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씨를 구한 건 내 선택이었어요. 그러니까 괜한 부채감 갖지 마요.”강현수는 꼭 임유진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런 그를 보며 어쩐지 자꾸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1시간 후, 한지영도 병실로 찾아왔다.한지영은 가장 먼저 강현수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별일 없다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러고는 온 김에 경찰의 조사한 결과도 얘기해줬다.결과적으로 한지영의 차는 누군가가 무슨 짓을 한 게 맞았다.브레이크는 처음부터 고장 난 것이 아니라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고장 났다.만약 그때 강현수가 차로 들이받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전에 자꾸 경보음이 울렸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 처음에는 고양이나 작은 동물들이 차체를 건드린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응,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경찰 쪽에서는 또 뭐래?”“계속 조사해보겠네. 경찰 조사도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아마 조만간 너한테도 연락이 갈 거야.”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빨리 범인을 잡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협조할게.”“유진 씨, 나도 내 방식대로 알아볼게요.”강현수의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범인이 해하려던 건 한지영이지만 결과적으로 임유진도 같이 다쳤기에 화가 많이 난 듯하다....병원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감탄하며 말했다.“현수 씨 말이야. 너한테 정말 진심인 것 같아.”“응.”임유진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사람 감정이라는 게 잘해주는 사람한테로 딱 향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유진아...”한지영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네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 두렵다는 이유로 행복을 놓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임유진은 진심 어린 친구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한지영을 꼭 끌어안았다.“지영아, 이제는 내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항상 내 걱정만 하잖아. 대신 이것 하나는 꼭 약속할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행
그러다 아침에 잠에서 깨보니 아직 통화 중이었다.백연신은 그녀가 자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이에 한지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백연신이 바로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꼭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아니, 어쩌면 한지영이 깰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을 수도 있다.백연신이 S 시를 떠난 지 이제 고작 2주 정도밖에 안 됐지만 한지영은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정말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생사의 갈림길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보니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한지영은 지하철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아파트 단지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그때 한지영의 발걸음이 멈췄다.한지영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된 검은색 승용차를 빤히 바라보았다.승용차 문이 열리고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바로 한지영 쪽으로 다가왔다.한지영은 그 남자를 보자마자 코가 찡해 나더니 이내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지영아, 나 왔어.”남자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지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더니 그대로 백연신의 품에 안겼다.한지영은 두 팔로 백연신을 꼭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서럽게 울어댔다.그 눈물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백연신을 향한 그리움도 있었다.백연신은 고개를 숙여 한지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분명히 부드러운 손짓이었지만 거기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마음도 담겨있었다.한지영의 눈물은 언제나 그를 긴장하게 하고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어젯밤 한지영이 전화기 너머로 울어댈 때 백연신은 자괴감 때문에 가슴이 욱신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백연신은 한지영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이 모두 자기가 옆에서 지켜주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만약 한지영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마 백
한지영은 그녀의 걱정으로 가득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연신은 어제 잠을 한숨도 못 잔 것인지 많이 피곤해 보였다.그는 요즘 백씨 가문 일 때문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일에만 매달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오늘 이렇게 직접 그녀를 찾아오기까지 했다.한지영은 두 손으로 백연신을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우리 결혼해요. 연신 씨네 집안일이 마무리되면 난 바로 연신 씨랑 결혼할 거예요.”전에 결혼에 관해 서로 얘기를 이미 다 나눈 상태이기는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자 백연신이라는 남자와 한시라도 더 빨리 결혼하고 싶어졌다.조금이라도 더 많이, 조금이라도 더 그와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싶었다.한지영은 지금 백연신과 마주하고 서로 껴안고 눈을 마주치는 이 모든 것들이 꼭 하늘이 내린 선물 같았다.백연신은 한지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서히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래. 결혼하자. 모든 걸 다 끝내면 그때 꼭 결혼하자. 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줄게.”한지영은 그 말에 배시시 웃었다.그녀는 백연신과 함께라면, 언제나 그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한지영의 집.한지영은 백연신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패기 넘치게 부모님을 향해 백연신과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꺼냈다.“결혼하겠다고?”한지영의 아빠인 한종훈이 딸과 미래 사위를 바라보며 물었다.물론 그나 한지영의 엄마인 이해영이나 딸의 연애는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결혼은 아무리 생각해도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한지영과 백연신은 아직 연애한 지 1년도 안 된 한창 열애 중인 커플이었다.“네, 저 지영이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허락해 주십시오!”백연신은 아까 집 앞에서 한지영을 만난 순간부터 이 집에 들어와서까지 한시도 한지영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런데 두 사람 연애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이해영이 걱정스러운 얼
