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녀올게요. 이따 의사 선생님도 오실 건데 만약 못 만나면 또다시 의사 선생님 찾으러 가야 하잖아요.”의사는 계속 한 곳에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주 회진을 다니기에 다시 찾으려고 하면 번거로울 게 분명했다.탁유미는 일리 있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미안한데 부탁 좀 해도 될까요?”“미안하긴요. 오늘은 이런 거 하려고 온 건데요 뭘.”곽동현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바로 병실을 나섰다.탁유미는 곽동현이 떠난 후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동현 씨 정말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네, 맞아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하지만 세상이라는 게 꼭 저렇게 좋은 사람한테만 가혹하더라고요. 동현 씨한테는 꼭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어요.”탁유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그녀는 젊었을 적 곽동현처럼 우직하고 착한 사람보다는 이경빈처럼 다정한 한편 남자다운 면도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런저런 일을 겪고 보니 우직하고 착한 사람만큼 소중한 사람은 없었다.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적어도 배신은 당하지 않을 테니까.또한 그런 사람과 연인이 되거나 나아가 결혼을 하게 되면 아무리 어려운 시기가 와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후 의사가 윤이의 병실로 찾아와 검사 결과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병실을 떠나기 전 탁유미에게 윤이의 상황에 대해 신신당부했다.그렇게 의사도 떠나고 시간이 또다시 어느 정도 흘렀다.그런데 결과지를 가지러 갔던 곽동현이 무슨 이유인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곽동현이 길을 헷갈려서 늦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그러나 아무리 전화를 걸어봐도 곽동현은 받지 않았다.탁유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임유진을 향해 물었다.“동현 씨 아직도 전화 안 받아요?”“주위가 시끄러워서 못 듣는 걸일 수도 있어요.”임유진이 다시 한번 전화를 걸려는 그때, 갑자
임유진은 간호사에게 곽동현이 어느 경찰서로 데려갔는지 물은 다음 다시 병실로 돌아와 탁유미에게 낮은 목소리로 방금 들었던 얘기를 전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윤이 퇴원하는 거 도와주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당장 경찰서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하게 알아봐야겠어요.”“당연하죠. 얼른 가봐요. 여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탁유미는 조급한 얼굴로 임유진을 배웅했다.그녀 역시 곽동현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윤이는 조급한 탁유미의 얼굴을 보며 덩달아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 구치소가 뭐냐고 계속해서 물었다.이에 탁유미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김수영과 함께 퇴원 준비를 했다.임유진이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곽동현은 아직 조사를 받고 있었다.경찰들의 얘기에 따르면 현장에는 증인도 있고 CCTV도 있었다고 한다.만약 CCTV 조사결과 피해자와 증인의 진술과 일치하면 경찰들은 바로 곽동현을 검찰에 송치하게 될 것이다.“곽동현 씨를 만나게 해주세요.”임유진은 지금 당장 곽동현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그의 입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얘기를 듣고 싶었다.“아직 조사 중이라 불가합니다.”경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이에 임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저, 곽동현 씨 변호사예요.”그러고는 경찰을 향해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경찰은 임유진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조사가 끝나면 반 시간 정도 면회 가능합니다.”“알겠습니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밖에 서서 기다렸다.그녀는 많이 초조한 듯 애꿎은 입술만 자꾸 깨물었다.그때 드디어 조사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 누군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티슈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배여진 씨는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혹시 또 기억나시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배여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다 마침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너 설마
임유진은 배여진의 쇼에 더 이상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방금 그녀가 했던 말로 곽동현은 억울하게 당한 것이고 이 모든 건 다 배여진이 꾸민 짓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챘으니까.다만 배여진이 왜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감히 잡히지 않았다.곽동현과 배여진은 아무런 접점도 없는 남이었으니까.그때 경찰이 다가와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아까 곽동현 씨 변호사라고 하셨죠? 곽동현 씨 면회 지금 가능하니까 조사실로 들어가 보세요. 면회 시간은 반 시간입니다.”“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었다.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유진 씨가 곽동현 씨 변호사라고요?”임유진은 고개를 돌린 후 그 말을 한 사람이 강현수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강현수가 왜 병원이 아닌 경찰서에 와 있는 거지?“현수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 허락은 받고 왔어요?”강현수는 어제 드디어 머리와 몸에 있는 붕대를 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며칠 더 입원하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요. 유진 씨가 정말 곽동현 씨 변호사 맞아요?”강현수가 고집스럽게 물었다.“나는 동현 씨가 결백하다고 믿어요.”임유진의 말에 배여진이 발끈하며 끼어들었다.“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야? 임유진, 나 아까 그 지나가는 사람 아니었으면 끔찍한 짓을 당했을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짐승 같은 사람 말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어? 아무리 두 사람이 친구라고 해도 그 남자 머릿속까지 네가 다 알 수는 없어.”“그래,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나는 동현 씨 말을 믿어.”임유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리고 강현수는 그런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경찰이 다시 다가와 임유진을 재촉했다.“시간이 얼마 없으니 서두르시죠.”“네, 갈게요!”임유진은 강현수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서둘러 조사실로 달려갔다.강현수는 임유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사실 문이
