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곽동현이 뒤돌아 떠날 때 탁유미는 뭔가를 그리워하듯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곽동현의 뒷모습 바라보았다.그러다 곽동현이 차 운전석에 올라타고 단지를 벗어나서야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편의점 쪽으로 가기 위해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쪽 팔을 잡혀버렸고 그대로 발걸음이 멈춰버렸다.“저 남자인가 보지? 네가 새 삶을 시작하려는 남자가?”이경빈의 조롱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탁유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리고 곧바로 차갑고 어딘가 화가 나 보이는 얼굴도 시야에 들어왔다.탁유미는 정장 차림의 이경빈을 보더니 조금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물었다.“네가 왜 여기 있어?”“왜,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이경빈은 싸늘한 말로 대꾸하며 불쾌한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아까 탁유미가 흔하디흔하게 생긴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을 때 가슴이 욱신거려 미치는 줄 알았다.자신만 보면 얼굴을 굳히던 여자가 별 볼 일 없는 남자에게는 잘도 웃어줬다.그 남자 때문에 양육권을 포기하려는 건가?“탁유미, 너 이렇게 쉬운 여자였어? 남자가 좀 잘해주면 금세 아이도 포기하고 새살림 차리려는 그런 여자였냐고!”날카로운 말이 탁유미를 향해 날라왔다.탁유미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경빈에게 잡힌 손이 아닌 다른 손을 들어 자기 심장 쪽을 매만졌다.욱신거리지도 않고 따끔하지도 않다.이경빈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이경빈의 말이 아프지 않다는 건 탁유미가 진정으로 모든 걸 내려놨다는 증거였다.상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면 그 상대가 하는 말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다.“그날 호텔 방에서 이미 약속한 거 아니었나? 너한테 윤이를 보내기 전까지의 3개월은 온전히 나랑 윤이 둘만의 시간이니까 앞으로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건 삼가줘. 3개월 후면 약속대로 너한테 윤이 보내고 더 이상 네 앞에도 윤이 앞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제는 정말 그 어떤 말을 들어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과 남은 시간은 오직 윤이와 김수영을 위한 거니까.“알았어. 지금 써서 줄게.”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우악스럽게 잡혀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제 그만 놔줄래?”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손을 놓았다.탁유미는 손을 뺀 후 아무 말 없이 앞장서서 걸어갔다.이경빈은 어쩐지 손아귀가 공허해진 느낌에 어쩐지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그의 요구대로 계약서까지 써준다고 하는데 뭐가 이렇게 자꾸 답답하고 마음에 걸리는 걸까? 뭣 때문에 두려움까지 느끼는 걸까?탁유미는 이경빈과 함께 집으로 올라왔다.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탁유미는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이경빈에게 물었다.“어떻게 쓸까?”그러자 이경빈이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양육권을 포기한다는 것과 3개월 뒤에 윤이를 나한테 넘기겠다는 내용을 적어. 그리고 앞으로 윤이랑은 연락도 하지 않고 윤이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겠다는 것도. 물론 몰래 만나는 것도 안 돼. 만약 네가 계약서까지 썼음에도 허튼짓을 하면 그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이용해서 널 제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거야.”“걱정하지 마. 허튼짓할 거였으면 애초에 널 찾아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윤이와는 이 3개월이 마지막이야.”탁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이경빈이 원하는 요구들을 기재해 나갔다.윤이와는 이 3개월이 마지막이다. 윤이의 미래에 그녀가 함께할 일은 없다.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3개월이고 그녀는 이 3개월 동안 윤이와 마지막으로 원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이경빈은 탁유미의 평온한 답변에 눈살을 찌푸렸다.그의 말은 더 이상 그녀에게는 닿지 않는 것 같고 꼭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한때는 껌딱지처럼 옆에 달라붙어 작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며 나 좀 봐달라고, 네가 날 바라봐주는 게 좋다고 했던 여자였는
“그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이경빈이 갑자기 탁유미의 손을 낚아채더니 벽 쪽으로 그녀를 몰아세웠다.“언제는 윤이가 네 목숨이라며? 아이는 더 이상 낳고 싶지 않다며? 그런데 지금은 연애도 하고 싶고 이제는 그 남자의 애까지 낳고 싶어졌어?”손을 비틀며 이경빈에게서 벗어나려 힘을 줘봤지만 탁유미의 힘으로는 끄떡없었고 이경빈은 그녀가 반항하면 할수록 더 세게 힘을 가했다.“대답해. 넌 내 앞에서 유리잔을 들어 네 배까지 찔렀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지금은 아이 같은 건 다른 남자 사이에서 또 낳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래?”이경빈이 무서운 얼굴로 추궁하기 시작했다.이에 탁유미는 반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렇게도 사랑했는데, 가진 전부를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그 사랑도 기한이 다 되니 이토록 부질없게 느껴졌다.“좋아하는 남자랑 함께하고 그 남자랑 나를 닮은 아이를 내가 낳겠다는 게 왜? 뭐가 문제야? 걱정하지 마. 