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발걸음을 멈추고 신기한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여자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앞에 세워진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여자는 강지혁이 가버리자 당황하며 주위를 훑다가 임유진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임유진 쪽으로 달려갔다.“임유진 씨, 저 좀 도와주세요. 지난번처럼 강 대표님한테 사정 좀 봐달라고 해주세요. 제발요!”갑작스러운 상황에 임유진은 상황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여자가 바로 앞에서 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빌고 있었다. 여자의 손가락 끝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흰색 붕대가 감겨 있었다.여자의 이마는 퉁퉁 부어올랐고 피도 찔끔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처럼 간절했고 아무거나 빨리 잡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그날 임유진 씨 과거 이용한 거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제가 바보 같았어요. 일부러 손톱 뽑힌 척 강 대표님의 시선을 잡으려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날 저는 이미 거짓말한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직접 느꼈다고요!”여자는 손가락 통증도 잊은 듯 임유진의 손목을 꽉 잡았다.“임유진 씨,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강 대표님한테 제발 저 좀 살려달라고 얘기 한 번 해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여자는 정성스럽게 짠 계획이 이득을 가져오지 못한 건 물론이고 자신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날 이후 이 사장은 곧바로 그녀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고 친척들은 그녀가 강지혁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매정하게 선을 그어버렸다.임유진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여자가 그날 밤 골드 클럽에서 강지혁이 손을 잡으며 걱정해줬던 직원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당시 웨이터들의 말로는 이 사장이라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이 여자와 트러블이 생겨 손톱을 뽑겠다며 난리를 부렸다고 했다.그런데 지금 이 여자의 말을 들어보니 모든 것이 다 이 여자가 꾸민 쇼였다.이 여자는 강지혁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 사장과 짜고
오로라 반지가 완성된 후 강지혁은 봉인하듯 반지를 금고에 넣어 두고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반지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처럼 강지혁에게는 금지어나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지금 임유진에게 빌고 있는 여자는 계속해서 강지혁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만 계속해댔다.“오로라 반지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알아봐. 그리고 찾아내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네, 알겠습니다.”임유진에게 빌고 있던 여자는 그 말에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몸을 덜덜 떨었다.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리고 저 여자가 한 말 틀린 거 없어. 저 여자가 대신 부탁해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강지혁은 이 말을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가 아닌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받고는 순간 가슴에 파도가 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은 지금 임유진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 속에 더 이상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한때는 아름답게 반짝였던 두 눈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이 모든 것들이 임유진은 더 이상 강지혁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고 비서, 저 여자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게 S 시에서 치워.”강지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고이준은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와 임유진을 번갈아 보다가 강지혁이 말한 ‘저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만약 강지혁이 임유진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을 테니까.강지혁의 차량이 떠난 후 한지영은 임유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임유진의 손목을 계속 붙잡고 있는 여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알아서 치워야지 이게 어디서 행패야! 유진이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강지혁한테 말 좀 해달라고? 뭐 이런 뻔뻔하고 파렴치한 인간이 다 있어! 야, 너 경고하는데 다시는 우리 유진이 앞에 나타나지 마. 만약 또 나타나면 그때는 머리털을 싹 다 뽑아버릴 거야. 알았어?!”한지영은 말을 마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옆에서 임유진의 행동을 지켜보던 백연신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그날 저녁, 백연신은 한지영을 향해 물었다.“유진 씨 말이야. 혹시 임신한 건 아닐까?”그 말에 한지영은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음료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그럴 리 없어요!”한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백연신은 확신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왜 그렇게 확신해? 유진 씨 강지혁이랑 헤어지고 아직 3개월도 안 됐어. 3개월이면 아직 티도 안 날 거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잖아.”한지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아꼈다.임유진의 임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제삼자가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물론 강지혁의 도움으로 자궁치료를 받은 적이 있지만 치료를 받은 지 얼마 안 가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그리고 임유진은 헤어진 뒤로 더 이상 자궁치료를 받고 싶지 않아 했다.한지영은 백연신의 시선에 결국 얼버무리기도 했다.“아무튼 유진이가 임신할 리는 없어요. 참, 연신 씨, 나 유진이랑 약속한 게 하나 있어요. 