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행이네요.”한지영은 이곳으로 오기 전 윤이가 시무룩해 있을까 봐 일부러 마트에 들러 장난감을 사 왔다.“자, 이거 윤이 선물이야.”“고맙습니다, 이모.”윤이는 장난감이 마음에 드는 듯 배시시 웃었다.그때 한지영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에 한지영이 서둘러 전화를 받아보자 전화를 건 사람은 병원 경비원이었다.“안녕하세요. XXX 차주 맞으시죠? 지금 그쪽 차에서 경보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거든요? 빨리 이쪽으로 오셔서 어떻게 해주셔야겠습니다.”“그래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한지영은 전화를 끊은 후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유진아, 나 잠깐 주차장 좀 갔다 올게. 경보음이 계속 울린다네?”“그래, 갔다 와.”한지영은 다급하게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간호사가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탁유미를 밖으로 불러냈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임유진과 윤이밖에 남지 않았다.탁유미가 나간 후 윤이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손에 들린 장난감을 살포시 옆에 내려놓았다.“왜? 재미없어?”임유진이 묻자 윤이가 꿍얼거리며 말했다.“이모... 윤이 이제 나쁜 아이죠?”“왜 그렇게 생각해?”“친구랑 싸우고 입원까지 해서 엄마 돈을 많이 섰으니까요. 엄마 돈 버는 거 엄청 힘들 텐데...”임유진은 윤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윤이는 어렸을 때부터 청력을 잃은 탓인지 항상 또래들보다 더 성숙하게 행동했고 철도 빨리 들었다.그리고 그만큼 무척이나 섬세하고 또 예민했다.물론 아이처럼 뛰어놀며 활짝 웃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항상 조용히 있었다.임유진은 어제 김수영이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이에게 물었다.“윤이 친구랑 싸운 거 엄마 지켜주려고 그런 거지? 친구가 윤이 엄마를 나쁘게 말해서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던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윤이는 절대 나쁜 아이가 아니야. 윤이는 아주 따뜻하고 남도 지켜줄 줄 아는 멋있는 아이야!”윤이는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임유진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아무리 화가
탁유미가 병실로 돌아온 후 임유진과 한지영은 그녀와 얼마간 더 대화를 나누다 슬슬 몸을 일으켰다.병실을 나선 후, 한지영은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윤이가 싸울 줄은 몰랐어.”한지영이 아는 윤이는 조용하고 부끄럼이 많으며 가끔 장난을 치면 금세 볼이 빨개지던 순진무구한 아이였으니까.“누구라도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윤이한테는 그게 유미 언니고.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마 겁먹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야.”임유진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윤이는 아이치고는 생각보다 멘탈이 단단했고 청각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인지 또래 아이들보다 인내심도 강하고 스트레스에도 강했다.인공와우를 장착하고 단기간에 말을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선천적으로 머리가 똑똑한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홀로 계속 노력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쉽게 이성을 잃지 않지만 한번 이성을 잃으면 집요하고 끝까지 간다.임유진은 윤이에게 맞은 아이는 윤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그건 그래.”두 사람은 말을 하며 병원 주차장으로 향했다.“데려다줄게. 타.”“그래.”한지영은 임유진을 태운 후 서서히 시동을 걸었다.“참, 너 강현수 씨랑은 어떻게 됐어? 아직도 그냥 친구야?”한지영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뭐 어떻게 될 게 있나... 하지만 그냥 친구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해.”임유진은 한지영의 앞에서는 모든 걸 술술 털어놓았다.“강현수가 나한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알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누구랑 연애하고 싶은 생각 없어. 그래서 거절했는데...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아. 다음번에 만나면 조금 더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유진아, 너 설마 강지혁 때문에 네 앞으로의 남자들을 모조리 다 쳐낼 생각이야?”한지영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너 그 생각 당장 버려. 그리고 강지혁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 그래서 보란 듯이 강지혁을 잊어!”
