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슬도 이번에 송재이가 공연 때문에 출국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따라서 리허설에 매진해야 하기에 굳이 방까지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물론 가끔 밤에 야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설령 매번 냉대를 당해도 송재이의 기분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셰프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챙겨왔다.“요즘 고생하고 있는 걸 아니까 체력 보충해. 이거 먹어 봐, 단백질이 듬뿍 들어 있거든.”문예슬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사실 오늘 송재이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온종일 계속된 리허설로 인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앞접시에 놓인 깐 새우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더니 정말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문예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가는 송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화장실에 다가갔다.한편, 양치를 마친 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고,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을 발견했다.“너 혹시 임신했어?”문예슬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송재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송재이가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며칠 전에 생리가 왔는데...”이내 멈칫했다. 물론 이틀 만에 끝나기는 했지만...그러다가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댓글이 문득 생각났다. 어떤 여자가 생리가 온 줄 알았는데 이틀 만에 끝나고 나중에 하혈까지 동반해서 병원에 검사를 받았더니 그제야 자연 유산되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댓글을 떠올리는 순간 송재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녀도...?갑자기 돌변한 송재이의 안색을 보고 문예슬이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행여나 문예슬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았다.“아니야.”‘이상한데?’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송재이를 보
설영준은 미팅이 끝나고 카톡을 확인하게 되었다.오늘 송재이의 공연 날인 걸 알고 카톡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어쩌면 공연이 끝나고 그에게 연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송재이는커녕 엉뚱한 사람한테서 문자를 받을 줄이야.문예슬도 출국한 건가? 게다가 송재이를 만났다니?설영준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문예슬은 마치 송재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갈 기세였다.만약 그에게 고백한 적이 없었더라면 사실 송재이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싶었다.이내 문예슬이 보낸 카톡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임신이라니?지난번 송재이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생리하는 중이지 않았는가?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아니었고, 아무 일도 없는데 임신이 웬 말이지?게다가 카톡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문예슬이며, 이간질한 게 어디 한 두 번뿐이었는가?문예슬의 의도 따위 설영준은 단번에 간파했다.그리고 콧방귀를 뀌더니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송재이가 몸이 안 좋다는 말까지 지어낼 정도는 아닌지라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결국 저도 모르게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송재이는 공연이 끝난 뒤 곧바로 오후에 귀국하는 항공권을 끊었다.그리고 남도에 도착하자마자 설영준한테서 카톡을 받았다.[어디야?]송재이는 흠칫 놀랐다. 설영준이 공연하는 날짜와 그녀가 귀국하는 시간까지 꿰차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내 재빨리 답장했다.[남도에 막 도착했어.]곧이어 마침 교장의 연락을 받게 되자 별생각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고 나서 캐리어를 끌고 교장과 통화하는 바람에 설영준이 나중에 보낸 문자는 보지 못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는 짐을 아파트에 두고 곧장 학교로 향했다.이번 공연은 학교에서도 매우 중요시했기에 성과 보고가 필요했다.공연에 다녀온 다른 선생님과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이어갔다.한편, 설영준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결국 남도로 향하는 제일
송재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아니야!”대체 어디서 전해 들었단 말이지?설영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 발코니로 향했다.“문예슬이 카톡 보냈는데 네가 자꾸 구역질한다고 했어.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임신한 거야?”또 문예슬이라니!송재이는 문예슬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려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눌렀다.매번 그녀를 마주칠 때면 꼭 무슨 일이 터졌다.겉으로 아무리 다정하고 살뜰하게 대하는 척해도 단지 방심하게 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실상은 틈만 나면 바가지를 씌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고!“임신 안 했어. 해외 일정이 빠듯해서 스트레스 때문에 구역질이 났을 뿐, 입덧은 아니야.”그녀는 말하면서도 무의식중으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설영준은 아무 말 없이 그윽한 시선으로 송재이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했다.결국 참다못해 등골이 오싹한 나머지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곧이어 다시 설영준에게 붙잡혔다.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에 가까웠다.설영준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엉겁결에 뒷걸음질 치는 송재이를 다시 앞으로 끌어당겼다.코앞에서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남자 때문에 분위기가 금세 미묘하게 변했다.비록 야외에 훤한 대낮이지만 마치 이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설영준을 보자 송재이는 괜스레 쑥스러웠다.이내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말했다.“진짜 임신 아니야.”하지만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만약 임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지난번에는 그에게 미처 알리지도 못하고 아이를 지웠다.이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한편, 설영준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그리고 송재이의 손을 덥석 잡고 밖으로 나갔다.“나랑 같이 병원 가자.”송재이는 어리둥절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미 차
