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은 자신이 탁유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경빈 씨, 소는 왜 갑자기 취하한 거예요? 윤이 데려오겠다면서요.”공수진이 S 시까지 찾아와 이경빈에게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경빈이 당분간 S 시에 머물기로 한 순간부터 불안하고 또 초조했다. 꼭 자신이 모르는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탁유미는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분명하지만 그녀와 이경빈 사이에는 아이라는 유대가 남아있다. 아이라는 건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고 아이로 맺어진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그래서 공수진은 하루라도 빨리 이경빈과 결혼해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고 싶었다.“탁유미랑 합의 봤어. 3개월 뒤에 군말 없이 윤이를 보내주겠대. 그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윤이 앞에 나타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을 거래.”이경빈의 말에 공수진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이렇게 갑자기 양육권을 넘게 주는 게 뭔가 이상해요.”꿍꿍이라는 말에 이경빈은 순간 탁유미와 우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자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광경이 떠올랐다.이에 그는 어쩐지 화가 치밀어 조금 딱딱하게 말했다.“꿍꿍이는 무슨. 그 여자가 머리를 굴려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공수진은 이경빈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나긋나긋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알겠어요. 합의했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죠. 경빈 씨, 나 좋은 엄마가 될게요. 윤이를 내 아들처럼 잘 키워볼게요.”이경빈은 공수진의 말에 문득 그날 밤 탁유미가 호텔 방으로 찾아와 말했던 첫 번째 조건이 생각났다.“경빈 씨? 왜 그래요?”공수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저기 경빈 씨, 우리 결혼식 말이에요. 이 3개월 안에 빨리 진행해버리는 거 어때요? 결혼 준비도 거의 끝나가고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바로 윤이 데려올 수 있잖아요. 그때가 되면 나도 윤이를 돌봐줄 엄마라는 명분이 생기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탁유미는 공수진이 제 발로 또다시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공수진은 부잣집 사모님이라도 되는 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두르고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유치원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나요?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경빈 씨한테 들었어요. 양육권을 포기한다면서요?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길래 끝까지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꼬기를 내렸네요? 혹시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을 빌미로 다른 이익을 얻어갈 생각은 아니죠?”공수진은 포장마차 앞에 서서 음식을 조리하는 탁유미를 마치 패배자 보듯 바라보며 조롱했다.이에 탁유미는 가스 불을 끄고 공수진을 바라보았다.“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야?”“당연히 아니죠. 나랑 경빈 씨 3개월 안에 결혼해요. 3개월 뒤에 윤이를 우리한테 보낼 생각이죠? 걱정하지 마요. 윤이는 내가 아주 ‘잘’ 키워줄 테니까.”공수진은 일부러 ‘잘’이라는 글자를 강조하며 탁유미의 화를 돋우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이에 탁유미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 씨 때문에 유산까지 했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고 그 일로 탁유미 씨가 감옥살이까지 했으니 벌은 다 받았다고 생각할게요. 나는 그렇게 꽁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윤이도 내 친아들처럼 잘 키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공수진의 눈빛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탁유미는 공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공수진, 그 사건의 진상이 어땠는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알아. 네가 그때 날 모함하고 음해할 수 있었던 건 이경빈이 날 싫어해서 가만히 내버려 둔 덕이야. 하지만 상대가 윤이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윤이는 이경빈의 자식이야. 이경빈이 네가 윤이한테 손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이경빈이 정말 그렇게 멍청해 보여?”그 말에 공수진의 표정이 굳더니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닫았다.“만약 그 언젠가 너 때문에 윤이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날이 오면 이경빈은 네가 아닌 윤이를 선택할 거야. 자기 핏줄
공수진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탁유미,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두고 봐!”공수진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얼마 안 가 양아치 몇 명이 다가오더니 포장마차에 있던 손님을 쫓아내고 손님들이 앉았던 의자와 음식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엎어버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유독 공수진이 앉은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다.즉 이 양아치들은 공수진이 부른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양아치 중 한 명은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탁유미에게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가했다.탁유미도 반항을 해보고 주먹도 막아봤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결국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버렸고 양아치들은 쓰러진 그녀에게 욕을 퍼부으며 자비 없이 발길질을 해댔다.