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현장 스태프 쪽으로 가 배여진에게 USB를 주기 위해 왔다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인파를 뚫고 배우들 대기실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배여진은 지금 한창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고 아직 옷은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현재 입고 있는 옷들은 전부 다 브랜드 옷이었고 그것도 로고가 크게 박혀 있는 옷들이었다. 자신이 브랜드 옷을 입었다는 것을 남들이 모를 수 없게 하려고 작정한 듯이 말이다.그리고 그녀는 반지와 팔찌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격이 비싼 것들이었다.임유진은 그런 배여진을 보며 새삼 예전의 그녀와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유진아, 왔어?”배여진은 친절한 태도로 그녀를 반겼다.“여기 USB.”임유진은 배여진에게 USB를 건넸다.하지만 배여진은 바로 받는 것이 아닌 시선을 그녀의 뒤로 보내며 말했다.“내가 지금 좀 바빠. 그리고 이따 촬영도 해야 하니까 나 끝날 때까지 저쪽 대기실에서 기다려줄래? 너한테 고소장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거든. 너도 차 변호사님 아래 있으니까 잘 알 거 아니야.”임유진은 USB만 넘겨주고 바로 갈 생각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다 한숨을 쉬며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가 엑스트라 무리 중 한 명을 보고 멈칫했다.그리고 그 상대방도 임유진을 보더니 흠칫하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임유진? 네가 왜 여기 있어?”“두 사람 아는 사이에요?”배여진이 물었다.“네, 알고 있어요! 잘 알죠.”여자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힘 좀 쓸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배여진을 향해 허리도 숙이고 입꼬리도 올리며 꽤 잘 보이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했고 배여진은 강현수와 현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예계 쪽에서는 배여진이 강현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그 소문 때문에 촬영 스태프들은 배여진을 속으로는 깎아내리고 주제를 모른다고 비웃으면서도 앞에서는 여
아니나 다를까, 오영지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두 사람... 감방살이하다 나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변호사 밑에서 일할 수가 있죠...?”그 질문의 대상은 임유진이었다.오영지는 질투 한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출소하고 나서 변호사 밑에서 일하는 임유진에 반해 오영지는 감방에 있을 때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오영지는 같은 감방 동기들 앞에서나 거들먹거렸지 일반 사람들 앞에서는 한껏 허리를 숙이고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주변인들의 시선에 임유진은 익숙한 듯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때, 배여진이 갑자기 나서며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고작 몇 년 옥살이 한 거 가지고 다들 왜 그래요?”배여진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아, 나는 네가 옥살이했든 안 했든 상관없어. 나는 널 절대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아. 너는 내 사촌 동생이잖아. 혹시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임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금세 그녀가 이런 연기를 해대는 이유를 알아챘다.‘사람들 앞에서 착한 사람인 척하고 싶은 거네.’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배여진을 칭찬하기 시작했다.“여진 씨, 정말 착하시다.”“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요. 혹시 모르잖아요.”“맞아요. 감방살이하다 나온 사람들 그렇게 쉽게 믿는 거 아니에요.”그때 평소 배여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여배우 한 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흥, 감방살이하다 나온 사촌 동생이 있다는 걸 강현수 씨는 아나 몰라.”그러자 배여진의 옹호자들이 반박에 나섰다.“감방살이하다 나온 건 여진 씨 사촌 동생이지 여진 씨가 아닌데 여기서 강현수 씨가 왜 나와요.”“그러니까요. 그리고 강현수 씨가 여진 씨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고작 친척 동생 일로 여진 씨를 달리 볼 것 같아요?”배여진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도 그렇고 배여진을 옹호하려는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 하나같이 임유진이 감방살이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입