한지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전에 한 토크쇼에서 유명한 여배우가 팬이라면서 강현수 씨한테 뽀뽀해달라고 했었거든? 볼이라도 좋으니 소원이라고 했어. 톱배우가 그런 말을 하는데 엔간하면 방송 재미도 보장할 겸 들어줄 만도 하잖아. 그런데 강현수 씨는 딱 잘라 거절했어. 당신은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고.”한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감탄을 해댔다.“참, 그리고 강현수 씨 그림도 엄청 잘 그린대. 화실도 따로 있다는데 대외적으로 공개된 적은 한 번도 없대. 또 전에 강현수 씨랑 사귀던 동갑내기 여배우가 방송에 나와서 강현수 이야기를 좀 풀었거든? 그런데 절대 ‘현수야’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 방송을 본 다른 여배우가 어떻게 해서든 강현수 씨랑 사귀어보려고 일부러 ‘현수야’라며 친한 척했거든? 그 뒤로 어떻게 됐을 것 같아? 그 여배우 연예계에서 영원히 사라졌대.”임유진은 가는 길 내내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그리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한지영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브레이크를 밟았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브레이크를 밟아도 차량이 멈추지 않았다.이에 한지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몸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조수석에 앉은 임유진은 한지영의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다급하게 물었다.“왜 그래?”“브레이크가 고장 났어!”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브레이크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더 무서운 건 차량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만약 이대로 속도가 계속 오르고 차가 멈추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나게 된다.“유진아, 내... 내가 이따 사람 없는 쪽으로 최대한 차를 붙이면 기회를 봐서 차에서 뛰어내려, 알겠지?”한지영은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하며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다행히 핸들은 아직 움직일 수 있었기에 잘만 하면 이대로 뛰어내리게 해도 크게 다치지 않을지도 모른다.임유진은 한지영의 의도를 바로 파악했다.“내가 먼저 뛰어내리면 너는? 너는 언제 뛰려고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한 후 탈출 준비를 위해 신속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렇게 속도가 70까지 올랐을 때 한적한 곳에서 빠르게 차를 버리고 뛰어내리려는데 갑자기 대각선 방향에서 대형차 한 대가 다가왔다.대형차 기사는 한지영의 차량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아니었다. 교통법규에 따르면 원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건 한지영 쪽이었으니까.하지만 한지영 차의 브레이크는 고장이 나 멈출 수가 없었다.만약 이대로 대형차를 들이받게 되면 한지영네 차는 아예 대형차 아래 깔려버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이에 한지영은 대형차와 부딪히는 것을 피하고자 있는 힘껏 핸들을 꺾었다.그리고 그때 대형차도 마침내 한지영네 차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한지영은 두 차량이 곧 있으면 충돌하려는 걸 보고는 절규하며 외쳤다.“유진아, 빨리 뛰어내려! 빨리!”그러나 그때 웬 승용차 한 대가 한지영의 차와 대형차 반대편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쾅.차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맞은편 승용차가 그대로 한지영의 차를 받아버렸다.그 충격으로 한지영의 차는 드디어 폭주를 멈췄고 대형차도 큰 사고 없이 천천히 멈춰 섰다.고작 몇 초였지만 그 짧은 시간 속 마치 세상이 뒤바뀌어버린 것 같았다.한지영과 임유진은 제때 터진 에어백 덕에 다행히 큰 부상은 면했다.“지영아, 너... 괜찮아?”임유진은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아프기는 해도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안전한 결과였다.“응... 괜찮아... 너는?”한지영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바로 임유진의 안부를 물었다.“응, 나도 괜찮아...”임유진은 다행히 괜찮아 보이는 그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까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대형차와 부딪히려는 순간 갑자기 웬 승용차가 우리 차를 들이받았어.’아까는 그 승용차가 아니었으면 임유
임유진은 그 누군가를 보는 순간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남자는 바로 강현수였다.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강현수가 맞았다.임유진은 이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꼴은 엉망진창이었다.다른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남자인데 지금은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걸어왔다.빨간 피는 그의 얼굴을 지나 베이지색 그의 외투를 빨갛게 물들였다.강현수는 성한 구석 하나 없는 몸을 이끈 채 어느새 조수석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차 문을 열고는 힘겹게 허리를 숙여 피범벅이 된 얼굴로 물었다.“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강현수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가라앉아있었고 그녀에게 내민 두 손은 빨간색 피투성이였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코가 시큰거렸다.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지금 자기가 제일 많이 다쳤으면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다.“일부러 들이받았죠? 그렇죠? 왜 그랬어요. 대체 왜!”임유진은 속상한 나머지 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유진 씨가 차에 타고 있잖아요.”그의 대답은 지나치게 심플했다.하지만 그 짧은 대답 안에 그의 마음 전부 다 담겨있었다.강현수가 목숨을 걸고 몸을 내던진 건 임유진이 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유진이라서 무모한 짓도 망설임 없이 한 것이다.임유진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으니까......임유진과 한지영, 그리고 강현수는 빠르게 재일 병원으로 옮겨졌다.임유진과 한지영은 가벼운 찰과상이라 큰 문제 없었지만 강현수의 상태는 조금 심각했다.의사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금방 수술실로 옮겼다.임유진과 한지영은 수술실 밖에서 강현수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한지영은 불안해 보이는 임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걱정하지 마. 강현수 씨 수술해주는 의사 선생님, 매우 유명한 선생님이야. 그러니까 분명히 괜찮을 거야.”하지만 임유진