임유진이 조사실로 들어가자 곽동현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그러고는 많이 당황한 듯 말을 주저리 없이 늘어놓았다.“유진 씨, 나 아니에요. 내가 안 그랬어요. 내가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어요.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억한 심정으로 나를 모함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내가 한 거 아니에요!”곽동현은 지금 패닉상태였다. 갑자기 강간미수죄로 끌려왔으니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동현 씨, 나 지금 동현 씨 변호사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얘기해봐요.”임유진은 먼저 곽동현을 안심시켰다.곽동현은 그녀의 말에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며 진정했다.“네, 알겠어요.”그러고는 경찰서에 끌려가기 전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곽동현은 아까 탁유미를 대신해 검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배여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배여진이 갑자기 발을 삐끗했다면서 주차장까지 같이 가줄 수 있냐며 그에게 먼저 부탁을 해왔다. 이에 곽동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그렇게 그녀를 부축해 주차장까지 갔다.그러다 가는 길, 배여진이 무거운 짐을 가득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진해서 배여진의 짐까지 들어주었다.그렇게 주차장에 다다른 다음 들고 있던 물건을 뒷좌석에 내려놓고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배여진이 뒷좌석에 들어가 무언가를 열심히 찾으며 그에게 플래시를 비춰달라고 부탁했다.이에 곽동현은 별다른 의심 없이 뒷좌석으로 들어가 그녀의 요구대로 플래시를 비춰주었다.그런데 그때 배여진이 갑자기 문을 닫더니 갑자기 옷을 찢고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곽동현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다 몇 분 후, 배여진은 곽동현에게 겁탈당한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차에서 뛰쳐나왔고 그 광경을 당시 주차장에 차를 가지러 왔던 시민 4명과 경비원이 목격했다.반 시간은 금방 흘렀고, 임유진은 곽동현의 얘기를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곽동현의 상황은 너무나도 불리했다.‘배여진은 절대
“결백?”강현수가 차갑게 웃었다.“CCTV 확인 결과 모든 게 여진의 말과 일치했어요. 그리고 현장에 있던 5명의 증인도 입을 모아 곽동현이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고 했고요. 위증의 가능성은 없어요. 아예 접점이 없는 다섯 명이었으니까요.”이에 임유진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억울해 본 적 있어요?”“네?”“모든 물증이 다 현수 씨를 가리키고 현수 씨가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봤자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하고 무력감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 느껴본 적 있냐고요.”임유진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는 있어요. 그래서 동현 씨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러니까 나는 동현 씨 결백을 꼭 증명해 보일 거예요.”강현수는 올곧은 그녀의 눈빛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곽동현의 일에 손을 떼길 바란다고 해도, 그래도 도울 거예요?”“네, 나는 동현 씨 믿어요.”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리고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임유진은 그 뒤로 며칠 동안 곽동현의 사건만 조사했다.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봐도 곽동현에게 불리한 증거들밖에 나오지 않았다.배여진이 곽동현을 모함한 것은 확실한데 그것을 입증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CCTV도 증인들도 모두 배여진에게 유리한 증거들이었다.물론 증인들의 말만으로 곽동현에게 죄가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증인들이 본 건 곽동현이 배여진을 겁탈하는 장면이 아닌 그저 배여진이 큰소리로 외치며 만신창이가 된 채로 차에서 뛰쳐나오던 장면이었으니까.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곽동현이 겁탈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임유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며칠 전 곽동현의 부모가 합의를 시도했다. 하지만 배여진은 단호하게 합의는 없다고 말하며 반드시 곽동현을 감옥에 넣을 것이라고도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감방살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임유진은 어제 구치소로 갔다가 곽동현네 부모와 만난 장면을 떠올렸다. 곽씨 부부는
