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빈은 탁유미와 윤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심지어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졌는데도 차를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대체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왜 탁유미와 윤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따뜻하다고 느끼는 걸까?왜 두 사람을 위해 양육권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까?윤이에게 탁유미가 좋은 엄마인 건 맞지만 제 아들이 탁씨 가문 사람 손에 키워지는 건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인데도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아버지를 증오했다.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이씨 가문이 하마터면 가루가 되어 사라질 뻔했으니까.얼마나 지났을까, 이경빈의 시야에 탁유미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차에 식자재가 든 큰 통을 하나하나 실었다.가뜩이나 살집도 별로 없는 몸인데 지금은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탁유미는 식자재를 다 옮기고는 운전석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자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또다시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꾹 짓누르며 몸을 웅크렸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서둘러 차에서 내려 탁유미 쪽으로 다가갔다.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을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에서는 피까지 났다.“너 왜 그래? 어디 아파?”이경빈의 질문에는 그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나왔다.“나... 난 괜찮아...”탁유미가 힘겹게 한 자 한 자 말을 내뱉었다.그녀는 하루에 통증이 두 번이나 일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은 아까 화장실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아픈듯했다.이경빈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꿈틀거렸다.“병원에 데려다줄게.”그는 말을 마친 후 탁유미를 부축하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았다.“괜찮아.”그러자 탁유미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신경 써줄 필요 없어. 그리고... 어차피 돈 아까워서 병원도 못 가.”이경빈은 그 말에 하마터면 그깟 돈 자신이 대신 대주
“정말 괜찮아?”강지혁이 임유진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 괜찮아.”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도 알잖아. 날씨가 추워지거나 습해지면 원래 이런다는 거. 내일 소 선생님한테 가보려고.”사실 소영훈의 말에 따랐으면 원래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으로 찾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간 여러 일이 겹치고 임신까지 하는 바람에 치료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늦게 찾아왔다고 뭐라 하실 것 같은데...’“내일 같이 가.”강지혁이 말했다.“괜찮아. 나 혼자 가도 돼. 넌 일해야지.”“같이 가.”단호한 그의 말에 임유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밥을 먹으려 다시 수저를 들려는데 강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먹여줄게.”“응? 먹여준다고?”임유진이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손 아프잖아. 내가 먹여줄게.”조금 아프긴 해도 젓가락을 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그런데 대답도 듣지 않고 멋대로 젓가락을 빼앗아버리는 강지혁의 행동에 임유진은 결국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따랐다.그렇게 강지혁은 임유진의 옆으로 와 손수 새우껍질도 까주고 찌개도 후후 불어주며 임유진에게 대령했다.또한 그녀를 먹이는 동안 강지혁은 한 번도 입에 음식을 넣지 않았다.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귀찮아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표정이 너무나도 다정했다.그의 다정함은 오직 임유진 한해서였다.옆에 있던 도우미는 천하의 강지혁이 누군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그도 그럴 것이 남의 시중을 받았으면 받았지 절대 시중을 들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강지혁의 행동은 말 그대로 시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꼭 임유진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다.강지혁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다음날.강지혁은 약속대로 임유진과 함께 소영훈을 찾아갔다.소영훈은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더 이상 강현수에게는 그 어떠한
“치료를 중단하겠다고요?”소영훈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내가 전에 치료를 중도에 그만두면 어떻게 되는지 다 얘기해준 것 같은데? 지금은 몇 주라서 괜찮지만 1년이 지나면 그때는...”“저 임신했어요.”임유진이 소영훈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여기서 더 치료하게 되면 아이한테 영향이 갈까 봐서요. 그래서 일단은 중단하려고요.”그 말에 소영훈의 얼굴이 굳었다.“확실히 임신한 상태로는 더 이상 지금껏 받아왔던 치료법대로 치료받을 수 없어요. 하지만 이대로 치료를 중단하면 상황이 더 악화하고 그때는 주먹을 쥐는 것조차 힘들 수 있어요.”“네? 그게 무슨.”강지혁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어쩌면 양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요.”소영훈이 말을 덧붙이자 강지혁의 얼굴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강지혁의 다급한 말에 소영훈이 혀를 차며 답했다.“유진 씨가 여기로 와서 치료를 받기 시작할 때 각종 위험한 상황에 대해서 이미 다 알려줬어요.”“선생님 말씀은 1년 뒤에도 치료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임유진이 물었다.