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이 이름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았고 이내 알아차렸다.‘주현아의 언니?’“이미...”“이미 죽은 줄 알았지?”오서희가 웃기만 하면서 가타부타 말을 안 하다가 이어서 말했다.“어쨌든 주승아가 깨어났어. 만일 그때 사고 나지 않았더라면 벌써 영준이와 결혼했을 거야. 어떤 면에서든 영준의 아내감으로는 네 차례가 없어.”오서희는 수시로 송재이를 탄압했다.전에는 송재이가 오서희의 말에 신경 쓰이고 속상해하고 했지만 이젠 많이 성장했다.오서희의 말을 듣고도 전혀 감흥이 없었고 심지어 오서희가 전에 윤수아가 설영준의 전 여자 친구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렇다면 윤수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서희가 날조한 것이란 말인가?송재이는 자신이 다른 여자의 대역이란 것을 알았을 때 정말 슬펐다.그 슬픔은 다시 끝없는 절망으로 변하면서 송재이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그런데 지금 오서희가 또 다른 변명을 꺼내놓았다.송재이를 한번 속이면 두번 속일 수 있었다. 하여 오서희의 말에 대해 송재의는 반신반의했다.송재이의 답도 듣기 전에 오서희가 서둘러 말했다.“좀 늦게 돈 보내놓을 테니까 돈 받으면 약속 지켜.”무슨 약속? 다름아닌 설영준을 떠나는 것이다.휴대폰 저 편에서 들려오는 신호음 소리를 들으며 송재이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퇴근할 무렵에 이원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저녁에 약속 있어? 같이 저녁 먹을까?”순조롭게 이혼 수속을 마친 이원희의 생활은 점점 풍부해졌다.송재이는 그러자고 했다.차 정비소에 맡겼던 차도 이젠 멀쩡해졌다.퇴근해서 송재이는 산타나를 운전해 상업가 부근에 있는 노점을 향했다.사실 운전하고 갈 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프면서 몸이 불편했다.이때에야 곧 있으면 생리 기간이란 걸 알아차렸다.주차장을 찾아 주차하고 나서 차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뜨거운 것이 확 쏟아져나왔다.전에는 생리 기간이 규칙적이던 것이 처음 유산하고 나서부터 그렇지 못했다.산부인과를 찾아가 봤더니 의사가 약을 처방해
부름소리에는 구조요청을 하는 긴박함이 묻어있었다.송재이가 전에는 예의를 지켜 박윤찬을 “박 변호사님”이라고 불렀는데 이렇게 불러보긴 처음이다.이런 호칭에 박윤찬도 깜짝 놀랐다.송재이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에 급급해서 재빨리 박윤찬의 몸 뒤로 숨어 두 손으로 박윤찬의 셔츠 자락을 잡고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때 설영준이 느릿느릿 걸어왔다.설영준은 박윤찬과 함께 이곳으로 식사하러 온 것이다.박윤찬뿐만 아니라 설영준도 송재이가 위급한 상황이 닥치니 이런 친근한 말투로 박윤찬을 부를 줄 몰랐다.송재이의 부름 소리를 들었을 때 설영준은 걸음을 잠깐 멈췄다가 다시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그이 얼굴은 무섭게 굳어있었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으며 온몸에서 찬 기운이 뿜어져나왔다.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두 남자를 보더니 슬금슬금 도망쳤다.설영준이 냉소를 지으며 박윤찬과 송재이를 번갈아 보았다. 송재이는 그때까지 박윤찬의 셔츠 자락을 잡고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박윤찬의 옆에 서 있으니 왠지 더욱 가냘파 보여 보는 사람의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설영준의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차가운 얼굴로 홱 돌아서더니 그대로 가버렸다.송재이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설영준이 화 난 것을 알아차렸다.설영준과 설명하고 싶었지만 몇 걸음 못가 멈췄다.“송 선생님 괜찮죠?”박윤찬이 물었다.박윤찬은 송재이가 난처할까 봐 재빨리 다른 화제로 넘겼다.“영준 씨는 자회사에 일 보러 오고 저는 출장을 왔어요. 같이 식사하려고 맞은 편 식당을 예약했는데 같이 가실래요?”박윤찬이 말할 때 이원희의 시선이 박윤찬의 몸에 고정되었고 같이 식사를 하자는 말에 송재이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송재이는 이원희의 그런 모습에 의아했다.이원희가 박윤찬에 대해 생각이 있을 줄 몰랐다. 송재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세 사람은 맞은편 식당으로 걸어가면서 통창을 통해 설영준의 모습을 보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그 남자의 얼굴은 안 보였
책상 위에 놓였던 휴대폰이 울리자 송재이는 바로 힐긋 쳐다봤다.그녀는 설영준이 이렇게 총명할 줄 몰랐다. 송재이의 표정과 행동만으로 속마음을 알아냈고 전혀 오차 없이 예상해 냈다.맞은편에 앉아 쉴 새 없이 땀을 훔치는 남자는 설영준과 만나기 전에는 줄곧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했기에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가 밖에서 여자를 희롱하는 모습을 설영준에게 들킬 줄 몰랐다.예약한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와 설영준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설영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가만히 있어도 위엄이 있었다.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남자는 가슴이 떨려 저절로 땀이 줄줄 흘렀다.이것이 극한인 줄 알았더니 좀 지나니 세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이 테이블에 지금 다섯 명이 앉아 있었고 네 명의 시선이 전부 그 남자의 얼굴에 집중되었다.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자 그 남자는 아부하는 듯 떨리는 손으로 메뉴판을 설영준의 앞으로 밀었다.양해를 구하는 뜻이 분명하다.메뉴판이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설영준은 손으로 막으면서 차갑게 말했다.“돌아가세요.”정말 어렵게 설영준이라는 큰 바이어를 알게 되었고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수 없이 소통해 겨우 계약하기 일보 직전까지 왔는데 이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남자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설 대표님, 무슨 뜻이에요?”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설영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인품에 문제가 있어요. 이젠 기회없어요.”...올 때까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남자는 설영준만 만나게 되면 순리롭게 계약이 성사될 줄 알았지만 계약이란 단어를 꺼내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남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식당 밖으로 나갔다.테이블에 남은 몇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이원희와 박윤찬의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송재이와 설영준에게 자리를 피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박윤찬이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분위를 깨더니 종업원
