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아. 만약 강지혁이 우리 집 전체를 망하게 하려고 들면 그때는 내가 직접 강지혁을 찾아갈 거다. 그러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결해!”진기태는 단호하게 말한 후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진세령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다음날, 한때 잘나가던 배우이자 부잣집 딸내미였던 진세령이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렀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돌기 시작했다.기사 내용에 따르면 진세령은 양손 모두 골절이라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고 하며 완치된다고 하더라도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했다.기사가 나간 후 각종 매체에서 진씨 가문에게 연락을 넣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전부 다 거절당하고 말았다.임유진은 기사 내용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행복한 임산부가 되는 방법]을 보고 있는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진세령 기사, 너랑 관련 있어?”그 말에 강지혁이 은은하게 웃었다.“왜, 내가 너 때문에 위법적인 일을 했을까 봐 걱정돼?”“...”임유진은 이에 침묵으로 답했다.그러자 강지혁이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예전의 나였다면 앞뒤 재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강지혁이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금은 네가 있으니까 위법적인 일은 안 해. 누군가를 상대해야 할 일이 있어도 법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강지혁은 임유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폭력적인 것을 싫어하고 권위를 앞세워 누군가를 짓누르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다.그러니 그녀가 싫어하는 건 할 이유가 없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강지혁에 순간 가슴이 일렁거렸다.강지혁이 자신을 위해준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고마워.”임유진이 말했다.“고마워할 거 없어. 당연한 거야. 나는 널 사랑하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나는 진세령에게 네 손을 이렇게 만든 것
“이 안에 우리 아이들이 있어.”강지혁은 임유진의 배가 조금 볼록해지고서야 실감이 났다.이 작은 배속에 새 생명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과 그가 정말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말이다.“혁이 너는 좋은 아빠가 될 거야.”임유진이 강지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정말 그럴까?”사실 강지혁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아이들이 자신처럼 외롭지만은 않기를 바랄 뿐이다.“분명히 그럴 거야.”임유진은 확신을 담아 대답한 다음 풉 하고 웃었다.“왜 웃어?”강지혁이 고개를 들어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냥, 미래에 아이들이 네 주위에 몰려들어 아빠라고 부르며 안아달라고 할 때 네가 말없이 세 명 다 안아주는 모습이 상상돼서.”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그게 어떤 그림일지 아직 그의 머리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다만 하나 알 수 있는 건 아이들이 태어나면 이 집안이 3배 더 북적거리고 3배 더 따뜻해질 거라는 것이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이 고개를 든 채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다.세상에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 건, 누군가가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이게 된 건 다 임유진 덕이다.임유진이 있어 흑백이던 그의 세상이 채색으로 되었다.“나도.”임유진은 달콤하게 웃더니 고개를 숙여 먼저 강지혁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그녀는 제일 힘들었던 시기에 강지혁을 만났고 그와 연애를 하고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자신의 인생에 결혼은 없을 거라고 아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지혁을 만난 후 모든 게 달라졌다.가족이 생긴 것도, 이렇게나 마음이 벅차고 포근해진 것도 다 강지혁 덕분이다.강지혁의 사랑이 그녀를 변하게 한 것이다....다음날.임유진은 임산부 교육 프로그램을 듣기 전 정기검진을 받게 되었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따라 함께 병원으로 갔다.임유진은 검진 중 초음파 기기 화면으로 보이는 세 명의 꼬물이들과 그 꼬물이들의 심장 소리를 전해 듣고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왜 그래?