“치료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다시 치료할 때 통증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플 거예요. 그리고 만약 치료하기 전에 두 손을 아예 못 쓰게 되면 그때는 치료고 뭐고 없고요.”강지혁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손을 아예 못 쓰게 되는 것도 1년 뒤 더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는 것도 그 어느 것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당시 그는 임유진이 치료받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었다.아무런 마취도 없이 살을 그대로 파고드는 치료법에 임유진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그런 고통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다.“걱정하지 마. 여기서 안 되면 그때는 전 세계를 전부 뒤져서라도 네 손을 고쳐줄 의사를 데려올 테니까.”강지혁이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해외는 모르겠지만 일단 국내에서 유진 씨 손을 고쳐줄 수 있는 의사는 나뿐이에요.”소영훈의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또다시 어두워졌다.“알겠어요
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임유진이 받은 처방전을 가져가며 말했다.“고 비서한테 이 처방전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할게.”“설마 선생님이 잘못된 처방전을 적으셨을까.”“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내 말대로 해.”강지혁은 지금 임유진의 일이라면 지금 모든 것이 예민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임유진의 손을 쥐며 그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의 손은 그녀와 똑같이 너무나도 가녀렸다. 그래서 관절 부분이 삐뚤빼뚤한 것이 더 선명했다.강지혁은 그녀의 두 손을 볼 때마다 후회와 부채감, 심지어는 무력감까지 들었다.제일 꼭대기에 군림해 있는데도,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데도 그녀의 손 앞에서는 그 모든 권력과 힘이 다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그간 이름 있는 의사들을 다 만나봤지만 하나같이 치료를 할 수 없는 손이라고 하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통증을 완화해주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강지혁은 1년 뒤 다시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 만약 정말 그녀가 손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리면 그때는 정말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는 임유진과 달리 아이보다는 그녀가 더 소중했다.“아니면 치료를 계속 이어가는 게 어때? 만약...”“안 돼!”임유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선생님도 그 치료는 아이한테 영향이 갈 거라고 했잖아. 어떻게 가진 아인데, 그것도 셋이나! 나는 절대로 아이들을 포기할 생각 없어.”“다시는 글을 쓰지 못해도, 물컵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도, 그래도 괜찮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초조함을 담아 언성을 조금 높였다.“응. 괜찮아.”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꼭 말아 제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나 정말 괜찮아. 그때도 손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괜찮았잖아. 그러니 이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이지.”강지혁은 그 말에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녀의 말에 심장이 욱신거리며 더욱더 심한 자책감이 들었다.“아이가... 그렇게나 소중해?”한참이 지난 후 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지혁의 어머니가 강지혁을 낳은 건 어디까지나 부잣집 도련님의 아이를 낳아 강씨 가문의 며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일 뿐이었다.그런데 그 욕심은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강선우와 강지혁은 그때부터 그녀에게 있어 쓸모없는 패가 되었다.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평생 손을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그러겠다고 하고 있다.그녀에게 있어 아이는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임유진의 두 눈은 언제나 티 없이 맑았고 감옥에게 그렇게 모진 고통을 겪었는데도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아마 그런 그녀라서 강지혁이 이토록 지독하고 깊게 빠져들었을 것이다.강지혁이 별안간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네 손 분명히 괜찮을 거야. 내가 절대 망가지게 두지 않아.”그는 임유진의 손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생각이다.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짓더니 두 손을 올려 강지혁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사실 그녀는 자기 두 손에 대해 크게 미련이 없었다.“혁아,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만약 정말 못쓰게 되면 그때는 네가 내 손이 되어주면 되잖아. 안 그래?”“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그때는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야.”강지혁이 임유진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임유진이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바로 그녀의 눈앞에 대령할 준비는 오래전부터 되어있었다....고이준을 통해 알아본 결과 소영훈의 처방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그래서 강지혁은 한의원으로 가 약재를 받아오고 푹 끓인 후 임유진이 족욕 할 수 있을 정도의 온도로 식혔다.물이 식는 동안 그는 옆에 놓아둔 약재를 임유진의 양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뜨거워?”“괜찮아. 딱 좋아.”처음에는 뜨거웠지만 금방 손이 뜨끈뜨끈해져 기분이 좋았다.잠시 후 강지혁은 임유진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발을 잡더니 적당한 온도로 식혀진 물 안에 조심스럽게 담갔다.온도가 설정한 대로 유지되는 족욕 통이라 물이 금방 식을 걱정은 없었다.
