해진 얼굴로 물었다.“윤이 양육권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한 건 너야. 수진이가 자기 자식도 아닌 윤이를 잘 키우겠다고 해줬으면 감사하다고 해야지 손찌검은 왜 해? 너 스스로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너무하다고? 내가? 하! 솔직하게 말할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공수진을 죽여버리고 싶어. 공수진이 나한테 한 것에 비하면 뺨 한 대는 싼 편이야, 알아?!”탁유미는 공수진을 증오하고 있다.공수진 때문에 감옥에 간 것도 물론 억울했지만 그보다는 공수진 때문에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이 마음에 한으로 남았다.만약 공수진의 계략이 아니었다면 탁유미는 감옥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윤이는 애초에 건강하게 태어나야 할 아이였다!“탁유미 너 정말...! 수진이는 너 때문에 아이를 잃었어! 세상 빛도 못 본 아이가 그렇게 수진이 뱃속에서 사라졌다고!”이경빈이 눈을 부릅뜨며 탁유미를 비난했다.그러자 탁유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단순한 비웃음이 아닌 정말 웃긴 얘기를 들은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웃었다.이경빈의 얼굴빛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계속될수록 점점 어두워져 갔다.“그만해.”그만 웃으라고 하는데도 탁유미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탁유미, 그만하
진작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이지만 이경빈이라는 남자 앞에서는 조금의 아픈 내색도 하고 싶지 않았다.“너 왜 그래?”이경빈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난...”괜찮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입을 연 순간 혀를 깨물고 말았다.몸은 점점 떨려오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에 흘러내렸다.그리고 원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이제는 곧 죽을 사람 같았고 입술마저 하얗게 질려버렸다.“병원으로 가자!”이경빈은 전에도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서둘러 탁유미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이번에는 아까처럼 세게 잡는 것이 아닌 그녀의 상태를 봐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필요 없어. 병원 안 가도 돼.”“고집 좀 그만 부려! 너는 지금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니까!”탁유미의 고집에 이경빈이 결국 화를 냈다.그러자 탁유미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내가 아프면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니야? 아버지가 진 빚은 딸인 내가... 갚아야 한다고 네가 계속 그랬잖아.”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이를 꽉 깨물었다.“탁유미, 그렇게도 죽고 싶어? 그게 네 소원이야?!”탁유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윤이 옆에서 정말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탁유미의 초연한 얼굴에 이경빈은 순간 가슴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리듯 아파 났다.하지만 이내 머리를 세게 흔들며 탁유미의 팔을 잡고 문을 열었다.문을 연 순간 이경빈은 마침 탁유미의 집 문 앞에 서 있던 곽동현과 눈이 마주쳐버렸다.손이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초인종을 누를 예정이었던 것 같았다.이경빈은 곽동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일전 탁유미의 집 아래서 탁유미와 곽동현이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지금 이게 무슨...”곽동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듯했다.그러나
이경빈은 곽동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곽동현의 말에 탁유미의 팔을 잡고 있는 자신이 순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꼭 이 공간에 자신이 있으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이경빈은 결국 천천히 탁유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그러자 탁유미가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나 이제 병원 갈 건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이경빈은 그 말에 이를 꽉 깨물고 복도로 나왔고 탁유미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문을 닫은 후 곽동현은 다시 탁유미를 부축해 이경빈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이경빈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저딴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거지?대체 저 남자의 뭐가 그렇게도 좋아서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거지?이경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곽동현을 따라가는 탁유미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기가 버린 여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대하며 데려가는 곽동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탁유미는 곽동현의 도움으로 택시에 올라탄 후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있는 곽동현을 향해 말했다.“근처 사거리 편의점에서 내릴게요. 병원은 됐어요.”“네? 하지만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러지 말고 나온 김에 병원으로 가보는 게 어때요?”곽동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난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아까는... 고마웠어요.”“그 남자... 윤이 아버지 맞죠?”곽동현은 이경빈의 얼굴이 윤이와 닮아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네. 3개월 뒤에 윤이 양육권을 아이 아빠한테 넘기기로 했어요. 윤이를 보내고 나면 나는 엄마랑 같이 엄마 본가 쪽으로 내려갈 거고요. 동현 씨랑 유진 씨, 그리고 지영 씨랑 알게 돼서 정말 좋았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탁유미가 곧 사라질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님 본가로 내려간다고요?”동현이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물었다.“네, 본가로 내려가서 엄마랑 둘이서 살려고요.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렇게...”탁유미는 또다시 통증이 일어
“피고 임유진, 음주 운전으로 피해자 진애령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므로 징역 3년에 처한다!”“유진아, 미안한데, 그 일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널 반대하셔. 탓하고 싶으면 그 사고를 저지른 널 탓해. 그러게 왜 하필이면 진애령을 쳐 죽이냐고.”“진애령은 진화 그룹 큰딸이자 강지혁의 약혼녀였어. 너 강지혁 몰라? S시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그만하자. 우리 집안까지 화를 입게 할 수는 없어.”“임유진 씨, 죄송하지만 당신은 이미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므로 아무리 좋은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건과 연루된 지라, 자격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울 겁니다. 죄송합니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집에 기어들어 와? 그 일로 우리 집안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알기나 해? 네 동생은 여주인공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너 하나 때문에 무산됐다고! 넌 네 여동생의 앞길을 망쳤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은 범죄자를 딸로 둔 적 없어!”……유진은 꽁꽁 얼어붙은 손을 비볐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1월의 밤이었다.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노란 형광색의 환경미화원 복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청초한 얼굴은 찬바람을 맞아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예쁘고 맑은 두 눈 아래에 오뚝한 코와 빨간 입술, 긴 머리를 대충 질끈 묶어 올린 그녀의 모습은 온갖 풍파를 겪은 여성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얼굴만 보면 아마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 정도로 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젊음의 활기 대신 사회의 모든 풍파를 겪은 듯한 체념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었다.유진은 3년의 옥살이로 거칠거칠해진 자기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본래 새하얗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손은 온데간데없었다.손에 감각이 돌아온 그녀는 계속해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다가 돌연 그녀의 시선은 길 건너편의 검은 실루엣에 멈췄다.이른 아침, 그녀가 이 거리를 청소할 때