뭐가 어떻게 된 거지?!임유진은 서둘러 대기실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잠가놓은 것이다.‘설마 배여진이 꾸민 일인 건가?!’그때 장이경이 임유진 쪽으로 달려들었다.대기실 밖.배여진은 지금 평온한 얼굴로 메이크업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심장은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다.‘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야 하는데.’배여진은 임유진이 이곳으로 오기 전 장이경을 이곳으로 불러내 그에게 약을 탄 음료를 건네며 방금 임유진이 들어간 대기실 천막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이에 장이경이 굳이 왜 그래야 하냐며 되묻자 배여진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고 아무래도 이건 돈거래이니 은밀히 하는 것이 좋다는 핑계를 댔다.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닌 걸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장이경은 돈에 눈이 멀어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배여진의 먼저 약을 먹은 장이경을 대기실 안으로 보낸 후 약이 돌 때쯤 임유진을 들여보내 둘이 몸을 섞게 만들고 그 현장을 강현수에게 보여주려는 심산이었다.그렇게 되면 강현수는 가장 먼저 장이경을 처리해버릴 것이고 임유진은 그 일로 개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잘만 하면 임유진을 향한 강현수의 마음을 완전히 접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라도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모습을 직관하게 되면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게다가 그런 추악한 경력을 달고 있으면 강현수의 부모님이 나서서 임유진을 반대하게 될 게 뻔했다.배여진은 기가 막힌 자신의 계획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때, 촬영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고 기다란 기럭지의 남자가 배여진 쪽으로 걸어왔다.배여진은 그를 보고는 드디어 때가 왔다는 듯 씩 웃었다.‘임유진, 넌 오늘부로 끝이야!’메이크업을 다 받은 배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수를 맞이했다.“현수 씨, 왔어요?”“오늘 촬영에 굳이 내가 있
배여진은 짜증이 가득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당, 당연히 그래야죠. 참, 오늘 여기 유진이도 왔어요. 지금 저쪽 대기실에서 나 기다리고 있고요. 조금 있으면 촬영도 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먼저 유진이 만나고 와야겠어요.”배여진은 옆 대기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유진 씨가 여기 있다고?”강현수는 깜짝 놀라며 배여진을 따라갔다.“같이 가.”강현수는 임유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활짝 폈다.사실 그는 임유진의 월세방에서 나온 뒤로 매일 같이 그녀를 찾아가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임유진이 부담스러워할까 봐서였다.그래서 강현수는 요즘 최대한 자중하며 임유진이 마음 정리를 하고 괜찮아질 때까지 그녀를 보러 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배여진은 강현수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그녀는 대기실 문을 열고 나면 크게 비명을 지를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강현수를 포함한 촬영장 스태프들 모두 이쪽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개망신을 당하게 될 테니까!그렇게 두 사람이 거의 대기실 앞에 도착할 무렵, 백화점 밖에서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서더니 이내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다급하게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비켜주세요! 비켜주세요!”구급대원들은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약물 환자 어디 있습니까?!”그 말에 배여진은 어리둥절했다.‘뭐야? 누가 구급차를 부른 거야?’그녀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경찰이 인파를 뚫고 들어오며 물었다.“약물 환자가 있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왔습니다. 임유진 신고자분은 어디 계시죠?”‘임유진이 경찰에 신고했다고?!’배여진은 몸이 굳어버렸다.그녀 옆에 있던 강현수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에 얼굴이 무섭게 변해서는 배여진을 향해 물었다.“유진 씨가 들어간 대기실이 어디야?!”“여... 여기요.”배여진은 다급한 얼굴의 강현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왜 임유진이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 거지? 지금쯤 장이경한테 덮쳐져야 하는데?!’임유진은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얼굴이 강현수라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현수 씨가 여기 왜 있어요?”강현수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임유진 곁으로 다가왔다.“괜찮아요? 별일 없었어요?”“네, 괜찮아요. 그냥...”임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가 그녀의 셔츠 소매 쪽이 살짝 찢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건 왜 이래요?”“아까 손목 잡혔을 때 저 사람 손톱에 살짝 긁혔나 봐요.”임유진은 셔츠 소매가 찢어진 것을 이제야 알아차렸다.강현수는 어두워진 얼굴로 임유진의 셔츠 소매를 위로 살짝 걷어 올렸다. 그러자 장이경에 의해 생긴 붉은색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피가 나거나 멍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강현수의 눈에는 그 흔적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그때, 바닥에 있던 장이경이 갑자기 몸을 뒤집더니 임유진을 향해 기어 왔다.그는 지금 약물에 취해 있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강현수는 그 모습을 보더니 붕대가 감겨 있는 오른손으로 장이경의 멱살을 잡고 왼손 주먹으로 힘껏 장이경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이성을 잃은 듯한 그의 행동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하고 벌렸다.