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는 많이 친한가 봐요?”가는 길,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강현수가 그런 작은 의원의 의사 선생님과 친하다는 것이 꽤 의외였다.“알고 지낸 지 오래됐어요. 여진이랑 산에서 내려올 때 다리가 골절됐었거든요.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봤지만 치료는 할 수 있어도 후유증이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엄마가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해서 소 선생님께 치료받게 됐어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골절이요?”“네. 3개월 정도 치료하고 그제야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게 됐어요.”골절이 있었다고? 혹시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다쳤던 건가?임유진은 속으로 그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절벽에서 그를 끌어올리고 난 후부터 강현수는 확실히 걷지 못했었다. 그때는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그저 엄살을 부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골절이었을 줄이야...산에서 내려올 때까지도 그는 한 번도 다리를 다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등에 업힌 채로 미안하다는 말만 줄곧 내뱉었었다.“그때... 많이 아팠어요?”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주며 물었다.강현수는 그녀 쪽을 힐끔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엄청 많이 아팠어요. 그때는 그게 평생 겪을 고통 중에서 제일 큰 고통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그런데 뭐요?”임유진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말을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강현수는 말해주지 않았다.물리적 고통이 제일 큰 고통인 줄 알았지만 그 여자아이를 찾지 못한 것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이대로 찾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만큼 그렇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그러나 막상 배여진을 만나고 나니 그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은 온데간데없었고 상상과는 많이 다른 그녀의 모습에 이유 모를 실망감만 남았다.그는 요즘 어쩌면 그저 그리움일 때가 더 나은 인연도 있다는
역시 그간 너무 많은 여자친구를 만났던 게 독이었을까? 그래서 모든 행동이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임유진은 그가 여자친구를 바꾸는 것에 회의적이었고 누군가를 정말 그리워한다면 대체품들은 결국 소용이 없을 거라고 일침을 놓기도 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간의 행적을 그대로 돌려받는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강현수는 이제껏 누군가를 이토록 원한 적이 없고 누군가의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적이 없다.전부 다 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언제나 수포가 되고야 말았다.그는 임유진을 원하고 있다. 강지혁과 척을 지는 일이 있다고 한다 해도 말이다.그때 고통스러운 신음이 치료실 안에서 들려왔다.강현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바로 세우더니 치료실 문을 활짝 열었다.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소영훈이 손에 들린 침으로 임유진의 손등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강현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가 천천히 관자놀이 쪽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졌다.그녀의 다른 한쪽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어떻게든 고통을 참아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치료과정 전반이 다 고통스러울 거라는 소영훈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평소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그런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소영훈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나게 아픈 것이 틀림없다.하지만 임유진은 아까의 신음을 끝으로 한 번도 소리 내지 않았다.강현수는 드라마 촬영이나 영화 촬영 중에 고통을 참는 여자의 얼굴은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심지어 어떤 여자들은 그의 시선을 끌기 위해 조그마한 상처에도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연약한 척 안겨 왔었다.그 모습들을 다 보아왔음에도 임유진이 고통을 참는 모습은 이상하게 마음이 쿡쿡 찔리듯 아파 왔다.강현수는 소영훈이 이제 막 다른 침을 놓으려고 할 때 임유진에게로 걸어가 그녀의 꽉 쥔 주먹을 자신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임유진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오늘은 여기서 끝이라는 소영훈의 말이 들려왔다.손등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도 한결 가라앉았다.임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시선 바로 앞에 강현수의 팔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손이 여전히 그의 팔 위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미안해요!”임유진을 손을 빠르게 거두어들이며 사과했다.“괜찮아요. 내가 잡으라고 했잖아요.”강현수는 아무렇지 않게 팔을 거두어들였다.“다음 주에 다시 오세요.”소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3시간 동안 물에 닿지 않지 않도록 조심하고 무거운 물건도 들지 마세요.”“네, 수고하셨습니다.”밖으로 나온 뒤 강현수가 그녀에게 말했다.“데려다줄게요.”“음...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임유진이 뒤돌아 떠나려고 하자 강현수는 다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그냥 데려다주려는 것뿐이에요. 나 받아달라고 안 할 테니까 너무 나 피할 필요 없어요.”“그게 아니라 이 이상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임유진은 그의 팔을 밀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밀어낸 순간 그가 팔을 움찔하고 떨었다.방금 세게 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강현수의 팔 쪽을 바라보았다.오늘 그는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손목 좀 더 윗부분에 언뜻 빨간색이 보였다.임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그의 셔츠 소매를 위로 확 걷어 올렸다. 그러자 자잘한 상처가 그대로 드러났다.그의 팔에는 할퀸 자국도 있었고 손톱이 깊게 파고든 자국도 있었다. 그리고 상처마다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임유진은 아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를 꽉 잡았던 게 생각이 났다. 그리고 기억은 안 나지만 할퀸 적도 있었던 것 같았다.“미... 미안해요.”“아까도 말했지만 먼저 잡으라고 한 건 나였어요. 그러니까 그런 미안한 표정 짓지 않아도 돼요.”강현수는 태연한 얼굴로 셔츠 소매를 내려 상처를 가렸다.“껍질 좀 까졌다고 안 죽어요.”그가 괜