앞으로 나한테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유진이 아이이기도 하고 아이의 또 다른 엄마는 유진이기도 하다고요. 이미 약속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연신 씨 의견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두 사람의 아이니까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응, 괜찮아.”그는 한지영에게 있어 임유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전에는 그런 임유진이 질투 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짧은 인생에 그런 친구를 만나게 된 건 축복이었다.한지영은 백연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고마워요, 연신 씨. 역시 역신 씨밖에 없어!”백연신은 한지영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며 말했다.“이틀 뒤에 다시 본가로 돌아가야 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이번에는 더 이상 너한테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경호원을 붙여둘게.”또다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한지영은 그와 떨어지기 싫었다.“아니면
“그래요? 어떤 거 좋아했어요?”곽동현은 쇼핑백을 열어 로봇들을 임유진에게 보여주었다.임유진은 쇼핑백 안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곽동현의 로봇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최소 10개는 넘어 보였다.그리고 마침 제일 위에 임유진이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것과 비슷한 로봇이 있었다.“이거요. 범블비.”임유진이 범블비를 손에 들고 과거를 회상하듯 씩 웃었다.“그럼 그건 유진 씨한테 선물로 줄게요.”“네? 하지만 이건 윤이 주려고 가지고 온 거잖아요.”“윤이한테는 아직 이만큼이나 남아 있는걸요? 그러니까 기념으로 하나 가져요.”곽동현이 묵직한 쇼핑백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기념이라...임유진은 수중에 있는 범블비를 보며 어릴 때 외할머니에게 범블비를 사달라고 졸랐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임유진은 아직 어렸기에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이거 사주려고 평소에 얼마나 돈을 아꼈는지 알지 못했다.임유진은 외할머니를 떠올리자 괜히 마음이 들떴다.“그럼 고맙게 받을게요.”임유진은 곽동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이에 곽동현도 그녀에게 미소도 답했다.임유진과 잘 될 일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임유진이 선물을 받아주자 괜히 기분이 좋았다.임유진과 곽동현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그 시각 누군가가 창문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임유진은 곽동현과 헤어진 후 곧바로 강현수의 병실로 찾아왔다.안으로 들어와 보니 예상대로 배여진이 있었다.하지만 오늘의 배여진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불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유진아, 아까 웬 남자랑 즐겁게 얘기하는 것 같던데 그 사람 누구야? 친구야? 혹시 너 병원까지 데려다줬어?”배여진의 질문에 임유진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전 직장 동료야. 우연히 병원 입구에서 마주친 거고.”“우연히...”배여진은 일부러 말을 길게 늘어트리며 임유진과 곽동현이 꼭 무슨 비밀 사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지난번에도 그랬으면서 이번에도 또 내쫓았다.배여진은 조금 분한 얼굴로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를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임유진은 사과와 과도를 가지고 또다시 강현수 옆 의자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아까 바로 아래에서 전 직장 동료를 만났어요?”강현수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네, 현수 씨도 만난 적 있는 사람이에요. 전에 촬영장에서 나 없어졌을 때 나 찾겠다고 들어갔다가 현수 씨랑 만난 곽동현이라는 남자요.”강현수의 질문에 그녀 역시 지나가는 말투로 대답했다.곽동현이라는 이름에 강현수가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았다.임유진이 갑자기 사라진 그 날 곽동현은 누가 봐도 초조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단순히 아는 지인이 사라졌다고 나올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표정은...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기억나요. 그때 유진 씨 걱정 엄청 많이 하던데.”“동현 씨는 미련할 정도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임유진은 아까 곽동현이 윤이에게 줄 로봇을 한 아름 들고 온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설마 옛날 물건을 그렇게까지 잘 보관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물론 지금도 트랜스포머 로봇들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곽동현의 로봇은 아주 옛날 거라 지금은 아마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한정판 같은 느낌일 것이다.윤이가 보면 좋아하며 방방 뛸 게 분명했다.“미련할 정도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요?”그 말에 강현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질투의 감정이 스멀스멀 그의 가슴에 퍼져갔다.방금 미소를 지은 건 곽동현이라는 사람 때문인 건가?“네, 정말 좋은 사람이거든요. 착하고 성실하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정말 친구로서 완벽한 사람이에요. 솔직히 지금 세상에 그런 사람 몇 없을걸요?”임유진은 진심으로 곽동현이라는 사람을 좋아했다.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인류애적인 면에서 말이다.감방 갔다 온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다른 사람은 다 피하는데 곽
