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이지만 이경빈이라는 남자 앞에서는 조금의 아픈 내색도 하고 싶지 않았다.“너 왜 그래?”이경빈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난...”괜찮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입을 연 순간 혀를 깨물고 말았다.몸은 점점 떨려오고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에 흘러내렸다.그리고 원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이제는 곧 죽을 사람 같았고 입술마저 하얗게 질려버렸다.“병원으로 가자!”이경빈은 전에도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서둘러 탁유미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이번에는 아까처럼 세게 잡는 것이 아닌 그녀의 상태를 봐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필요 없어. 병원 안 가도 돼.”“고집 좀 그만 부려! 너는 지금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니까!”탁유미의 고집에 이경빈이 결국 화를 냈다.그러자 탁유미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내가 아프면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니야? 아버지가 진 빚은 딸인 내가... 갚아야 한다고 네가 계속 그랬잖아.”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이를 꽉 깨물었다.“탁유미, 그렇게도 죽고 싶어? 그게 네 소원이야?!”탁유미는 죽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윤이 옆에서 정말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탁유미의 초연한 얼굴에 이경빈은 순간 가슴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리듯 아파 났다.하지만 이내 머리를 세게 흔들며 탁유미의 팔을 잡고 문을 열었다.문을 연 순간 이경빈은 마침 탁유미의 집 문 앞에 서 있던 곽동현과 눈이 마주쳐버렸다.손이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초인종을 누를 예정이었던 것 같았다.이경빈은 곽동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일전 탁유미의 집 아래서 탁유미와 곽동현이 한참을 서로를 바라보며 웃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지금 이게 무슨...”곽동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듯했다.그러나
이경빈은 곽동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곽동현의 말에 탁유미의 팔을 잡고 있는 자신이 순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꼭 이 공간에 자신이 있으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이경빈은 결국 천천히 탁유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그러자 탁유미가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나 이제 병원 갈 건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이경빈은 그 말에 이를 꽉 깨물고 복도로 나왔고 탁유미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문을 닫은 후 곽동현은 다시 탁유미를 부축해 이경빈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이경빈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저딴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든 거지?대체 저 남자의 뭐가 그렇게도 좋아서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거지?이경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곽동현을 따라가는 탁유미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기가 버린 여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대하며 데려가는 곽동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탁유미는 곽동현의 도움으로 택시에 올라탄 후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있는 곽동현을 향해 말했다.“근처 사거리 편의점에서 내릴게요. 병원은 됐어요.”“네? 하지만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러지 말고 나온 김에 병원으로 가보는 게 어때요?”곽동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탁유미가 고개를 저었다.“난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아까는... 고마웠어요.”“그 남자... 윤이 아버지 맞죠?”곽동현은 이경빈의 얼굴이 윤이와 닮아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네. 3개월 뒤에 윤이 양육권을 아이 아빠한테 넘기기로 했어요. 윤이를 보내고 나면 나는 엄마랑 같이 엄마 본가 쪽으로 내려갈 거고요. 동현 씨랑 유진 씨, 그리고 지영 씨랑 알게 돼서 정말 좋았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탁유미가 곧 사라질 것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님 본가로 내려간다고요?”동현이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물었다.“네, 본가로 내려가서 엄마랑 둘이서 살려고요.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렇게...”탁유미는 또다시 통증이 일어
탁유미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더니 임유진을 바라보며 담담히 얘기를 꺼냈다.“유진 씨 추측이 맞아요. 나 간암 3기예요. 이제 6개월 정도 남았어요. 항암 치료하면 2년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했지만 남은 생을 항암치료에 쏟아붓고 싶지는 않아요.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마지막 6개월을 보내고 싶어요.”임유진은 그 말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약 봉투를 봤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설마 암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럼... 수술은요? 수술로는 어떻게 안 된대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간이식을 받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대요. 하지만 내 혈액형이 좀 특별해서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그래서 수술은 진작에 포기했어요.”김수영은 탁유미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유미야, 수술 말인데 사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때 네가 골수를 이식해준 사람이 있잖아. 그 사람 나이가 너랑 비슷하다고 했었지, 아마? 혈액형도 같고 또 젊고, 우리... 그 사람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사정을 얘기하면 너한테 간을 기증해줄지도 모르잖아.”간이식 수술이라는 건 원래 간의 일부만 이식하는 수술이고 간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기에 간을 기증해도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다.“엄마, 그만 해요. 이미 지난 일이에요. 그리고 당시 골수를 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병원 규정상 얘기를 못 해줘요. 애초에 저도 뭔가를 바라고 기증한 게 아니고요. 지금 나 필요하다고 간 내놓으라는 건 강도질이나 다름없어요.”“하지만...!”“그리고 간이식 수술이라는 건 생각하는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에요. 골수 이식 수술보다 리스크가 더 큰 수술이라고요. 만약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면 지금쯤 배우자도 있고 아이도 있을 텐데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리스크를 감당할 필요는 없죠.”모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임유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언니도... 골수를 기증해준 적 있어요?”“네, 몇 년