생리 불순을 제외하고 송재이는 면역력도 약한 편이라 양은서는 처방전에 따라 그녀에게 약을 잔뜩 지어주었다.글씨가 빼곡한 처방전을 보며 송재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약을 달이는 건 처음인데...”이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이때, 등 뒤에서 설영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송재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사 와서 나랑 같이 살자고 했잖아. 고민 좀 해봤어?”뜻인즉슨 이사 오면 마침 자기가 약을 달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예전에도 밥해준 적이 있는지라 송재이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맞은편의 양은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설영준은 호의호식하는 도련님으로서 남의 시중을 든 적이 없었다.하지만 송재이의 모습을 보니 마치 설영준이 자주 챙겨주는 듯 무덤덤하기만 했다.양은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넌지시 건넸다.“영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에요. 그 여자가 역시나 재이 씨가 맞았네요!”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아무 말도 안 했다.둘이 다시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고, 적어도 자신은 아직 동의한 적이 없지 않은가?하지만 설영준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이미 자기 여자를 대하는 듯싶었다.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준을 향해 말했다.“오늘 고마웠어. 먼저 가볼게.”말을 마치고 나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단호한 발걸음은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양은서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설영준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뭐야? 이미 사귀는 줄 알았더니 아직도 작업 중이었어?”심기 불편한 설영준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녀를 힘껏 째려보았다.헛기침으로 무마하려는 양은서는 사실 속으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송재이를 위해 약을 달여주는 건 물론 그녀의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라니?...설영준의 아파트로 이사 가서 동거하는 일에 대해 송재이는 아직 확답을 주지 않았다.왜냐하면 앞으로 설영준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제일 걱정되는 부분은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가
사실 송재이는 오서희에게 10억을 돌려줄 생각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그만 새까맣게 잊고 카톡을 보고 나서야 문득 기억이 났다.그리고 계좌에 있는 10억을 그대로 다시 보내주며 재빨리 답장했다.[돈은 이미 돌려드렸어요. 그리고 영준 씨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는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다시 말해서 설영준이 계속해서 매달리면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이는 상대방한테도 사뭇 도발적인 말이었다.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한 오서희는 휴대폰에 대고 연신 욕설을 퍼부었다.무려 60초가 되는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자 송재이는 머뭇거리다가 클릭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악의적인 공격과 경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물론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다.어떻게 보면 오서희도 재벌 사교계에 자주 모습을 보이는 일원으로서 상류층 인사들만 접촉할 텐데 어찌 몰상식한 여자처럼 무지막지하게 굴 수 있단 말이지?비록 고상하고 도도한 겉모습과 달리 또 다른 이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무려 설영준의 어머니가 이런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는 인품과 교양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과연 설영준은 어머니의 본성을 이미 꿰뚫어 봤는지 궁금했다.카톡을 확인한 송재이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리고 이원희와 밥을 먹은 다음 한약까지 마셨다.다시 휴대폰을 봤을 때는 오서희가 보낸 메시지가 몇 통이나 더 있었다.대부분 그녀가 손윗사람의 문자를 읽씹해서 되레 교양이 없고 무례하다는 비난들로 가득했다.송재이는 할 말을 잃었다....이번에는 그녀도 참지 않고 음성 메시지를 문자로 타이핑해서 설영준에게 보냈다.물론 그가 이미 경주로 돌아간 줄 모르고 아직 남도 지사에 있다고 생각했다.공항 로비를 막 벗어난 설영준은 차에 올라타서 휴대폰을 켜자 송재이가 보낸 카톡을 발견했다.사실 오서희가 송재이를 늘 적대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악의가 다분한 내용은 심기가 불편해지기 마련이었다.이내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에