“미친년이 감히 누굴 건드려? 너 같은 년은 기어오르지 못하게 확실히 밟아버려야 해!”“독한 년, 입 꾹 다물고 있는 거 봐.”탁유미는 이를 꽉 깨문채 버티고 또 버텼다.공수진과 양아치들에게 살려달라는 말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그런데 그때 갑자기 발길질이 멈추더니 이내 양아치들의 비명과 깜짝 놀란 듯한 공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탁유미가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요?!”임유진이 서둘러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유진 씨가 왜...”“언니 보러 왔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양육권을 포기하려는 것을 말리려고 왔다가 양아치들이 날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임유진과 함께 온 황채린은 이미 진작 양아치들을 제압해 바닥에 무릎을 꿇렸고 몰래 도망가려는 공수진의 손도 낚아채 임유진의 앞으로 데려왔다.“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나한테 이딴 식으로 굴어?! 나 당신들 고소할 거야!”공수진은 큰소리로 외치며 황채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뿌리쳐봐도 끄떡없었다.“잘됐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강지혁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입을 열었다.“약혼녀 데리러 왔나 봐요?”“강 대표님도 아는 사람 데리러 왔나 보죠?”이경빈이 되물었다.“제 와이프랑 와이프 친구가 여기 있다고 해서요.”강지혁의 말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공수진은 아까 전화로 일이 좀 생겼다고 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해도 공수진이 울먹거리며 흐느끼는 바람에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그런데 지금 강지혁의 하는 말을 들으니 상황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설마... 탁유미도 경찰서에 있는 건가?생각을 마친 이경빈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강지혁이 갑자기 뒤에서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가 양육권을 이 대표님한테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이유...이경빈은 강지혁의 말에 전에 다른 남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던 탁유미의 말이 생각나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강 대표님이 남 일에 이토록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이 대표님의 증언으로 탁유미 씨를 감옥에 보낸 일,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한마디 건네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겨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는 타인의 일 따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경빈과 탁유미를 보고 있으면 그와 임유진의 일이 떠올라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탁유미는 이경빈의 증언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임유진은 강지혁의 방관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경빈은 후회하지 말라는 강지혁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후회라니, 그딴 걸 할 리가 없다.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고 3년 반이라는 형은 한 아이의 생명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자꾸 심장이 욱신거렸다.생각을 다잡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버린 탁
임유진은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지만 지금은 탁유미 때문에 화가 머리까지 치솟아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았다.그리고 이렇게 강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공수진이 또다시 양아치들을 데리고 탁유미를 괴롭히러 올지도 모른다.공수진은 임유진의 말에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저도 그 양아치들이 뭣 때문에 왔는지 궁금하네요!”임유진은 공수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더니 고개를 숙여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언니,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네, 괜찮아요.”탁유미가 애써 웃어 보이며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에 임유진이 탁유미를 부축하려고 하자 강지혁이 탁유미의 반대편 팔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내가 할게.”그러고는 그대로 탁유미의 팔을 잡아 부축하고는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경빈은 떠나는 세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혁은 탁유미를 좋아하지도 않고 탁유미를 부축한 건 단지 임유진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모습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또한 아까 이경빈의 곁을 스칠 때 탁유미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것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꼭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탁유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눈을 떼지 않았다.그리고 공수진은 탁유미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이경빈의 눈빛에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설마 탁유미가 신경 쓰이기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경빈이 탁유미를 신경 쓴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결국 이경빈과 결혼하는 건 그녀일 테고 결혼한 뒤에도 이경빈은 영원히 그녀의 것일 테니까....경찰서에서 나왔는데도 공수진은 여전히 자신은 억울하다며 울먹거렸다.“나는 그냥 앞으로 윤이를 잘 키우겠다고 한 것뿐인데... 그냥 탁유미 씨와는 이제 과거의 악감정을 다 풀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뺨을 맞을 줄은 몰랐어요. 나는 그때 유산까지 했는데 탁유미 씨는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건지
