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바삐 일하고 있던 탁유미는 임유진을 발견하더니 활짝 웃었다.“유진 씨, 어떻게 왔어요?”“저녁에는 일도 없고 언니 얼굴 보려고요. 요즘은 좀 어때요? 지난번처럼 행패 부리는 사람들 없어요?”그 말에 탁유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그러자 임유진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또 누가 왔어요?”“그 뒤로 또 찾아와서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요. 요 며칠은 경찰분들이 이 근처를 순찰해주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탁유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아치 몇 명이 포장마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흉악한 얼굴로 손님들을 쫓아냈다. 그러고는 떡볶이 1인분을 시키더니 한사람이 한 테이블을 차지해버렸다.총 네 테이블 정도밖에 없는 것을 그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 다른 손님들은 다가올 수조차 없었다.가끔 혼자 온 손님이 합석 제안을 해도 쌍욕을 늘어놓으며 쫓아내기 일쑤였다.그 모습을 본 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제는 저렇게 장사를 방해하고 있어요?”탁유미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네... 지금은 가끔 오는 포장 손님들밖에 못 받아요. 일부러 행패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서 경찰분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대요. 아니면 장소를 아예 바꿔보려고요.”이제는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사람은 공수진이 분명했다.이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이제는 공수진을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다만 그녀는 S 시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해성시로 찾아간다고 해도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다음날, 임유진은 출근해서도 줄곧 탁유미의 일만 생각했다.그러다 점심시간이 되고 동료들 몇 명이 모여 오늘 밤 있을 연예계 자선 파티에 참석하는 연예인들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들려왔다.임유진도 얼마 전 그런 기사가 올라온 것을 얼핏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연예계 쪽 일이라 그녀와는 큰 접점이 없었기에 금방 다시 스크롤을 내리고 말았다.그때 동료 중 한 명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이번 파티에 이강 그룹 대표랑 그 약혼녀도 함께 참석한다고 한
강현수는 임유진이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줄곧 그와는 선을 그으려고 했었던 그녀였으니까.그리고 찾아온 목적을 듣고는 더더욱 고개를 갸웃했다.“오늘 저녁에 있을 자선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고요?”“네, 안 될까요?”“안될 건 없죠. 그런데 갑자기 파티에 가겠다고 이렇게 부탁하는 이유는 들어보고 싶은데요? 연예인 보려고 가는 건 아닐 테고.”오늘 있을 파티에는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하기에 덕질이 취미인 재벌 2, 3세들이 팬심으로 많이 참석할 예정이다.물론 임유진이 연예인 덕질을 하겠다고 해도 도와줄 수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인을 받아온다든지 그 연예인과 같이 밥을 먹는다든지 그에게 있어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이경빈 씨와 공수진 씨를 만나고 싶어요. 두 사람이 이 파티에 참석한다고 들었거든요.”“그 두 사람을요?”강현수가 의문 섞인 얼굴로 물었다.“그 두 사람이 파티에 참석하는 건 맞지만 유진 씨가 왜...”“친한 언니랑 관련된 개인적인 일이라...”임유진은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지는 않았다.“알겠어요. 더 묻지는 않을게요. 음... 지금 시간이 조금 타이트하긴 한데 아마 괜찮을 거예요.”강현수의 말에 그녀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러다 반 시간 뒤 그제야 시간이 타이트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강현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벤을 준비시키더니 S 시의 제일 유명한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샘을 불러 임유진의 메이크업을 맡겼다.“꾸미지 않고 이대로 파티에 참석하면 더 눈에 띄게 될 거예요.”임유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러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편한 복장이 아닌 예쁘게 꾸며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보통은 파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샵을 돌아야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늦어 파티장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수밖에 없다.“날 부려먹는 데는 선수야 아주. 내가 스타일리스트 동생까지 데려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그건 그렇고 이쪽은 현수 새 여자친
“정말 현수를 거절했어요?”샘은 신기한 동물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강현수가 바로 앞에 있던 터라 임유진은 이 상황이 어색하고 무척이나 민망해졌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르고 있던 찰나 샘은 다시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현수를 마다하는 여자는 처음 봐요. 우와, 신기해.”“어째 기분 좋아 보인다?”강현수는 팔짱을 낀 채 샘을 흘겨보았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이니까 그렇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은 반응일걸?”베테랑은 베테랑인 건지 샘은 강현수와 얘기를 하면서도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메이크업을 완성해 나갔다.차량이 파티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임유진의 메이크업과 스타일링도 전부 마무리가 되었다.“드레스는 네가 준비하는 거 맞지?”샘은 메이크업 도구를 정리하며 물었다.강현수는 줄곧 옆에 있던 큰 쇼핑백을 꺼내 들어 임유진에게 건넸다.“우리는 먼저 내릴 테니까 이거로 갈아입어요. 사이즈는 아마 맞을 겁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사람들을 데리고 벤에서 내렸다.혼자 남겨진 임유진은 쇼핑백 안에 들어있던 선물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드레스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강현수가 준비해둔 드레스는 보라색 드레스로 밑단에는 레이스와 수정으로 된 나비들과 꽃들이 예쁘게 수 놓여있었다.이 드레스는... 어릴 때 그가 그녀에게 얘기해줬던 것과 똑같았다.강현수는 그때 꽃무늬가 있는 보라색 원피스를 그녀에게 선물해주겠다고 했었다.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그 여자아이가 임유진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결국에는 그녀에게 드레스를 선물로 주었다.임유진은 그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그가 선물해준 드레스를 조심스럽게 입었다.옷을 다 갈아입은 임유진이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강현수는 넋을 잃고야 말았다.이 드레스는 언젠가 어릴 때의 그 여자아이를 만나면 주려고 했던 드레스였다. 하지만 그는 배여진을 만나고 나서도 그녀에게 그 많은 옷을 선물해주지 않았다.이대로 주
