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신의 진심에 한씨 부부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한종훈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자네가 집안 갈등을 전부 다 해결하고 오면 그때는 두 사람 결혼을 허락하지.”물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씨 부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기로 했다.자식이 이렇게 원하는 데 들어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드디어 떨어진 허락에 한지영의 얼굴이 활짝 폈다.백연신도 한시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지영이 소중한 만큼 그녀의 부모님도 소중했기에 그는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한지영과 결혼하고 싶었다.백연신은 기뻐하는 한지영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2개월 안에 반드시 백씨 가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겠다고 말이다....임유진은 오늘도 병원으로 왔다.다만 오늘은 강현수의 병실로 가기 전 먼저 윤이 병실로 찾아왔다.강현수와 윤이는 우연히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다만 윤이는 일반 병실이지만 강현수는 VIP 병실이었다.윤이는 이제 이틀 정도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게 된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윤이는 임유진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임유진은 윤이의 안부를 묻고는 이내 사 온 과일을 아이에게 건넸다.윤이는 야무지게 과일을 먹고는 임유진의 팔을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에 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가를 닦아주고는 새로 산 동화책을 읽어주었다.윤이는 이제 4살밖에 안 됐지만 아는 단어가 제법 많았다. 임유진이 지금 읽고 있는 동화책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임유진은 윤이에게 책을 넘겨주고는 낮은 목소리로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안식이 조금 안 좋은데.”사실 임유진은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탁유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탁유미는 어쩐지 임유진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혹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 도움은 못 될 수도 있지만 언니 마음의
“그럼 저는 친구 병실에 가봐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아, 네.”임유진의 말에 곽동현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는 임유진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전보다 더 마른 듯한 느낌이었다.사실 곽동현은 아까 그녀에게 강지혁과 강현수 중에서 누구를 선택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담도 없었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누구를 선택하든 임유진은 다 행복할 테니까.곽동현은 두 사람과 어깨도 나란히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이런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 그가 아직 임유진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머리는 그녀를 놔줘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가슴은 누군가를 좋아했던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 못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병실로 들어왔다.이번에는 저번이랑 달리 배여진 말고 강현수의 부모도 있었다.“임유진 씨가 여기는 뭐하러 왔죠?”한은정은 임유진을 보더니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현수 씨 병문안 왔어요.”임유진은 손에 든 과일을 들어 보였다.“과일 좀 사 왔어요.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은 종류별로 다 샀고요. 음... 그럼 오늘은 과일만 놓고 갈게요.”임유진은 자신이 강현수의 부모에게 있어 얼마나 불청객일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자기 아들을 하마터면 죽일 뻔한 여자를 그 어떤 부모가 반길 수 있을까.“필요 없으니까 도로 가지고 가요.”한은정은 임유진의 것은 하나도 받지 않겠다며 매정한 태도를 보였다.“임유진 씨가 아니었으면 현수가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어머니!”강현수가 외쳤다.“유진 씨를 구한 건 제 선택이었어요. 누구도 저한테 강요하지 않았다고요. 정말 저를 생각하시면 유진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주세요.”“너...!”한은정이 고개를 돌려 강현수를 노려보았다.“저한테 있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여자는 단 두 명뿐이에요. 한 명은 어머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유진 씨에요.”강현수가 한은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 눈빛은 말하자면 일종의 경고였다.만약 이대로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말이다.배여진은 이를 꽉 깨문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너도 이만 집으로 돌아가. 간병인도 있어서 네가 날 보살펴줄 필요 없어.”강현수가 말했다.하지만 그 말에 쉽게 물러설 배여진이 아니었다.“어차피 나는 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현수 씨 옆에 있을게요.”배여진은 이번 기회에 강현수에게 여성스러운 모습을 한껏 어필하고 싶었다.“아니,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하지만 강현수는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배여진은 강현수에게 완전히 거절당했다. 하지만 아무리 분해도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그...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요.”배여진은 결국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갔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강현수와 임유진, 이렇게 둘만 남았다.“아까 어머니한테 그렇게 얘기할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현수 씨 어머니가 나 보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임유진의 말에 강현수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우리 엄마 마음은 그렇게 잘 이해하면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왜 이해 못 해줘요?”이에 임유진이 흠칫했다.임유진은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다. 그저...“나랑 현수 씨는 그런 사이가...”임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날 거절하려는 말을 꺼낼 거라면 그냥 얘기하지 말아줘요. 내가 죽을 만큼 싫고 미친 듯이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면 그런 말은 앞으로 쉽게 꺼내지 말아줘요.”누구한테도 고개를 숙여본 적 없는 강현수가 임유진의 앞에서는 지금 거의 애원하듯 빌고 있다.임유진은 목구멍에 가시 같은 것이 박힌 것처럼 따끔해 났다.강현수의 몸에 감긴 붕대들과 그 붕대를 뚫고 나온 미세한 핏자국들은 모두 그녀를 구하려다 생긴 것이다.“사과... 사과 깎아줄게요.”임유진은 결국 화제를 돌리며 가지고 온 과일 바구니에서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한 알 꺼냈다.“네, 유진 씨가 깎아줘요.”강현수가 미소를