레스토랑.송재이는 자신을 훑어보는 민효연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꼈다.고개를 숙인 채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으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최근에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 게 바로 오서희이지 않은가?설영준과 얽힌 이후로 항상 이러한 평가하고 관찰하는 상황에 놓이는 듯싶었다.어쨌거나 손윗사람인지라 그녀도 굳이 따질 생각이 없었다.그리고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고 민효연을 바라보았다.“우선 축하드려요, 사모님.”민효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축하라니? 왜요?”송재이가 피식 웃었다.“주승아 씨 말이에요. 아직 살아있지 않나요?”큰딸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민효연은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맞아요.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회복에 전념하라고 딸아이도 지킬 겸 외부에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죠. 결국 기적이 나타나 진짜 다시 깨어날 줄은 몰랐어요.”“부모로서 자식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사모님의 표정을 보니 그리 기쁜 편은 아닌가 봐요?”송재이는 뻔히 알면서 물었다.“무슨 일이 있어요?”시간이 흐르고 나서 되돌아보니 민효연도 예전처럼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신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심지어 눈앞의 송재이마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여유가 흘러넘치지 않는가?설영준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분명 그녀만의 색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반면 그러한 신분과 지위를 지닌 사람을 상대하기에 본인은 역부족이었다.이내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비록 깨어나긴 했으나 실력 있는 의료진의 치료가 절실한 상황이죠. 현아가 몹쓸 짓을 워낙 많이 해서 우리 집에 선입견이 있을 수 있지만 승아는 송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혹시라도...”“네?”송재이가 되물었다.“영준한테 부탁해서 승아에게 더 좋은 치료 환경을 제공할 수 없는지 물어봐 주면 안 될까요?”민효연의 말을 듣자 송재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은 영준 씨랑 아
민효연과 헤어진 이후로 송재이는 아파트로 돌아갔다.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고,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 다가와 그녀에게 얼른 식사하라고 했다.방금 민효연과 일식 레스토랑에 가서 코스 요리를 주문했는데 작은 접시에 코딱지만큼 나와서 전혀 배부르지 않았다.게다가 온종일 학교에서 수업하느라 힘든 탓에 배가 꼬르륵거릴 지경이었다.아주머니가 만든 먹물 파스타를 보는 순간 식욕이 확 돋았다.이원희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그녀에게 젓가락을 건네주었다.의자에 앉자마자 송재이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반쯤 먹다가 방금 민효연과 만났을 때 그녀가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이내 곰곰이 생각하더니 결국 휴대폰을 꺼내 설영준에게 카톡을 보냈다.[왜 아직도 주승아 보러 안 간 거야? 그리고 더 좋은 의료진의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던데 혹시 도와줄 수 있어?]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다시 코 박고 파스타 먹기에 여념이 없었다.“누구한테 카톡 보낸 거예요?”이원희가 능글맞은 말투로 물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들고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설마 또 무슨 낌새라도 눈치챈 건가?이원희는 웃으면서 말했다.“얼굴에 모든 감정이 드러나 있다니까? 방금 카톡을 보낼 때 표정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아요?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죠.”송재이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정말 그렇게 티가 나는지 의아했다.곧이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먹물 파스타를 계속 먹었다.결국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설영준은 답장이 없었고, 송재이는 그가 바빠서 못 봤을 거로 생각했다.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다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볼 때 문득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제목은 다음과 같았다.[경주 대표님의 만행?! 3년 동안 만난 여친이 임신하자 바로 내팽개치다?]경주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송재이는 무심결에 링크를 열어보았다.기사에 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구구절절 재벌 설영준을 가르키고 있었다.심지어 그가 최근에 남도 지사를 설립한 이유도 여자를 더 편하게 만나기 위해서
도경진은 설영준의 여자에 대해 사뭇 궁금했다.그러다 갑자기 제안했다.“참, 조만간 자리 한 번 마련하려고 하는데 그때 가서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거예요. 혹시 베일에 싸인 여자 친구분도 모셔 와서 소개할 생각은 없어요?”설영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 여자가 아무한테나 보여줄 그런 사람인가?”도경진은 본인의 가벼운 말투 때문에 설영준이 심기 불편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한편으로 그가 여자 친구를 꽤 아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얼굴이나 익히는 거죠. 나중에 마주치더라도 대표님의 여자 친구분이라는 걸 알고 나면 서로 배려해 주기 마련이잖아요.”설영준은 눈을 내리깔고 곰곰이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송재이가 같이 가겠다고 할 확률은 희박했다.남도에서 일도 하고 있는지라 바쁠 텐데 굳이 모임에 참석하려고 경주까지 오지는 않을 것이다.비록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추측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에게 거절당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예전 같았으면 그는 이런 고민 따위 안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이때, 문득 송재이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약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물론 본인은 끝까지 부정하고 싶지만 진실은 변치 않는 법이다.언제부터인지 이 사랑싸움에서 그는 점점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사업가로서 일방적인 열세는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하지만... 힘들어도 달갑게 받아들이는 건 또 뭐냐는 말이다.“됐어요. 자기 여자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안 가요, 어차피 데려 갈 생각도 없으니까.”그녀에게 거절당하기 전에 설영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어떻게 보면 체면은 지킨 셈이다....설영준은 도경진과 헤어진 이후에 송재이의 카톡을 보게 되었다.그리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민 사장님 만났어? 주승아에 관한 일을 왜 너한테 대신 전달하라고 시키는 거지? 본인은 입이 없대?]송재이는 샤워를 마치고 나서 설영준의 답장을 확인했다.이내 빠르게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