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아이들이 태어난 뒤의 미래가 점점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것이 틀림없다....그 뒤로 임유진은 매일같이 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병원을 갈 필요는 없었다.강지혁이 임유진이 힘들게 움직이는 건 싫다고 간호사를 직접 저택으로 불러 주사를 놓게 했으니까.유산방지 주사는 맞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고통도 점점 더 강해졌고 주사를 맞은 곳은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퍼렇게 변해갔다.저녁.강지혁은 이미 몇 번이나 주사를 맞은 임유진의 복부를 보며 미간을 꿈틀거렸다.“의사한테 다른 방법은 없나 한번 물어볼까?”“더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해주셨을 거야. 그리고 이거 겉보기에 이래서 그렇지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야. 나보다 더 심한 임산부들도 많은데 뭐. 특히 시험관 시술을 한 사람들은 임신할 때까지 이걸 거의 매일 맞아야 한 대. 그러니 나 정도는 양호한 거지 뭐.”강지혁은 그녀의 말에도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고작 일주일 맞은 것으로도 이러한데 만약 앞으로 더 맞게 되면 그때는 고통이 배로 증가하게 될 거고 멍도 더 세게 들 테니까.“혁아, 나 정말 괜찮아.”임유진은 웃어 보이며 강지혁을 위로했다.그러자 강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가 주사를 맞았던 곳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그러고는 임유진이 이런 고생을 감내한 만큼 아이들도 무사히 태어나주기를 바랐다.“할 수만 있다면 너 대신 내가 아이를 낳고 싶어.”“난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 그래서 한 번도 혼자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해.”임유진은 이렇게 말을 해줬지만 강지혁은 지금 그녀를 살뜰히 보살펴 주는 것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할 수만 있으면 그녀에게는 조금의 고통도 주고 싶지 않았다.그때 임유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임유진은 발신자가 탁유미인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네, 언니.”“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혹시 자고 있었던 건 아니죠?”탁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에요.”임유진은
강지혁은 그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이가 이경빈한테 가면 부족함 없이 자랄 거래. 윤이가 어른들 싸움에 상처받는 게 싫대. 그런데 이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 문제로 양육권을 포기한다고?”임유진은 탁유미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자신을 해한 여자에게 제 아들을 부탁할 여자가 아니었으니까.“예상외의 선택이기는 하지만 틀린 결정은 아니야. 아이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확실히 탁유미 씨보다는 이경빈 쪽이 훨씬 더 나을 테니까.”강지혁이 객관적인 사실을 늘어놓았다.“게다가 승소할 확률도 낮았잖아.”“재판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그 재판에서 이기려고 네가 공수진의 주치의도 찾고 있잖아. 그 주치의를 찾으면 일이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너무 아깝지.”임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안 되겠어. 지금 당장 언니를 만나러 가야겠어.”“안 돼. 오늘은 너무 늦었어.”강지혁이 다시 임유진을 자리에 앉혔다.“그리고 네가 지금 찾아간다고 해도 일하느라 제대로 얘기도 못 할 거야. 그러니까 내일 다시 찾아가든지 해.”그 말에 임유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내일 다시 언니한테 물어볼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그 시각, 탁유미는 포장마차 골목이 아닌 택시를 타고 이경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왔다.으리으리한 호텔을 바라보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두 먹을 꽉 말아쥐었다.이미 생각을 다 끝낸 일이다.이제 와서 망설일 이유는 없다.이경빈에게 보내주는 게 윤이를 위한 선택이다.탁유미는 머릿속으로 이게 맞다며 되뇐 후 천천히 발걸음을 들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그러고는 리셉션 데스크로 가 직원에게 말했다.“이경빈 씨한테 연락 좀 넣어주시겠어요? 탁유미가 찾아왔다고 말해주시면 돼요.”그 말에 직원이 내선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두어 마디 나눈 후 다시 전화를 끊고 탁유미를 바
탁유미가 이경빈을 따라 소파 쪽으로 다다랐을 때 이경빈이 드디어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또 뭣 때문에 찾아왔는데? 드디어 양육권을 포기할 마음이라도 들었어?”“그래.”탁유미의 입에서 긍정의 두 글자가 튀어나왔다.다만 이 말을 내뱉을 때 탁유미는 자신의 영혼마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양육권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기쁘기는커녕 찝찝하고 기분이 나빠졌다.“진심으로 하는 말이야?”이경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자 탁유미가 쓰게 웃었다.“네가 원하던 거 아니야? 대신 조건이 두 가지 있어.”이경빈은 그녀의 처연한 미소가 너무나도 거슬렸다.“말해.”이경빈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첫 번째는 네가 직접 윤이를 키웠으면 좋겠어. 공수진에게 아이 교육을 다 맡는 게 아니라 네가 직접. 공수진이 아이를 양육하는데 완전히 발을 뺄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만약 공수진과 윤이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그때는 윤이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공수진과 나는 사이가 안 좋았잖아. 그러니 공수진도 제 아이처럼 대하지는 못할 거야.”“수진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여자가 아니야. 수진이가 윤이를 학대할까 봐 걱정인가 본데 쓸데없는 걱정이야. 윤이를 자기 아들처럼 대하겠다고 했어.”이경빈이 싸늘한 얼굴로 얘기했다.“공수진의 말을 전부 다 믿어?”“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 내가 안 믿으면 또 누가 믿어?”이경빈의 단호한 말에 탁유미는 순간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만약... 윤이랑 공수진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윤이를 네 어머니한테 맡겨줘. 어머님이 윤이를 돌보게 해줘. 그래 줄 수 있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너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야?”“엄마로서 내 아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것뿐이야. 너는 공수진을 믿지만 나는 아니거든.”탁유미는 이경빈의 눈을 똑바로
