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첫날 밤 처음으로 도정원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소통도 없었다. 도경욱도 이 여자에게 사랑보다는 책임감을 더 많이 느꼈다.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들 도정원이 태어났다.도정원이 3살이 되었을 때 도경욱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할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도씨 가문으로 향했다.오후에 그의 아내와 아들은 위층 침실에서 낮잠을 잤고 도경욱은 그의 형제 형수들과 함께 1층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당시 도씨 가문의 젊은이들은 큰형인 도진욱을 제외하고 거의 다 결혼했었다. 도진욱은 자기가 최근에 좋아하게 된 여자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아름답고 똑똑한 매우 온화한 여자라고 자랑하더니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마침 도진욱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위층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다들 깜짝 놀라서 달려가 보니 3층 발코니에 도경욱의 아내가 이미 화단에 떨어져 있었다.겨우 3살밖에 되지 않은 도정원은 비틀거리며 난간을 잡고서는 아래층에 떨어져 피범벅이 된 엄마를 향해 울부짖었다.경찰과 구급차가 잇따라 도착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결국 그녀의 죽음은 사고로 판명됐지만 이에 대중의 비난은 끝이 없었다.사고 후 도씨 가문의 사람들은 도경욱을 도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오히려 도경욱의 사생아라는 신분을 이유로 그와 명확한 선을 그었다.몇 년 동안 도정원의 외할아버지는 도경욱을 정말 많이 원망했었다. 외할아버지는 도경욱의 보살핌이 소홀해서 자신의 딸이 사고로 떨어져 죽었다고 믿었다.만약 도정원이 아니었다면 외할아버지는 도경욱을 죽여버렸을 수도 있었다.수년 동은 도경욱은 가족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떠돌이 개처럼 살았다.태어났을 대부터 그의 운명은 이미 찬란한 비극으로 물들어 있었다.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여곡절이 있는 것이었다.현재 그는 이미 인생의 절반을 지나왔고 지금 다시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노숙자처럼 도시를 떠돌며 살
다음날.도정원은 송재이와 길거리 꽃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두 사람은 각각 꽃다발을 샀다.그런 다음 도정원은 운전하고 송재이는 그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차는 도로를 천천히 달려 교외에 있는 묘지로 향했다.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거의 대화가 없었다. 두 사람이 제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 가느다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남쪽의 겨울비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동반했다.도정원은 추위에 움츠러드는 송재이를 보고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몸을 녹이자고 했다.송재이도 그의 말에 알겠다고 답했다.저녁이 되자 빗방울이 경주의 거리를 적셨다.가로등은 어두운 거리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에 작은 국수 가게가 있었다.두 사람은 국수 가게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송재이와 도정원은 가끔 대화를 나눴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지만 미묘하게 잔잔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졌다.설씨 저택, 2층 서재.설영준은 설한 그룹 법무팀과 재무팀이 보낸 모든 세부 정보를 모두 박윤찬에게 보냈다. 그리고 내년 그룹 감사 회의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설명했다.설 연휴 기간에 일 얘기를 하는 것은 비매너였기에 설영준은 긴 얘기를 최대한 짧게 얘기하며 박윤찬의 휴식 시간을 많이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전화를 끊은 뒤 설영준은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그는 의자를 돌려 서재의 통유리창을 바라보았다.이곳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이라 대부분 아주 조용했다. 평소에는 괜찮았지만 이런 명절 때는 조금 황량하게 느껴졌다.특히 섣달그믐날 밤을 그는 혼자 보내려니 조금 쓸쓸했다.설영준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더 투정이 많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예전에는 외로움이 어떤 느낌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무심코 메시지들을 훑어봤다.일상적인 업무 외에는 사람들과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가장 최근에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부하 직원이거
송재이는 볼까지 흐른 눈물을 슥 닦았다.설영준이 영상통화를 걸다니.평소에 연락할 때는 문자나 카톡만 보내던 그가 영상통화를 걸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그녀는 설영준이 영상통화라는 기능을 모르는 줄 알았다. 핸드폰은 한참 동안 울렸다. 송재이는 도정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일어나 국숫집 밖으로 나갔다.밖에는 아직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 지붕 아래에 서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설영준과 영상통화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 그런지 카메라 너머로 보는 그는 평소와 달라서 좀 이상했다.설영준은 무난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배경을 보니 집 서재에 있는 것 같았다. 여유롭고 나른한 모습이었다."울었어?"송재이의 눈가는 약간 빨갛고 긴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너무 추워서 그런가? 아까 재채기했거든."눈가가 빨간 게 재채기 때문인지 아니면 운 것 때문인지 정도는 설영준도 판단할 수 있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지만 그는 진실을 간파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왜 아직도 밖에 있어?""친구와 밖에서 뭘 좀 먹고 들어가려고.""새해부터 만나는 거 보니 중요한 친구인가 봐."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때는 그녀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자기만 놓으면 끝나는 관계였다.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럭저럭, 인연이 닿아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야."