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그거 먹고 떨어지라고?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냐?”장이경은 배여진을 아래위로 훑더니 변태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보다 너 많이 예뻐졌다? 강현수가 너한테 잘해주나 봐?”“됐고, 또 뭣 때문에 온 거야?”배여진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장이경은 얼마 전 배여진을 찾아와 돈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돈을 주지 않으면 배여진의 사진들을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협박했다.그녀의 사진이라는 건 강현수를 만나기 전 화장기 없이 후줄근한 상태로 찍은 사진과 장이경과 찍었던 스킨십 사진이었다.만약 그 사진들이 인터넷에 떠돌게 되면 바로 강현수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톱스타가 되겠다는 그의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다.그렇기에 배여진은 어쩔 수 없이 장이경에게 돈을 줌으로써 사진 원본을 사들였다.그렇게 일이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장이경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그녀를 찾아왔고 매번 다른 사진들을 가져와 협박해댔다.“뭣 때문에 왔는지 다 알고 있잖아. 돈 내놔.”장이경은 아주 당당하게 돈을 요구했다.이에 배여진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100억 줄 테니까 갖고 있는 사진 다 내놔. 만약 그 뒤로 또 찾아오면 그때는 현수 씨한테 다 말하고 널 처리해 버리라 할 거야. 나는 너한테 평생 돈 뜯기는 것보다 차라리 현수 씨가 그 사진들을 보는 게 나으니까!”장이경은 미간을 찌푸렸다.이 사실이 강현수의 귀에 들어가면 좋은 게 하나 없었다.‘뭐 100억이면 충분하지. 내가 언제 또 100억을 만져보겠어.’“좋아, 그렇게 할게.”“그럼 일단 나한테 일주일만 시간을 줘. 돈 준비해서 바로 연락할게.”장이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일주일 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거짓말이면 가만 안 둬.”배여진은 장이경이 떠난 후 씩씩대며 발을 동동 굴렀다.“장이경을 하루빨리 처리해야겠어! 이대로 계속 놔둬서는 안 돼. 저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나한테 해를 끼치고 말 거야! 그리고...”그녀는 손톱을
공수진은 팔짱을 낀 채 탁유미와 윤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그들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 질투심이 가득 어려있었다.공수진은 탁유미가 감방에서 아이까지 낳았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그리고 그 탓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공수진은 지금 어쩔 수 없이 탁유미의 아이를 대신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유미 씨, 오랜만이에요.”공수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경빈 씨한테 들었어요. 윤이가 경빈 씨 아들이라면서요? 이렇게 된 거 나도 앞으로 윤이를 내 아이처럼 생각할게요.”공수진은 말을 마치고 등 뒤에 있는 기사에게 손짓을 건넸다.그러자 기사가 차에서 여러 가지 장난감 세트를 들고 걸어왔다.“이건 내가 윤이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사양하지 말고 받아요. 어디 사는지 몰라서 이렇게 직접 유치원으로 찾아왔어요.”공수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탁유미의 눈에 그 미소는 섬뜩하지 그지없었다.그때도 공수진은 이렇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그러고는 탁유미가 잠깐 눈을 돌린 사이 갑자기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여기는 왜 온 거지? 무슨 짓을 하려고?’탁유미는 본능적으로 윤이를 자기 뒤로 숨겼다.“목적이 뭐야?”탁유미는 잔뜩 경계한 채로 물었다.“목적이라뇨. 나는 그저 윤이한테 잘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경빈 씨 아들이면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조만간 정식으로 내 아들이 되기도 할 거고요.”공수진은 생글생글 웃었다.“윤이가 네 아들이 되는 날은 절대 오지 않아!”탁유미가 그녀를 노려보며 외쳤다.윤이를 어떻게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여자의 아들로 살게 할 수 있겠는가!탁유미는 마치 공수진이 아이를 유괴하려는 유괴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윤이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아파요.”윤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이는 탁유미가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리고 왜 공수진이 자신을 그녀의 아들이 될 거라고 하는지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탁유미는 윤이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세게 잡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화가 난 것이다.윤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에서 감방에 간 사람들은 전부 다 악당들이었다.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엄마가 악당들이나 가는 감방에 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공수진은 시선을 내려 윤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빛에는 분노와 경멸이 담겨있었다.특히 탁유미와 닮은 아이의 두 눈은 지금 당장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너희 엄마한테 직접 물어봐.”