이대로 충분히 더 세게 끌어안을 수 있음에도 그는 행여 그녀가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미안해요...”그녀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대로... 이대로 조금만 더 안고 있어도 될까?”그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물었다.그 모습이 너무나도 간절해 보여 이 남자가 강현수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이제껏 여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임유진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 와 그저 그의 품에 안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등 뒤로는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고 코끝에는 그의 향기가 맴돌며 귓가에는 불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길고도 짧았던 포옹이 드디어 끝이 났다.“미안해요.”이것으로 그는 오늘 벌써 두 번이나 사과했다.“유진 씨를 내 상상 속의 사람과 착각하는 바람에...”“괜찮아요.”임유진은 강현수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다음부터는 유진 씨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일 없을 거예요. 유진 씨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냥 임유진이니까요.”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임유진은 올곧게 마주 오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맑은 눈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자니 그의 세상에 온통 자신이라는 존재밖에 없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임유진은 강현수와 함께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연예인과 셀럽들이 많이 참석한 파티였지만 기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초대된 사람들이 아니기에 파티장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사진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강현수가 직접 에스코트해서 들어가는 바람에 사람들의 시선은 금세 임유진에게로 집중되었다. 특히 연예계 관계자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강현수의 곁에 있는 여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늘 화제의 중심이었다.임유진은 주위를
“나는... 하하, 오늘 여기 연예인들이 많이 온다길래 연신 씨한테 부탁해서 같이 왔어.”한지영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부터 그녀는 이곳에 오기 위해 백연신에게 적극적으로 키스도 하고 애교도 부렸다. 그러다 그와 실컷 침대 위에서 뒹굴고 나서야 드디어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물론 이곳으로 오기 전 백연신은 그녀에게 세 가지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첫 번째는 남자 연예인들을 보면서 침 흘리지 않기, 두 번째는 백연신 없이 직접 사인받으러 가지 않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같이 사진찍기 금지였다.세 가지 모두 이제껏 해왔던 것들이며 하고 싶었던 것들이었지만 이곳으로 오기 위해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원래는 연예인들 얼굴이나 실컷 보고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뜻밖에도 임유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강현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말이다.한지영은 티 안 나게 강현수를 아래위로 훑었다.덕질하는 사람으로서 강현수를 모를 리가 없었다.수많은 연예인의 뒤에는 모두 강현수가 있고 그의 한마디면 시골 촌구석에 있는 사람도 유명해질 수 있다.그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덕질하는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얼굴에 홀린 사람들이 대다수였다.“너야말로, 여기는 웬일이야? 그것도 옆에 저분이랑 같이...?”“누구 좀 만나려고 강현수 씨한테 부탁했어.”임유진은 다급하게 설명했다.“누구 만나려고?”한지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유진은 덕질도 하지 않으니 연예인 사인을 받으러 왔을 리는 없었다.“공수진 씨랑 이경빈 씨.”‘유미 언니 때문에 온 거구나...’한지영은 바로 눈치채고는 임유진을 옆으로 당겨 물었다.“유미 언니한테 또 무슨 일 있었던 거야?”“양아치들이 그 뒤로도 계속 찾아와서 언니 장사 못 하게 방해하고 있어. 만약 언니한테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면 양육권 갖고 오는 데 있어서 많이 불리할 거야.”“공수진 그 여자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아니지. 이건 악질이야 아주.”한지영은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아니면 내가 연신 씨한테 언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 대부분이 KS 그룹 산하의 엔터 기업 소속이었다.한지영은 백연신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고 제일 잘생겼으며 다른 남자는 다 필요 없고 백연신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막상 남자 아이돌들의 영상을 볼 때는 1초라도 놓칠까 봐 시선을 떼지 못했다.홧김에 영상을 보지 못하게도 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취미를 이렇게 박탈당하면 자신은 정말 슬플 거라며 우는 척을 해댄다. 그러면 그는 마음이 약해져 한숨을 내쉬며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곤 한다.백연신은 지난날을 회상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백 대표님이 엔터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강현수의 말에 백연신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어쩌다 보니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런데 여자 아이돌에 비해 남자 아이돌이 확연히 많더군요. 여자 아이돌 쪽은 크게 관심이 없는 걸까요?”한지영은 여자 아이돌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이참에 남자가 아닌 여자 아이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현수는 정말 관심이 있는 듯 보이는 그를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혹시 눈여겨보는 여자 아이돌 연습생이라도 있는 겁니까?”백연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한지영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아이돌 연습생이라뇨? 연신 씨 여자 아이돌한테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그동안 얘기 안 했어요?”백연신은 눈을 질끈 감고는 최대한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오늘 꼭 보고 싶다던 배우 있지 않았어? 아까 저기 보이던데, 이만 갈까?”“진짜요? 얼른 가요.”한지영은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임유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바로 백연신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이 파티에 오게 된 목적이 바로 연예인 구경하는 것이니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옆으로 걸어갔다.“현수 씨, 혹시 바쁜 일 있으면 먼저 가도 돼요. 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아까부터 현수 씨와 얘기하고 싶어 하는 분들도 많아 보이는데...”“바쁜 일 없어요. 그리고 이곳
