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여진은 그 말에 안심했다.4시 12분에 그녀는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본 사람 또한 많았었기에 알리바이는 문제없었다.“CCTV를 건드린 사람은요?”강현수가 물었다.“그건 현장을 더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조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당시 대기실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해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물어봐야 하니까요.”경찰은 질문에 대답하고는 바로 장이경의 이야기로 넘어갔다.장이경의 말로는 그날 배여진을 찾으러 간 것이 맞고 배여진이 대기실에서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한 것도 맞다고 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데 10분 정도 뒤에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고 그 뒤로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했다.병원 쪽에서는 장이경의 혈액에서 성적흥분을 하게 만드는 약 성분이 검출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약은 요즘 인터넷만 이용하면 어디서든, 누구든 살 수 있었기에 구매자를 찾아내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다.“저희도 조사는 계속하겠지만 단시간 안에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경찰의 말에 배여진은 한시름 놓았다. 단시간 안에 알아내지 못하면 이런 사건은 결국 흐지부지되기 일쑤니까.경찰서에서 나온 후 배여진은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유진아, 너무 걱정하지 마. 범인은 꼭 잡힐 거야. 정말 어떤 파렴치한 인간이 이런 짓을 했는지! 잡히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응, 나도 범인은 꼭 잡힐 거라고 생각해.”임유진은 배여진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고는 이곳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그러자 강현수가 그녀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데려다줄게요.”“아니요. 나는 버스 탈 거라서. 그럼 이만.”임유진은 강현수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최대한 그와 거리를 뒀다.배여진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더니 강현수 옆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현수 씨, 우리도 이제 가요.”하지만 강현수는 배여진의 말은 무시한 채 임유진의 뒷모습만 바라보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청량한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에 고개를 홱 돌려보니 강현수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왜... 여기 있어요?”“유진 씨 집까지 데려다주려고요. 내 차에 앉는 건 싫은 것 같으니 이렇게 내가 유진 씨 따라 버스에 탈 수밖에 없겠죠?”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강현수가 자신을 따라 버스에 오를 줄을 몰랐다.“젊은이, 돈 내야지.”그때 버스 기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강현수는 그 말에 지갑을 꺼내더니 당당하게 수표를 꺼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요금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잠깐만요!”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설마 수표 넣으려는 건 아니죠?”“맞는데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아까 지갑에 넣어뒀던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내가 찍어줄 테니까 돈은 넣어둬요.”그러고는 다시 한번 카드를 찍고 버스 중간으로 걸어갔다.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붐빌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리는 이미 사람들이 다 앉고 없었다.결국 임유진은 적당한 곳에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강현수는 그녀 바로 옆에 섰다.“버스 타니 옛날 생각나고 좋네요.”강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 익숙하거든요.”“데려다주는 사람이 나라서 불편한 건 아니고?”강현수는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이에 임유진은 찔리는 게 있는 듯 서둘러 그의 눈을 피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는 거 시간 낭비에요.”그 말에 강현수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그는 한참을 임유진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예요. 전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거든요.”강현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혹시 내가 계속 다가가는 게 두려워요? 나를 어느 순간 받아주게 될까 봐, 그래서 자꾸 시간 낭비라고 하는 거예요?”“그게 무슨...!”임유진은 그의 말에 발끈하고는 이내 한숨
임유진은 강현수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고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때, 임유진의 앞에 있던 승객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차량이 천천히 멈췄다.“앉아요. 아니면 계속 나랑 같이 서서 가던가.”강현수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이에 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1인석이었기에 앉을 수 있는 건 임유진뿐이었고 강현수는 계속 서 있어야만 했다.임유진은 그걸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이 앉게 되면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될 테고 그러면 강현수와의 묘한 분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유진은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처해졌다.강현수가 그녀가 앉은 자리 바로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손잡이가 아닌 임유진과 그 앞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기 때문이다.