“나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왜 그 남자를 모함해? 그 남자를 모함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임유진이 알고 싶은 것도 바로 이거였다.“합의도 안 해주겠다고 했다며?”“네가 나라면 널 겁탈하려 했던 사람과 합의 할 거니? 안 할 거잖아.”배여진은 임유진의 초조함이 조금 어려있는 얼굴을 관상하듯 보고 있었다.이제야 드디어 임유진의 우위에 선 기분이었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질 수도 있어. 평생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살게 될 수도 있다고.”“야, 임유진, 변호사면 변호사답게 증거로 얘기해. 감성팔이 하지 말고.”배여진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내가 어떻게 하면 동현 씨를 놓아줄래?”임유진이 배여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할게.”임유진은 배여진이 이런 짓을 꾸민 이유가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뭐든지? 그럼 내가 이제 변호사 그만하라고 하면 그것도 할 거야?”배여진이 비웃으며 물었다.“그럴게.”임유진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만약 이대로 곽동현이 정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임유진은 아마 평생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진해서 변호사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곽동현 때문에 직업도 포기할 생각입니까?”그때 한기가 가득 서린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평소와 달리 차갑고 분노가 살짝 서려 있는 강현수의 얼굴이 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고작 전 직장 동료일 뿐인데 변호사라는 직업까지 포기하려 든다고?“이대로 동현 씨가 누명을 쓰게 둘 수는 없어요.”“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 아직도 그 남자를 믿어요?”강현수가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동현 씨를 믿어요. 동현 씨는 그런 짓을 할 사람
만약 임유진이 지금이라도 발을 빼겠다고 하면 강현수는 최대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 사건을 해결할 생각이다.하지만 임유진에게서 들려온 말은...“현수 씨는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래서 현수 씨가 원하는 거는 최대한 들어주고 싶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일은 들어줄 수 없어요.”그 말에 강현수가 싸늘하게 웃었다.“그 남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유진 씨한테 그 곽동현이라는 남자가 그렇게도 중요하냐고요!”임유진은 그 질문에 잠깐 침묵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건 곽동현이라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일까 봐서이다.그리고 곽동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그때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주고 싶었다.강현수는 계속되는 그녀의 침묵에 서서히 얼굴을 굳혀갔다.그때 배여진이 강현수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팔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현수 씨,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아요. 그 남자가 유진이한테 어떤 거짓말을 늘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진이는 결국 그 남자를 믿기로 한 거예요. 친척인 내가 아니라 그 남자를요. 솔직히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손이 덜덜 떨려요. 만약 그때 차에서 도망치지 못했더라면 나는 정말... 흑...”배여진은 말을 하다 말고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임유진은 배여진의 눈물 쇼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언니 말을 믿어요?”“믿지 않을 이유가 없죠. 전 직장 동료라서 곽동현을 믿는다는 유진 씨의 이유보다 어릴 적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라서 배여진을 믿는다는 내 이유가 더 그럴 듯하지 않아요?”강현수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배여진 쪽을 바라보았다.“여진아, 그만 울어. 네 사건은 내가 책임지고 잘 처리해 줄 테니까.”“현수 씨... 고마워요. 나 믿어줘서 정말 고마워요!”배여진은 감격에 찬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순간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숨긴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언니가 제일 잘 알겠지.”임유진은 배여진에게 그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말 믿어줘요.”강현수는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유진 씨가 바로 어릴 때 나를 구해줬던 그 여자아이라고요?”“네.”임유진은 자신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강현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잘 알고 있다.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전에 나랑 절벽 바로 앞에서 만났던 거 기억해요? 그때 내가 그 여자아이가 유진 씨냐고 물었을 때 유진 씨는 어떻게 대답했죠?”강현수의 담담한 목소리에 임유진의 몸이 움찔 떨렸다.그날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해 기억을 다 되찾았음에도 결국 아니라고 대답했다.“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내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물어봤잖아요. 정말 유진 씨 아니냐고.”강현수의 입에서 힘이 다 빠진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슬픔도 깃들어 있었다.강현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유진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니라고 했잖아요. 내가 그렇게 많이 물어봤는데 매번 다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유진 씨 말을 믿어달라고요? 스스로 생각해도 좀 웃기지 않아요?”그 말에 임유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강현수의 말과 강현수의 시선이 뺨을 세차게 내리치고 있는 듯했다.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이건 모두 그녀가 선택한 결과니까.“내가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우습게 들릴지 알아요. 하지만 현수야...”임유진은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정말 네가 어릴 때 만났던 여자애 맞아. 그때는 왜 아니라고 했는지,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설명?”강현수가 싸늘하게 웃었다.“내가 유진 씨를 사랑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 때문에 거짓말하는 걸 다 들어줄 정도로 맛이 가지는 않았어요. 나는 똑똑히 기억해요. 내가 유진 씨한테 그 질문을 했을 때 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