보라색 드레스에 단아한 메이크업을 한 임유진은 그녀가 봐도 너무나도 아름다웠다.반면 배여진은 거의 매일 피부과도 다니고 오늘은 실력 좋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스타일리스트에게 메이크업도 받고 스타일링도 받았지만 샵에서 나올 때 사람들에게서 촌스러움을 가리려 애쓴다는 평만 들었다.아무리 돈으로 메꾸려고 해봐도 절대 메꿀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듯이 주위 사람들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매정했다.두 사람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어릴 때는 얼굴이 비슷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심지어는 길거리를 나가면 쌍둥이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자주 받았었다.게다가 닮지 않았으면 어릴 때 사진으로 강현수를 속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점점 닮은 구석이 사라져갔고 임유진은 계속 예뻐진 것에 반해 배여진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임유진처럼 눈이 크지도, 코가 오뚝하지도, 피부가 맑고 희지도 않았다.배여진은 혼자만의 비교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왜, 내가 현수 씨랑 여기 있으면 안 돼?”임유진은 배여진에게 되물었다.배여진은 지금 마치 임유진에게 제 물건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그 ‘물건’이 정말 제 것이라도 되는 양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다.배여진은 조금 차가워진 강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기억을 되찾은 이상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상황에 대비해 어떻게 반박할지, 어떻게 해야 임유진의 말을 믿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이미 전부 다 준비를 해두었다. 그러나 변수는 언제나 있고 강현수는 임유진을 사랑하고 있으니 최대한 들키지 않는 것이 좋았다.배여진은 재빨리 표정을 바꿔 임유진을 향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그럴 리가. 나는... 나는 그냥 현수 씨가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다고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조금 놀랐을 뿐이야.”그 말에 임유진은 강현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는 그녀가 파티에 같이 가달라고 했을 때 아무런
배여진은 임유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현수를 보며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유진이랑 강지혁 씨 지금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어요. 헤어졌다고는 하는데 들어보니까 자주 만나고 그런다던데...”자주 만난다는 말은 강현수가 임유진을 어장 관리나 하는 여자로 보도록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다.강현수는 그 말을 듣더니 임유진을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여진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이에 배여진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배여진, 유진 씨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앞으로 내 앞에서 유진 씨 얘기 함부로 꺼내지 마.”배여진은 잔뜩 풀이 죽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그게 아니라, 나는 그냥...”“그냥 뭐?”강현수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고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공기도 한순간에 가라앉아 분위기가 험악했다.배여진은 지금 이 상황이 무섭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다.강현수는 그녀에게 언제나 매너 있고 다정했으며 잘못한 게 있어도 항상 품어주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마치 그 모습들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무척이나 냉랭했다.배여진은 순간 일전 인터넷에서 봤던 강현수의 목격담과 평가가 떠올랐다. 냉혹하고 매정하며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눈 깜빡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 글이 말이다...그게 강현수의 본모습이었던 걸까?지금껏 잘해주고 감싸주었던 건 단지 그녀가 생명의 은인이라 그랬던 것이고?강현수의 다정함과 부드러움은 오로지 어릴 때 그를 구해준 여자아이만의 것이었다. 배여진만의 것이 아니었다!그리고 임유진을 사랑하게 된 지금 그 다정함이 이제는 임유진에게로 넘어간 걸까?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나가자 배여진은 소름이 돋으며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너는 내 목숨을 구한 사람이니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나는 네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줄 거야.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너와 나 사이에 다른 건 없어.”강현수의 단호한 말에 배여진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직접적으로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
“나는 더 이상 이경빈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알아보니 실패한 사례들이 꽤 많더라고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1기나 2기 정도였으면 간이식 수술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발견 당시 벌써 3기였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었기에 수술에 대한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혁이한테 부탁해서 이쪽으로 제일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올게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하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됐어요. 나는 나머지 몇 개월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계속 병원에만 있게 되잖아요.”“하지만...!”“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큰 의미 없는 수술에 쓰고 싶지 않아요.”탁유미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탁유미였다.