평소 늘 냉정한 얼굴을 하고 흥분이라고는 하지 않던 강현수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때리고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정말 강현수 맞아...?’‘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직접 주먹을 휘두른다고? 그것도 이렇게 잔뜩 흥분해서?’“그만 해요!”임유진은 강현수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이미 지난번 파티장 입구에서 강지혁에게 끌려갔을 당시 고개를 돌려 강현수가 사람을 때리는 모습을 봤었다. 그러니 강현수가 사람을 패는 모습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이 사람 약물에 취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예요.”강현수는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하지
그 말에 강현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는 문은 잠겨있지 않았으니까.“경찰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경찰이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같이 가줄게요.”강현수는 대기실을 나서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괜찮아요. 나 혼자 가도 돼요.”임유진은 괜찮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강현수는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나도 목격자라 같이 가는 게 좋을 거예요.”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임유진은 거절 따위 듣지 않겠다는 듯한 그를 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녀가 동의하든 말든 강현수는 경찰서로 가야만 했다. 그의 말처럼 그는 현장을 목격한 목격자였으니까.강현수는 대기실 밖 인파를 확인하더니 임유진을 자신의 뒤에 세우며 말했다.“내 등 뒤에 딱 붙어서 따라와요. 알겠죠?”“네?”임유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강현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현장 스태프들과 백화점 고객들 그리고 주인공 배우들의 팬까지, 전부 다 강현수와 임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경호원이 바로 강현수와 임유진을 보호해주기는 했지만 극성인 팬들은 그 경호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심지어 누군가는 임유진의 얼굴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그리고 강현수는 임유진을 뒤로 숨긴 채 그들이 그녀의 얼굴을 찍지 못하게 막았다.“고개 들지 말고 나만 따라서 와요.”강현수의 말이 들려오자 임유진은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그리고 이 느낌은 어릴 때 산속에서 헤맸을 당시와 똑같았다.날이 어두워지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당시 강현수는 일단 쉬는 게 좋겠다며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괜찮아.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그리고 졸리면 나한테 기대고 자. 나는 자지 않아도 되니까 네가 자면 내가 망을 볼게. 나는 너보다 담이 커서 안 무서워.”하지만 무섭지 않다고 얘기한 것 치고 그의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임유진은 인파 속을 뚫고 가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
배여진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그때, 대기실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이게 뭐야?”그리고 뒤이어 대기실 안에 있던 현장 스테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이 사진들 뭐야? 웩, 더러워.”‘사진?!’배여진은 그제야 오늘 장이경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사진 거래라는 것이 떠올랐다.그녀는 아까 장이경에게 약이 탄 음료를 준 후 대기실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약 효과가 돌기까지 기다렸다.원래 계획은 장이경과 임유진이 뒤엉켜있는 장면을 강현수와 함께 목격하고 난 뒤 틈을 타 사진을 회수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그녀는 사진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배여진이 서둘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미 장이경이 가져온 사진들이 스태프들 손에 전부 다 들려있었다.그중 누군가가 갑자기 배여진을 힐끔 보고는 옆 사람에게 말했다.“이 여자 배여진 아니야?”“에이, 완전 시골 촌뜨기가 따로 없는데 설마...”“배여진 맞는 것 같은데? 잠깐, 여기 배여진이 뽀뽀한 사진 속 남자... 아까 구급대원들이 데리고 간 그 남자 아니야?”배여진은 분노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장이경까지 불러서 임유진에게 개망신을 주려고 했던 계획은 보기 좋게 어그러지고 되레 그녀가 개망신을 당하게 되었다.‘임유진! 진짜 죽여버릴 거야!’그 시각 현장에 있던 또 한 명의 여자 역시 몸을 덜덜 떨었다.오지영은 그녀가 감방에서 그렇게도 괴롭혔던 임유진이 지금 강현수의 보호 하래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아까 그 장면은 누가 봐도 강현수가 임유진을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임유진은 감방까지 갔다 왔는데 어떻게 강현수랑 같이 있을 수가 있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오지영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상황을 되짚어 보다가 문득 무서운 사실이 하나가 떠올랐다.‘설마 임유진 그게 강현수한테 감방에서 나한테 괴롭힘당했다는 거 다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강현수가 대신 복수해주겠다고 나서면 어떡하지?!’
