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놓칠 뻔했네요.”청량한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에 고개를 홱 돌려보니 강현수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왜... 여기 있어요?”“유진 씨 집까지 데려다주려고요. 내 차에 앉는 건 싫은 것 같으니 이렇게 내가 유진 씨 따라 버스에 탈 수밖에 없겠죠?”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강현수가 자신을 따라 버스에 오를 줄을 몰랐다.“젊은이, 돈 내야지.”그때 버스 기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강현수는 그 말에 지갑을 꺼내더니 당당하게 수표를 꺼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요금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잠깐만요!”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설마 수표 넣으려는 건 아니죠?”“맞는데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아까 지갑에 넣어뒀던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내가 찍어줄 테니까 돈은 넣어둬요.”그러고는 다시 한번 카드를 찍고 버스 중간으로 걸어갔다.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붐빌 정도는 아니었지만 자리는 이미 사람들이 다 앉고 없었다.결국 임유진은 적당한 곳에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강현수는 그녀 바로 옆에 섰다.“버스 타니 옛날 생각나고 좋네요.”강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 익숙하거든요.”“데려다주는 사람이 나라서 불편한 건 아니고?”강현수는 임유진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이에 임유진은 찔리는 게 있는 듯 서둘러 그의 눈을 피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는 거 시간 낭비에요.”그 말에 강현수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그는 한참을 임유진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예요. 전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거든요.”강현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혹시 내가 계속 다가가는 게 두려워요? 나를 어느 순간 받아주게 될까 봐, 그래서 자꾸 시간 낭비라고 하는 거예요?”“그게 무슨...!”임유진은 그의 말에 발끈하고는 이내 한숨
임유진은 강현수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렇게 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고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때, 임유진의 앞에 있던 승객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차량이 천천히 멈췄다.“앉아요. 아니면 계속 나랑 같이 서서 가던가.”강현수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이에 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1인석이었기에 앉을 수 있는 건 임유진뿐이었고 강현수는 계속 서 있어야만 했다.임유진은 그걸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명이 앉게 되면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될 테고 그러면 강현수와의 묘한 분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그것도 잠시, 임유진은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처해졌다.강현수가 그녀가 앉은 자리 바로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손잡이가 아닌 임유진과 그 앞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기 때문이다.임유진은 지금 그에게 완전히 갇혀버린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이에 민망해진 임유진은 최대한 강현수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하지만 집까지 아직 10개 정거장이나 지나야 하고 시간상으로는 대략 40분 가까이 지나야 했다.그래서 언제까지고 고개를 숙일 수 없었던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고 자는 척을 시도했다.그리고 강현수는 고개를 숙여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질끈 감은 눈과 앙증맞은 코, 그리고 정갈하게 어깨까지 떨어진 검은색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이 강현수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대체 언제부터 임유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걸까? 또 언제부터 그녀에게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린 걸까?처음에는 아마 외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단기간에 한 사람의 내면까지 파악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뭐였다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정의감? 아니면 단호함? 어쩌면 그런 명확한 이유 없이 그저 임유진이라서
“깼어요?”강현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말에 고개를 들고는 빨개진 얼굴로 짧게 대답한 후 빠르게 버스에서 내렸다. 강현수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집으로 가는 길, 강현수는 임유진이 빠르게 걷든 느리게 걷든 상관없이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었고 그렇게 집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었다.“그럼 난 이만 돌아갈게요. 들어가요.”그는 집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다만 발걸음을 돌려 두어 걸음 걸었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참, 대기실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경찰 쪽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도 내가 계속 알아볼 테니까. 범인이 누구를 해치려 했든 간에 꼭 잡아낼게요.”그 말에 임유진이 그를 보며 물었다.“그 말은 현수 씨도 여진 언니 말을 믿는다는 뜻인가요? 그 범인이 노린 건 애초에 언니였고 나는 재수 없게 그 대기실을 들어간 탓에 그런 일을 겪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아니요. 