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그 누군가를 보는 순간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남자는 바로 강현수였다.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강현수가 맞았다.임유진은 이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고 꼴은 엉망진창이었다.다른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남자인데 지금은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걸어왔다.빨간 피는 그의 얼굴을 지나 베이지색 그의 외투를 빨갛게 물들였다.강현수는 성한 구석 하나 없는 몸을 이끈 채 어느새 조수석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차 문을 열고는 힘겹게 허리를 숙여 피범벅이 된 얼굴로 물었다.“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강현수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가라앉아있었고 그녀에게 내민 두 손은 빨간색 피투성이였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코가 시큰거렸다.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지금 자기가 제일 많이 다쳤으면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있다.“일부러 들이받았죠? 그렇죠? 왜 그랬어요. 대체 왜!”임유진은 속상한 나머지 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유진 씨가 차에 타고 있잖아요.”그의 대답은 지나치게 심플했다.하지만 그 짧은 대답 안에 그의 마음 전부 다 담겨있었다.강현수가 목숨을 걸고 몸을 내던진 건 임유진이 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유진이라서 무모한 짓도 망설임 없이 한 것이다.임유진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으니까......임유진과 한지영, 그리고 강현수는 빠르게 재일 병원으로 옮겨졌다.임유진과 한지영은 가벼운 찰과상이라 큰 문제 없었지만 강현수의 상태는 조금 심각했다.의사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금방 수술실로 옮겼다.임유진과 한지영은 수술실 밖에서 강현수의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한지영은 불안해 보이는 임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걱정하지 마. 강현수 씨 수술해주는 의사 선생님, 매우 유명한 선생님이야. 그러니까 분명히 괜찮을 거야.”하지만 임유진
강현수의 부모님은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며 의사에게서 강현수의 현 상황을 전해 들었다.의사는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고 두 사람은 그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조금 긴장을 풀었다.한은정은 한숨 돌린 후 고개를 돌려 임유진과 한지영 쪽을 바라보았다.더 정확히 말하면 임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그쪽이 임유진 씨죠.”한은정은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싸늘한 얼굴로 경고했다.“임유진 씨가 우리 현수와 지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현수 엄마로서 두 번 다시 이런 꼴을 보고 싶지 않네요.”한지영은 임유진을 대신해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임유진은 그런 그녀를 말리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아들을 하마터면 잃을 뻔했는데 한은정 정도면 많이 참은 것이다.임유진은 솔직히 그녀에게 머리채를 잡힐 것도 각오했었다.“됐어. 지금은 현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는 게 먼저야.”강재호가 얼굴을 굳힌 채로 말했다.이에 한은정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별말 없이 다시 강재호의 옆으로 다가갔다.두 시간 후, 길었던 수술이 드디어 끝이 났다.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마에 일곱 바늘이나 꿰매긴 했지만 다행히 수술은 순조롭게 끝이 났고 이제는 휴식만 제대로 취해주면 된다.강재호와 한은정은 그 말에 드디어 얼굴을 완전히 피며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병실로 향했다.임유진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병실로 가보지 않아도 돼?”한지영의 말에 임유진은 쓰게 웃었다. 당연히 그녀도 가고 싶었다. 가서 강현수가 깰 때까지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강현수 부모님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할 거야.”그녀는 그들의 아들을 다치게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었으니까.“그럼... 내일 나랑 같이 다시 올까?”한지영도 강현수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에 감사의 인사를 해야만 했다.“그러자.”내일이면 아마 강현수도 깨어날 것이다.만약 내일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할까.임유진은 심장이 욱
임유진은 진애령의 차와 부딪혔을 당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이번 사고는 두려움보다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한 것뿐이에요.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강현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여진은 그 미소가 향하는 곳이 임유진이라는 사실에 질투 나 미칠 것 같았다.“현수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단순한 사고 아니었어요?”그 말에 강현수는 시선을 돌렸다.“여진아, 나 따뜻한 차 마시고 싶은데 사다 줄래?”배여진은 그가 지금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에둘러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땅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알겠어요. 금방 다녀올게요.”그녀는 병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남녀를 보고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임유라의 말대로 임유진이 있는 한 그녀는 강현수와 결혼은 물론이고 연애도 꿈을 꿀 수 없다.강현수가 임유진을 마음속 깊이 증오하거나 혹은 임유진에게 철저하게 실망해야만 그녀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나아가 강현수의 옆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배여진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문을 닫으며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병실 안.임유진은 강현수를 걱정하며 물었다.“몸은 좀 어때요? 상처가 난 곳은 많이 아파요?”그러자 강현수가 더 환하게 웃었다.“드디어 내 걱정을 해주네요.”“현수 씨 덕에 무사할 수 있었는데 당연히 걱정해야죠!”“만약 유진 씨를 구하지 않았으면요?”강현수는 그 말을 내뱉고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에 금방 다시 입을 열었다.“방금 한 말은 잊어줘요.”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를 구할 수 있어서 기뻐요. 진심이에요.”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이 지경이 되고서도 기쁘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임유진은 순간 코가 시큰거렸다.강현수는 이제껏 여자친구를 셀 수도 없이 많이 사귀었지만 이게 과연 연인이 맞나 싶을
