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윤은 진정훈의 말을 듣더니 눈을 내리깔며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진정훈은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할머니하고 엄마는.”방금 김영희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진정훈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이것이 바로 그가 그토록 화목하다고 여겼던 가족이었다.지금 와서 보니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진정훈이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해 얘기할 때 진윤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형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거지?”진정훈은 진윤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사실 진윤이 대답하지 않아도 진정훈은 이미 진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진윤이 왜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그건 너무나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형 난 엄마와 동생이 그때 당한 불행한 일도 할머니가 꾸민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맞아.”진정훈은 순간 숨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형은 다 알고 있었네.”“믿을 수 있어?”‘아니 믿을 수 없어.’진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밤 일이 있기 전에 진윤이 진정훈에게 말했다면 진정훈은 아마도 진윤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훈은 이제 믿었다.진윤은 할머니와 아버지를 증오했고 그동안 두 사람을 거의 원수처럼 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었을까? 남이었다면 진윤은 바로 제거했겠지만 할머니와 아버지에게는 복수를 한다고 해도 결국 무력한 인생만 남을 것이다.그동안 진윤은 오직 비즈니스에서만 진성택을 방해했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그러데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 그리고 호영이에게도.”진정훈과 진호영은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할머니는 그동안 두 사람과도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할머니에게 잘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하늘 아래 어떻게 이렇게 독한 할머니가 있을 수 있는 거지? 며느리가 싫어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고
진윤은 와인진을 내려놓고서는 진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알고 싶어?”“정말 알고 싶냐니? 난 알 권리도 없다는 거야?”“그럼 넌 지금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진윤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진정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뭘 의미하냐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오늘 김영희의 일이 너무 갑작스러워 진정훈은 지금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어머니의 죽음과 여동생의 실종이 할머니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진정훈은 믿을 수 없었지만 진윤이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진정훈은 믿지 않을 수 없었다.진윤이 깊은 눈빛으로 망설이자 진정훈은 다시 한번 진윤을 재촉했다.“형.”진윤은 와인잔을 들어 또 한 잔을 비웠다.진정훈은 그런 진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더욱 답답했다.“알려줘. 진유경은 도대체 누구야?”“진성택의 사생아야.”순간 진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거실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진정훈은 멍하니 진윤을 바라보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숨소리만 들렸다.“아니. 더 자세히 얘기하면 진성택과 첫사랑 사이의 사생아야.”진정훈이 물었다.“무슨 뜻이야?”‘첫사랑의 사생아? 무슨 뜻이지?’진윤은 조롱이 가득 섞인 웃음을 터뜨렸고 거기에는 얼핏 광기도 섞여 있었다.그동안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진성택을 증오하게 된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진유경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동생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왜 말하지 않았을까? 그건 바로 너무 역겨웠기 때문이다.진윤은 자기 가족에 대해 지독히도 역겨움을 느꼈다.진정훈은 윙윙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서는 떨리는 눈동자로 진윤의 말을 기다렸다.진윤은 다시 와인잔을 채우며 말했다.“그때 여동생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성택은 진유경을 집으로 데려왔어. 그 이후의 일은 너도 알다시피 어머니는 진유경을 많이 사랑하셨지.”진정훈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맞아 엄마가 진유경을 얼마나 사랑했어.’“그럼 설마 엄마는.”“엄마에게 사실을 말했을 리가 있겠어?”진윤은
진윤은 할머니가 왜 그렇게 진유경을 아꼈는지 정말 몰랐다. 아마 그 내막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진씨 가문과 그는 완전히 무관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진정훈은 다시 냉담해진 진윤의 모습을 보며 답답해서 물었다.“왜 이제야 나한테 말해주는 거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여기까지 말한 진정훈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그동안 진유경을 아끼고 사랑했던 장면들이 미친 것처럼 진정훈의 머릿속을 휩쓸었다.매번 진유경을 위해 정성껏 선물을 골라 생일파티를 열어주며 마치 공주처럼 그녀를 예뻐했다.당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여동생에게 쏟았던 감정을 모두 진유경에게 퍼부었었다.그러나 지금 갑작스럽게 이런 진실을 알게 되자 진정훈은 모든 일들을 단번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왜 이제서야 이런 사실을 말해주었냐고 묻는 진정훈의 질문에 진윤은 차가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한테 알려줘서 뭐 해? 너와 진성택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려고? 진성택은 널 통제할 수 없어.”“그럼 형은 내가 진유경을 아껴주는 걸 그냥 지켜봤다는 거야? 형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진정훈 한 사람의 인생에 오직 증오만 남아 있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야. 그리고 증오 때문에 파괴하면 안 되는 것들도 있어.”진윤의 목소리는 이 순간 더욱 엄숙해졌다.하지만 진정훈은 이 말에 할 말을 잃었다.‘그러니까 형은 내가 사실을 알게 되면 아버지와 갈등이 생겨 반항하고 순탄하게 성장할 수 없을까 봐 걱정한 거야?’“호영이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지.”진호영이 당시 얼마나 어렸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어찌 됐든 진윤은 당시 사실을 알게 된 후 거의 주저 없이 진씨 가문을 버렸다.진정훈은 눈을 감았다. 심장이 너무 아파 제대로 숨쉬기조차 힘들었고 목은 금방 뻣뻣해졌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와인잔을 들어 원샷했다.“이제 마지막으로 물을게.”진정훈은 숨이 멎을 듯이 호흡하며 입을 열었다.진씨 가문에 대해
