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놓였던 휴대폰이 울리자 송재이는 바로 힐긋 쳐다봤다.그녀는 설영준이 이렇게 총명할 줄 몰랐다. 송재이의 표정과 행동만으로 속마음을 알아냈고 전혀 오차 없이 예상해 냈다.맞은편에 앉아 쉴 새 없이 땀을 훔치는 남자는 설영준과 만나기 전에는 줄곧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했기에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가 밖에서 여자를 희롱하는 모습을 설영준에게 들킬 줄 몰랐다.예약한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와 설영준을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설영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은 가만히 있어도 위엄이 있었다.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남자는 가슴이 떨려 저절로 땀이 줄줄 흘렀다.이것이 극한인 줄 알았더니 좀 지나니 세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이 테이블에 지금 다섯 명이 앉아 있었고 네 명의 시선이 전부 그 남자의 얼굴에 집중되었다.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자 그 남자는 아부하는 듯 떨리는 손으로 메뉴판을 설영준의 앞으로 밀었다.양해를 구하는 뜻이 분명하다.메뉴판이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설영준은 손으로 막으면서 차갑게 말했다.“돌아가세요.”정말 어렵게 설영준이라는 큰 바이어를 알게 되었고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수 없이 소통해 겨우 계약하기 일보 직전까지 왔는데 이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남자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설 대표님, 무슨 뜻이에요?”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설영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인품에 문제가 있어요. 이젠 기회없어요.”...올 때까지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남자는 설영준만 만나게 되면 순리롭게 계약이 성사될 줄 알았지만 계약이란 단어를 꺼내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남자는 몸을 일으키더니 식당 밖으로 나갔다.테이블에 남은 몇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이원희와 박윤찬의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송재이와 설영준에게 자리를 피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박윤찬이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분위를 깨더니 종업원
송재이가 이 말을 이원희와 박윤찬이 있는 앞에서 하는 바람에 설영준의 자존심에 상당히 큰 상처를 주었다.마치 설영준이 맨날 송재이를 쫓아다니는 것처럼 들렸다.송재이가 설영준을 피해 남도로 이사까지 왔는데 자꾸 불쑥불쑥 눈앞에 나타났을뿐더러 이곳에 자회사도 성립했다.설영준이 제일 사랑하는 사업을 남도로 옮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알 수 있었다.밥을 먹는 송재이의 모습은 여유로우면서도 강해 보였다.설영준은 끝까지 음침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어쩔 바를 몰라 안절부절했다.식사가 끝나자 송재이는 집에 가겠다고 하면서 이원희를 힐끗 쳐다보았다.지금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으니 함께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이원희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설영준이 갑자기 일어서면서 송재이에게 말했다.“나랑 잠깐 어디 다녀와야겠어.”“미안해. 피곤해서 들어가 쉴래.”생리 때문에 몸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설영준이 아랑곳하지 않고 송재이의 손목을 잡아끌자 이원희가 깜짝 놀라면서 옆에 비켜섰다.박윤찬이 앞으로 다가가며 설영준에게 말했다.“영준 씨, 진정해요.”설영준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어 박윤찬을 바라보았다.아까 전 긴급한 시각에 송재이가 말한 첫마디가 ‘윤찬 씨’였다.비록 사정이 있긴 했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호칭에 설영준은 온몸이 불편했다.사실 그는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고 감정에 있어서는 쪼잔하기까지 했다.“갈 거야 말 거야?”설영준이 낮은 소리로 말하며 차갑게 송재이를 노려보았다.평소 같으면 송재이는 겁이 나서 못 따라갔을 텐데 생리 기간이니 설영준이 아무리 화가 나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송재이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송재이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본 설영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재빠르게 식당을 빠져나갔다.송재이가 하이힐을 신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면서 허둥대는 모습은 초라해 보였고 설영준의 손에 잡힌 손목도 아팠다.“왜 이렇게 난폭해?”식당밖으로 나와 송재
“나쁜 자식? 난폭? 너한테 내가 그리 형편없는 남자였어?”설영준도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지라 저도 모르게 유치한 말을 내뱉었다.송재이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아예 외면했다.“내가 싫어?”설영준이 문득 물었다.순간 송재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다행히 얼굴이 창문을 향하고 있는지라 설영준은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느릿느릿 대답했다.“그걸 몰라서 물어?”새침한 목소리는 억울함 때문인지 화가 묻어났다.그녀는 설영준이 단지 떠보고 있다고 생각했다.이때, 등 뒤로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설영준은 담배를 물고 힘껏 빨아들였고, 마치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싶었다.이내 차 안에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순간 남자의 손이 턱을 움켜쥐었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빨개진 눈시울은 억울한 듯 보호 본능을 자극했고, 마치 공중에 매달려 있는 유리처럼 손대면 깨질 듯 위태위태했다.“엄마가 준 10억을 진짜 받은 거야? 고작 돈 때문에 평생 날 외면하겠다고?”“그래, 나 원래 돈에 환장하잖아.”“괜한 객기 부리지 마.”설영준은 그녀가 홧김에 일부러 오서희의 돈을 받은 걸 알고 있었다.그제야 송재이는 어떤 사람인지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왜냐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니까 ‘죄책감과 미안함’이 들었던 것이다.하지만 박윤찬과 다정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 속사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질투심을 감추지 못했다.물론 이런 기분은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박윤찬과 같은 책을 읽고, 두 사람이 찍은 셀카, 그리고 친구의 소송 때문에 박윤찬을 찾아간 걸 알게 되는 순간에도...그러나 둘은 단지 친한 친구에 불과했고, 박윤찬도 송재이에게 관심이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따라서 꼬투리를 잡을 거리가 없어 왠지 모르게 더욱 화가 났다.용암처럼 부글거리는 감정은 오로지 혼자서 삭여야만 했다.이내 그는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내부는 유난히 조용했고 송재이가