강현수의 부모님은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의사에게서 강현수의 현 상황을 전해 들었다.의사는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두 사람은 그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조금 긴장을 풀었다.한은정은 한숨 돌린 후 고개를 돌려 임유진과 한지영 쪽을 바라보았다.더 정확히 말하면 임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쪽이 임유진 씨죠.”한은정은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싸늘한 얼굴로 경고했다.“임유진 씨가 우리 현수와 지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현수 엄마로서 두 번 다시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네요.”한지영은 임유진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그녀를 말리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들을 하마터면 잃을 뻔했는데 한은정 정도면 많이 참은 것이다.임유진은 솔직히 그녀에게 머리채를 잡힐 것도 각오했었다.“됐어. 지금은 현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게 먼저야.”강재호가 얼굴을 굳힌 채로 말했다.이에 한은정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별말 없이 다시 강재호의 옆으로 다가갔다.두 시간 후, 길었던 수술이 드디어 끝이 났다.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마에 일곱 바늘이나 꿰매긴 했지만 다행히 수술은 순조롭게 끝이 났고 이제는 휴식만 제대로 취해주면 된다.강재호와 한은정은 그 말에 드디어 얼굴을 완전히 피며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임유진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병실로 가보지 않아도 돼?”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은 쓰게 웃었다. 당연히 그녀도 가고 싶었다. 가서 강현수가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강현수 부모님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할 거야.”그녀는 그들의 아들을 다치게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었으니까.“그럼... 내일 나랑 같이 다시 올까?”한지영도 강현수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에 감사의 인사를 해야만 했다.“그러자.”내일이면 아마 강현수도 깨어날 것이다.만약 내일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할까.임유진은 심장이 욱
임유진은 진애령의 차와 부딪혔을 당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이번 사고는 두려움보다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한 것뿐이에요.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강현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여진은 그 미소가 향하는 곳이 임유진이라는 사실에 질투 나 미칠 것 같았다.“현수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단순한 사고 아니었어요?”그 말에 강현수는 시선을 돌렸다.“여진아, 나 따뜻한 차 마시고 싶은데 사다 줄래?”배여진은 그가 지금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땅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알겠어요. 금방 다녀올게요.”그녀는 병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를 보고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임유라의 말대로 임유진이 있는 한 그녀는 강현수와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꿈을 꿀 수 없다.강현수가 임유진을 마음속 깊이 증오하거나 혹은 임유진에게 철저하게 실망해야만 그녀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나아가 강현수의 옆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배여진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문을 닫으며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병실 안.임유진은 강현수를 걱정하며 물었다.“몸은 좀 어때요? 상처가 난 곳은 많이 아파요?”그러자 강현수가 더 환하게 웃었다.“드디어 내 걱정을 해주네요.”“현수 씨 덕에 무사할 수 있었는데 당연히 걱정해야죠!”“만약 유진 씨를 구하지 않았으면요?”강현수는 그 말을 내뱉고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에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방금 한 말은 잊어줘요.”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를 구할 수 있어서 기뻐요. 진심이에요.”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이 지경이 되고서도 기쁘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임유진은 순간 코가 시큰거렸다.강현수는 이제껏 여자친구를 셀 수도 없이 많이 사귀었지만 이게 과연 연인이 맞나 싶을
“유진 씨를 구한 건 내 선택이었어요. 그러니까 괜한 부채감 갖지 마요.”강현수는 꼭 임유진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런 그를 보며 어쩐지 자꾸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1시간 후, 한지영도 병실로 찾아왔다.한지영은 가장 먼저 강현수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별일 없다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러고는 온 김에 경찰의 조사한 결과도 얘기해줬다.결과적으로 한지영의 차는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한 게 맞았다.브레이크는 처음부터 고장 난 것이 아니라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고장 났다.만약 그때 강현수가 차로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전에 자꾸 경보음이 울렸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 처음에는 고양이나 작은 동물들이 차체를 건드린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응,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경찰 쪽에서는 또 뭐래?”“계속 조사해보겠네. 경찰 조사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아마 조만간 너한테도 연락이 갈 거야.”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빨리 범인을 잡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유진 씨, 나도 내 방식대로 알아볼게요.”강현수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범인이 해하려던 건 한지영이지만 결과적으로 임유진도 같이 다쳤기에 화가 많이 난 듯하다....병원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감탄하며 말했다.“현수 씨 말이야. 너한테 정말 진심인 것 같아.”“응.”임유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잘해주는 사람한테로 딱 향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유진아...”한지영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네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 두렵다는 이유로 행복을 놓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임유진은 진심 어린 친구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한지영을 꼭 끌어안았다.“지영아, 이제는 내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항상 내 걱정만 하잖아. 대신 이것 하나는 꼭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행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