이 범블비는 외할머니가 그때 사준 것과 완전히 똑같은 로봇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 다 똑같은 범블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와의 추억들이 생각났다.외할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여전히 임유진의 마음의 안식처였다.강현수는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는 듯한 임유진의 미소를 보고는 질투의 감정이 점점 더 거세졌다.머리로는 임유진이 곽동현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자꾸 곽동현이 임유진의 마음에 중요한 자리를 꿰차면 어쩌지라는 불안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한편 병실 밖에서 몰래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배여진은 이거다 싶어 눈을 반짝였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병실에서 나온 후 곧바로 윤이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곽동현이 한창 윤이와 놀아주고 있었다.예상대로 윤이는 트랜스포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참, 윤이 정확히 언제 퇴원한다고 했죠?”임유진이 옆에 있는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내일모레요. 별다른 상황 없으면 점심쯤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모레 점심에 나도 병원으로 올게요.”임유진이 말했다.“번거롭게 뭐하러 그래요. 점심시간도 별로 없을 텐데.”“2시간 정도 여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버스 타고 오면 금방이에요. 옷가지들이랑 이것저것 챙기려면 아마 사람이 많아야 할 거예요.”“그러면 저도 올게요.”그때 곽동현이 손을 들며 말했다.“차 가지고 오면 물건 싣기 편할 거예요. 내일모레 유진 씨 태우고 병원으로 올게요. 그러면 유미 씨도 마음이 조금 편하지 않겠어요?”두 사람의 말에 탁유미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두 사람 다 정말 고마워요. 그러면 그날 신세 좀 질게요.”윤이와 실컷 놀아준 후 임유진은 슬슬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곽동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데려다줄게요.”그러고는 행여 임유진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뒷말도 덧붙였다.“어차피 가는 길이거든요.”“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곽동현은 차에 시동을 걸고 임유진의 집으
곽동현은 멀어져가는 임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임유진에게로 다가갔다.“유진 씨, 나는... 나는 유진 씨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곽동현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큰 용기를 내서 한 말 같았다.“그 행복을 주는 사람이 내가 아니어도 그래도 나는 좋아했던 여자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곽동현의 말에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느껴졌다.“고마워요. 동현 씨는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곽동현의 따뜻함과 선의는 언제나 임유진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고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곽동현은 좋은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가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될 사람은 아니었다.“나...”곽동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좀처럼 말을 내뱉지 못했다. “동현 씨?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유진 씨, 나... 유진 씨 한번 안아봐도 돼요? 잠깐이면 돼요. 유진 씨를 향한 마음에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고 싶어요.”곽동현은 자기가 말하고도 변명 같은지 머쓱하게 웃었다.“아니다... 그냥 못 들은 거로 해요. 멋지게 떠나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마침표라는 건 서로 쌍방이어야만 가능한 얘기인데, 우리 둘은 항상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했잖아요. 그게 유진 씨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줄도 모르고...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은...”곽동현이 횡설수설하던 그때 임유진이 먼저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이에 곽동현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이제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목까지 다 빨개졌다.“동현 씨, 동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 동현 씨를 좋아하지 않은 건 내가 그만큼 복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 걸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같은 사람 말고 동현 씨를 사랑해주고 진심으로 아껴주는 그런 멋진 여성분을 만나길 바라요. 동현 씨 아까 나한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동현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강현수가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 배여진을 향해 물었다.“그래서 너는 이걸 건네준 사람이 누군지 정말 모른다고?”그 말에 배여진의 몸이 움찔 떨렸다.강현수의 눈동자가 꼭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려워 났다.“네, 정말 몰라요. 만약 아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을 잡았겠죠. 그리고 왜 이런 걸 주냐고 따졌겠죠.”배여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현수 씨 혹시... 이 사진을 내가 준비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현수 씨도 나한테 그랬잖아요. 현수 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유진이라고, 그리고 나는 어릴 때 현수 씨 목숨을 구해준 은인뿐이라고. 그런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이런 짓을 하겠어요. 나는 현수 씨가 모르는 사람이랑 잘 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이랑 잘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현수 씨가 결혼해도 나도 마음 편히 현수 씨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나는 현수 씨랑 헤어지기 싫은 사람이에요!”배여진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호소했다.강현수는 입을 꾹 닫은 채 한참을 배여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사진 보내줄 테니까 곽동현이라는 남자에 대해 조사 좀 해 봐.”배여진은 강현수의 말을 듣고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몰래 이겼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일은 임유라가 계획한 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 만약 여기서 뭔가 더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면 임유진과 강현수의 사이는 완전히 깨져버리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때는 배여진의 세상이었다....저녁, 한지영은 임유진과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유진아, 나 이틀 뒤에 연신 씨 찾으러 갈 거야.]그 말에 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뭐? 갔다가 언제쯤 돌아올 건데?][휴가를 아예 다 써버리기로 했으니까 열흘 정도 될 거야. 유진아, 나 그날 거의 죽을 뻔한 뒤로 자꾸 연신 씨랑 붙어있고 싶어져. 떨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또 보고 싶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