“태아 상태가 양호한 편이기는 하지만 유산방지 주사는 맞아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 일주일을 맞게 될 거예요. 더 맞을지 말지는 일주일 뒤에 다시 판단하게 되고요. 미리 말씀드리면 주사는 복부에 맞게 됩니다. 그래서 팔이나 엉덩이에 맞는 것보다 통증이 조금 있을 거예요. 마음의 준비를 해주세요.”“네, 그럴게요.”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다 참을 수 있다.하지만 강지혁은 아니었다.그는 주삿바늘이 임유진의 복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올 때 잔뜩 긴장한 채로 간호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겁니까?”“네... 그렇죠?”간호사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정말 배에 맞아도 괜찮은 겁니까? 확실해요? 이거보다 더 짧은 건 없나요?”“...”간호사는 그 말에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그러자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혁아,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그 말에 강지혁은 그제야 간호사의 손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고 간호사가 손에 든 주삿바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이에 간호사는 괜히 긴장돼 강지혁의 눈치를 보며 주사 놓는 것을 망설였다.“혁아, 너 잠깐 나가 있을래? 네가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면 이분이 긴장하시잖아.”보다 못한 임유진이 말했다.“여기 있을 거야. 대신 시선은 다른 곳을 볼게.”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시선을 바로 임유진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간호사는 감시의 시선이 사라지자 그제야 안심하고 주삿바늘을 임유진의 복부로 밀어 넣었다.주삿바늘이 들어온 순간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의사 말대로 확실히 다른 곳보다 많이 아팠다. 하지만 이 정도 고통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3년이나 감옥에서 버텼는데 이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주사를 다 맞은 후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많이 아파?”“괜찮아. 그냥 다른 주사에 비해 조금 더 아팠을 뿐이야.”임유진이 웃으
박현재는 임산부와 그 임산부의 남편이 듣는 수업에 왜 강지혁이 버젓이 앉아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당신 왜 그래? 눈에 뭐 들어갔어?”박현재의 와이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박현재는 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와이프에게 웃어 보였다.그러고는 와이프의 손을 잡고 강지혁의 뒤쪽으로 가서 앉았다.근거리에서 보니 확실히 강지혁이 맞았다.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옆에 앉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수업을 들으러 온 듯했다.‘임산부 같은데 강 대표랑은 어떤 사이지? 친척 동생인가? 설마 부인일 리는 없고.’만약 강지혁이 결혼을 했으면 이미 기사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그 시각 임유진은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강지혁은 진지한 얼굴의 그녀를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놓친 부분이 있으면 선생님을 집으로 불러 따로 수업해 달라고 할게.”“아니, 나는 지금 이 분위기가 좋아.”임유진이 주위에 앉은 임산부들을 둘러보며 조금 들뜬 얼굴로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이 말한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잘 몰랐지만 그녀가 좋다고 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시간이 되고 수업을 맡게 된 의사가 활짝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왔다.의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걸어들어오다가 바로 앞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잠시 흠칫했다.해당 의사는 임유진의 주치의는 아니었지만 당시 강지혁이 의사들을 불러모았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강지혁이 임유진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다 알고 있는데도 아내를 따라 임산부 수업을 들으러 온 강지혁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강지혁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약혼녀가 죽었을 때도 냉랭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강지혁은 그저 그간 임자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는 여자들이
“아버님들 중에 또 지원하실 분 없으세요?”간호사는 예비 아빠들을 쭉 훑어보더니 이내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섰다.“잘생긴 아버님, 시범 좀 보여주지 않으시겠어요?”예비 아빠들 중 강지혁의 얼굴은 단연 눈에 띄었다. 그래서 간호사는 분위기도 끌어올릴 겸 바로 강지혁을 지목했다.하지만 간호사의 말에 의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리 강지혁이 지금 이 자리에 참석했어도 앞으로 나와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것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그러나 예상외로 강지혁은 간호사의 말에 바로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임유진에게 물었다.“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너 하고 싶어?”임유진이 되물었다.“네가 원하면 나갈게.”그 말에 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하면 강지혁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어떤지 무척이나 궁금했다.그래서 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응, 원해.”“좋아.”강지혁은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을 벗은 후 앞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잘생긴 얼굴에 모델 같은 기럭지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강지혁에게로 쏠렸다.예비 엄마들은 물론이고 예비 아빠들도 입을 떡 벌리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편 의사는 강지혁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원한다는 한마디에 싫은 내색도 없이 바로 앞으로 걸어 나왔으니까.강지혁의 뒤에 있던 박현재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그 언젠가 의사의 가르침 아래 아이 모형을 안고 있는 강지혁을 보게 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이건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지인들에게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사실 그대로 얘기해도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자기야, 저 남자 너무 잘생겼다. 배우일까? 아니면 모델?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대체 누구지?”박현재의 와이프가 박현재의 팔을 콩콩 두드리며 작게 소리를 질렀다.이에 박현재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당연히 한 번도 본 적 없겠지. 쉽게 볼