공수진은 다시 시선을 돌려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설마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죠?”탁유미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공수진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하는 윤이의 얼굴을 보면서 탁유미는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공수진 씨는 시간이 남아도나 보네요?”그때 임유진이 끼어들며 탁유미의 옆에 섰다.“전에 유미 언니 장사 망치려고 깡패들을 보냈었죠? 공씨 가문은 그런 세력과도 친분이 있나 봅니다? 요즘 깡패들 소탕한다고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인력을 투입했던데 행여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다는 걸 들키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안 그러면 공수진 씨뿐만 아니라 공씨 집안사람들 모두 감방에 갈지도 모르니까요.”공수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난 또 누구라고. 또 그쪽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쪽도 감방살이하다 나왔죠? 하하, 끼리끼리라더니 감방 동지들끼리 우애가 아주 깊나 보네요.”지난번 파티에서 임유진과 만난 뒤로 공수진은 바로 사람을 시켜 임유진의 뒷조사를 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저 감방살이하다 나온 거 맞아요. 하지만 그건 누명을 쓴 거였고 이미 재판부에서는 저한테 결백하다는 판결을 다시 내려 줬어요. 저한테 누명을 씌운 진정한 가해자는 이제라도 법의 심판을 받게 됐고요. 한번 억울하게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유미 언니도 누군가의 계략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공수진 씨도 그 사건에는 엮여있죠? 혹시 공수진 씨가 언니를 음해한 건 아니에요?”공수
“아까 그 이모 나쁜 사람이에요?”윤이가 물었다.“그리고 그 이모는 왜 엄마랑 유진이 이모가 다 감방에 갔다고 그래요?”탁유미는 윤이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 입만 달싹거렸다.그때 임유진이 윤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차근차근 얘기해주었다.“윤이야, 감방에 갔다고 해서 다 나쁜 사람인 건 아니야. 이모도 감방에 갔다 왔지만 그건 이모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나쁜 사람이 자기가 한 잘못을 이모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해서 그렇게 된 거야. 하지만 얼마 전에 진짜로 나쁜 사람이 잡혔고 이모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어.”윤이는 그녀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모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진짜로 나쁜 사람은 결국 잡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이내 배시시 웃었다.“그럼 엄마는요? 엄마도 이모처럼 아무런 죄도 없는데 감방에 들어간 거예요?”윤이는 고개를 돌려 탁유미를 바라보며 물었다.탁유미는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켰다.그 사건에 관련해서는 줄곧 애써 외면하려고 했었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였다.탁유미는 윤이가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을 그저 좀 더 빨리 알게 될 뿐이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윤이야, 엄마는 죄를 지은 적이 없어. 이건 맹세할 수 있어. 아까 그 이모가 한 얘기는 전부 다 거짓말이야. 엄마는 그 이모를 다치게 한 적이 없어.”탁유미를 쏙 빼닮은 윤이의 눈이 두어 번 깜빡거렸다.윤이는 탁유미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응, 윤이는 엄마 믿어요!”윤이는 아직 어리기에 탁유미의 입에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충분했다.탁유미는 아들의 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그녀는 여태 자신이 감방살이한 것에 대해서 타인이 뭐라고 하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사실이 아니니 자신만 하늘 우러러 부끄럼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윤이에게는 말해주기 싫었다. 아무리 죄가 없다고는 해도 윤이에게는 말해주기 싫었다. 자격 없는 엄마가 되기 싫었고 윤이에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윤이는
“언니도 나 힘들 때 손 내밀어 줬잖아요. 그래서 나도 그 은혜에 보답하는 거예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정말 탁유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그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특히 탁유미의 사건은 이미 5년도 지난 사건이라 아직도 유력한 증거가 남아있을지 미지수였다.임유진은 사건을 생각하다 문득 강지혁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결백을 돌려준 사람이 바로 강지혁이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쩌면 아직도 교통사고 가해자라는 죄를 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임유진, 생각하지 마! 너랑 강지혁은 이제 다 끝났어! 그러니까 생각하지 마!’임유진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강지혁의 생각을 털어버렸다.그 시각 윤이는 창가 옆 의자에 올라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탁유미 쪽이었다.“윤이 엄마 보는 거야?”옆에 있던 탁유미 엄마가 물었다.“네.”