“네가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수락하면 너한테 양육권 넘겨줄게.”탁유미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이경빈과의 거리를 벌렸다.“윤이를 짐처럼 여기면서 3개월은 왜 필요한 건데? 차라리 지금 당장 나한테 보내.”“싫어!”탁유미가 단호하게 외치며 이경빈을 바라보았다.“3개월이야. 3개월만 윤이랑 같이 살다가 너한테 보내준다잖아. 그것도 안 돼?”“3개월?”이경빈이 코웃음을 쳤다.“어차피 까맣게 잊어버릴 건데 3개월이 왜 필요해?”그 말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만약 내 조건에 응하지 않으면 나도 양육권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이경빈은 탁유미의 태도에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갑자기 찾아와서 나한테 양육권을 양보하겠다고 하는 의도가 뭐야? 너 설마 남자 생겼어? 그래서 그 남자랑 새 인생 살려고 생각을 바꿨어?”탁유미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 침묵이 이경빈에게는 묵인하는 것으로 보였다.순간 이경빈은 가슴에 무수히 많은 가시가 돋친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렸다.탁유미가 시선을 내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아파 왔다.“어떤 놈한테 반한 건지 얘기나 해봐. 혹시 알아? 한때 너랑 연인이었던 정으로 내가 축하선물이라도 보낼지.”이경빈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내 개인적인 일에 상관하지 말고 너는 대답만 해주면 돼. 내 조건에 응할 건지 말 건지.”탁유미는 다시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이경빈과의 거리를 벌렸다.하지만 거리를 벌린 즉시 이경빈이 또다시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개인적인 일? 그 남자한테 아주 단단히 빠졌나 봐? 그 남자는 너한테 아이가 있다는 거 모르지? 어떻게 시간 날 때 내가 대신 말해줄까? 너랑 나랑 어떻게 붙어먹었는지?”짝!날카로운 마찰음이 방안에 울려 퍼지고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이경빈의 얼굴은 옆으로 돌아갔고 탁유미의 손바닥은 화끈거리며 빨개졌다.그렇다.탁유미가 이경빈의 뺨을 내리친 것이다.탁유미는 이경빈을 똑바로 바
“아, 아무것도... 아니야...”탁유미가 힘겹게 대답했다.고작 1분 남짓의 통증일 뿐인데도 그녀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린 채 에너지를 다 빼앗긴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이경빈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치 심장에 돌이라도 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병원까지 데려다줄게.”“괜찮아.”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손을 들어 이경빈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이경빈은 순간 팔이 찌릿 저렸다.“고질병일 뿐이야.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으면 괜찮아져. 그보다 내 조건... 받아들일 거야?”탁유미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그리고 이경빈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고질병이라니?대체 언제부터 생긴 거지?당시 그녀와 연애할 때는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렇다는 건 역시 감옥에 있을 때 생긴 병인가?“대답해... 내 조건 받아들일 거야?”탁유미가 재촉했다.기어코 그의 입에서 꼭 답변을 듣고야 말겠다는 표정이었다.이경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래, 받아들일게.”그 말에 탁유미의 입가에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듣고 싶은 말을 들어 안심된다는 듯한 미소에 창백한 얼굴색이 더해지니 아름답기도 하고 또 유약해 보이고 했다.이경빈은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탁유미는 천천히 손에 힘을 풀더니 몸을 바로 세웠다.“그럼 3개월 뒤에 약속대로 윤이를 보낼게. 약속을 어길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녀는 천천히 이경빈의 팔을 잡았던 손을 놓고는 휘청휘청 문으로 향했다.“탁유미!”이경빈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탁유미가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뭐 할 말 남았어?”“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이경빈은 어쩐지 지금 너무나도 불안했다. 불안한 탓에 심장도 빨리 뛰었다.“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감옥에서 애까지 낳아 길렀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괜찮아. 안 괜찮아도 괜찮아지게 할 거야...”탁유미는 이경빈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다시 고개
“언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왜 갑자기 포기한다는 건데요?”임유진은 별다른 인사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원래부터 승소할 확률도 낮았고... 유진 씨도 알다시피 나는 경제적으로 윤이한테 많은 지원을 못 해줘요. 앞으로 윤이가 크면 돈 들어갈 곳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텐데 그걸 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는 없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제일 최악만 면하게 해주는 것뿐이에요.”“그럼 내가 해주면 되잖아요!”임유진이 다급하게 외쳤다.“나는 윤이를 내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윤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아깝지 않다고요!”“고마워요.”탁유미가 쓰게 웃었다.“그런데 유진 씨한테는 그간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만약 윤이한테 정말 아버지가 없었다면 유진 씨한테 부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경빈이 있잖아요. 