송재이는 고의적으로 애매하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생각한 대로 말했을 뿐이었다.가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방금 알게 되었다.송재이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카메라 너머로 설영준은 그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땅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차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의 등 뒤에서부터 따스한 가로등 빛이 비쳤고 뒤편에는 사람이 오가는 국숫집이 있었다.이런 배경에 있는 그녀는 더욱 외로워 보였다.그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의심을 거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도정원은 그녀가 밖에서 통화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똑''똑'그의 손이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녀는 설영준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국숫집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도정원이 물었다."나갈까요?""그래요."국숫집을 나선 후, 그녀는 도정원의 차에 올랐다.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송재이 마음도 많이 평온해졌다.그녀는 이미 도경욱과 도정원이 자기의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그저 헤프닝이었을 뿐이었기에 그렇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 일로 그렇게 우울해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했다."아까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앞으로도 친오빠처럼 대해도 된다고. 진심으로 한 말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도정원을 바라보면서 물었다.그는 운전 중이었는데 그녀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 걸 보고 놀랐다.'아까까지 훌쩍거리면서 얼굴이 죽상이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고?'이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물론이죠, 제가 나이가 더 많으니 나이로는 오빠가 맞죠.”그 말을 들은 송재이는 눈매가 휘어지게 웃었다."그럼 정원 오빠, 앞으로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잘 지켜주셔야 해요. 오빠를 도와서 연우를 잘 돌볼 테니 오빠는 저를 지켜주세요, 알겠죠?”"당연하죠.”도정원은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는 시인의 얼굴에 미소를 보고 마음이 매우 괴로워 말을 잇지 못했다. 거의 송재이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갑자기 또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참, 지난번에 우리 집으로 보내준 만두 도시락은 제가 이미 씻어놨어요. 다음에 제가 사장님 집으로 보낼게요. 가는 김에 가져가세요.”"네, 그럴게요." 그녀는 도시락은 사실 자기의 것이 아니라 설씨 집안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도정원이 직접 설영준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왜 설씨 가문의 도시락이 왜 그녀의 손에 있는지
송재이는 얼떨결에 뭐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전에 영상통화에서 인연이 닿아도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라고 도정원과의 사이를 설명했던 적이 있었다.그러나 설영준이 송재이를 오해한 것이 분명했다."도정원 대표님 좋은 분이야. 인연이 있어도 남매 관계고, 오빠로 삼고 싶어."송재이는 진심이었다. 아무런 애매한 관계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현대인에게 혈육이 없다면 남매니 오빠니 하는 것은 추잡스러운 핑계라고 생각하기 쉬웠다.'남매?''X랄 하네!'설영준은 더욱 껴 끌어 안아 키스를 했다. 송재이는 아파서 숨을 들이 마셨다.송재이를 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서 나온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껴안았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댔다."왜 울었어? 응?"그녀를 울게 한 사람이 도정원이 맞는지, 이게 바로 그가 묻고 싶은 것이었다.하지만 이렇게 물으면 송재이가 자기가 질투하는 줄 알까 봐 묻지 않았다.그녀는 온몸에 힘이 다 풀렸다.설영준이 욕실에서 한바탕 저질러서 졸려 눈도 뜨지 못했다.얼버무리게 입을 열었다. "아니, 안 울었다니까…"송재이는 몸만 피곤했을 뿐, 정신은 멀쩡했다.설영준을 보니 자신과 도정원 사이에 뭔가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다. 만약 송재이가 아직도 울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 자신이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웠다.그의 호르몬을 좋아했지만 체력이 바닥났다.하지만 설영준은 송재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설영준은 송재이의 얼굴을 돌려 키스를 갈겼다. 그녀 위로 올라탔다."차라리 이전에 내가 너를 지원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는 내 말도 잘 들었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어! 나를 배신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고혹적이고 허스키했다."오빠로 삼고 싶어? 그럼 나는? 말해봐!"설영준이 물었지만 송재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마치 큰 전쟁을 치르는 듯했다.방안에서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송재이의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설영준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
