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첫날 밤 처음으로 도정원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소통도 없었다. 도경욱도 이 여자에게 사랑보다는 책임감을 더 많이 느꼈다.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들 도정원이 태어났다.도정원이 3살이 되었을 때 도경욱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할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도씨 가문으로 향했다.오후에 그의 아내와 아들은 위층 침실에서 낮잠을 잤고 도경욱은 그의 형제 형수들과 함께 1층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당시 도씨 가문의 젊은이들은 큰형인 도진욱을 제외하고 거의 다 결혼했었다. 도진욱은 자기가 최근에 좋아하게 된 여자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아름답고 똑똑한 매우 온화한 여자라고 자랑하더니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마침 도진욱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위층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다들 깜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3층 발코니에 도경욱의 아내가 이미 화단에 떨어져 있었다.겨우 3살밖에 되지 않은 도정원은 비틀거리며 난간을 잡고서는 아래층에 떨어져 피범벅이 된 엄마를 향해 울부짖었다.경찰과 구급차가 잇따라 도착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결국 그녀의 죽음은 사고로 판명됐지만 이에 대중의 비난은 끝이 없었다.사고 후 도씨 가문의 사람들은 도경욱을 도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오히려 도경욱의 사생아라는 신분을 이유로 그와 명확한 선을 그었다.몇 년 동안 도정원의 외할아버지는 도경욱을 정말 많이 원망했었다. 외할아버지는 도경욱의 보살핌이 소홀해서 자신의 딸이 사고로 떨어져 죽었다고 믿었다.만약 도정원이 아니었다면 외할아버지는 도경욱을 죽여버렸을 수도 있었다.수년 동은 도경욱은 가족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떠돌이 개처럼 살았다.태어났을 대부터 그의 운명은 이미 찬란한 비극으로 물들어 있었다.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었다.현재 그는 이미 인생의 절반을 지나왔고 지금 다시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노숙자처럼 도시를 떠돌며 살
다음날.도정원은 송재이와 길거리 꽃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두 사람은 각각 꽃다발을 샀다.그런 다음 도정원은 운전하고 송재이는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차는 도로를 천천히 달려 교외에 있는 묘지로 향했다.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거의 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제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 가느다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남쪽의 겨울비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동반했다.도정원은 추위에 움츠러드는 송재이를 보고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몸을 녹이자고 했다.송재이도 그의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저녁이 되자 빗방울이 경주의 거리를 적셨다.가로등은 어두운 거리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에 작은 국수 가게가 있었다.두 사람은 국수 가게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송재이와 도정원은 가끔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미묘하게 잔잔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졌다.설씨 저택, 2층 서재.설영준은 설한 그룹 법무팀과 재무팀이 보낸 모든 세부 정보를 모두 박윤찬에게 보냈다. 그리고 내년 그룹 감사 회의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설명했다.설 연휴 기간에 일 얘기를 하는 것은 비매너였기에 설영준은 긴 얘기를 최대한 짧게 얘기하며 박윤찬의 휴식 시간을 많이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전화를 끊은 뒤 설영준은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그는 의자를 돌려 서재의 통유리창을 바라보았다.이곳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이라 대부분 아주 조용했다.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이런 명절 때는 조금 황량하게 느껴졌다.특히 섣달그믐날 밤을 그는 혼자 보내려니 조금 쓸쓸했다.설영준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더 투정이 많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예전에는 외로움이 어떤 느낌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무심코 메시지들을 훑어봤다.일상적인 업무 외에는 사람들과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가장 최근에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부하 직원이거
송재이는 볼까지 흐른 눈물을 슥 닦았다.설영준이 영상통화를 걸다니.평소에 연락할 때는 문자나 카톡만 보내던 그가 영상통화를 걸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그녀는 설영준이 영상통화라는 기능을 모르는 줄 알았다. 핸드폰은 한참 동안 울렸다. 송재이는 도정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일어나 국숫집 밖으로 나갔다.밖에는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 지붕 아래에 서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설영준과 영상통화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 그런지 카메라 너머로 보는 그는 평소와 달라서 좀 이상했다.설영준은 무난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배경을 보니 집 서재에 있는 것 같았다. 여유롭고 나른한 모습이었다."울었어?"송재이의 눈가는 약간 빨갛고 긴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너무 추워서 그런가? 아까 재채기했거든."눈가가 빨간 게 재채기 때문인지 아니면 운 것 때문인지 정도는 설영준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그는 진실을 간파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왜 아직도 밖에 있어?""친구와 밖에서 뭘 좀 먹고 들어가려고.""새해부터 만나는 거 보니 중요한 친구인가 봐."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때는 그녀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자기만 놓으면 끝나는 관계였다.