네 아이를 낳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탁유미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그 어떤 희로애락도 느껴지지 않았다.하지만 그 말에 이경빈의 얼굴은 무섭게 가라앉았다.“그래? 그 남자가 그렇게도 좋아? 윤이를 버리고 아이를 낳아줄 만큼? 날 좋아했을 때보다 더?”“널 좋아한 건 내 실수야.”실수.이경빈은 실수라는 그녀의 말에 이성을 잃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탁유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전부 다 먹어버리려는 듯 그는 그녀가 숨 술 공간조차 주지 않았다.탁유미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입술에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이내 모든 걸 다 포기한 듯 반항을 멈추고 그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실수’라는 두 글자에 자극을 받아 홧김에 그녀에게 키스했지만 이경빈은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의 키스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끝날 것 같지 않았던 키스가 끝이 나고 이경빈은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뗐다.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그녀와의 키스는 정신이 아득해
이경빈은 자신이 탁유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졌다....“경빈 씨, 소는 왜 갑자기 취하한 거예요? 윤이 데려오겠다면서요.”공수진이 S 시까지 찾아와 이경빈에게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경빈이 당분간 S 시에 머물기로 한 순간부터 불안하고 또 초조했다. 꼭 자신이 모르는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탁유미는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분명하지만 그녀와 이경빈 사이에는 아이라는 유대가 남아있다. 아이라는 건 생각보다 영향력이 크고 아이로 맺어진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그래서 공수진은 하루라도 빨리 이경빈과 결혼해 자기 위치를 확고히 하고 싶었다.“탁유미랑 합의 봤어. 3개월 뒤에 군말 없이 윤이를 보내주겠대. 그리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윤이 앞에 나타나지도 연락하지도 않을 거래.”이경빈의 말에 공수진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이렇게 갑자기 양육권을 넘게 주는 게 뭔가 이상해요.”꿍꿍이라는 말에 이경빈은 순간 탁유미와 우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자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광경이 떠올랐다.이에 그는 어쩐지 화가 치밀어 조금 딱딱하게 말했다.“꿍꿍이는 무슨. 그 여자가 머리를 굴려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공수진은 이경빈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나긋나긋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알겠어요. 합의했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죠. 경빈 씨, 나 좋은 엄마가 될게요. 윤이를 내 아들처럼 잘 키워볼게요.”이경빈은 공수진의 말에 문득 그날 밤 탁유미가 호텔 방으로 찾아와 말했던 첫 번째 조건이 생각났다.“경빈 씨? 왜 그래요?”공수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저기 경빈 씨, 우리 결혼식 말이에요. 이 3개월 안에 빨리 진행해버리는 거 어때요? 결혼 준비도 거의 끝나가고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바로 윤이 데려올 수 있잖아요. 그때가 되면 나도 윤이를 돌봐줄 엄마라는 명분이 생기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탁유미는 공수진이 제 발로 또다시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공수진은 부잣집 사모님이라도 되는 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두르고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유치원 앞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나요?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경빈 씨한테 들었어요. 양육권을 포기한다면서요?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길래 끝까지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꼬기를 내렸네요? 혹시 양육권을 포기하는 것을 빌미로 다른 이익을 얻어갈 생각은 아니죠?”공수진은 포장마차 앞에 서서 음식을 조리하는 탁유미를 마치 패배자 보듯 바라보며 조롱했다.이에 탁유미는 가스 불을 끄고 공수진을 바라보았다.“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야?”“당연히 아니죠. 나랑 경빈 씨 3개월 안에 결혼해요. 3개월 뒤에 윤이를 우리한테 보낼 생각이죠? 걱정하지 마요. 윤이는 내가 아주 ‘잘’ 키워줄 테니까.”공수진은 일부러 ‘잘’이라는 글자를 강조하며 탁유미의 화를 돋우려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이에 탁유미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 씨 때문에 유산까지 했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고 그 일로 탁유미 씨가 감옥살이까지 했으니 벌은 다 받았다고 생각할게요. 나는 그렇게 꽁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윤이도 내 친아들처럼 잘 키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공수진의 눈빛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탁유미는 공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공수진, 그 사건의 진상이 어땠는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알아. 네가 그때 날 모함하고 음해할 수 있었던 건 이경빈이 날 싫어해서 가만히 내버려 둔 덕이야. 하지만 상대가 윤이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윤이는 이경빈의 자식이야. 이경빈이 네가 윤이한테 손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이경빈이 정말 그렇게 멍청해 보여?”그 말에 공수진의 표정이 굳더니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닫았다.“만약 그 언젠가 너 때문에 윤이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날이 오면 이경빈은 네가 아닌 윤이를 선택할 거야. 자기 핏줄