임유진은 지금 그에게 완전히 갇혀버린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이에 민망해진 임유진은 최대한 강현수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하지만 집까지 아직 10개 정거장이나 지나야 하고 시간상으로는 대략 40분 가까이 지나야 했다.그래서 언제까지고 고개를 숙일 수 없었던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고 자는 척을 시도했다.그리고 강현수는 고개를 숙여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질끈 감은 눈과 앙증맞은 코, 그리고 정갈하게 어깨까지 떨어진 검은색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이 강현수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대체 언제부터 임유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걸까? 또 언제부터 그녀에게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걸까?처음에는 아마 외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단기간에 한 사람의 내면까지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뭐였다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정의감? 아니면 단호함? 어쩌면 그런 명확한 이유 없이 그저 임유진이라서
“깼어요?”강현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들고는 빨개진 얼굴로 짧게 대답한 후 빠르게 버스에서 내렸다. 강현수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집으로 가는 길, 강현수는 임유진이 빠르게 걷든 느리게 걷든 상관없이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었고 그렇게 집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럼 난 이만 돌아갈게요. 들어가요.”그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다만 발걸음을 돌려 두어 걸음 걸었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참, 대기실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경찰 쪽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도 내가 계속 알아볼 테니까. 범인이 누구를 해치려 했든 간에 꼭 잡아낼게요.”그 말에 임유진이 그를 보며 물었다.“그 말은 현수 씨도 여진 언니 말을 믿는다는 뜻인가요? 그 범인이 노린 건 애초에 언니였고 나는 재수 없게 그 대기실을 들어간 탓에 그런 일을 겪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아니요. 나는 그저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만약 범인이 정말 언니라면 그때는 언니를 경찰에 넘겨 법대로 판결받게 할 수 있겠어요?”그 질문에 강현수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임유진은 그 일로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을 생각이다.하지만 만약 그 범인이 배여진이라면 정말 경찰에 넘겨 법대로 판결받게 할 수 있을까?“여진이는 어렸을 때 날 구해줬던 사람이에요...”강현수의 힘겨운 한마디에 임유진은 쓰게 웃었다.어쩐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 알고도 모른 척 한 건 그녀였으니까.임유진은 자신이 택했던 침묵이 이런 식으로 발을 잡을 줄은 몰랐다.이럴 때면 차라리 그 여자아이는 배여진이 아니라고 강현수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게 나을까 싶으면서도 만약 그 사실을 털어놓게 되면 강현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강하게 집착해올 것이 분명하기에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강현수가 원하는 미래를 주지 못할 바에는 계속해서 그를 속이는
이 빌라는 강현수가 사준 것이다.배여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이든 원하는 건 다 사주는 강현수를 보며 그도 자신을 어느 정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강현수가 임유진을 대하는 것을 보고는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그는 임유진에게 엄청난 돈은 쏟아붓지는 않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임유진을 걱정하고 관심하며 사랑을 퍼부어댔으며 오로지 임유진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임유진만 생각했다.배여진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임유진이 왜 기억을 되찾고도 계속해서 강현수를 속이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뭐가 됐든 임유진은 결과적으로 침묵을 택했다. 그러니 강현수의 사랑을 받을 자격 같은 건 없어야 마땅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배여진은 문을 연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막 닫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재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그리고 문은 쾅 하고 닫혔다.이에 배여진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벌써 내 목소리 잊었어요? 배여진 씨를 위해 CCTV까지 움직여줬는데?”그 말에 배여진은 그제야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그녀는 배여진이 계획 성공을 위해 고용한 청소부 아줌마였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멀쩡한 옷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 거추장스럽던 모자와 안경도 시원하게 벗어버렸기 때문이다.“그쪽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돈이라면 줬잖아요. 돈을 더 달라고 온 거면 못 줘요. 어차피 대기실 문을 잠근 건 그쪽이니 감방을 가도 그쪽이 가게 될 테니까요.”배여진의 경계심 가득한 말에 청소부가 같잖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그러면 배여진 씨도 나랑 함께 감방에 가게 되겠네요. 나한테 문을 잠그라고 지시한 거 그쪽이니까.”“뭐라고요?!”배여진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질렀다.“참, 이사가 늦었네요. 나는 임유라예요. 임유진은 당신을 언니라고 불렀으니 나도 그래야 하나?”배여진은 그 말을 듣고는 믿