“혹시 방금 지혁이 얼굴 떠올렸어요?”강현수가 물었다.사실 묻지 않아도 됐지만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임유진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그에게 답을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유진 씨가 아직 지혁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유진 씨 기다릴 거예요. 유진 씨가 완전히 강지혁을 내려놓고 날 사랑하게 되는 날까지 계속해서 기다릴 거예요.”“나는 강지혁한테 아무런 마음도 없어요.”임유진이 부인했다.“그런 거면 다행이고요.”강현수가 씩 웃었다.“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더 짧아지겠네요. 유진 씨는 날 싫어하지 않아요, 내 말이 맞죠?”임유진은 그 질문을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그녀는 강현수를 싫어해 본 적이 없다. 당연한 거다. 강현수는 바로 그 현수니까.그때 강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서서히 표정이 변했다.“알겠어.”강현수는 전화를 끊고는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차 사고 범인 잡았대요.”“네? 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범인을 잡은 건 백연신 씨예요. 내 비서보다 한발 더 빨리 알아냈다고 하네요. 범인은 지금 체포됐고 지금 경찰들이 조사하고 있어요.”“범인은 누군데요?”“고유정이라고 백씨 가문에서 고른 백연신 씨 정략결혼 상대예요. 아마 한지영 씨를 다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봐요. 그런데 마침 그날 임유진 씨가 함께 탄 거고요.”임유진은 고유정이라는 이름을 전에 한지영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그때도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한지영에게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며 백연신의 옆에서 떨어질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그런데 아무리 백연신 씨가 탐이 났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차 사고를 일으킬 수가 있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그렇게도 쉬운 일인가?임유진은 전례 없는 분노를 느끼며 두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어느 경찰서인지 혹시 알아요?”임유진의 질문에 강현수는 바로 주소를 얘기해주었다.“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 봐야겠어요. 몸조리
다만 이번 일은 고유정 혼자 벌인 일이고 고씨 집안은 아무것도 몰랐다. 만약 고씨 집안에서 나섰다면 더 은밀하고 더 무서운 수법으로 한지영을 처리했을 것이다.한지영은 경찰을 통해 고유정의 얘기를 듣고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널 끌어들였어.”“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이런 일로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고. 미안한 거로 따지면 내가 너한테 더 미안하니까.”한지영은 그때 임유진의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학업도 포기하고 미래도 포기했다. 그렇게 삼 년을 한지영은 오직 임유진을 위해서만 뛰어다녔다.임유진은 그 일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이번 일은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탓입니다. 설마 고유정이 멋대로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어요. 지영이도 그렇게 유진 씨까지 끌어들여서 정말 미안합니다.”백연신은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렸다.그는 고씨 가문만 예의주시하느라 고유정은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던 게 고유정은 고씨 집안에서 버리는 패였고 그렇기에 고유정은 큰 소란은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건 결과적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고유정이 절대로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꼭 강력하게 처벌할 겁니다. 배짱 좋게 이런 일을 저질렀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니까요.”백연신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웠다. 그리고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이에 임유진은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그녀는 고유정의 인생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힘들 거라고 확신했다.백연신에게 있어 한지영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해 마지않는 한지영을 건드렸으니 백연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게다가 백연신은 원래 매정하고 냉혹한 사람이다. 그게 아니면 백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꿰찰 수도 없었을 테니까.경찰서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유진아, 우리랑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않을래?”이에 임유진이 입을 열고 대답을 하려다
행인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발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여자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앞에 세워진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여자는 강지혁이 가버리자 당황하며 주위를 훑다가 임유진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임유진 쪽으로 달려갔다.“임유진 씨, 저 좀 도와주세요. 지난번처럼 강 대표님한테 사정 좀 봐달라고 해주세요. 제발요!”갑작스러운 상황에 임유진은 상황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여자가 바로 앞에서 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빌고 있었다. 여자의 손가락 끝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흰색 붕대가 감겨 있었다.여자의 이마는 퉁퉁 부어올랐고 피도 찔끔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처럼 간절했고 아무거나 빨리 잡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그날 임유진 씨 과거 이용한 거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제가 바보 같았어요. 