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매가 살짝 휘어진 채 까만 눈동자로 올곧게 쳐다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찡하며 코가 시큰해졌다.‘현수’와 함께 있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걸까? 아니면 그의 말 때문에 감동이라도 받은 걸까?전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힘든 일도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옆에서 그 고통을 분담해주겠다고 한다.“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에요.”그가 이렇게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시간 낭비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예요.”강현수는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나는 내 행동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임유진은 순간 누군가가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강현수의 차량이 천천히 임유진의 집 앞에 멈춰 섰다.임유진이 차에서 내린 후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더 이상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야 비로소 시선을 내려 자신의 오른팔에 있는 밴드를 바라보았다.“유진아...”강현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가 붙여준 밴드 위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그의 마음을 이렇게도 뒤흔드는 여자는 임유진이 처음이다.그는 그녀가 주는 상처 또한 소중해 마지않았다.“언젠가 나도 사랑해줄 거지?”강현수는 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애절한 고백을 조용히 읊조렸다.그에게 있어 여자란 언제든지,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구애라는 걸 굳이 하지 않아도 달라붙는 여자들이 태반이라 이토록 애가 닳는 기분은 처음이었다.임유진이라는 여자가 주는 사랑 속에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은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다.한참을 멈춰있던 차량은 드디어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졌다.강현수는 시동을 건 후 사이드미러를 통해 어딘가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강현수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
임원진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하나같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그렇게 피를 말리는 10분이 흐르고 강지혁은 드디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임원진들을 향해 냉랭하게 말을 내뱉었다.“계속하지.”임원진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토론을 이어갔다. 그들은 행여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고이준은 어두운 강지혁의 얼굴색을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지혁이 메시지로 무엇을 받았는지 옆에서 전부 다 봤던 터라 골치가 아팠다.‘대체 강현수와 임유진이 함께 있는 사진은 왜 보낸 거야! 그렇게도 눈치가 없나?’게다가 차라리 평범한 사진이었다면 말도 안 하겠지만 경호원들은 강현수와 임유진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사진들만 골라서 보냈다.특히 임유진이 강현수의 팔을 잡고 밴드를 붙여주는 사진과 두 사람이 서로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진은 구도와 주변 풍경도 완벽해 정말 영화 한 장면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이준은 앞으로 임유진의 경호원은 눈치가 있고 사진도 예쁘게 찍지 않는 사람들로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지금은 강지혁이 제발 화내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유진아, 네 생각이 맞았어. 그 양아치들을 누가 고용한 게 맞았다고!”한지영은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백연신이 알아낸 정보를 알려주었다.임유진은 그녀의 말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들 고용한 사람이 누군지 한번 맞춰봐.”한지영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이경빈 쪽이 아니면 공수진 쪽일 텐데... 내 생각에는 공수진 쪽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이경빈이 탁유미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건 맞지만 고작 이런 식으로 복수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그라면 조금 더 확실하고 더 지독하게 탁유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공수진이 더 유력했다.“너... 너 어떻게 알았어?”한지영은 생각지도 못한 정답에 말까지 더듬었다.“이건 이경빈보다는 공수진이 할 법한 짓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임유