“유진 씨를 구한 건 내 선택이었어요. 그러니까 괜한 부채감 갖지 마요.”강현수는 꼭 임유진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런 그를 보며 어쩐지 자꾸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1시간 후, 한지영도 병실로 찾아왔다.한지영은 가장 먼저 강현수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별일 없다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러고는 온 김에 경찰의 조사한 결과도 얘기해줬다.결과적으로 한지영의 차는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한 게 맞았다.브레이크는 처음부터 고장 난 것이 아니라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고장 났다.만약 그때 강현수가 차로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전에 자꾸 경보음이 울렸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 처음에는 고양이나 작은 동물들이 차체를 건드린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응,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경찰 쪽에서는 또 뭐래?”“계속 조사해보겠네. 경찰 조사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아마 조만간 너한테도 연락이 갈 거야.”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빨리 범인을 잡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유진 씨, 나도 내 방식대로 알아볼게요.”강현수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범인이 해하려던 건 한지영이지만 결과적으로 임유진도 같이 다쳤기에 화가 많이 난 듯하다....병원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감탄하며 말했다.“현수 씨 말이야. 너한테 정말 진심인 것 같아.”“응.”임유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잘해주는 사람한테로 딱 향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유진아...”한지영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네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 두렵다는 이유로 행복을 놓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임유진은 진심 어린 친구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한지영을 꼭 끌어안았다.“지영아, 이제는 내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항상 내 걱정만 하잖아. 대신 이것 하나는 꼭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행
그러다 아침에 잠에서 깨보니 아직 통화 중이었다.백연신은 그녀가 자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이에 한지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백연신이 바로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꼭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한지영이 깰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을 수도 있다.백연신이 S 시를 떠난 지 이제 고작 2주 정도밖에 안 됐지만 한지영은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생사의 갈림길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보니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한지영은 지하철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아파트 단지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그때 한지영의 발걸음이 멈췄다.한지영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검은색 승용차를 빤히 바라보았다.승용차 문이 열리고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바로 한지영 쪽으로 다가왔다.한지영은 그 남자를 보자마자 코가 찡해 나더니 이내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지영아, 나 왔어.”남자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지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더니 그대로 백연신의 품에 안겼다.한지영은 두 팔로 백연신을 꼭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서럽게 울어댔다.그 눈물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백연신을 향한 그리움도 있었다.백연신은 고개를 숙여 한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분명히 부드러운 손짓이었지만 거기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도 담겨있었다.한지영의 눈물은 언제나 그를 긴장하게 하고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어젯밤 한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울어댈 때 백연신은 자괴감 때문에 가슴이 욱신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백연신은 한지영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모두 자기가 옆에서 지켜주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만약 한지영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마 백