임유진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느끼며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강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왜 그래?”“아... 아무것도 아니야...”아까 족욕 할 때보다 몸의 열기가 더 빠르게 올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강지혁은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침실로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 올려놓았다.“음... 나 먼저 잘게.”임유진은 침대에 올려진 후 심장이 세게 뛰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이불을 잡았다.하지만 이불을 끌어 올리기 전에 강지혁이 갑자기 허리를 숙여 몸을 기대오더니 한 손을 그녀의 몸 옆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은 채 자신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게 했다.“왜 갑자기 내 얼굴 안 봐? 나 방금 뭐 말실수 한 거 있어? 아니면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래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어?”임유진은 그 말에 두 눈을 깜빡였다.‘무슨...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아... 혹시 뭐 오해한 건가?’“그런 거 아니야.”“그런데 왜 갑자기 내 얼굴 안 봐?”강지혁이 집요하게 물었다.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나는 그게... 그러니까... 그냥...”임유진이 빨개진 얼굴로 우물쭈물했다.“그냥?”그러자 그 모습이 더 이상해 보였던 건지 강지혁의 얼굴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그냥 뭐?”임유진은 바로 코앞에 있는 잘생긴 얼굴을 보며 참을성 테스트라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의 얼굴은 멀리서 봐도 잘생겼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잘생긴 것에 더해 예쁘기까지 했다. 속눈썹이 길게 뻗은 것도 예뻤고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까만 눈동자도 너무 예뻤다.게다가 코는 어찌나 오뚝한지 손이 벨 것 같았고 입술은 그대로 입을 맞춰버리고 싶을 정도로 섹시했다.심지어 조금 긴장한 듯 울렁대는 목젖도 심각하게 관능적이었다.“유진아, 말해줘. 왜 갑자기 내 얼굴을 보지 않아?”중저음의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를 간지럽혔다.“널... 널 보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데
“너 진짜!”임유진이 터질 것 같은 빨간 얼굴을 한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볼에 찰싹 붙은 것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강지혁은 단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게,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게 전부 다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쁜 것을 넘어 희열마저 느꼈다.강지혁은 그녀가 더욱더 그에게 끌리기를 원하고 더욱더 그로 인해 심장이 떨리기를 원하며 그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강력하게 원하기를 바라고 있다.그래야만 그는 그녀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것 같았다.임유진은 알까?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사실 그는 임유진과 다시 시작하기로 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 불안과 초조함을 품고 있었다.임유진이 그 언젠가 다시 전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는지, 노력 때문이 아닌 정말 그를 사랑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날이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유진아, 사랑해.”강지혁은 마음속 제일 깊은 곳에 묻어뒀던 자기 마음을 그녀에게 꺼냈다....다음날.임유진은 잠에서 깬 후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금세 얼굴을 붉혔다.어제저녁, 강지혁의 ‘사랑해’라는 한마디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맞췄고 그대로 사랑까지 나눴다.임유진은 어제 지나칠 정도로 그녀를 유혹하는 강지혁 때문에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조선 시대 때 여자한테 미쳐서 정세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왕을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네.’임유진은 새삼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누군가에게 미쳐버리면 그때부터는 이성적인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니까.하지만 강지혁과는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더 좋았다. 전과 같은 분위기도 조금씩 감도는 것 같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며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는 벽도 서서히 허물어가는 것 같았으니까.이제야 정말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
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 쪽이 탁유미 쪽보다 훨씬 더 좋은 육아 환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어떻게 안 될까요?”임유진이 물었다.그녀는 탁유미가 이대로 윤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하면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힌 듯 괴로웠다.이런 감정이 드는 건 아마 탁유미를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크게는 같이 억울하게 누명 쓴 입장에서 나오는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탁유미 씨가 당시 억울하게 누명 썼다는 게 증명이 되면 승률이 지금보다는 높아질 수도 있는데 말이죠...”변호사의 말에 임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제가 방법을 생각해볼게요.”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공수진의 유산 수술을 집도했던 주치의를 찾는 것뿐이었다.공수진이 퇴원하고 탁유미가 감옥에 들어간 후 그 의사가 얼마 안 가 바로 병원을 그만뒀으니까.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퇴근 후 임유진은 데리러 온 강지혁의 차에 올라탄 후 바로 그에게 부탁했다.“혁아, 너 사람 한 명 찾아줄 수 있어?”“누구?”“당시 공수진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그 말에 강지혁이 미간을 꿈틀거렸다.“탁유미 씨가 누명을 썼다는 걸 증명하려고?”“응.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그 의사야. 나는 공수진이 애초에 임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또 혹은... 그 아이가 이경빈의 아이가 아니거나.”이 두 가지 가정 중 하나라도 맞다면 그때는 공수진이 다른 목적으로 계단에서 굴렀다는 걸 손쉽게 증명할 수 있다.그런데 만약 두 가지 가정 모두 아니라면, 공수진이 정말 이경빈의 아이를 임신한 게 맞다면 그때는 탁유미와 임유진 두 사람 모두 지게 된다.하지만 지금은 뭐가 됐든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만약 공수진이 정말 이경빈의 아이를 임신한 게 맞으면?”아니나 다를까 강지혁이 그녀가 우려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찔러왔다.“나는 지금 언니가 공수진의 계략에 말려든 게 틀림없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어. 당시 언니가 임신했다는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