한창 바삐 일하고 있던 탁유미는 임유진을 발견하더니 활짝 웃었다.“유진 씨, 어떻게 왔어요?”“저녁에는 일도 없고 언니 얼굴 보려고요. 요즘은 좀 어때요? 지난번처럼 행패 부리는 사람들 없어요?”그 말에 탁유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그러자 임유진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또 누가 왔어요?”“그 뒤로 또 찾아와서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요. 요 며칠은 경찰분들이 이 근처를 순찰해주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탁유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아치 몇 명이 포장마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흉악한 얼굴로 손님들을 쫓아냈다. 그러고는 떡볶이 1인분을 시키더니 한사람이 한 테이블을 차지해버렸다.총 네 테이블 정도밖에 없는 것을 그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 다른 손님들은 다가올 수조차 없었다.가끔 혼자 온 손님이 합석 제안을 해도 쌍욕을 늘어놓으며 쫓아내기 일쑤였다.그 모습을 본 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제는 저렇게 장사를 방해하고 있어요?”탁유미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네... 지금은 가끔 오는 포장 손님들밖에 못 받아요. 일부러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서 경찰분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대요. 아니면 장소를 아예 바꿔보려고요.”이제는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은 공수진이 분명했다.이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이제는 공수진을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녀는 S 시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해성시로 찾아간다고 해도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다음날, 임유진은 출근해서도 줄곧 탁유미의 일만 생각했다.그러다 점심시간이 되고 동료들 몇 명이 모여 오늘 밤 있을 연예계 자선 파티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들려왔다.임유진도 얼마 전 그런 기사가 올라온 것을 얼핏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연예계 쪽 일이라 그녀와는 큰 접점이 없었기에 금방 다시 스크롤을 내리고 말았다.그때 동료 중 한 명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이번 파티에 이강 그룹 대표랑 그 약혼녀도 함께 참석한다고 한
강현수는 임유진이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줄곧 그와는 선을 그으려고 했었던 그녀였으니까.그리고 찾아온 목적을 듣고는 더더욱 고개를 갸웃했다.“오늘 저녁에 있을 자선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고요?”“네, 안 될까요?”“안될 건 없죠. 그런데 갑자기 파티에 가겠다고 이렇게 부탁하는 이유는 들어보고 싶은데요? 연예인 보려고 가는 건 아닐 테고.”오늘 있을 파티에는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하기에 덕질이 취미인 재벌 2, 3세들이 팬심으로 많이 참석할 예정이다.물론 임유진이 연예인 덕질을 하겠다고 해도 도와줄 수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인을 받아온다든지 그 연예인과 같이 밥을 먹는다든지 그에게 있어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이경빈 씨와 공수진 씨를 만나고 싶어요. 두 사람이 이 파티에 참석한다고 들었거든요.”“그 두 사람을요?”강현수가 의문 섞인 얼굴로 물었다.“그 두 사람이 파티에 참석하는 건 맞지만 유진 씨가 왜...”“친한 언니랑 관련된 개인적인 일이라...”임유진은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지는 않았다.“알겠어요. 더 묻지는 않을게요. 음... 지금 시간이 조금 타이트하긴 한데 아마 괜찮을 거예요.”강현수의 말에 그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러다 반 시간 뒤 그제야 시간이 타이트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강현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벤을 준비시키더니 S 시의 제일 유명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샘을 불러 임유진의 메이크업을 맡겼다.“꾸미지 않고 이대로 파티에 참석하면 더 눈에 띄게 될 거예요.”임유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러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편한 복장이 아닌 예쁘게 꾸며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보통은 파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샵을 돌아야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늦어 파티장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수밖에 없다.“날 부려먹는 데는 선수야 아주. 내가 스타일리스트 동생까지 데려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건 그렇고 이쪽은 현수 새 여자친
“정말 현수를 거절했어요?”샘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현수가 바로 앞에 있던 터라 임유진은 이 상황이 어색하고 무척이나 민망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르고 있던 찰나 샘은 다시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현수를 마다하는 여자는 처음 봐요. 우와, 신기해.”“어째 기분 좋아 보인다?”강현수는 팔짱을 낀 채 샘을 흘겨보았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 반응일걸?”베테랑은 베테랑인 건지 샘은 강현수와 얘기를 하면서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메이크업을 완성해 나갔다.차량이 파티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임유진의 메이크업과 스타일링도 전부 마무리가 되었다.“드레스는 네가 준비하는 거 맞지?”샘은 메이크업 도구를 정리하며 물었다.강현수는 줄곧 옆에 있던 큰 쇼핑백을 꺼내 들어 임유진에게 건넸다.“우리는 먼저 내릴 테니까 이거로 갈아입어요. 사이즈는 아마 맞을 겁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사람들을 데리고 벤에서 내렸다.혼자 남겨진 임유진은 쇼핑백 안에 들어있던 선물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드레스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강현수가 준비해둔 드레스는 보라색 드레스로 밑단에는 레이스와 수정으로 된 나비들과 꽃들이 예쁘게 수 놓여있었다.이 드레스는... 어릴 때 그가 그녀에게 얘기해줬던 것과 똑같았다.강현수는 그때 꽃무늬가 있는 보라색 원피스를 그녀에게 선물해주겠다고 했었다.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그 여자아이가 임유진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결국에는 그녀에게 드레스를 선물로 주었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그가 선물해준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입었다.옷을 다 갈아입은 임유진이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강현수는 넋을 잃고야 말았다.이 드레스는 언젠가 어릴 때의 그 여자아이를 만나면 주려고 했던 드레스였다. 하지만 그는 배여진을 만나고 나서도 그녀에게 그 많은 옷을 선물해주지 않았다.이대로 주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