임유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진지한 강현수의 표정을 보고는 거절하려는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그에게서 다시 돌려받은 휴대폰이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졌다.“집으로 데려다줄게요. 그리고 오늘 일은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무조건 알아낼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경찰분들이 조사하겠다고 했잖아요. 걱정 안 해요.”“경찰한테 맡기기만 할 수는 없어요.”강현수는 임유진에게 해가 될 만한 사람은 싹 다 제거하겠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유진 씨한테 해를 끼친 사람은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임유진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그를 보며 물었다.“나를 해치려는 사람이 여진 언니라고 해도요?”이에 강현수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솔직히 그는 그 가능성만큼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다른 사람에게는 망설임 없이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지만 배여진에게는 아니었다. 배여진은 강현수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리워한 상대이기도 하고 어릴 적 그의 목숨을 구해준 여자이기도 하기에 강현수는 배여진에게 사랑은 약속하지 못해도 앞으로의 평탄한 생활은 보장해주고 싶었다.임유진은 복잡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못 들은 거로 해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다시 경찰서 밖으로 걸어갔다.임유진은 현재 한쪽 운동화에 신발 끈이 없어 걸음걸이가 조금 느렸다. 그러다 경찰서 밖 계단을 내려갈 때 다리를 드는 순간 신발 끈이 없는 운동화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아!”임유진이 빠르게 내려가 신발을 주우려는 찰나 강현수가 그녀보다 더 빨리 움직여 신발을 주웠다.그러고는 다시 임유진의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발 앞에 신발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임유진이 발을 넣으려고 할 때 강현수는 편히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을 바닥에 고정해주었다.“고마워요.”강현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이대로 가면 몇 번이고 신발이 날아가고 말 거예요.”그는 말을 마치고는 임유진이 뭐라 답변하려는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유진의 상처받은 눈빛과 아프게 내뱉은 모든 말이 그에게는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헉!”어두운 저녁, 강지혁은 악몽에서 깨듯 눈을 번쩍 떴다.한숨 잤는데도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강지혁은 이를 꽉 깨문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너무나도 괴로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옆에 누워있는 그녀가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오늘 많이 피곤했던 건지 평소보다 깊게 잠이 들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강지혁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는 안간힘을 쓰며 옆방과 연결된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다시 닫은 후 그는 힘이 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분명히 아픈 건 머리뿐이어야 하는데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일전 박건태가 말했던 것처럼 강지혁은 쉽게 기억을 떠올리고 빠르게 기억을 찾아가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두통을 느끼며 아주 힘겹게 기억을 되찾고 있었다.임유진 때문에 고통이 전보다 더할 거라는 건 이미 인지한 바 있지만 이렇게도 통증이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머리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지혁은 지금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쥔 채 아주 미약한 흐느낌만 내고 있었다.소리를 키우면 임유진이 깰 수도 있으니 꼭 참고 있었다.강지혁은 자꾸만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렇게 아픈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임유진.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며 그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그 시각 임유진은 강지혁의 흐느낌 소리도 그가 아파하는 것도 그 무엇하나 느끼지 못한 채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
“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내 말 들려? 눈 좀 떠봐!”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에 어둠이 천천히 걷혔다.강지혁은 고통의 감정이 서서히 사라짐과 동시에 누군가가 관자놀이 쪽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 뒤덮인 임유진의 얼굴이 보였다.“머리가 아픈 거지?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집사님한테 전화해서 지난번에 저택으로 왔었던 의사를 부르라고 할까?”강지혁은 임유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그의 이마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과거의 나는 대체 널 얼마나 많이 사랑했던 걸까? 왜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살기 싫다는 감정부터 들었을까?’전에는 기억이 떠올라도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관점으로 그저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만 들 뿐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그 일을 그대로 겪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워 정신이 다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사랑해야 이런 느낌이 들 수가 있는 거지?“혁아, 내 말 들려? 나 보여?”아무런 대답도 없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조금 심각한 얼굴로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따뜻한 손이다. 차디찬 유골함 따위가 아닌 매우 따뜻한 손이다.강지혁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으스러질 듯이 임유진을 꽉 끌어안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널 얼마만큼 사랑했는지 한번 얘기해봐.”간절하고도 유약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얘기해주었다.“많이, 아주 많이 사랑했어. 혁이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었어.”아직 절벽에서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이준이 해줬던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이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
“그래.”강지혁은 임유진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는 아주 잠깐 시선을 돌려 백연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백연신의 얼굴에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니, 이건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분명히 살아있는데도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다.강지혁은 그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머릿속으로 기억의 파편이 빠르게 스쳐 가는 게 느껴졌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갑자기 멈춘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났다.차에 오른 후, 강지혁은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곧바로 두 눈을 감았다.“많이 피곤해?”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려 퍼졌다.“조금.”“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30분 정도 걸려야 하니까.”임유진이 말했다.강지혁은 편히 쉬기 위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고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아까 봤던 백연신의 얼굴만 떠올랐다.그 언젠가 자신 역시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언제?