윤이는 임유진과 인사하고 포장마차 거리로 향하는 탁유미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탁유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엄마, 윤이가 꼭 엄마 지켜줄게요. 엄마가 감방에 갔다고 해도,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윤이는 엄마 지켜줄 거예요. 윤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니까 꼭 지켜줄 거예요!’...임유진은 탁유미와 헤어진 후 바로 로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차정훈이 다가와 그녀에게 USB를 하나 건넸다.“이거 배여진 씨가 오늘 오전 놓고 간 물건이에요. 급히 이걸 써야 하니 유진 씨한테 지금 바로 가져다 달라고 전화가 왔어요.”“저한테요?”임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네, 다른 일 없으면 지금 바로 가져다주세요.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요.”임유진은 차정훈에게서 검은색의 작은 USB를 건네받았다.“오전에 상담할 때 언니가 이걸 썼어요?”임유진이 물었다.“아니요. 필요한 건 배여진 씨가 휴대폰으로 보여줘서 따로 USB를 쓰지는 않았어요.”차정훈을 말을 마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임유진은
임유진은 현장 스태프 쪽으로 가 배여진에게 USB를 주기 위해 왔다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인파를 뚫고 배우들 대기실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배여진은 지금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고 아직 옷은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현재 입고 있는 옷들은 전부 다 브랜드 옷이었고 그것도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옷들이었다. 자신이 브랜드 옷을 입었다는 것을 남들이 모를 수 없게 하려고 작정한 듯이 말이다.그리고 그녀는 반지와 팔찌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격이 비싼 것들이었다.임유진은 그런 배여진을 보며 새삼 예전의 그녀와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유진아, 왔어?”배여진은 친절한 태도로 그녀를 반겼다.“여기 USB.”임유진은 배여진에게 USB를 건넸다.하지만 배여진은 바로 받는 것이 아닌 시선을 그녀의 뒤로 보내며 말했다.“내가 지금 좀 바빠. 그리고 이따 촬영도 해야 하니까 나 끝날 때까지 저쪽 대기실에서 기다려줄래? 너한테 고소장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거든. 너도 차 변호사님 아래 있으니까 잘 알 거 아니야.”임유진은 USB만 넘겨주고 바로 갈 생각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다 한숨을 쉬며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가 엑스트라 무리 중 한 명을 보고 멈칫했다.그리고 그 상대방도 임유진을 보더니 흠칫하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임유진? 네가 왜 여기 있어?”“두 사람 아는 사이에요?”배여진이 물었다.“네, 알고 있어요! 잘 알죠.”여자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힘 좀 쓸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배여진을 향해 허리도 숙이고 입꼬리도 올리며 꽤 잘 보이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했고 배여진은 강현수와 현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예계 쪽에서는 배여진이 강현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그 소문 때문에 촬영 스태프들은 배여진을 속으로는 깎아내리고 주제를 모른다고 비웃으면서도 앞에서는 여
아니나 다를까, 오영지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두 사람... 감방살이하다 나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변호사 밑에서 일할 수가 있죠...?”그 질문의 대상은 임유진이었다.오영지는 질투 한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출소하고 나서 변호사 밑에서 일하는 임유진에 반해 오영지는 감방에 있을 때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오영지는 같은 감방 동기들 앞에서나 거들먹거렸지 일반 사람들 앞에서는 한껏 허리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주변인들의 시선에 임유진은 익숙한 듯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때, 배여진이 갑자기 나서며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고작 몇 년 옥살이 한 거 가지고 다들 왜 그래요?”배여진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나는 네가 옥살이했든 안 했든 상관없어. 나는 널 절대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아. 너는 내 사촌 동생이잖아. 혹시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임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금세 그녀가 이런 연기를 해대는 이유를 알아챘다.‘사람들 앞에서 착한 사람인 척하고 싶은 거네.’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배여진을 칭찬하기 시작했다.“여진 씨, 정말 착하시다.”“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요. 혹시 모르잖아요.”“맞아요. 감방살이하다 나온 사람들 그렇게 쉽게 믿는 거 아니에요.”그때 평소 배여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여배우 한 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흥, 감방살이하다 나온 사촌 동생이 있다는 걸 강현수 씨는 아나 몰라.”그러자 배여진의 옹호자들이 반박에 나섰다.“감방살이하다 나온 건 여진 씨 사촌 동생이지 여진 씨가 아닌데 여기서 강현수 씨가 왜 나와요.”“그러니까요. 그리고 강현수 씨가 여진 씨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고작 친척 동생 일로 여진 씨를 달리 볼 것 같아요?”배여진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도 그렇고 배여진을 옹호하려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하나같이 임유진이 감방살이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입