다음날 송재이는 교장실에 불려갔고, 교장은 그녀에게 해외 공연에 다녀오라고 추천해줬다.학교에서 총 5명의 음악 선생님이 뽑혔는데 그중에 그녀가 있었다.지난번에 교환 학생으로 유학 보내더니 이번에는 오케스트라 공연하러 다시 출국하게 되었다.학교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런 기회가 벌써 몇 번째인가?사실 교직원 사이에서 이미 그녀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물론 송재이도 알고 있었다. 만약 눈총받기 싫으면 너무 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다만 워낙 관심이 많았던 해외 공연인지라 설령 동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더라도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결국 오후에 교장이 건네준 신청서를 작성했다.공연 일정이 보름 가까이 되기에 과연 설영준한테 얘기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어젯밤만 해도 차 안의 분위기가 미묘했고, 새집 키까지 건네주었다는 건 다시 동거하자는 뜻과 다름없었다.그 뒤로 연락을 못 받았기에 아마도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듯싶었다.저녁이 되자 설영준의 문자가 도착했다.[이사는 좀 생각해봤어?]송재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장했다.[학교에서 해외 공연 다녀오라고 해서 보름 정도 나가 있을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설영준은 샤워하고 나와서 그녀의 카톡을 확인했다.그리고 휴대폰을 쥔 채 화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또다시 떠난다는 말에 갑자기 마음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사실 이런 기분은 그녀가 출국한다고 했을 때 이미 경험해 본 바가 있었다.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어긋나냐는 말이다.결국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답장했다.[공연 잘해.]물론 [기다릴게]라는 말은 끝내 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경주 오케스트라에서 송재이는 항상 수석이었다.그 당시에도 늘 오케스트라를 따라 공연하러 다니고는 했었다.나중에 남도에 와서는 이런 대형 행사에 자주 참석하지는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문예슬도 이번에 송재이가 공연 때문에 출국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따라서 리허설에 매진해야 하기에 굳이 방까지 찾아가서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물론 가끔 밤에 야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설령 매번 냉대를 당해도 송재이의 기분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셰프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챙겨왔다.“요즘 고생하고 있는 걸 아니까 체력 보충해. 이거 먹어 봐, 단백질이 듬뿍 들어 있거든.”문예슬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그녀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사실 오늘 송재이는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온종일 계속된 리허설로 인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앞접시에 놓인 깐 새우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더니 정말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문예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가는 송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화장실에 다가갔다.한편, 양치를 마친 송재이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고,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을 발견했다.“너 혹시 임신했어?”문예슬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송재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송재이가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며칠 전에 생리가 왔는데...”이내 멈칫했다. 물론 이틀 만에 끝나기는 했지만...그러다가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댓글이 문득 생각났다. 어떤 여자가 생리가 온 줄 알았는데 이틀 만에 끝나고 나중에 하혈까지 동반해서 병원에 검사를 받았더니 그제야 자연 유산되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댓글을 떠올리는 순간 송재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그녀도...?갑자기 돌변한 송재이의 안색을 보고 문예슬이 바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행여나 문예슬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여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았다.“아니야.”‘이상한데?’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송재이를 보