공수진은 이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면 가장 먼저 탁유미부터 제거할 생각이다. 그리고 윤이도 괴롭히고 또 괴롭혀 이윽고 제 발로 집을 나가게 할 생각이다....임유진과 강지혁은 탁유미를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검사 결과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탁유미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임유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씩씩거렸다.“난 유미 언니가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이경빈에게 윤이를 맡기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지? 윤이가 이경빈한테로 간다는 건 공수진이 윤이의 새엄마가 된다는 건데, 그 공수진이 윤이를 제대로 키워줄 리가 없잖아!”“탁유미 씨도 생각이 있겠지.”강지혁이 임유진을 달래주며 말했다.“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으니까 너도 이제 그만 화 풀어. 화내면 몸에 안 좋아.”“옆에서 보는 게 답답해서 그래. 이경빈은 공수진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걸 수도 있어. 이경빈이 공수진을 옆에 둔 건 이씨 가문이 망하기 직전 이경빈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이 필요할 때 마침 골수 기증에 적합한 기증자가...”“공수진이었기 때문이라고?”“응.”강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공수진이 골수를 기증해준 걸 알아버렸으니 이경빈 입장에서는 공수진에게 목숨을 빚진 것과 다름없지.”“그런데 보통은 기증자 이름을 알려주지 않지 않나? 이경빈은 공수진이 그 기증자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임유진이 의문을 제기했다.“당시 공수진한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이경빈이 입원해 있었던 병원의 의사였어. 아마 그 남자를 통해 어찌어찌 알게 된 게 아닐까 싶어.”강지혁이 답했다.“그런데 나도 네가 공수진 주치의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했을 때 고 비서가 건넨 자료로 우연히 알게 된 거라 자세하게는 몰라.”“참, 그 주치의는 어떻게 됐어? 찾았어?”“곧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거야.”“다행이네.”임유진은 불행 중 다행인 소식에 찌푸렸던 미간을
다음날.간밤 이경빈은 잠이 들기 직전까지 탁유미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헝클어진 머리, 시퍼렇게 멍든 두 볼, 그리고 가녀리다 못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던 몸... 그녀의 모든 것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왜 이러는 걸까.왜 이렇게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그 여자 얼굴이 생각나는 걸까.3개월 뒤에 윤이만 건네받으면 앞으로 다시는 볼 일 없는 여자일 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대표님? 프로젝트는 이대로 진행할까요?”부하직원의 목소리에 이경빈은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왔다.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이곳은 회의실이었고 그는 회의실 가운데 앉아있었다.“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는 거로 하죠. 프로젝트에 관해서는 다음 회의 때 다시 얘기합시다.”이경빈의 말에 임원진들은 너도나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주고받았다.오늘 회의 의제가 이 프로젝트의 진행 여부인데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니?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경빈의 얼굴색을 보고는 금세 고개를 숙이고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이경빈은 임원진들이 다 나간 후 옆에 있는 비서도 내보냈다.“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비서까지 나가고 이윽고 회의실에는 이경빈 혼자만 남게 되었다.이경빈은 사람들이 다 사라진 뒤에야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꾹꾹 주물렀다.“탁유미...”조용한 공간 속에서 탁유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그 시각 탁유미는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어제 병원에 가서 검사해본 결과 별다른 심한 상처는 없었지만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뼈 마디마디가, 근육 하나하나가 시큰하고 아파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힘들었다.그렇게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김수영이 외출할 때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물건이 있나 싶어 탁유미는 힘겹게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왔다.하지만 바닥에 발을 내디디고 움직이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몸이 하루가 다르게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뭐 하자는 건데? 네가 달라고 해서 계약서까지 써 줬잖아. 윤이랑 보내는 이 3개월 동안은 찾아오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그녀의 추궁에 이경빈은 입을 꾹 닫았다.사실 그조차도 자신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 어젯밤 경찰서에서 봤던 탁유미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이곳으로 달려왔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진이 뺨, 정말 네가 때렸어?”이경빈은 한참 뒤에야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탁유미는 어젯밤 일을 추궁하는 그의 말에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결국 공수진 때문에 왔다는 건가?“그래, 내가 때렸어. 그래서 뭐 복수라도 해주게?”탁유미가 싸늘해진 얼굴로 물었다.“윤이 양육권을 나한테 넘기겠다고 한 건 너야. 수진이가 자기 자식도 아닌 윤이를 잘 키우겠다고 해줬으면 감사하다고 해야지 손찌검은 왜 해? 너 스스로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너무하다고? 내가? 하! 