나는 그저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만약 범인이 정말 언니라면 그때는 언니를 경찰에 넘겨 법대로 판결받게 할 수 있겠어요?”그 질문에 강현수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임유진은 그 일로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잡을 생각이다.하지만 만약 그 범인이 배여진이라면 정말 경찰에 넘겨 법대로 판결받게 할 수 있을까?“여진이는 어렸을 때 날 구해줬던 사람이에요...”강현수의 힘겨운 한마디에 임유진은 쓰게 웃었다.어쩐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다 알고도 모른 척 한 건 그녀였으니까.임유진은 자신이 택했던 침묵이 이런 식으로 발을 잡을 줄은 몰랐다.이럴 때면 차라리 그 여자아이는 배여진이 아니라고 강현수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게 나을까 싶으면서도 만약 그 사실을 털어놓게 되면 강현수는 아마 지금보다 더 강하게 집착해올 것이 분명하기에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강현수가 원하는 미래를 주지 못할 바에는 계속해서 그를 속이는
이 빌라는 강현수가 사준 것이다.배여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이든 원하는 건 다 사주는 강현수를 보며 그도 자신을 어느 정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강현수가 임유진을 대하는 것을 보고는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그는 임유진에게 엄청난 돈은 쏟아붓지는 않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임유진을 걱정하고 관심하며 사랑을 퍼부어댔으며 오로지 임유진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임유진만 생각했다.배여진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임유진이 왜 기억을 되찾고도 계속해서 강현수를 속이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뭐가 됐든 임유진은 결과적으로 침묵을 택했다. 그러니 강현수의 사랑을 받을 자격 같은 건 없어야 마땅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배여진은 문을 연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막 닫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재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그리고 문은 쾅 하고 닫혔다.이에 배여진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벌써 내 목소리 잊었어요? 배여진 씨를 위해 CCTV까지 움직여줬는데?”그 말에 배여진은 그제야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그녀는 배여진이 계획 성공을 위해 고용한 청소부 아줌마였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멀쩡한 옷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 거추장스럽던 모자와 안경도 시원하게 벗어버렸기 때문이다.“그쪽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돈이라면 줬잖아요. 돈을 더 달라고 온 거면 못 줘요. 어차피 대기실 문을 잠근 건 그쪽이니 감방을 가도 그쪽이 가게 될 테니까요.”배여진의 경계심 가득한 말에 청소부가 같잖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그러면 배여진 씨도 나랑 함께 감방에 가게 되겠네요. 나한테 문을 잠그라고 지시한 거 그쪽이니까.”“뭐라고요?!”배여진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질렀다.“참, 이사가 늦었네요. 나는 임유라예요. 임유진은 당신을 언니라고 불렀으니 나도 그래야 하나?”배여진은 그 말을 듣고는 믿
배여진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반짝였다.“무슨 방법이라도 있어?”“내가 방법도 없이 찾아왔을까 봐? 배여진, 너 강현수랑 결혼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강현수가 임유진을 계속 사랑하는 한 너한테 기회는 없을 거야.”배여진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왜 날 도와주려는 건데?”“당연히 돈 때문이지. 그리고 임유진을 전부터 계속 벼르고 있기도 했고.”임유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임유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그녀의 부모는 진작에 S 시를 떠났지만 그녀는 이곳에 남았고 간간이 알바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청소부 일을 한 것도 기존에 있던 아줌마의 대타로 잠시 들어간 것뿐이었다.그러다 마침 우연히 배여진을 만나게 됐고 배여진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이다.배여진은 장이경에게 협박받은 일 때문인지 임유라도 그럴까 봐 대답을 망설였다.“왜, 임유진은 처리하고 싶고 돈은 주기 싫어?”임유라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너는 임유진을 처리해서 좋고 나는 돈 받아서 좋고, 내 제안은 서로한테 이득밖에 안 돼. 임유진이 만약 사라지게 되면 네가 강현수랑 결혼할 가능성도 점점 커지게 될 거야. 반대로...”임유라는 일부러 말을 늘어트리며 조롱 섞인 얼굴로 배여진을 바라보았다.“만약 이대로 임유진을 계속 내버려 두게 되면 네 그 가짜 신분은 당장 내일 까발려질지도 모르지. 너도 그건 싫잖아, 안 그래?”그 말에 배여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무, 무슨 헛소리야!”초조함을 감추려고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출 수가 없었다.임유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설마 한동안 진짜 행세를 했다고 네가 정말 진짜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강현수가 줄곧 찾아 헤맸던 건 네가 아니라 임유진이잖아.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작은 은팔찌, 그거랑 똑같은 팔찌를 임유진도 가지고 있는 걸 내가 봤거든.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강현수가 찾아