“많이 긴장했어?”설영준이 태연한 얼굴로 은근히 물었다.송재이는 서둘러 고개를 젓더니 그릇을 내려놓으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설영준은 너무 치명적이었다.그에게는 눈빛 하나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일부러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른다.그러나 오히려 그런 무신경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담긴 짙은 욕망이 그녀를 자꾸만 심란하게 만들었다.다루기 어려운 야수처럼 거친 남자는 매력이 흘러넘치는 법이다.“밥 다 먹으면 돌아가려고?”송재이가 식탁 앞에서 입을 열었다.설영준은 젓가락을 들고 접시 안 음식을 먹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뭐라고?”송재이는 이해하지 못했다.“내가 보고 싶지 않으면 돌아가고, 날 보내는 게 아쉬우면 그냥 여기 남아있을게.”설영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장난기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송재이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설영준이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설영준은 그녀가 직접 얘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내가 가지 말라고 하길 바라는 거야? 꿈 깨! 난 절대 말 안 할 거야!’식사를 마친 송재이는 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난 다 먹었어. 이제 잘 거니까 돌아갈 때 문 잘 잠그고 나가.”말을 마친 뒤 그녀는 조금 짜증이 난 듯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갔다.어젯밤 그녀는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오전 햇볕은 아주 따뜻하고 좋았다.송재이는 다시 침대에 누운 뒤 이불을 덮고 낮잠을 자려고 했다.그러나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잠이 들지 못했다.설영준이 밖에 있다는 걸 알아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탓이었다. 결국 송재이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설영준이 문을 열고 떠나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랑하는 남자에게 홀대받는 느낌이라 괴로웠지만 그 괴로움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이 틀림없이 떠날 거로 생각했다. 다만 그가 언제 떠
“여기서 자고 가는 남자는 내가 첫 번째인 거지?”끝날 때쯤에 송재이는 땀범벅이었다.그녀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자신의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설영준의 말을 들었다.송재이는 후회되기 시작했다. 설영준을 굴복시킬 생각으로 시작한 것인데 결국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참 창피한 일이었다.“첫 번째는 맞지만 마지막은 아닐 거야...”송재이는 이를 악물고 원망스레 대답했다.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소녀의 것처럼 귀엽고 매력적이었다.그런 부드러운 매력이 설영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가끔 토라져서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따질 생각은 없었다.이제 막 그 짓을 끝내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설영준은 피식 웃으며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말은 다른 남자도 만나보고 싶다는 거야? 그러면 못 써. 네가 다른 사람이랑 만나본 적 없어서,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서 그래. 날 소중히 여기라고...”“뻔뻔하긴!”송재이는 그가 뻔뻔하게 느껴졌다.그녀는 몸을 돌려 눈을 부릅뜨면서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설영준은 그녀를 침대 위에 눌러놓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송재이가 욕하고 때려도 설영준은 줄곧 태연했다.육체적으로 만족해서 화를 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설영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의 눈에 송재이는 작은 동물 같아 보였다.오늘 오후에는 낮잠을 잘 생각이었으나 송재이는 몇 번이나 설영준에게 잡아먹혔다.온갖 수단을 다 써도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물론 설영준은 그녀에게 그럴 기회를 줄 생각도 없었다.송재이는 저녁쯤이면 살이 빠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배고파...”날이 저물어서야 송재이는 이불 속에서 작은 머리를 내밀었다.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침대에 앉아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오후에 그가 만들어준 파스타와 토스트, 과일도 먹었지만 또다시 배가 고팠다.설영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슈퍼 갔
휴가가 끝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설영준이 송재이에게 바란 건 잠자리뿐이었기에 그녀와의 미래를 그려본 적은 없었다.앞으로 결혼도 하게 되겠지만 그 상대는 절대 송재이가 아니었다.휴가가 끝나고 3일 뒤, 기업들은 정식으로 업무를 재개하기 시작했다.설한 그룹 회의실.각 계열사 대표들과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설한 그룹 사옥은 경주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사옥으로 백 년 된 기업의 기개와 대범함이 있었다.건물 전체에 하늘을 찌를 듯한 의욕과 생기발랄한 활력이 넘쳤다.아래층에서 위를 바라보던 도정원은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꼈다.제민 그룹도 나쁘지 않았으나 설한 그룹과 비교하면 아예 레벨이 달랐다.직원의 안내에 따라 도정원은 다른 회사 대표들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널찍하고 환한 회의실 안, 도정원은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그가 들고 있는 두꺼운 서류뭉치는 최근 몇 년간의 비즈니스 운영 사례와 운영 방법들이었다.오전 열 시쯤, 설영준은 회의실 옆 방에 있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짧은 머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귀티가 흐르면서도 엘리트 같아 보였다.어떤 이들은 강한 카리스마를 타고났고, 외모는 그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었다.오늘 설영준이 캐주얼한 차림이었다고 해도 그의 남다른 박력과 수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여진이 그에게 손목시계를 건넸다.설영준은 여유롭게 손목시계를 찼고 딸깍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말했다.“가죠.”...설영준은 서류를 챙겨서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의장이 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자리는 아주 익숙했다.설영준의 당당한 뒷모습 위로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의장 자리에 앉았다. 도정원은 그의 대각선 오른쪽 세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설영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무심한 얼굴로 도정원 쪽을 힐끗 바라봤다.“좋은 아침입니다. 새로운 분기의 시찰이 곧 시작될 겁니다. 전 의장 설영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