공수진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탁유미,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두고 봐!”공수진은 말을 마친 후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얼마 안 가 양아치 몇 명이 다가오더니 포장마차에 있던 손님을 쫓아내고 손님들이 앉았던 의자와 음식이 놓여있는 테이블을 엎어버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유독 공수진이 앉은 자리는 건드리지 않았다.즉 이 양아치들은 공수진이 부른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양아치 중 한 명은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탁유미에게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가했다.탁유미도 반항을 해보고 주먹도 막아봤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결국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버렸고 양아치들은 쓰러진 그녀에게 욕을 퍼부으며 자비 없이 발길질을 해댔다.“미친년이 감히 누굴 건드려? 너 같은 년은 기어오르지 못하게 확실히 밟아버려야 해!”“독한 년, 입 꾹 다물고 있는 거 봐.”탁유미는 이를 꽉 깨문채 버티고 또 버텼다.공수진과 양아치들에게 살려달라는 말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그런데 그때 갑자기 발길질이 멈추더니 이내 양아치들의 비명과 깜짝 놀란 듯한 공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탁유미가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요?!”임유진이 서둘러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유진 씨가 왜...”“언니 보러 왔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양육권을 포기하려는 것을 말리려고 왔다가 양아치들이 날뛰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임유진과 함께 온 황채린은 이미 진작 양아치들을 제압해 바닥에 무릎을 꿇렸고 몰래 도망가려는 공수진의 손도 낚아채 임유진의 앞으로 데려왔다.“이거 놔! 내가 누군지 알고 나한테 이딴 식으로 굴어?! 나 당신들 고소할 거야!”공수진은 큰소리로 외치며 황채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뿌리쳐봐도 끄떡없었다.“잘됐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강지혁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 입을 열었다.“약혼녀 데리러 왔나 봐요?”“강 대표님도 아는 사람 데리러 왔나 보죠?”이경빈이 되물었다.“제 와이프랑 와이프 친구가 여기 있다고 해서요.”강지혁의 말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공수진은 아까 전화로 일이 좀 생겼다고 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해도 공수진이 울먹거리며 흐느끼는 바람에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다.그런데 지금 강지혁의 하는 말을 들으니 상황이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설마... 탁유미도 경찰서에 있는 건가?생각을 마친 이경빈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강지혁이 갑자기 뒤에서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가 양육권을 이 대표님한테 넘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이유...이경빈은 강지혁의 말에 전에 다른 남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던 탁유미의 말이 생각나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강 대표님이 남 일에 이토록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이 대표님의 증언으로 탁유미 씨를 감옥에 보낸 일,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강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한마디 건네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겨 먼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는 타인의 일 따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경빈과 탁유미를 보고 있으면 그와 임유진의 일이 떠올라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탁유미는 이경빈의 증언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임유진은 강지혁의 방관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경빈은 후회하지 말라는 강지혁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후회라니, 그딴 걸 할 리가 없다.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고 3년 반이라는 형은 한 아이의 생명을 대체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자꾸 심장이 욱신거렸다.생각을 다잡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고 얼굴에는 멍이 들어버린 탁