송재이가 이 말을 이원희와 박윤찬이 있는 앞에서 하는 바람에 설영준의 자존심에 상당히 큰 상처를 주었다.마치 설영준이 맨날 송재이를 쫓아다니는 것처럼 들렸다.송재이가 설영준을 피해 남도로 이사까지 왔는데 자꾸 불쑥불쑥 눈앞에 나타났을뿐더러 이곳에 자회사도 성립했다.설영준이 제일 사랑하는 사업을 남도로 옮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 수 있었다.밥을 먹는 송재이의 모습은 여유로우면서도 강해 보였다.설영준은 끝까지 음침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어쩔 바를 몰라 안절부절했다.식사가 끝나자 송재이는 집에 가겠다고 하면서 이원희를 힐끗 쳐다보았다.지금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으니 함께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이원희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설영준이 갑자기 일어서면서 송재이에게 말했다.“나랑 잠깐 어디 다녀와야겠어.”“미안해. 피곤해서 들어가 쉴래.”생리 때문에 몸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이 아랑곳하지 않고 송재이의 손목을 잡아끌자 이원희가 깜짝 놀라면서 옆에 비켜섰다.박윤찬이 앞으로 다가가며 설영준에게 말했다.“영준 씨, 진정해요.”설영준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어 박윤찬을 바라보았다.아까 전 긴급한 시각에 송재이가 말한 첫마디가 ‘윤찬 씨’였다.비록 사정이 있긴 했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호칭에 설영준은 온몸이 불편했다.사실 그는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감정에 있어서는 쪼잔하기까지 했다.“갈 거야 말 거야?”설영준이 낮은 소리로 말하며 차갑게 송재이를 노려보았다.평소 같으면 송재이는 겁이 나서 못 따라갔을 텐데 생리 기간이니 설영준이 아무리 화가 나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송재이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송재이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본 설영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재빠르게 식당을 빠져나갔다.송재이가 하이힐을 신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면서 허둥대는 모습은 초라해 보였고 설영준의 손에 잡힌 손목도 아팠다.“왜 이렇게 난폭해?”식당밖으로 나와 송재
“나쁜 자식? 난폭? 너한테 내가 그리 형편없는 남자였어?”설영준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지라 저도 모르게 유치한 말을 내뱉었다.송재이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아예 외면했다.“내가 싫어?”설영준이 문득 물었다.순간 송재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다행히 얼굴이 창문을 향하고 있는지라 설영준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느릿느릿 대답했다.“그걸 몰라서 물어?”새침한 목소리는 억울함 때문인지 화가 묻어났다.그녀는 설영준이 단지 떠보고 있다고 생각했다.이때, 등 뒤로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설영준은 담배를 물고 힘껏 빨아들였고, 마치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싶었다.이내 차 안에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순간 남자의 손이 턱을 움켜쥐었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빨개진 눈시울은 억울한 듯 보호 본능을 자극했고,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유리처럼 손대면 깨질 듯 위태위태했다.“엄마가 준 10억을 진짜 받은 거야? 고작 돈 때문에 평생 날 외면하겠다고?”“그래, 나 원래 돈에 환장하잖아.”“괜한 객기 부리지 마.”설영준은 그녀가 홧김에 일부러 오서희의 돈을 받은 걸 알고 있었다.그제야 송재이는 어떤 사람인지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왜냐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니까 ‘죄책감과 미안함’이 들었던 것이다.하지만 박윤찬과 다정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 속사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질투심을 감추지 못했다.물론 이런 기분은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박윤찬과 같은 책을 읽고, 두 사람이 찍은 셀카, 그리고 친구의 소송 때문에 박윤찬을 찾아간 걸 알게 되는 순간에도...그러나 둘은 단지 친한 친구에 불과했고, 박윤찬도 송재이에게 관심이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따라서 꼬투리를 잡을 거리가 없어 왠지 모르게 더욱 화가 났다.용암처럼 부글거리는 감정은 오로지 혼자서 삭여야만 했다.이내 그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내부는 유난히 조용했고 송재이가
다음날 송재이는 교장실에 불려갔고, 교장은 그녀에게 해외 공연에 다녀오라고 추천해줬다.학교에서 총 5명의 음악 선생님이 뽑혔는데 그중에 그녀가 있었다.지난번에 교환 학생으로 유학 보내더니 이번에는 오케스트라 공연하러 다시 출국하게 되었다.학교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기회가 벌써 몇 번째인가?사실 교직원 사이에서 이미 그녀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물론 송재이도 알고 있었다. 만약 눈총받기 싫으면 너무 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다만 워낙 관심이 많았던 해외 공연인지라 설령 동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더라도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결국 오후에 교장이 건네준 신청서를 작성했다.공연 일정이 보름 가까이 되기에 과연 설영준한테 얘기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어젯밤만 해도 차 안의 분위기가 미묘했고, 새집 키까지 건네주었다는 건 다시 동거하자는 뜻과 다름없었다.