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이 있었나?그때 웬 장면 하나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아주 정확하게 보였다.기억의 파편 속 그는 웬 유골함을 껴안은 채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절망이 그대로 담긴 울음소리는 꼭 이대로 목숨마저 포기하려는 사람 같았다.“왜 내가 아닌 건데? 왜 네가...!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사람도 나고 죽어야 할 사람도 난데 왜 네가 죽어버린 거냐고! 아아악!!”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왜 울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이건 임유진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인 건가? 임유진이 죽었다고 생각해 이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해외로 다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새 프로젝트 시작했다며.”이한이 물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으려고.”강현수가 답했다.5년이나 지났음에도 임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강지혁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떠날 수가 없었다. 방금처럼 그저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으니 그저 곁에 있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한은 강현수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뒤돌면 해외로 가 있던 놈이 갑자기 해외 스케줄을 취소했다는 건 물어보나 마나 임유진 때문일 게 분명했다.사실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이제 그만 임유진을 잊으라고는 했지만 만날 때마다 점점 야위어가는 강현수를 보고 있자니 이한은 이제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임유진이 돌아온 이상 강지혁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즉 강현수에게는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임유진은 강지혁과 함께 간단하게 디저트로 배를 채운 후 홀로 테라스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마침 백연신이 넋을 잃은 얼굴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오늘은 만월이라 평소보다 달빛이 조금 더 강한 듯한 느낌이었다.백연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인기척 소리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왜 혼자예요?”“혁이는 지금 사업 얘기로 한창이라 혼자 왔어요.”임유진이 답했다.“그러는 백연신 씨야말로 왜 혼자예요? 고은채 씨는요?”“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이내 백연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지영이는 백연신 씨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둘이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도 늘 백연신 씨와는 가치관이 달라 헤어진 것뿐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건 아니라고 했어요. 백연신 씨는 그저 사랑과 사업 중에서 사업을 택한 것뿐이라면서.”임유진의 말에 백연신은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저도 모르게 꽉 말아쥐었다.“지영이는 백연신 씨와 헤어지고서 나서 단 한 번도 백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
정다연은 볼을 감싼 채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인태를 바라보았다.“아빠,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나는...”“입 다물라고 했지! 네가 뭔데 회장님 걱정을 해?! 그리고 네가 뭐라고 사모님이 사생활을 털어놔?!”정인태는 어렵게 일군 사업이 딸 때문에 한순간에 엎어질까 봐 전례 없는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이미 일은 엎질러졌고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며칠 전에 얘기했던 계약 건은 아무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강지혁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정인태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지혁은 얘기를 다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발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응, 괜찮아졌어.”“배는 안 고파? 저쪽으로 가서 뭐 좀 먹을까?”“응, 그러자.”아침에 눈을 뜨고서부터 줄곧 온 신경을 파티에 쏟아부었던 터라 안 그래도 허기가 느껴졌던 참이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은 채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난 후 정인태는 곧바로 또 한 번 딸의 뺨을 내리쳤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은 망했어! 이런 멍청한 것!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정다연은 두 뺨이 빨갛게 부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몇 분도 안 돼 온데간데없어졌다.상황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볼 장 다 봤다는 듯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5년 만에 돌아온 안주인이라고는 하나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이 사랑하는 아내라는 것을 말이다.고은채는 가만히 옆에서 소란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연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임유진 씨 능력 좋은데요? 5년이나 지났는데도 강지혁 씨의 마음을 꽉 잡고 있고. 정 회장 가문은 조만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겠네요. 협력해줄 회사가 아무도 없을 테니까.”“고은채, 너는 사랑이 뭔지 몰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내가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연신 씨한테 5년이라는
정다연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헙 하고 들이켰다.“얘기는 다 끝났어?”임유진이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응.”강지혁은 조금 더 걸어와 임유진의 앞에 섰다.“무슨 소란인 건데?”“다른 건 아니고 여기 정다연 씨가 내가 변호사인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얘기를 하던 중이었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강지혁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사실 늘 파티장에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는 부류들이 있기에 만약 그것들이 임유진에게 뭐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호되게 갚아줄 심산이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임유진은 누군가가 괴롭힌다고 해서 쉽게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도리어 침착하게 말로 제압하는 당찬 여자였다.정다연은 임유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회, 회장님, 오해예요. 사모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는 그저 사모님이 여러모로 오해를 받고 있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난 5년간 어떻게 사셨는지 얘기해 달라고 한 것뿐이었어요! 다른 뜻은 절대 없었어요!”“오해?”강지혁의 차가운 시선이 정다연의 얼굴에 고정됐다.“그럼 누가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어디 한번 들어볼까?”당연하게도 그의 질문에 나서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저... 저는 정말 아까 사람들이 다 오해하고 궁금해하길래... 그래서 대신 물은 거예요. 저, 정말 악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믿어주세요...”정다연은 지금 식은땀이 다 났다. 아무리 강지혁이 욕심났어도 끝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네가 뭔데 사람들을 대변해 내 와이프의 지난 5년간을 묻지? 우리 집 일에 간섭도 다 하고 정씨 가문도 꽤 심심한가 봐?”강지혁은 상대가 어리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정다연은 다리가 풀리는 느낌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다시 중심을 잡았다.그때 50대 중후반 정도로 돼 보이는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름 아닌 정다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