“혹시 갈 곳이 없으면 저랑 같이 갈래요?”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유진은 자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충동적으로 낯선 남자를 집에 데려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어쩌면 이 남자가 아무런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이 남자가 감옥에 있을 때의 자신과 너무 닮아서일 수도 있다.그도 아마 그녀와 똑같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발버둥 치고 있는 그녀에 반해, 그는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 같았다.“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바닥에서 주무시겠어요? 이불 깔아 드릴게요.”유진은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새 수건과 새 칫솔을 꺼내 건네주었다.“욕실은 저쪽이에요. 남자 옷이 없어서……, 최대한 옷이 젖지 않게 조심하세요.”남자가 욕실에 들어가자 유진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여분의 이불을 꺼냈다.그녀가 살고 있는 그리 집은 크지 않은 원룸이다. 기껏해야 5평 남짓한 크기에 따로 주방도 없이 달랑 화장실 하나 있는 게 다였다. 때문에 평소에 요리를 해 먹을 때면 구비해 둔 인덕션을 사용하곤 했다.남자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여전히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는 물에 젖어있었다.유진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수건 하나를 꺼내 들고 몸을 일으켰다.“허리 좀 숙여 봐요.”남자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물기를 닦아드리려고요. 머리가 너무 축축하잖아요, 안 말리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여전히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예요?”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리만치 듣기 좋았다.“네.”유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제가 당신을 데려온 이상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그는 이내 천천히 몸을 숙였다.그제야 유진은 수건을 그의 머리에 덮고 담담히 물기를 털어주었다.“이름이 뭐예요?”오랜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네, 원해요.”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좋아요.”이건 그녀가 처음 보는 남자의 미소였다. 매우 옅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다.……출근해야 하는 유진은 그에게 5천원을 건네며 밥을 챙겨 먹으라고 했다.혁이 유진의 집에서 나오자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그를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대표님.”“가자.”강지혁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검은색 벤츠에 올라탄 지혁은 손에 쥐고 있던 5천 원짜리 지폐를 한참이나 바라봤다.‘오랜만에 용돈을 받아보네. 그것도 5천원을.’그는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왔다.“강 대표님, 어제 대표님과 같이 있던 여성분은 환경위생과의 계약직 직원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곳에서 월세로 지내고 계시고, 2달 전에 출소하신 걸로 확인됩니다.”오랫동안 지혁의 개인 비서였던 고이준이 차에 오르기 바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감옥?”“네. 이름은 임유진, 3년 전 음주 운전으로 진애령 씨를 죽인 장본인이자 소민준의 전 여자친구입니다. 그때 그 일로 3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소당했습니다.”이준은 지혁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지혁은 매년 이맘때면 남루한 차림으로 노숙자인 양 거리에 앉아있곤 했다.이는 지혁의 이상한 취미이자 꺼내면 안 될 금기에도 가깝다. 누구도 감히 묻지 못하는 금기.심지어 그의 곁에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이준마저 자기의 대표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어느 순간부터 그의 루틴이자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이미 모두가 우러러보는 선망의 대상일지 언정 매년 이 행동은 반복됐다.추운 겨울밤, 지혁은 홀로 거리에 머물렀다.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세우고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밤 11시 35분만 되면 다시 그가 알던 강 대표님으로 돌아올 지혁을.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듯이, 어젯밤은 이변이 일어났다. 낯선 여자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 것이었다. 게다가
임유라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호는 망설임도 없이 임유진의 뺨을 때렸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네가 사고로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간 거로 우리 집 체면이 얼마나 깎였는지 알아? 네 인생 망쳤다고 동생 앞날도 망칠 셈이야?”임정호의 눈에는 유진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유진 덕에 서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샀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그 부러움은 모두 비아냥으로 변했고 우쭐대던 그도 체면이 완전히 깎여버렸다.유진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랐지만, 눈빛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했다.“어머니 제사 때문에 왔는데, 보아하니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앞으로 이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일 없을 겁니다.”말을 마친 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이 ‘집’에는 이제 그녀의 자리가 없었다.……유진이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캄캄했다. 불을 켠 뒤 그녀를 맞이하는 건 그저 쓸쓸한 적막감뿐이었다.5평 남짓한 방은 아무도 없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혁이 씨는 간 건가? 결국 또 혼자구나.’유진은 문득 공허함을 느꼈다.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으려고 몸을 살짝 돌렸을 때,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림자에 멍해졌다.‘혁이 씨잖아!’그는 여전히 어제와 똑같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두꺼운 앞머리가 얼굴을 반 정도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그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이런 사람이…… 정말 노숙자라고?’그녀는 아무런 친분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그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충동적이고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어쩌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왔어요.”차갑고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에겐 그저 듣기 좋은 빗소리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