임유진은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지만 지금은 탁유미 때문에 화가 머리까지 치솟아 말이 예쁘게 나가지 않았다.그리고 이렇게 강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공수진이 또다시 양아치들을 데리고 탁유미를 괴롭히러 올지도 모른다.공수진은 임유진의 말에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저도 그 양아치들이 뭣 때문에 왔는지 궁금하네요!”임유진은 공수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더니 고개를 숙여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언니,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네, 괜찮아요.”탁유미가 애써 웃어 보이며 휘청휘청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에 임유진이 탁유미를 부축하려고 하자 강지혁이 탁유미의 반대편 팔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내가 할게.”그러고는 그대로 탁유미의 팔을 잡아 부축하고는 경찰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경빈은 떠나는 세 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강지혁은 탁유미를 좋아하지도 않고 탁유미를 부축한 건 단지 임유진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모습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또한 아까 이경빈의 곁을 스칠 때 탁유미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것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꼭 자신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탁유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눈을 떼지 않았다.그리고 공수진은 탁유미의 뒷모습만 바라보는 이경빈의 눈빛에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설마 탁유미가 신경 쓰이기라도 하는 건가?!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경빈이 탁유미를 신경 쓴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결국 이경빈과 결혼하는 건 그녀일 테고 결혼한 뒤에도 이경빈은 영원히 그녀의 것일 테니까....경찰서에서 나왔는데도 공수진은 여전히 자신은 억울하다며 울먹거렸다.“나는 그냥 앞으로 윤이를 잘 키우겠다고 한 것뿐인데... 그냥 탁유미 씨와는 이제 과거의 악감정을 다 풀고 싶었던 것뿐인데 이렇게 뺨을 맞을 줄은 몰랐어요. 나는 그때 유산까지 했는데 탁유미 씨는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건지
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는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아이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하는 새엄마와 아이에게 관심조차 없는 아빠의 보호 아래 있다. 말이 보호지 실상은 아마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전처의 애’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러고 보니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많이 혼났을까? 맞은 애들은 많이 다쳤나?’“무슨 생각해?”강지혁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려 퍼졌다.“아... 별건 아니고 오늘 놀이공원에서 봤던 그 어린 남자애가 갑자기 생각나서. 그 왜 애들 노는 곳에서 자기보다 덩치도 큰 애들을 때려눕힌 애 있잖아. 아마 그 일로 엄청 혼났을 거야.”“그 아이가 걱정돼?”강지혁은 말을 하며 임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응. 걱정되고 신경 쓰여. 나 사실 아까 그 애 얼굴을 봤을 때 너랑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 그 애가 너랑 닮아서 이렇게도 신경이 쓰이나 봐.”“나와 닮았다고?”강지혁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얼굴이 닮았다기보다는 눈빛이랑 표정이 그때의 너랑 많이 닮았어. 도무지 아이의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어. 그런데 분명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자기 누나는 끔찍이 여기더라고. 아마 키 큰 남자애들이 그 여자애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 남자애도 손을 대지 않았을 거야.”“그래?”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확실히 신경 쓰이고 지켜주고 싶은 누나가 있는 점에서는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그 역시 임유진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만약 그날 임유진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강지혁은 아마 전과 다를 것 없이 쭉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도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인지도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그 남자애 가족을 찾아내 그 일로 그 애가 벌을 받는다거나 하지 않도록 조치할게.”“정말?”“응. 그러니까 이제 걱
임유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여기 있어?”“기억 안 나? 너 아까 거기서 기절했었어. 혹시 몰라 병원으로 왔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대”강지혁은 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혁아, 어떡해... 흑... 우리 아이가... 아이가... 흑...”아이를 향한 미안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인지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목 놓아 울기만 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김재호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 만약 그 아이가 정말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뒀다면 우리한테 애가 묻힌 곳이라도 얘기해줬을 거야. 절대 경찰에게 끌려가면서까지 입을 닫고 있지는 않았을 거야.”강지혁은 나머지 한 아이가 살아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김재호가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살아있다고...?”