임유진은 아이들이 태어난 뒤의 미래가 점점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것이 틀림없다....그 뒤로 임유진은 매일같이 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병원을 갈 필요는 없었다.강지혁이 임유진이 힘들게 움직이는 건 싫다고 간호사를 직접 저택으로 불러 주사를 놓게 했으니까.유산방지 주사는 맞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 고통도 점점 더 강해졌고 주사를 맞은 곳은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퍼렇게 변해갔다.저녁.강지혁은 이미 몇 번이나 주사를 맞은 임유진의 복부를 보며 미간을 꿈틀거렸다.“의사한테 다른 방법은 없나 한번 물어볼까?”“더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해주셨을 거야. 그리고 이거 겉보기에 이래서 그렇지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야. 나보다 더 심한 임산부들도 많은데 뭐. 특히 시험관 시술을 한 사람들은 임신할 때까지 이걸 거의 매일 맞아야 한 대. 그러니 나 정도는 양호한 거지 뭐.”강지혁은 그녀의 말에도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고작 일주일 맞은 것으로도 이러한데 만약 앞으로 더 맞게 되면 그때는 고통이 배로 증가하게 될 거고 멍도 더 세게 들 테니까.“혁아, 나 정말 괜찮아.”임유진은 웃어 보이며 강지혁을 위로했다.그러자 강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가 주사를 맞았던 곳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그러고는 임유진이 이런 고생을 감내한 만큼 아이들도 무사히 태어나주기를 바랐다.“할 수만 있다면 너 대신 내가 아이를 낳고 싶어.”“난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 그래서 한 번도 혼자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해.”임유진은 이렇게 말을 해줬지만 강지혁은 지금 그녀를 살뜰히 보살펴 주는 것도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할 수만 있으면 그녀에게는 조금의 고통도 주고 싶지 않았다.그때 임유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임유진은 발신자가 탁유미인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네, 언니.”“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혹시 자고 있었던 건 아니죠?”탁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에요.”임유진은
강지혁은 그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이가 이경빈한테 가면 부족함 없이 자랄 거래. 윤이가 어른들 싸움에 상처받는 게 싫대. 그런데 이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 문제로 양육권을 포기한다고?”임유진은 탁유미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자신을 해한 여자에게 제 아들을 부탁할 여자가 아니었으니까.“예상외의 선택이기는 하지만 틀린 결정은 아니야. 아이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확실히 탁유미 씨보다는 이경빈 쪽이 훨씬 더 나을 테니까.”강지혁이 객관적인 사실을 늘어놓았다.“게다가 승소할 확률도 낮았잖아.”“재판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그 재판에서 이기려고 네가 공수진의 주치의도 찾고 있잖아. 그 주치의를 찾으면 일이 쉽게 해결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너무 아깝지.”임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안 되겠어. 지금 당장 언니를 만나러 가야겠어.”“안 돼. 오늘은 너무 늦었어.”강지혁이 다시 임유진을 자리에 앉혔다.“그리고 네가 지금 찾아간다고 해도 일하느라 제대로 얘기도 못 할 거야. 그러니까 내일 다시 찾아가든지 해.”그 말에 임유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럼 내일 다시 언니한테 물어볼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그 시각, 탁유미는 포장마차 골목이 아닌 택시를 타고 이경빈이 묵고 있는 호텔로 왔다.으리으리한 호텔을 바라보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는 두 먹을 꽉 말아쥐었다.이미 생각을 다 끝낸 일이다.이제 와서 망설일 이유는 없다.이경빈에게 보내주는 게 윤이를 위한 선택이다.탁유미는 머릿속으로 이게 맞다며 되뇐 후 천천히 발걸음을 들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그러고는 리셉션 데스크로 가 직원에게 말했다.“이경빈 씨한테 연락 좀 넣어주시겠어요? 탁유미가 찾아왔다고 말해주시면 돼요.”그 말에 직원이 내선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두어 마디 나눈 후 다시 전화를 끊고 탁유미를 바
탁유미가 이경빈을 따라 소파 쪽으로 다다랐을 때 이경빈이 드디어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또 뭣 때문에 찾아왔는데? 드디어 양육권을 포기할 마음이라도 들었어?”“그래.”탁유미의 입에서 긍정의 두 글자가 튀어나왔다.다만 이 말을 내뱉을 때 탁유미는 자신의 영혼마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이경빈은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양육권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기쁘기는커녕 찝찝하고 기분이 나빠졌다.“진심으로 하는 말이야?”이경빈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자 탁유미가 쓰게 웃었다.“네가 원하던 거 아니야? 대신 조건이 두 가지 있어.”이경빈은 그녀의 처연한 미소가 너무나도 거슬렸다.“말해.”이경빈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첫 번째는 네가 직접 윤이를 키웠으면 좋겠어. 공수진에게 아이 교육을 다 맡는 게 아니라 네가 직접. 공수진이 아이를 양육하는데 완전히 발을 뺄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만약 공수진과 윤이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면 그때는 윤이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공수진과 나는 사이가 안 좋았잖아. 그러니 공수진도 제 아이처럼 대하지는 못할 거야.”“수진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여자가 아니야. 수진이가 윤이를 학대할까 봐 걱정인가 본데 쓸데없는 걱정이야. 윤이를 자기 아들처럼 대하겠다고 했어.”이경빈이 싸늘한 얼굴로 얘기했다.“공수진의 말을 전부 다 믿어?”“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 내가 안 믿으면 또 누가 믿어?”이경빈의 단호한 말에 탁유미는 순간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만약... 윤이랑 공수진 사이에 정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윤이를 네 어머니한테 맡겨줘. 어머님이 윤이를 돌보게 해줘. 그래 줄 수 있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너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야?”“엄마로서 내 아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는 것뿐이야. 너는 공수진을 믿지만 나는 아니거든.”탁유미는 이경빈의 눈을 똑바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