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럭저럭, 인연이 닿아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야."송재이는 고의적으로 애매하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생각한 대로 말했을 뿐이었다.가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방금 알게 되었다.송재이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카메라 너머로 설영준은 그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땅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차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의 등 뒤에서부터 따스한 가로등 빛이 비쳤고 뒤편에는 사람이 오가는 국숫집이 있었다.이런 배경에 있는 그녀는 더욱 외로워 보였다.그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의심을 거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도정원은 그녀가 밖에서 통화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똑''똑'그의 손이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녀는 설영준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국숫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도정원이 물었다."나갈까요?""그래요."국숫집을 나선 후, 그녀는 도정원의 차에 올랐다.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송재이 마음도 많이 평온해졌다.그녀는 이미 도경욱과 도정원이 자기의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그저 헤프닝이었을 뿐이었기에 그렇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 일로 그렇게 우울해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했다."아까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앞으로도 친오빠처럼 대해도 된다고. 진심으로 한 말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도정원을 바라보면서 물었다.그는 운전 중이었는데 그녀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 걸 보고 놀랐다.'아까까지 훌쩍거리면서 얼굴이 죽상이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고?'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물론이죠, 제가 나이가 더 많으니 나이로는 오빠가 맞죠.”그 말을 들은 송재이는 눈매가 휘어지게 웃었다."그럼 정원 오빠, 앞으로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잘 지켜주셔야 해요. 오빠를 도와서 연우를 잘 돌볼 테니 오빠는 저를 지켜주세요, 알겠죠?”"당연하죠.”도정원은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는 시인의 얼굴에 미소를 보고 마음이 매우 괴로워 말을 잇지 못했다. 거의 송재이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갑자기 또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참, 지난번에 우리 집으로 보내준 만두 도시락은 제가 이미 씻어놨어요. 다음에 제가 사장님 집으로 보낼게요. 가는 김에 가져가세요.”"네, 그럴게요." 그녀는 도시락은 사실 자기의 것이 아니라 설씨 집안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도정원이 직접 설영준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왜 설씨 가문의 도시락이 왜 그녀의 손에 있는지
송재이는 얼떨결에 뭐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전에 영상통화에서 인연이 닿아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라고 도정원과의 사이를 설명했던 적이 있었다.그러나 설영준이 송재이를 오해한 것이 분명했다."도정원 대표님 좋은 분이야. 인연이 있어도 남매 관계고, 오빠로 삼고 싶어."송재이는 진심이었다. 아무런 애매한 관계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현대인에게 혈육이 없다면 남매니 오빠니 하는 것은 추잡스러운 핑계라고 생각하기 쉬웠다.'남매?''X랄 하네!'설영준은 더욱 껴 끌어 안아 키스를 했다. 송재이는 아파서 숨을 들이 마셨다.송재이를 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서 나온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껴안았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댔다."왜 울었어? 응?"그녀를 울게 한 사람이 도정원이 맞는지, 이게 바로 그가 묻고 싶은 것이었다.하지만 이렇게 물으면 송재이가 자기가 질투하는 줄 알까 봐 묻지 않았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다 풀렸다.설영준이 욕실에서 한바탕 저질러서 졸려 눈도 뜨지 못했다.얼버무리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안 울었다니까…"송재이는 몸만 피곤했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설영준을 보니 자신과 도정원 사이에 뭔가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만약 송재이가 아직도 울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 자신이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웠다.그의 호르몬을 좋아했지만 체력이 바닥났다.하지만 설영준은 송재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을 돌려 키스를 갈겼다. 그녀 위로 올라탔다."차라리 이전에 내가 너를 지원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는 내 말도 잘 들었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 나를 배신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고혹적이고 허스키했다."오빠로 삼고 싶어? 그럼 나는? 말해봐!"설영준이 물었지만 송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치 큰 전쟁을 치르는 듯했다.방안에서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송재이의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설영준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