임유진은 그제야 눈물을 그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응, 분명히 살아있을 거야. 아이의 행방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찾아낼게.”강지혁은 손을 들어 임유진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나더러 울지 말라더니 이제는 네가 우네.”임유진은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위로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강지혁의 팔을 꽉 잡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우리 아이, 정말 살아있어...?”“응.”“정말...?”“응, 정말.”임유진은 강지혁의 품에 기댄 채 계속해서 질문했고 강지혁은 그 질문에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그러기를 몇 번, 임유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지혁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혁아, 우리 아이 꼭 찾아줘...”5년이나
김재호는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애초에 임유진을 제거하려고 한 건 강씨 가문을 책임질 강지혁에게 약점이 생겨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했던 강문철의 유언 때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강문철이 내린 시험에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강지혁도 구하고 스스로의 목숨도 구했다.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똑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한편 임유진의 말을 들은 강지혁은 순간 심장을 누군가가 강하게 틀어쥐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해 보이는 말투로 얘기했다.“설령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내가 해결해!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까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어?!”임유진은 시선을 옮겨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임유진!”강지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이었다.“그럼 영원히 그런 날이 오지 않게 하자.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나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순간 머리가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익숙하지만 낯선 무언가가 스쳐 가는 듯한 느낌이 들이 들었다.그때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김재호가 입을 열었다.“제 조건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행방에 관해 얘기는 해드리죠. 나머지 한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숨이 멎었습니다.”“거짓말!”임유진이 반박했다.“사실입니다. 애초에 살아있었다면 두 분 중 한 분한테 보냈거나 제가 데리고 있었겠죠.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이는 없잖습니까.”김재호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답했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확실히 김재호 곁에 아이가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다. 또한 방 내부를 이곳저곳 둘러봐도 아이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품 같은 것은 없다.그러면 나머지 아이는 정말 5년 전에 살아남지 못한 건가? 정말 태어나자마자 숨이 멎어버린 건가?아이가 없을지도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고 말 테니까.”“응.”두 사람은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경호원 세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이 있었다.임유진은 몇 초과량 흐르고 나서야 그 중년남성이 바로 김재호라는 것을 알아챘다. 5년이나 지나 있어 그런지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주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흰머리도 나고 수염도 생겼으며 못 보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반 시민이었다.만약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났다면 아마 김재호인 걸 인지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김재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태연하게 미소를 띄웠다.“역시 회장님 곁으로 돌아오셨네요.”임유진은 천천히 자리에 멈춰서며 답했다.“네, 돌아왔어요.”5년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나가봐.”강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방에서 나갔다.“아이는 어디 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라면 보내드렸잖아요. 한 명은 회장님 곁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임유진 씨 곁으로.”“내가 어떤 아이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유진이 배 속에 있었던 건 세쌍둥이였어. 우리한테 한 명씩 보냈으면 나머지 한 명 또한 당연히 있어야지.”“회장님, 세쌍둥이 중에 두 명이나 생존했는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실제로 세쌍둥이 중에 세 명 다 태어나는 경우는 적어요.”김재호의 빈정거림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우리 아이... 살아있는 거죠? 그렇죠?”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설령 김재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