그래서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가 이토록 쉽게 포기하는 건 수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경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언니한테는 윤이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잖아요. 언니가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두 사람은 어떡해요? 남게 될 사람도 생각해야죠.”“유진 씨,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마지막 몇 개월을 수술 하나에 의존하는 거, 나는 못 해요.”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탁유미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 사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수술이 백 퍼센트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후유증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으니까.임유진이 떠난 후 김수영이 다가와 말했다.“유미야, 그냥 이경빈이 간을 기증한다고 할 때 받는 게 어때? 그러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기잖아.”방금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로 김수영은 일전 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
이경빈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하지만 웃고 있다기에는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부럽네. 서로 옆에 딱 붙어 있잖아. 반면에 나랑 유미는...”강지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잔뜩 취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보다 다시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임유진 씨는 유미 친구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유미가 내 간 기증을 받아들이고 수술을 받게 할 수 있는지...”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네? 언니가 수술을 안 하겠대요? 아니, 이경빈 씨한테 간 기증을 안 받겠다고 했어요?”이경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한테 뭔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고 더 이상 나랑은 엮이기 싫다고 했어...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 죽는데도... 그래도 내 간은 싫대.”그는 탁유미가 살기를 원하고 있다. 용서는 둘째치고 일단 그녀가 목숨은 부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탁유미가 살 방법은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밖에 없다. 그런데 거절이라니...임유진은 생각도 못 한 전개에 고민에 빠졌다.“뭐라고 말 좀 해봐. 임유진 씨 똑똑하잖아. 어떻게 하면 유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얘기 좀 해보라고!”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임유진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그의 꼴이 화가 나기도 했다.“그러게 조금만 더 일찍 언니를 향한 마음을 깨닫지 그랬어요. 아니면 감옥에 보낸 것으로 복수를 끝냈으면 두 번 다시 찾지 말던가 왜 다시 나타나서 또 언니한테 상처를 줘요!”“그래...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등신이라 내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어...”이경빈은 주먹을 말아쥐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날 증오한다고 했어... 유미가... 유미가...”이윽고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안 돼 얼굴 전체가 눈물로 뒤덮였다.지
“이경빈 씨가요?”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10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것도 술에 취해서?“지금 바로 내려갈게요.”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잠깐.”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내가 만나고 올 테니까 넌 여기 있어.”“아니, 내가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갑자기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언니 일일 테니까.”임유진의 단호함에 강지혁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집사를 향해 말했다.“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단 안으로 들여.”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외투부터 걸쳐. 그리고 슬리퍼도 신고.”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임유진의 다리를 들어 슬리퍼를 신겨주었다.집사는 침실을 떠나기 전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이 세상에 강지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임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예로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극도로 비정하거나 극도로 감성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강문철은 비정하다 못해 한여름에도 녹지 않을 얼음장 같은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인 강선우는 지독한 낭만파로 사랑에 목을 맨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지혁은 두 사람 중 하필이면 강선우를 닮았고 강선우처럼 한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집사는 강문철이 젊었을 때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했던 사람이라 강지혁은 강선우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임유진과 깨가 쏟아질 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신겨주는 강지혁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족이 아닌 강지혁에게서 느끼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임유진은 가만히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에 강지혁은 손을 잠깐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람을 녹일 것 같은 그의 눈빛과 마주하니 어쩐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강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이경빈은 혼이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차에 앉아 탁유미가 유치원에서 윤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경빈이 아주 조금이라도 일찍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으면 어쩌면 지금쯤 탁유미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윤이를 데리러 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들과 함께 있을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찼다.