“많이 긴장했어?”설영준이 태연한 얼굴로 은근히 물었다.송재이는 서둘러 고개를 젓더니 그릇을 내려놓으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설영준은 너무 치명적이었다.그에게는 눈빛 하나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일부러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그러나 오히려 그런 무신경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담긴 짙은 욕망이 그녀를 자꾸만 심란하게 만들었다.다루기 어려운 야수처럼 거친 남자는 매력이 흘러넘치는 법이다.“밥 다 먹으면 돌아가려고?”송재이가 식탁 앞에서 입을 열었다.설영준은 젓가락을 들고 접시 안 음식을 먹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뭐라고?”송재이는 이해하지 못했다.“내가 보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고, 날 보내는 게 아쉬우면 그냥 여기 남아있을게.”설영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송재이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설영준이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설영준은 그녀가 직접 얘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내가 가지 말라고 하길 바라는 거야? 꿈 깨! 난 절대 말 안 할 거야!’식사를 마친 송재이는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난 다 먹었어. 이제 잘 거니까 돌아갈 때 문 잘 잠그고 나가.”말을 마친 뒤 그녀는 조금 짜증이 난 듯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어젯밤 그녀는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오전 햇볕은 아주 따뜻하고 좋았다.송재이는 다시 침대에 누운 뒤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자려고 했다.그러나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잠이 들지 못했다.설영준이 밖에 있다는 걸 알아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탓이었다. 결국 송재이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설영준이 문을 열고 떠나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랑하는 남자에게 홀대받는 느낌이라 괴로웠지만 그 괴로움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이 틀림없이 떠날 거로 생각했다. 다만 그가 언제 떠
“여기서 자고 가는 남자는 내가 첫 번째인 거지?”끝날 때쯤에 송재이는 땀범벅이었다.그녀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자신의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설영준의 말을 들었다.송재이는 후회되기 시작했다. 설영준을 굴복시킬 생각으로 시작한 것인데 결국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참 창피한 일이었다.“첫 번째는 맞지만 마지막은 아닐 거야...”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원망스레 대답했다.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소녀의 것처럼 귀엽고 매력적이었다.그런 부드러운 매력이 설영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가끔 토라져서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제 막 그 짓을 끝내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설영준은 피식 웃으며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말은 다른 남자도 만나보고 싶다는 거야? 그러면 못 써. 네가 다른 사람이랑 만나본 적 없어서,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서 그래. 날 소중히 여기라고...”“뻔뻔하긴!”송재이는 그가 뻔뻔하게 느껴졌다.그녀는 몸을 돌려 눈을 부릅뜨면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설영준은 그녀를 침대 위에 눌러놓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송재이가 욕하고 때려도 설영준은 줄곧 태연했다.육체적으로 만족해서 화를 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설영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의 눈에 송재이는 작은 동물 같아 보였다.오늘 오후에는 낮잠을 잘 생각이었으나 송재이는 몇 번이나 설영준에게 잡아먹혔다.온갖 수단을 다 써도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물론 설영준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줄 생각도 없었다.송재이는 저녁쯤이면 살이 빠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배고파...”날이 저물어서야 송재이는 이불 속에서 작은 머리를 내밀었다.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침대에 앉아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오후에 그가 만들어준 파스타와 토스트, 과일도 먹었지만 또다시 배가 고팠다.설영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슈퍼 갔
휴가가 끝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설영준이 송재이에게 바란 건 잠자리뿐이었기에 그녀와의 미래를 그려본 적은 없었다.앞으로 결혼도 하게 되겠지만 그 상대는 절대 송재이가 아니었다.휴가가 끝나고 3일 뒤, 기업들은 정식으로 업무를 재개하기 시작했다.설한 그룹 회의실.각 계열사 대표들과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설한 그룹 사옥은 경주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사옥으로 백 년 된 기업의 기개와 대범함이 있었다.건물 전체에 하늘을 찌를 듯한 의욕과 생기발랄한 활력이 넘쳤다.아래층에서 위를 바라보던 도정원은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꼈다.제민 그룹도 나쁘지 않았으나 설한 그룹과 비교하면 아예 레벨이 달랐다.직원의 안내에 따라 도정원은 다른 회사 대표들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널찍하고 환한 회의실 안, 도정원은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그가 들고 있는 두꺼운 서류뭉치는 최근 몇 년간의 비즈니스 운영 사례와 운영 방법들이었다.오전 열 시쯤, 설영준은 회의실 옆 방에 있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짧은 머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귀티가 흐르면서도 엘리트 같아 보였다.어떤 이들은 강한 카리스마를 타고났고, 외모는 그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었다.오늘 설영준이 캐주얼한 차림이었다고 해도 그의 남다른 박력과 수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여진이 그에게 손목시계를 건넸다.설영준은 여유롭게 손목시계를 찼고 딸깍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말했다.“가죠.”...설영준은 서류를 챙겨서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의장이 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자리는 아주 익숙했다.설영준의 당당한 뒷모습 위로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의장 자리에 앉았다. 도정원은 그의 대각선 오른쪽 세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설영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무심한 얼굴로 도정원 쪽을 힐끗 바라봤다.“좋은 아침입니다. 새로운 분기의 시찰이 곧 시작될 겁니다. 전 의장 설영준입니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