솔직하게 말할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공수진을 죽여버리고 싶어. 공수진이 나한테 한 것에 비하면 뺨 한 대는 싼 편이야, 알아?!”탁유미는 공수진을 증오하고 있다.공수진 때문에 감옥에 간 것도 물론 억울했지만 그보다는 공수진 때문에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이 마음에 한으로 남았다.만약 공수진의 계략이 아니었다면 탁유미는 감옥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윤이는 애초에 건강하게 태어나야 할 아이였다!“탁유미 너 정말...! 수진이는 너 때문에 아이를 잃었어! 세상 빛도 못 본 아이가 그렇게 수진이 뱃속에서 사라졌다고!”이경빈이 눈을 부릅뜨며 탁유미를 비난했다.그러자 탁유미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단순한 비웃음이 아닌 정말 웃긴 얘기를 들은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웃었다.이경빈의 얼굴빛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계속될수록 점점 어두워져 갔다.“그만해.”그만 웃으라고 하는데도 탁유미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탁유미, 그만하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
이경빈은 공수진에게로 더 바짝 다가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래서 네 배 속의 아이가 주원호의 아이라는 걸 다 알고 일부러 그런 식으로 유산해 아이도 제거하고 탁유미도 제거하려고 했던 거야?”공수진의 흥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경빈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하지만 그건 꼭 거대한 해일이 밀려들기 전의 고요함으로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공수진은 이경빈의 질문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에 꽉 막힌 채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았다.이경빈은 그녀의 머릿속을 다 꿰뚫어버리려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나는... 나는...”공수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네 유산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를 불러올까? 태아가 정확히 몇 개월 된 아이였는지 물어봐 줘? 그것도 아니면 너희 집안이 의사한테 돈을 먹인 증거를 가지고 올까?”공수진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부인해봤자 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노선을 바꿔 그에게 매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경빈 씨, 미안해요. 경빈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일로 경빈 씨가 나를 싫어할까 봐...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그리고 일부러 탁유미 씨를 모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유미 씨가 나를 밀어버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산하게 된 거예요. 절대 일부러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경빈 씨,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요...? 전에는 내가 한 잘못은 다 용서해줬잖아요. 그리고 날 평생에 걸쳐 사랑하고 또 아껴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도 한 번만 봐줘요. 네...?”그녀의 눈물과 애처로운 말은 더 이상 이경빈의 동정심을 자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심기만 건드릴 뿐이었다.“용서?”이경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공수진의 팔을 뿌리쳤다.공수진은 그 충격으로 뒤에 있는 벽에 몸이 부딪쳐버렸다.그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이경빈에 의해 목이 졸려졌다.냉랭하고 차분했던 기색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
이경빈의 말에 공씨 집안 사람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공수진은 등줄기를 타고 오는 오싹함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설마...!’“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경빈 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속이다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공수진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예전이면 가여워 보였을 그녀의 모습이 지금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이경빈은 가볍게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고 화면을 두어 번 터치하더니 곧바로 공수진 쪽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그러자 휴대폰 안에서 의사와 공수진의 통화 녹음이 흘러나왔다.공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공수진은 물론이고 공씨 부부 역시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심지어 공수진은 많이 당황한 것인지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임유진이 말했던 녹음이라는 게 이거였어?! 그 여자가 기어코 경빈 씨한테 이 녹음 파일을 전해준 거야?!’공수진은 임유진을 향한 분노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참 대단해.”그때 이경빈이 천천히 병상 옆으로 다가와 공기조차 얼려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나를 몇 년이나 가지고 놀고 말이야. 참 대단해, 공수진.”“이... 이거 거짓말이에요! 가짜라고요! 누가 내 목소리로 일부러 이런 통화 녹음을 만든 거예요!”“네가 아니라고?”공수진의 부인에 이경빈은 손에 든 자료를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당시 너랑 통화했던 의사 선생님도 찾았고 네 목소리가 맞는지 전문가한테 의뢰하기까지 했어. 그런데도 네가 아니야?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공수진은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병원 기록을 알아보면 되잖아요! 기, 기록에 다 적혀 있어요. 내가 경빈 씨한테 기증했다는...”드르륵.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공수진은 갑자기 나타난 주원호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