설영준은 미팅이 끝나고 카톡을 확인하게 되었다.오늘 송재이의 공연 날인 걸 알고 카톡이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어쩌면 공연이 끝나고 그에게 연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송재이는커녕 엉뚱한 사람한테서 문자를 받을 줄이야.문예슬도 출국한 건가? 게다가 송재이를 만났다니?설영준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문예슬은 마치 송재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갈 기세였다.만약 그에게 고백한 적이 없었더라면 사실 송재이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싶었다.이내 문예슬이 보낸 카톡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임신이라니?지난번 송재이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생리하는 중이지 않았는가?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만한 여건이 아니었고, 아무 일도 없는데 임신이 웬 말이지?게다가 카톡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문예슬이며, 이간질한 게 어디 한 두 번뿐이었는가?문예슬의 의도 따위 설영준은 단번에 간파했다.그리고 콧방귀를 뀌더니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송재이가 몸이 안 좋다는 말까지 지어낼 정도는 아닌지라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결국 저도 모르게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송재이는 공연이 끝난 뒤 곧바로 오후에 귀국하는 항공권을 끊었다.그리고 남도에 도착하자마자 설영준한테서 카톡을 받았다.[어디야?]송재이는 흠칫 놀랐다. 설영준이 공연하는 날짜와 그녀가 귀국하는 시간까지 꿰차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내 재빨리 답장했다.[남도에 막 도착했어.]곧이어 마침 교장의 연락을 받게 되자 별생각 없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러고 나서 캐리어를 끌고 교장과 통화하는 바람에 설영준이 나중에 보낸 문자는 보지 못했다.전화를 끊고 나서는 짐을 아파트에 두고 곧장 학교로 향했다.이번 공연은 학교에서도 매우 중요시했기에 성과 보고가 필요했다.공연에 다녀온 다른 선생님과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몇 시간 동안 회의를 이어갔다.한편, 설영준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결국 남도로 향하는 제일
송재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아니야!”대체 어디서 전해 들었단 말이지?설영준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복도를 지나 발코니로 향했다.“문예슬이 카톡 보냈는데 네가 자꾸 구역질한다고 했어. 몸이 안 좋은 거야? 아니면 임신한 거야?”또 문예슬이라니!송재이는 문예슬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려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눌렀다.매번 그녀를 마주칠 때면 꼭 무슨 일이 터졌다.겉으로 아무리 다정하고 살뜰하게 대하는 척해도 단지 방심하게 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실상은 틈만 나면 바가지를 씌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빌어먹을 여자 같으니라고!“임신 안 했어. 해외 일정이 빠듯해서 스트레스 때문에 구역질이 났을 뿐, 입덧은 아니야.”그녀는 말하면서도 무의식중으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설영준은 아무 말 없이 그윽한 시선으로 송재이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했다.결국 참다못해 등골이 오싹한 나머지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하지만 곧이어 다시 설영준에게 붙잡혔다.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에 가까웠다.설영준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고, 엉겁결에 뒷걸음질 치는 송재이를 다시 앞으로 끌어당겼다.코앞에서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남자 때문에 분위기가 금세 미묘하게 변했다.비록 야외에 훤한 대낮이지만 마치 이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설영준을 보자 송재이는 괜스레 쑥스러웠다.이내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말했다.“진짜 임신 아니야.”하지만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만약 임신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지난번에는 그에게 미처 알리지도 못하고 아이를 지웠다.이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다.한편, 설영준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침묵을 유지했다.그리고 송재이의 손을 덥석 잡고 밖으로 나갔다.“나랑 같이 병원 가자.”송재이는 어리둥절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이미 차
생리 불순을 제외하고 송재이는 면역력도 약한 편이라 양은서는 처방전에 따라 그녀에게 약을 잔뜩 지어주었다.글씨가 빼곡한 처방전을 보며 송재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약을 달이는 건 처음인데...”이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이때, 등 뒤에서 설영준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송재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이사 와서 나랑 같이 살자고 했잖아. 고민 좀 해봤어?”뜻인즉슨 이사 오면 마침 자기가 약을 달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예전에도 밥해준 적이 있는지라 송재이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맞은편의 양은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설영준은 호의호식하는 도련님으로서 남의 시중을 든 적이 없었다.하지만 송재이의 모습을 보니 마치 설영준이 자주 챙겨주는 듯 무덤덤하기만 했다.양은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농담을 넌지시 건넸다.“영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에요. 그 여자가 역시나 재이 씨가 맞았네요!”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아무 말도 안 했다.둘이 다시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고, 적어도 자신은 아직 동의한 적이 없지 않은가?하지만 설영준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이미 자기 여자를 대하는 듯싶었다.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준을 향해 말했다.“오늘 고마웠어. 먼저 가볼게.”말을 마치고 나서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고, 단호한 발걸음은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양은서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설영준을 바라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뭐야? 이미 사귀는 줄 알았더니 아직도 작업 중이었어?”심기 불편한 설영준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녀를 힘껏 째려보았다.헛기침으로 무마하려는 양은서는 사실 속으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송재이를 위해 약을 달여주는 건 물론 그녀의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라니?...설영준의 아파트로 이사 가서 동거하는 일에 대해 송재이는 아직 확답을 주지 않았다.왜냐하면 앞으로 설영준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제일 걱정되는 부분은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