이경빈은 두 모자를 이렇게도 시야 안에 꽉 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그의 복수는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으니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게다가 건강하게 태어났어야 했을 아이가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이경빈은 과거의 행동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언제쯤이면 이 고통이 나아질 수 있을지 그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어쩌면 이렇게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가 목숨을 거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른다.이경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께를 꽉 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강씨 저택.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족욕을 시켜준 다음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로 데려왔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을 유리구슬처럼 대하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돼. 아직 못 걸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요즘 우리 아이들도 엄청 조용하고 말이야.”이제 그녀는 어느덧 5개월을 넘기고 있어 입덧도 가라앉고 잠도 잘 왔다.그리고 참으로 다행히도 정기 검진 결과도 늘 양호한 편이었고 아이들도 아주 얌전히 잘 자라주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특히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나서는 매일매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며칠 전 임유진이 화장실이 가고 싶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강지혁이 자고 있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가 등 뒤에서 어디 가냐는 그의 말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깜짝이야! 너 안 자고 있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막 자
“내가... 그렇게도 싫어?”이경빈은 속으로 그녀가 아니라고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응. 더 이상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날 내가 너를 병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너를 공수진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시키지 않았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너한테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까...?”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하지만 탁유미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네가 겪은 수모와 고통... 내가 돌려받을게. 내가 다 돌려받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아니, 최소한 내 간을 거절하지는 말아줘!”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차가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탁유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경빈이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람들이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밖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이경빈이 무릎을 꿇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한 번, 두 번, 세 번....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주민들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경빈이 머리를 조아린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탁유미는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경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솔직히 놀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니까.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얼마나 세게 머리를 박은 건지 처음에는 그저 이마 쪽에 스치듯 껍질이 까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슬슬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아.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당시의 이경빈은 몰랐다.“유미야, 사랑해.”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드디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탁유미는 힘껏 반항하다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품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경빈은 더욱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사랑해.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이제야 전해서 미안해. 그때 네가 유리 파편을 네 복부에 찔러넣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어. 피를 흘리는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너무 무서웠어.”사실 그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앞으로는 잘할게. 내 모든 걸 걸고 너를 지켜줄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내 간도 너한테 줄게!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너한테 간을 기증할게!”이경빈은 탁유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탁유미는 간 얘기에 조금 흠칫했다.‘...다 알고 온 거네.’사실 그녀도 이경빈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건 잘못된 기대고 잘못된 희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나 이제 너 안 사랑해.”차가운 목소리가 이경빈의 귓가에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경빈은 온몸이 굳어지며 심장 고동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경빈, 나 너 안 사랑해.”탁유미는 두 손으로 이경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경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너는 그때 복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척했어. 그리고 지금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 기분 하나로 쉽게 바뀔 사랑을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이경빈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아니야...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