뭐가 어떻게 된 거지?!임유진은 서둘러 대기실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잠가놓은 것이다.‘설마 배여진이 꾸민 일인 건가?!’그때 장이경이 임유진 쪽으로 달려들었다.대기실 밖.배여진은 지금 평온한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심장은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다.‘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야 하는데.’배여진은 임유진이 이곳으로 오기 전 장이경을 이곳으로 불러내 그에게 약을 탄 음료를 건네며 방금 임유진이 들어간 대기실 천막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이에 장이경이 굳이 왜 그래야 하냐며 되묻자 배여진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고 아무래도 이건 돈거래이니 은밀히 하는 것이 좋다는 핑계를 댔다.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닌 걸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장이경은 돈에 눈이 멀어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배여진의 먼저 약을 먹은 장이경을 대기실 안으로 보낸 후 약이 돌 때쯤 임유진을 들여보내 둘이 몸을 섞게 만들고 그 현장을 강현수에게 보여주려는 심산이었다.그렇게 되면 강현수는 가장 먼저 장이경을 처리해버릴 것이고 임유진은 그 일로 개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잘만 하면 임유진을 향한 강현수의 마음을 완전히 접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도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모습을 직관하게 되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게다가 그런 추악한 경력을 달고 있으면 강현수의 부모님이 나서서 임유진을 반대하게 될 게 뻔했다.배여진은 기가 막힌 자신의 계획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때, 촬영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기다란 기럭지의 남자가 배여진 쪽으로 걸어왔다.배여진은 그를 보고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씩 웃었다.‘임유진, 넌 오늘부로 끝이야!’메이크업을 다 받은 배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수를 맞이했다.“현수 씨, 왔어요?”“오늘 촬영에 굳이 내가 있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
“지혁아, 아무리 그래도 너랑 우리랑은 사돈이 될 뻔했던 집안이잖냐. 그간의 정도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진기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진가원 프로젝트는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야. 너희가 가져가봤자 사업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굳이 왜 그걸 가져가려고 해.”“진화 그룹도 이제는 슬슬 무대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잔뜩 긴장한 진기태와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롭다 못해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우리 그간 사업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잘 이어왔잖아. 뭐 서운한 거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얘기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그럼 진화 그룹과 진화 그룹 산하의 모든 회사를 다 저한테로 넘기세요.”강지혁의 말에 진기태의 얼굴이 한순간에 변했다.모든 회사를 다 넘기라니, 그건 헐벗고 거지가 되라는 말과도 같았다.“너...!”진기태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설마...”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하지만 몇 초도 안 돼 아무리 강지혁이 미친놈이라고는 해도 그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멀쩡한 가문 하나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하지만 그거 말고는 강지혁이 갑자기 이러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씨 가문과 강지혁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면 그건 임유진이 감옥에 간 일밖에 없으니까.“너 혹시... 임유진 때문은 아니지?”진기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강지혁은 아주 빠르게 인정했다.“허...!”진기태는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 하나 때문에 이런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하, 하지만 그 일은 그때 세령이가 이미 대가를 치렀잖아!”일전 진세령은 임유진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강지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연예계에서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