임유진은 윤이 양육권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던 탁유미가 이경빈에게 양육권을 넘기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을 해야 했는지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다만 윤이를 보내기로 결정을 내린 지금에도 마음속 한구석이 공허하고 쓸쓸하고 또 아플 거라는 건 탁유미의 마음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자기 목숨처럼 생각하던 자식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하는데 그 어떤 부모가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무슨 병인데?”“간암이래. 벌써 3기고. 간이식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는데 언니 혈액형이 흔치 않은 혈액형이라서 공여자를 찾는 게 쉽지 않나 봐.”임유진은 코를 훌쩍이더니 고개를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나 좀 도와줘.”강지혁은 눈이 빨개진 채 울먹거리고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응, 뭐든 도와줄게.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임유진의 눈물은 여전히 강지혁을 약하게 만든다.그리고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강지혁은 한편으로 질투도 났다.탁유미의 상황상 임유진이 걱정하는 것도, 걱정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아는데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걱정을 쏟아붓는다는 게 질투가 났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감정을 추스르고 한참 뒤에야 다시 평온해진 얼굴로 말했다.“언니랑 얘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언니도 예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적이 있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공여자는 자기 골수가 누구에게로 가는지를 몰라.”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뭔가 깨달은 듯 물었다.“탁유미 씨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이경빈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임유진은 정확하게 간파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의심이 들어.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잖아. 공수진도 골수를 기증했고 언니도 골수를 기증했어. 그리고 공수진은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남자친구를 뒀었고. 이경빈은 마침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너무나도 잘 짜여
그래서 임유진은 주사를 다 맞고 나면 항상 제일 먼저 강지혁부터 달래야 했다.“혁아, 나 정말 괜찮아. 몇 번 맞았다고 이제는 아픈 것도 모르겠어.”그 말에 강지혁의 눈가가 서서히 빨개졌다.임유진은 아프지 않다고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전에 의사가 이 주사는 맞으면 맞을수록 감각이 무뎌지기는커녕 점점 더 아프다고 했으니까.그러니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정말이야. 혁이 너 지금 곧 울 것 같은 표정인 거 알아? 아까 나한테 울지 말라고 한 사람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 이따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임유진은 아이 달래듯 강지혁의 볼을 매만지고 머리도 다정히 쓰다듬었다.주삿바늘을 정리하던 간호사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강지혁이 맞나?무정한 것을 넘어 냉혈한이라는 소문을 가진 남자인데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행동을 보면 영락없는 한 마리 강아지였다.주인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고 있는 강아지 말이다.그리고 그 주인은 당연하게도...간호사의 눈빛이 임유진에게로 향했다.천하의 강지혁이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건 오직 이 여자 앞에서만일 것이 분명했다.강지혁이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건 병원 내부에서만 돌고 있는 얘기로 밖으로는 뉴스는 물론이고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다.그래서 병원 종사자들은 처음에는 임유진이 임신을 무기 삼아 강지혁을 협박한 것이라고 자기들끼리 쉬쉬했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된 사람들은 금방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은 여자 배 속에 있는 세 명의 아이보다 그 아이들을 임신한 여자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까.주사 하나 맞는 것도 자기 살이 뚫리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는데 그 누가 협박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수업이 진행될 회의실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어쩐지 첫날 수업을 들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든 듯했다.다만 이유가 무엇인