윤이한테 내가 주지 못하는 것을 다 줄 수 있는 아빠가 있는데 어떻게 유진 씨한테 도움을 청해요. 그러니 이게 맞아요.”“하지만 그러면... 언니는요? 언니는 윤이가 없어도 정말 괜찮아요?”임유진은 임신한 뒤로 아이와 엄마 사이의 유대를 확실히 느꼈다.이제 막 13주 조금 넘은 자신도 이런데 4년을 기른 탁유미는 더 할 것이 분명했다.“안 괜찮아요. 나도 윤이 보내고 싶지 않아요.”탁유미가 시선을 내린 채 중얼거렸다.“하지만 내 마음보다 윤이의 미래가 더 중요해요. 나는 윤이가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그건 언니가 생각하는 행복이죠. 윤이는 그 행복을 기꺼워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윤이는 알아요? 앞으로 이경빈과 함께 살게 될걸?”“아직 윤이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3개월 뒤에 이경빈한테 데려갈 때, 그때 얘기해주려고요.”이 3개월이 그녀에게는 윤이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유진 씨, 윤이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탁유미가 간절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언니한테는 얘기 안 했지만 사실 혁이한테 부탁해서 공수진을 수술해줬던 주치의를 찾고 있어요. 만약
“알았어.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자.”강지혁이 다시 임유진을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강지혁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저기 혁아... 나 배고파.”“그래? 기다려. 도우미한테 뭐 먹을 것 좀 해오라고 할게.”강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러지 마. 늦은 시간이라 다 잠들었을 거야. 그리고 계란찜이 먹고 싶은 거라 내가 직접 해도 돼.”“그럼 내가 해줄게.”“네가?”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응. 금방 해줄 테니까 기다려.”결국 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식탁 의자에 앉힌 후 계란을 집어 들고 그릇에 하나둘 깼다. 그러고는 간을 하고 젓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진지하게 요리하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어쩐지 강지혁이 조금 더 가정적인 남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있던 거리가 점점 좁혀지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았다.임유진은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는 강지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평화롭고 여느 부부 같은 이런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았다.임유진이 넋을 잃고 있던 그때 주문한 계란찜이 완성되고 강지혁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계란찜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뜨거울 테니까 후후 불어서 먹어.”“알았어.”임유진은 숟가락으로 큼직하게 한술 뜨고는 강지혁의 조언대로 후후 불었다.“참, 혁아, 너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은 거 없어?”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강지혁이 몸을 움찔했다.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곧 그의 생일이었다.강지혁은 생일이라는 말에 임유진의 생일을 떠올렸다.그녀의 생일은 정말 최악이었고 그 최악을 만든 사람은 바로 강지혁 본인이었다.만약 강지혁이 그때 헤어짐을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임유진의 생일은 즐거움만 가득했을 것이고 다시 함께하기까지의 아프고 상처만 줬던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임유진은 시선을 계란찜에 고정한 채 계속 후후 불다가 강
“혁아, 남녀가 만나서 사귀는데 어떻게 좋은 순간만 있겠어. 가끔은 서로한테 속상하기도 하고 서로가 밉기도 하고 그런 거지. 너 설마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건 아니지? 나는 내 생일이든 네 생일이든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고 싶단 말이야.”임유진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다.“미안해.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면 안 됐어.”강지혁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럼 이제부터 절대 헤어지자는 얘기 꺼내지 않는 거로 하자. 우리 두 사람 다, 어때?”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점차 가시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응. 그러자...”“그래서 생일 선물로는 뭐 갖고 싶어?”“...”“떠오르는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준비한다? 대신 불만 없기야.”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계란찜을 후후 불어먹기 시작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조금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정말 더 이상의 헤어짐은 없는 걸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임유진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가 떠나는 걸 강지혁이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지키지를 강지혁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생일 선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은 부족한 게 없는 남자였으니까. 게다가 목도리나 장갑 같은 건 이미 선물로 준 적이 있어 마땅한 선물이 생각나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한지영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으로 간 뒤 강지혁에게 선물할 것을 고르러 백화점으로 향했다.한지영의 상태는 꽤 양호한 편으로 의사의 말에 따르면 수치가 다 정상이라 얼마 안 가 금방 깨어날 거라고 했다.이에 임유진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었다.백화점을 돌아보는 중에도 임유진의 옆에는 여전히 황채린이라는 여경호원이 따라붙었다.강지혁의 선물을 고르는 것이기에 임유진은 남성 코너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어디선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