백연신의 진심에 한씨 부부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한종훈은 시선을 돌려 백연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자네가 집안 갈등을 전부 다 해결하고 오면 그때는 두 사람 결혼을 허락하지.”물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씨 부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기로 했다.자식이 이렇게 원하는 데 들어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드디어 떨어진 허락에 한지영의 얼굴이 활짝 폈다.백연신도 한시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지영이 소중한 만큼 그녀의 부모님도 소중했기에 그는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한지영과 결혼하고 싶었다.백연신은 기뻐하는 한지영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2개월 안에 반드시 백씨 가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겠다고 말이다....임유진은 오늘도 병원으로 왔다.다만 오늘은 강현수의 병실로 가기 전 먼저 윤이 병실로 찾아왔다.강현수와 윤이는 우연히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다만 윤이는 일반 병실이지만 강현수는 VIP 병실이었다.윤이는 이제 이틀 정도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게 된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서 참으로 다행이었다.윤이는 임유진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임유진은 윤이의 안부를 묻고는 이내 사 온 과일을 아이에게 건넸다.윤이는 야무지게 과일을 먹고는 임유진의 팔을 잡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에 임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가를 닦아주고는 새로 산 동화책을 읽어주었다.윤이는 이제 4살밖에 안 됐지만 아는 단어가 제법 많았다. 임유진이 지금 읽고 있는 동화책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임유진은 윤이에게 책을 넘겨주고는 낮은 목소리로 탁유미를 향해 물었다.“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안식이 조금 안 좋은데.”사실 임유진은 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탁유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탁유미는 어쩐지 임유진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혹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 도움은 못 될 수도 있지만 언니 마음의
“그럼 저는 친구 병실에 가봐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아, 네.”임유진의 말에 곽동현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는 임유진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전보다 더 마른 듯한 느낌이었다.사실 곽동현은 아까 그녀에게 강지혁과 강현수 중에서 누구를 선택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담도 없었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누구를 선택하든 임유진은 다 행복할 테니까.곽동현은 두 사람과 어깨도 나란히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이런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마 그가 아직 임유진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머리는 그녀를 놔줘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가슴은 누군가를 좋아했던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 못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병실로 들어왔다.이번에는 저번이랑 달리 배여진 말고 강현수의 부모도 있었다.“임유진 씨가 여기는 뭐하러 왔죠?”한은정은 임유진을 보더니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현수 씨 병문안 왔어요.”임유진은 손에 든 과일을 들어 보였다.“과일 좀 사 왔어요.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은 종류별로 다 샀고요. 음... 그럼 오늘은 과일만 놓고 갈게요.”임유진은 자신이 강현수의 부모에게 있어 얼마나 불청객일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자기 아들을 하마터면 죽일 뻔한 여자를 그 어떤 부모가 반길 수 있을까.“필요 없으니까 도로 가지고 가요.”한은정은 임유진의 것은 하나도 받지 않겠다며 매정한 태도를 보였다.“임유진 씨가 아니었으면 현수가 이렇게 다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어머니!”강현수가 외쳤다.“유진 씨를 구한 건 제 선택이었어요. 누구도 저한테 강요하지 않았다고요. 정말 저를 생각하시면 유진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주세요.”“너...!”한은정이 고개를 돌려 강현수를 노려보았다.“저한테 있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여자는 단 두 명뿐이에요. 한 명은 어머니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유진 씨에요.”강현수가 한은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 눈빛은 말하자면 일종의 경고였다.만약 이대로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 말이다.배여진은 이를 꽉 깨문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너도 이만 집으로 돌아가. 간병인도 있어서 네가 날 보살펴줄 필요 없어.”강현수가 말했다.하지만 그 말에 쉽게 물러설 배여진이 아니었다.“어차피 나는 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현수 씨 옆에 있을게요.”배여진은 이번 기회에 강현수에게 여성스러운 모습을 한껏 어필하고 싶었다.“아니, 필요 없으니까 돌아가.”하지만 강현수는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배여진은 강현수에게 완전히 거절당했다. 