“너한테라면 괴롭힘당해도 괜찮아.”강지혁이 임유진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괴롭히는 건 얼마든지 해도 되니까 대신 내 곁에서 떠나지만 마.”그 말에 임유진은 심장께가 갑자기 뭔가에 꽉 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은 여전히 뭔가를 불안해하고 있는 듯했다.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지?결혼도 했고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는 마음까지 확인했고 이제야 서서히 예전에 함께 했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는데 대체 왜 아직도 불안해 하고 있는 거지?임유진은 양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살포시 감싸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난 너 안 떠나. 무슨 일이 있어도!”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가가 짙어지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 미소가 너무나도 예쁘고 황홀해 임유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그런데 그녀 말고 넋을 잃은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그건 바로 주변 사람들이었다.여자가 강지혁의 볼을 감싸는 것도 놀랄 일인데 강지혁은 여자가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며 기분이 좋은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강지혁이 웃는 얼굴을 볼 기회는 절대 흔치 않다.강지혁은 지금 꼭 눈앞에 있는 여자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고 자신의 웃음을 포함한 모든 것이 전부 눈앞에 있는 여자의 것이라는 듯 굴었다.여성들은 강지혁의 순종적인 모습에 임유진이 부러워났다. 이미 배 속에 아이까지 품은 예비 엄마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부러웠다.그리고 강지혁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특히 더 부러워했다.뉴스나 기사에서 강지혁이 결혼했다는 소식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대개는 어느 한 가문의 며느리나 딸이라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임유진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어느새 따끔해진 주위의 시선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 얼른 강지혁의 볼에서 손을 뗐다.그러고는 빨개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며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수업이 시작되고 오늘도 역시나 의사가 예비 아빠들을 앞으로 불러 시범을 보이게 했다.임유진은 시범을 보이러 나간 예비
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놀라다가 점점 이름이 많이 거론될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연치고는 유명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그룹의 총수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임신한 아내를 위해 하나같이 제 할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여기로 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게다가 이 병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은 시간대가 무척이나 다양해 꼭 이 시간대만 있는 건 아니었다.그러니 아내를 위해 수업에 참여하는 정성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하필이면 이 시간대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뭐가 그렇게 많아?”강지혁의 말이 끝난 후 임유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아마 일부러 온 거겠지.”강지혁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일부러?”임유진은 그 말에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이 사람들... 네가 여기 있다는 거 알고 일부러 온 거야...?”“목적이 뭔지는 수업이 끝나면 알게 되겠지.”강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수업이 끝난 후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그들은 비즈니스맨의 얼굴을 하며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게다가 다가온 사람들 모두 강지혁이 아까 임유진에게 이름을 얘기해줬던 사람들이었다.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정말 강지혁 때문에 수업에 참석한 것이었다.만약 눈앞에 있는 광경을 사진이라도 찍으면 아마 사람들은 재계 총수들끼리의 사적인 만남이나 비즈니스 포럼인 줄 알 것이다.뭐가 됐든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이 끝난 뒤의 광경으로는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앞을 꽉 메우고 있는 재계의 거물들과 그런 거물들의 아내군단을 한번 훑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그들을 상대했다.하지만 그 와중에도 임유진의 손은 여전히 꽉 잡고 있었다....오후.탁유미는 식자재
화를 내는 김수영과 달리 탁유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엄마, 내가 골수를 이식해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나한테 간 기능을 해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당시 나는 정말 그저 누군가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었을 뿐이고 이제 와서 그 사람이 간 기증을 거부했다고 해서 속상하지도 실망감이 들지도 않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선택인 거예요.”“왜 유미 너만 이런지 모르겠어. 왜... 왜 내 딸 명이 이리도...”김수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탁유미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그리고 탁유미는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엄마, 우리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기로 해요.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속상한 얘기보다는 즐거운 얘기를 더 많이 하고 싶어요. 나는 정말 마지막 6개월을 엄마랑 윤이랑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요. 네?”김수영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런 양심도 없는 인간 얘기 말고... 이제는 행복한 얘기만 하자. 그러자 유미야...”탁유미는 미소를 지으며 김수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간암 3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탁유미도 김수영처럼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하지만 지금은 원망보다는 그저 엄마랑 윤이랑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그 시각, 공수진은 웬 남자를 만나러 클럽 룸 안으로 들어갔다.공수진의 반대편 소파에 앉은 남자는 훈훈한 외모를 가진 젊은 남성이었다.이 남자는 바로 공수진의 전 남자친구로 공수진이 이경빈과 사귀기 전까지 사귀었던 남자였다.공수진은 가방을 옆에 내려놓더니 남자를 무섭게 노려보았다.“내가 분명히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왜 또 불러?”공수진의 말에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주원호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최근 재밌는 전화를 한 통 받아서 말이야. 너도 흥미를 느낄 일이라 불렀어.”“전화?”“얼마전에 웬 아줌마가 전화가 와서 자기 딸이 간염에 걸렸는데 간이식 수술이 필요하다며 자기 딸이 전에 골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