일부러 손톱 뽑힌 척 강 대표님의 시선을 잡으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날 저는 이미 거짓말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직접 느꼈다고요!”여자는 손가락 통증도 잊은 듯 임유진의 손목을 꽉 잡았다.“임유진 씨,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강 대표님한테 제발 저 좀 살려달라고 얘기 한 번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여자는 정성스럽게 짠 계획이 이득을 가져오지 못한 건 물론이고 자신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날 이후 이 사장은 곧바로 그녀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고 친척들은 그녀가 강지혁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매정하게 선을 그어버렸다.임유진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날 밤 골드 클럽에서 강지혁이 손을 잡으며 걱정해줬던 직원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당시 웨이터들의 말로는 이 사장이라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이 여자와 트러블이 생겨 손톱을 뽑겠다며 난리를 부렸다고 했다.그런데 지금 이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모든 것이 다 이 여자가 꾸민 쇼였다.이 여자는 강지혁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 사장과 짜고
오로라 반지가 완성된 후 강지혁은 봉인하듯 반지를 금고에 넣어 두고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반지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처럼 강지혁에게는 금지어나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지금 임유진에게 빌고 있는 여자는 계속해서 강지혁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만 계속해댔다.“오로라 반지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알아봐. 그리고 찾아내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임유진에게 빌고 있던 여자는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몸을 덜덜 떨었다.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리고 저 여자가 한 말 틀린 거 없어. 저 여자가 대신 부탁해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강지혁은 이 말을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가 아닌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받고는 순간 가슴에 파도가 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은 지금 임유진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 속에 더 이상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한때는 아름답게 반짝였던 두 눈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이 모든 것들이 임유진은 더 이상 강지혁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고 비서, 저 여자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S 시에서 치워.”강지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고이준은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와 임유진을 번갈아 보다가 강지혁이 말한 ‘저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만약 강지혁이 임유진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을 테니까.강지혁의 차량이 떠난 후 한지영은 임유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임유진의 손목을 계속 붙잡고 있는 여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알아서 치워야지 이게 어디서 행패야! 유진이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강지혁한테 말 좀 해달라고? 뭐 이런 뻔뻔하고 파렴치한 인간이 다 있어! 야, 너 경고하는데 다시는 우리 유진이 앞에 나타나지 마. 만약 또 나타나면 그때는 머리털을 싹 다 뽑아버릴 거야. 알았어?!”한지영은 말을 마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옆에서 임유진의 행동을 지켜보던 백연신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저녁, 백연신은 한지영을 향해 물었다.“유진 씨 말이야. 혹시 임신한 건 아닐까?”그 말에 한지영은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그럴 리 없어요!”한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백연신은 확신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왜 그렇게 확신해? 유진 씨 강지혁이랑 헤어지고 아직 3개월도 안 됐어. 3개월이면 아직 티도 안 날 거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잖아.”한지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아꼈다.임유진의 임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제삼자가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물론 강지혁의 도움으로 자궁치료를 받은 적이 있지만 치료를 받은 지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그리고 임유진은 헤어진 뒤로 더 이상 자궁치료를 받고 싶지 않아 했다.한지영은 백연신의 시선에 결국 얼버무리기도 했다.“아무튼 유진이가 임신할 리는 없어요. 참, 연신 씨, 나 유진이랑 약속한 게 하나 있어요. 앞으로 나한테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유진이 아이이기도 하고 아이의 또 다른 엄마는 유진이기도 하다고요. 이미 약속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연신 씨 의견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두 사람의 아이니까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응, 괜찮아.”그는 한지영에게 있어 임유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전에는 그런 임유진이 질투 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짧은 인생에 그런 친구를 만나게 된 건 축복이었다.한지영은 백연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고마워요, 연신 씨. 역시 역신 씨밖에 없어!”백연신은 한지영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이틀 뒤에 다시 본가로 돌아가야 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이번에는 더 이상 너한테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경호원을 붙여둘게.”또다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한지영은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아니면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