한지영은 그녀의 걱정으로 가득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연신은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잔 것인지 많이 피곤해 보였다.그는 요즘 백씨 가문 일 때문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일에만 매달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오늘 이렇게 직접 그녀를 찾아오기까지 했다.한지영은 두 손으로 백연신을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우리 결혼해요. 연신 씨네 집안일이 마무리되면 난 바로 연신 씨랑 결혼할 거예요.”전에 결혼에 관해 서로 얘기를 이미 다 나눈 상태이기는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자 백연신이라는 남자와 한시라도 더 빨리 결혼하고 싶어졌다.조금이라도 더 많이, 조금이라도 더 그와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싶었다.한지영은 지금 백연신과 마주하고 서로 껴안고 눈을 마주치는 이 모든 것들이 꼭 하늘이 내린 선물 같았다.백연신은 한지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서히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래. 결혼하자. 모든 걸 다 끝내면 그때 꼭 결혼하자. 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줄게.”한지영은 그 말에 배시시 웃었다.그녀는 백연신과 함께라면, 언제나 그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한지영의 집.한지영은 백연신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패기 넘치게 부모님을 향해 백연신과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꺼냈다.“결혼하겠다고?”한지영의 아빠인 한종훈이 딸과 미래 사위를 바라보며 물었다.물론 그나 한지영의 엄마인 이해영이나 딸의 연애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아무리 생각해도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한지영과 백연신은 아직 연애한 지 1년도 안 된 한창 열애 중인 커플이었다.“네, 저 지영이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허락해 주십시오!”백연신은 아까 집 앞에서 한지영을 만난 순간부터 이 집에 들어와서까지 한시도 한지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런데 두 사람 연애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이해영이 걱정스러운 얼
백연신의 진심에 한씨 부부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한종훈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자네가 집안 갈등을 전부 다 해결하고 오면 그때는 두 사람 결혼을 허락하지.”물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씨 부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기로 했다.자식이 이렇게 원하는 데 들어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드디어 떨어진 허락에 한지영의 얼굴이 활짝 폈다.백연신도 한시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지영이 소중한 만큼 그녀의 부모님도 소중했기에 그는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한지영과 결혼하고 싶었다.백연신은 기뻐하는 한지영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2개월 안에 반드시 백씨 가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겠다고 말이다....임유진은 오늘도 병원으로 왔다.다만 오늘은 강현수의 병실로 가기 전 먼저 윤이 병실로 찾아왔다.강현수와 윤이는 우연히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다만 윤이는 일반 병실이지만 강현수는 VIP 병실이었다.윤이는 이제 이틀 정도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게 된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윤이는 임유진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임유진은 윤이의 안부를 묻고는 이내 사 온 과일을 아이에게 건넸다.윤이는 야무지게 과일을 먹고는 임유진의 팔을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에 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가를 닦아주고는 새로 산 동화책을 읽어주었다.윤이는 이제 4살밖에 안 됐지만 아는 단어가 제법 많았다. 임유진이 지금 읽고 있는 동화책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임유진은 윤이에게 책을 넘겨주고는 낮은 목소리로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안식이 조금 안 좋은데.”사실 임유진은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탁유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탁유미는 어쩐지 임유진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혹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 도움은 못 될 수도 있지만 언니 마음의
“그럼 저는 친구 병실에 가봐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아, 네.”임유진의 말에 곽동현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는 임유진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전보다 더 마른 듯한 느낌이었다.사실 곽동현은 아까 그녀에게 강지혁과 강현수 중에서 누구를 선택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담도 없었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누구를 선택하든 임유진은 다 행복할 테니까.곽동현은 두 사람과 어깨도 나란히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이런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 그가 아직 임유진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머리는 그녀를 놔줘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가슴은 누군가를 좋아했던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 못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병실로 들어왔다.이번에는 저번이랑 달리 배여진 말고 강현수의 부모도 있었다.“임유진 씨가 여기는 뭐하러 왔죠?”한은정은 임유진을 보더니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현수 씨 병문안 왔어요.”임유진은 손에 든 과일을 들어 보였다.“과일 좀 사 왔어요.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은 종류별로 다 샀고요. 음... 그럼 오늘은 과일만 놓고 갈게요.”임유진은 자신이 강현수의 부모에게 있어 얼마나 불청객일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자기 아들을 하마터면 죽일 뻔한 여자를 그 어떤 부모가 반길 수 있을까.“필요 없으니까 도로 가지고 가요.”한은정은 임유진의 것은 하나도 받지 않겠다며 매정한 태도를 보였다.“임유진 씨가 아니었으면 현수가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어머니!”강현수가 외쳤다.“유진 씨를 구한 건 제 선택이었어요. 누구도 저한테 강요하지 않았다고요. 정말 저를 생각하시면 유진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주세요.”“너...!”한은정이 고개를 돌려 강현수를 노려보았다.“저한테 있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여자는 단 두 명뿐이에요. 한 명은 어머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유진 씨에요.”강현수가 한은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너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