하지만 아무리 분해도 그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그...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요.”배여진은 결국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갔다.그렇게 병실 안에는 강현수와 임유진, 이렇게 둘만 남았다.“아까 어머니한테 그렇게 얘기할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현수 씨 어머니가 나 보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임유진의 말에 강현수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우리 엄마 마음은 그렇게 잘 이해하면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왜 이해 못 해줘요?”이에 임유진이 흠칫했다.임유진은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다. 그저...“나랑 현수 씨는 그런 사이가...”임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날 거절하려는 말을 꺼낼 거라면 그냥 얘기하지 말아줘요. 내가 죽을 만큼 싫고 미친 듯이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면 그런 말은 앞으로 쉽게 꺼내지 말아줘요.”누구한테도 고개를 숙여본 적 없는 강현수가 임유진의 앞에서는 지금 거의 애원하듯 빌고 있다.임유진은 목구멍에 가시 같은 것이 박힌 것처럼 따끔해 났다.강현수의 몸에 감긴 붕대들과 그 붕대를 뚫고 나온 미세한 핏자국들은 모두 그녀를 구하려다 생긴 것이다.“사과... 사과 깎아줄게요.”임유진은 결국 화제를 돌리며 가지고 온 과일 바구니에서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한 알 꺼냈다.“네, 유진 씨가 깎아줘요.”강현수가 미소를
“혹시 방금 지혁이 얼굴 떠올렸어요?”강현수가 물었다.사실 묻지 않아도 됐지만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임유진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침묵은 그에게 답을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유진 씨가 아직 지혁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유진 씨 기다릴 거예요. 유진 씨가 완전히 강지혁을 내려놓고 날 사랑하게 되는 날까지 계속해서 기다릴 거예요.”“나는 강지혁한테 아무런 마음도 없어요.”임유진이 부인했다.“그런 거면 다행이고요.”강현수가 씩 웃었다.“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더 짧아지겠네요. 유진 씨는 날 싫어하지 않아요, 내 말이 맞죠?”임유진은 그 질문을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그녀는 강현수를 싫어해 본 적이 없다. 당연한 거다. 강현수는 바로 그 현수니까.그때 강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서서히 표정이 변했다.“알겠어.”강현수는 전화를 끊고는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차 사고 범인 잡았대요.”“네? 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범인을 잡은 건 백연신 씨예요. 내 비서보다 한발 더 빨리 알아냈다고 하네요. 범인은 지금 체포됐고 지금 경찰들이 조사하고 있어요.”“범인은 누군데요?”“고유정이라고 백씨 가문에서 고른 백연신 씨 정략결혼 상대예요. 아마 한지영 씨를 다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나 봐요. 그런데 마침 그날 임유진 씨가 함께 탄 거고요.”임유진은 고유정이라는 이름을 전에 한지영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그때도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한지영에게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며 백연신의 옆에서 떨어질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그런데 아무리 백연신 씨가 탐이 났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차 사고를 일으킬 수가 있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그렇게도 쉬운 일인가?임유진은 전례 없는 분노를 느끼며 두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어느 경찰서인지 혹시 알아요?”임유진의 질문에 강현수는 바로 주소를 얘기해주었다.“지금 바로 그쪽으로 가 봐야겠어요. 몸조리
다만 이번 일은 고유정 혼자 벌인 일이고 고씨 집안은 아무것도 몰랐다. 만약 고씨 집안에서 나섰다면 더 은밀하고 더 무서운 수법으로 한지영을 처리했을 것이다.한지영은 경찰을 통해 고유정의 얘기를 듣고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널 끌어들였어.”“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이런 일로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고. 미안한 거로 따지면 내가 너한테 더 미안하니까.”한지영은 그때 임유진의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학업도 포기하고 미래도 포기했다. 그렇게 삼 년을 한지영은 오직 임유진을 위해서만 뛰어다녔다.임유진은 그 일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이번 일은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탓입니다. 설마 고유정이 멋대로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어요. 지영이도 그렇게 유진 씨까지 끌어들여서 정말 미안합니다.”백연신은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렸다.그는 고씨 가문만 예의주시하느라 고유정은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하지만 그럴 만도 했던 게 고유정은 고씨 집안에서 버리는 패였고 그렇기에 고유정은 큰 소란은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건 결과적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고유정이 절대로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꼭 강력하게 처벌할 겁니다. 배짱 좋게 이런 일을 저질렀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니까요.”백연신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웠다. 그리고 눈빛은 당장이라도 사람 하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이에 임유진은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그녀는 고유정의 인생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힘들 거라고 확신했다.백연신에게 있어 한지영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해 마지않는 한지영을 건드렸으니 백연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게다가 백연신은 원래 매정하고 냉혹한 사람이다. 그게 아니면 백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꿰찰 수도 없었을 테니까.경찰서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유진아, 우리랑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않을래?”이에 임유진이 입을 열고 대답을 하려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