그 뒤로 연락을 못 받았기에 아마도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듯싶었다.저녁이 되자 설영준의 문자가 도착했다.[이사는 좀 생각해봤어?]송재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장했다.[학교에서 해외 공연 다녀오라고 해서 보름 정도 나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설영준은 샤워하고 나와서 그녀의 카톡을 확인했다.그리고 휴대폰을 쥔 채 화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또다시 떠난다는 말에 갑자기 마음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사실 이런 기분은 그녀가 출국한다고 했을 때 이미 경험해 본 바가 있었다.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어긋나냐는 말이다.결국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답장했다.[공연 잘해.]물론 [기다릴게]라는 말은 끝내 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경주 오케스트라에서 송재이는 항상 수석이었다.그 당시에도 늘 오케스트라를 따라 공연하러 다니고는 했었다.나중에 남도에 와서는 이런 대형 행사에 자주 참석하지는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문예슬도 이번에 송재이가 공연 때문에 출국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따라서 리허설에 매진해야 하기에 굳이 방까지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물론 가끔 밤에 야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설령 매번 냉대를 당해도 송재이의 기분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셰프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챙겨왔다.“요즘 고생하고 있는 걸 아니까 체력 보충해. 이거 먹어 봐, 단백질이 듬뿍 들어 있거든.”문예슬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사실 오늘 송재이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온종일 계속된 리허설로 인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앞접시에 놓인 깐 새우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더니 정말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문예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가는 송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화장실에 다가갔다.한편, 양치를 마친 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고,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을 발견했다.“너 혹시 임신했어?”문예슬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송재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송재이가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며칠 전에 생리가 왔는데...”이내 멈칫했다. 물론 이틀 만에 끝나기는 했지만...그러다가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댓글이 문득 생각났다. 어떤 여자가 생리가 온 줄 알았는데 이틀 만에 끝나고 나중에 하혈까지 동반해서 병원에 검사를 받았더니 그제야 자연 유산되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댓글을 떠올리는 순간 송재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녀도...?갑자기 돌변한 송재이의 안색을 보고 문예슬이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행여나 문예슬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았다.“아니야.”‘이상한데?’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송재이를 보
설영준은 미팅이 끝나고 카톡을 확인하게 되었다.오늘 송재이의 공연 날인 걸 알고 카톡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어쩌면 공연이 끝나고 그에게 연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송재이는커녕 엉뚱한 사람한테서 문자를 받을 줄이야.문예슬도 출국한 건가? 게다가 송재이를 만났다니?설영준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문예슬은 마치 송재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갈 기세였다.만약 그에게 고백한 적이 없었더라면 사실 송재이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싶었다.이내 문예슬이 보낸 카톡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임신이라니?지난번 송재이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생리하는 중이지 않았는가?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아니었고, 아무 일도 없는데 임신이 웬 말이지?게다가 카톡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문예슬이며, 이간질한 게 어디 한 두 번뿐이었는가?문예슬의 의도 따위 설영준은 단번에 간파했다.그리고 콧방귀를 뀌더니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송재이가 몸이 안 좋다는 말까지 지어낼 정도는 아닌지라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결국 저도 모르게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송재이는 공연이 끝난 뒤 곧바로 오후에 귀국하는 항공권을 끊었다.그리고 남도에 도착하자마자 설영준한테서 카톡을 받았다.[어디야?]송재이는 흠칫 놀랐다. 설영준이 공연하는 날짜와 그녀가 귀국하는 시간까지 꿰차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내 재빨리 답장했다.[남도에 막 도착했어.]곧이어 마침 교장의 연락을 받게 되자 별생각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고 나서 캐리어를 끌고 교장과 통화하는 바람에 설영준이 나중에 보낸 문자는 보지 못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는 짐을 아파트에 두고 곧장 학교로 향했다.이번 공연은 학교에서도 매우 중요시했기에 성과 보고가 필요했다.공연에 다녀온 다른 선생님과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이어갔다.한편, 설영준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결국 남도로 향하는 제일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