다음날, 임유진은 여느 때와 같이 로펌으로 출근했다.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들이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그러다 임유진이 그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할 일을 했다.임유진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커피를 내리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갔다.“유진 씨, 축하해요. 그렇게 고생하더니 드디어 팔자가 피려나 보네. 잘 되고 나면 우리 로펌 식구들 잊으면 안 돼요, 알겠죠?”임유진을 발견한 여자 동료가 활짝 웃으며 갑자기 축하를 보내왔다.“뭘 축하해요?”이에 임유진이 어리둥절해서 묻자 여자 동료가 팔을 툭툭 치며 다 알고 있으니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얼굴로 웃었다.“에이, 지금 인터넷에 쫙 퍼졌는데 뭘 계속 감춰요. 다들 유진 씨 부럽다고 난리에요. 하지만 조심해요. 아직도 많은 여자들이 호시탐탐 강현수 씨 노리고 있으니까.”임유진은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강현수와 뭔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여자 동료는 임유진이 뭐라 묻기 전에 호호 웃으며 탕비실을 나가버렸다.이에 임유진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인터넷을 보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하지만 그때 탕비실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임유진이 고개를 들어보자 그 누군가는 바로 정한나였다.정한나는 요즘 사무실에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다니며 동료들과는 말 한마디도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지난번 세리나에게 폭행당한 영상이 공개된 후 그녀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음에도 다른 남자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한나는 남자친구에게 대차게 차인 건 물론이고 사무실 직원들에게서도 야유와 조롱을 받게 되었다.심지어 그 일로 정한나는 상사에게 불려가기도 했었다.당장 자르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재계약은 아무래도 어려울 듯 보였다.정한나는 이미 한번 다른 곳에서 쫓겨난 전적이 있었기에 계약이 끝나게 되면 더는 이 업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정한나가 다시는 이런 행동도 말도 못 하게 겁을 줄 필요가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정한나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어버렸다.“한나 씨 말대로 현수 씨와 결혼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한나 씨 하나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정한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만약 임유진이 정말 강현수에게 부탁하게 되면 강현수는 아마 100%의 확률로 그 부탁을 들어주게 될 테니까.아니, 어쩌면 부탁할 필요도 없이 방금 그 녹음 하나로 당장 움직여 줄지도 모른다.지금도 최악인데 만약 강현수 쪽으로부터 압박이 들어오게 되면 아마 그녀는 더 이상 S 시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될 것이다.정한나는 생각으로 벌써 몸이 덜덜 떨렸다.임유진은 그런 그녀를 힐끔 보더니 커피를 들고 유유하게 탕비실을 나왔다.그리고 자리에 앉아 이제 일을 시작하려는데 한지영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유진아, 너 강현수 씨랑 사귀어?!][??]또다시 강현수의 이름이 나왔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다들 이러는 걸까.그때 한지영이 또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아니라고? 그럼 이 동영상은 뭔데?]한지영은 말을 보내고 난 후 문제의 동영상도 바로 뒤이어 보냈다.임유진은 그 영상을 클릭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영상은 버스 안에서 찍힌 것이었고 등장인물은 그녀와 강현수였다.촬영 각도로 봤을 때 해당 영상을 찍은 사람은 그들 뒤쪽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문제의 영상 속에는 강현수가 그녀의 머리와 버스 창문 가운데 손을 넣고 그녀의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조심스럽게 감싸주는 모습이 찍혔다.그리고 제일 문제가 되는 건 강현수의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린 채 임유진만 보는 그 시선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시선이었다.이... 이게 뭐지?임유진은 영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잠깐 넋을 잃었다.그러다 한지영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임유진은 메시지를 보낸 후 채팅방에서 나와 인터넷을 확인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해당 영상은 벌써 인기 동영상에 올라 있었고 댓글도 수없이 많이 달렸다. 댓글 중에는 강현수를 데리고 버스에 탄 첫 번째 여자라면서 임유진이 신기한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이에 임유진은 기가 막히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처음에는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제껏 이런 스캔들보다 더한 기사들도 많았었기에 시간이 지나면 네티즌들도 잠잠해지리라 생각했다.그래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일로 직접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유진 씨 혹시 현수랑 사귀어요?”임유진을 찾아온 건 이한이었다.이한은 임유진과 몇 번 만난 적 있었고 그는 강지혁과 강현수의 친한 친구이자 S 시에서 유명한 재벌가의 아들이다.“빨리 얘기해봐요. 사귀어요?”이한은 다급한 얼굴로 그녀에게 답을 요구했다.“제가 꼭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요? 이건 제 사생활이에요.”임유진의 말에 이한은 머리가 아파 났다.그는 오늘 아침 해당 영상을 보고는 기겁하며 하마터면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임유진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했는지 바로 코앞에서 보았었기 때문이다.물론 고이준에게서 얼마 전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리는 이미 전해 들었다.하지만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던 강지혁이 요즘은 수상할 정도로 매일 밤 골드 클럽에 얼굴을 내비치고 클럽에 와서는 기이한 행동만 골라 했다.그래서 이한은 이 모든 것이 임유진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오늘 임유진과 강현수가 사귀는 것 같은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게 된 것이다.이한은 이 영상을 만약 강지혁이 보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아니, 어쩌면 이미 다 봤을지도 모른다.이한은 임유진에게로 오기 전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일에 관해 물었었다. 하지만 이에 강현수는 임유진과 똑같이 ‘내가 꼭 대답해야 해?’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