배여진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반짝였다.“무슨 방법이라도 있어?”“내가 방법도 없이 찾아왔을까 봐? 배여진, 너 강현수랑 결혼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강현수가 임유진을 계속 사랑하는 한 너한테 기회는 없을 거야.”배여진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왜 날 도와주려는 건데?”“당연히 돈 때문이지. 그리고 임유진을 전부터 계속 벼르고 있기도 했고.”임유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임유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녀의 부모는 진작에 S 시를 떠났지만 그녀는 이곳에 남았고 간간이 알바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청소부 일을 한 것도 기존에 있던 아줌마의 대타로 잠시 들어간 것뿐이었다.그러다 마침 우연히 배여진을 만나게 됐고 배여진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이다.배여진은 장이경에게 협박받은 일 때문인지 임유라도 그럴까 봐 대답을 망설였다.“왜, 임유진은 처리하고 싶고 돈은 주기 싫어?”임유라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너는 임유진을 처리해서 좋고 나는 돈 받아서 좋고, 내 제안은 서로한테 이득밖에 안 돼. 임유진이 만약 사라지게 되면 네가 강현수랑 결혼할 가능성도 점점 커지게 될 거야. 반대로...”임유라는 일부러 말을 늘어트리며 조롱 섞인 얼굴로 배여진을 바라보았다.“만약 이대로 임유진을 계속 내버려 두게 되면 네 그 가짜 신분은 당장 내일 까발려질지도 모르지. 너도 그건 싫잖아, 안 그래?”그 말에 배여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무, 무슨 헛소리야!”초조함을 감추려고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가 없었다.임유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설마 한동안 진짜 행세를 했다고 네가 정말 진짜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강현수가 줄곧 찾아 헤맸던 건 네가 아니라 임유진이잖아.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작은 은팔찌, 그거랑 똑같은 팔찌를 임유진도 가지고 있는 걸 내가 봤거든.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강현수가 찾아
다음날, 임유진은 여느 때와 같이 로펌으로 출근했다.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들이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그러다 임유진이 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할 일을 했다.임유진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커피를 내리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갔다.“유진 씨, 축하해요. 그렇게 고생하더니 드디어 팔자가 피려나 보네. 잘 되고 나면 우리 로펌 식구들 잊으면 안 돼요, 알겠죠?”임유진을 발견한 여자 동료가 활짝 웃으며 갑자기 축하를 보내왔다.“뭘 축하해요?”이에 임유진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여자 동료가 팔을 툭툭 치며 다 알고 있으니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얼굴로 웃었다.“에이, 지금 인터넷에 쫙 퍼졌는데 뭘 계속 감춰요. 다들 유진 씨 부럽다고 난리에요. 하지만 조심해요. 아직도 많은 여자들이 호시탐탐 강현수 씨 노리고 있으니까.”임유진은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강현수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여자 동료는 임유진이 뭐라 묻기 전에 호호 웃으며 탕비실을 나가버렸다.이에 임유진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인터넷을 보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그때 탕비실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임유진이 고개를 들어보자 그 누군가는 바로 정한나였다.정한나는 요즘 사무실에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동료들과는 말 한마디도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지난번 세리나에게 폭행당한 영상이 공개된 후 그녀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음에도 다른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한나는 남자친구에게 대차게 차인 건 물론이고 사무실 직원들에게서도 야유와 조롱을 받게 되었다.심지어 그 일로 정한나는 상사에게 불려가기도 했었다.당장 자르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재계약은 아무래도 어려울 듯 보였다.정한나는 이미 한번 다른 곳에서 쫓겨난 전적이 있었기에 계약이 끝나게 되면 더는 이 업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정한나가 다시는 이런 행동도 말도 못 하게 겁을 줄 필요가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정한나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어버렸다.“한나 씨 말대로 현수 씨와 결혼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한나 씨 하나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정한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만약 임유진이 정말 강현수에게 부탁하게 되면 강현수는 아마 100%의 확률로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될 테니까.아니, 어쩌면 부탁할 필요도 없이 방금 그 녹음 하나로 당장 움직여 줄지도 모른다.지금도 최악인데 만약 강현수 쪽으로부터 압박이 들어오게 되면 아마 그녀는 더 이상 S 시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될 것이다.정한나는 생각으로 벌써 몸이 덜덜 떨렸다.임유진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커피를 들고 유유하게 탕비실을 나왔다.그리고 자리에 앉아 이제 일을 시작하려는데 한지영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유진아, 너 강현수 씨랑 사귀어?!][??]또다시 강현수의 이름이 나왔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다들 이러는 걸까.그때 한지영이 또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아니라고? 그럼 이 동영상은 뭔데?]한지영은 말을 보내고 난 후 문제의 동영상도 바로 뒤이어 보냈다.임유진은 그 영상을 클릭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영상은 버스 안에서 찍힌 것이었고 등장인물은 그녀와 강현수였다.촬영 각도로 봤을 때 해당 영상을 찍은 사람은 그들 뒤쪽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문제의 영상 속에는 강현수가 그녀의 머리와 버스 창문 가운데 손을 넣고 그녀의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조심스럽게 감싸주는 모습이 찍혔다.그리고 제일 문제가 되는 건 강현수의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린 채 임유진만 보는 그 시선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시선이었다.이... 이게 뭐지?임유진은 영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잠깐 넋을 잃었다.그러다 한지영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