진유경은 김영희의 품에 안겨 울다가 진정훈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눈가가 더 붉어지더니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둘째 오빠.”진유경이 진정훈을 부르는 목소리에 김영희도 문 앞을 바라보았다.진정훈을 발견한 순간 김영희 얼굴에 남아 있던 모든 온화함은 완전히 사라졌다. 진유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진정훈을 바라보았다.“오빠 난 정말 그러지 않았어.”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할머니는 진유경을 품에서 떼어낸 뒤 똑바로 앉게 했다. 그런 다음 엄숙한 얼굴로 진정훈을 바라보았다.“기사한테는 내가 다시 물어봤다. 네 외할머니의 지시라고 하더구나.”‘멀리 있는 정가 마을의 외할머니?’진정훈은 순간 비웃음을 터뜨렸다.김영희는 그런 진정훈의 모습에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진정훈이 먼저 말했다.“정말 변명도 잘하시네요.”몇 년 동안 외할머니는 한 번도 강성에 돌아온 적이 없었고 진유경에게 호감을 보인 적도 없었다.‘그런데 지금 내가 정가 마을에서 돌아오자마자 외할머니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는 거야? 형의 말이 맞았어. 이 가문 정말 역겹네.’하지만 지금 진정훈의 눈에는 떠나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는 진윤처럼 하지 않을 것이다.그런 방식은 고통받지 말아야 할 사람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김영희는 진정훈의 말투를 듣고 나서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너 이 자식. 감히 이 할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해? 내가 네 할머니야.”진유경은 김영희의 화가 난 모습을 보더니 서둘러 일어나 김영희를 부축하며 말했다.“할머니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오빠 할머니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진유경은 한 편으로는 급히 김영희를 부축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원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진정훈을 바라보았다.이 순간 진유경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오빠는 그동안 날 정말 아껴줬는데 지금 왜 이러는 거야?’진정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김영희는 심하게 화가
이번에 진정훈은 진유경을 놓아주며 강한 힘으로 큰비 속으로 내던졌다.“아.”내던져진 순간 진유경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김영희는 따라 나와 이 광경을 목격하고서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이 못된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이야.”김영희는 이렇게 외치며 비가 쏟아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빗속으로 뛰어들어 진유경을 품에 안았다.진성택도 뒤따라 나와 이 혼란스러운 장면을 보고 진정훈에게 분노하며 외쳤다.“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빗소리와 울음소리 그리고 김영희의 욕설 뒤이어 진성택의 분노 섞인 꾸짖음까지 진정훈은 모두 차가운 표정으로 들으며 바닥에 던져버린 진유경을 혐오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진유경도 진정훈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마치 겁에 질린 토끼처럼 온몸을 떨었다.예전 같았으면 진정훈은 진유경의 이런 모습을 보고 분명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슴이 아프다고 해도 진유경 때문이 아니었다.진정훈은 눈을 감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 당장 여기서 나가.”“뭐라고? 너 이 녀석 미쳤구나.”원래도 화가 나 있던 김영희는 진정훈의 말에 더더욱 분노했다.진성택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어딘가 이상한 진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너 대체 무슨 일이야?”“무슨 일이냐고요? 그건 제가 아버지한테 묻고 싶네요.”진정훈은 아버지라는 말에 조롱의 뜻을 가득 담아 강조하며 말했다.진성택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로 진정훈은 진성택의 말을 순종적으로 따르며 진윤을 너무 냉정하다고까지 말했었다. 그러니 지금 징정훈은 자기 행동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깨달았다.진성택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진정훈을 바라보았다. 진정훈은 그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더욱 비꼬듯 말했다.“왜요? 유경이가 불쌍하세요?”“진정훈.”진성택의 무거운 목소리에 진성훈이 이어서 말했다.“아버지 정말 파렴치하고 역겹네요.”순간 진성택은 할 말을 잃었다. 원래도 표정이 어두웠던 진성택은 진정훈의 말에 왜 이런
진정훈과 고은영은 이렇게 약 5분간 팽팽하게 대치하다가 결국 고은영이 우산을 들고 진정훈의 옆으로 향했다.고은영은 깨끗한 휴지를 진정훈에게 건넸다.진정훈은 멍하니 깊은 슬픔이 서려 있는 눈빛으로 고은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진정훈의 모습에 고은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너무 여동생을 버릇없게 만드는 거 아니에요? 다 큰 성인 남자가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게 맞다고 생각하세요?”진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은영의 말을 들은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고은영은 휴지를 진정훈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나와 준우 씨는 이미 아이도 있어요. 그쪽 여동생한테 다른 남자 알아보라고 하세요. 다리가 네 개 달린 개구리는 찾기 힘들어도 다리가 두 개 달린 남자는 준우 씨보다 잘생긴 사람이 있을 거예요.”비록 고은영은 배준우가 잘생겼다는 걸 인정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미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었다.고은영은 계속 진정훈이 그녀와 배준우에게 집착한다고 느꼈다. 진유경이 배준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은영이 배준우와 이혼해 주길 진정훈은 원할 것이다.부자들의 세계를 고은영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이 따라잡을 수 없다고 여겼다.고은영은 진정훈이 최근 집착했던 것이 떠올라 한 마디 덧붙였다.“그리고 나한테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 비록 내가 가난하게 살았고 어릴 때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지켜야 할 원칙을 무시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사람은 아니에요. 게다가 난 결혼도 했고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거든요.”진정훈은 고은영의 말에 입꼬리가 떨려왔다. 이제야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고은영의 뜻은 내가 진유경 때문에 접근했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자기를 좋아해서? 자기와 배준우를 헤어지게 만들고 진유경에게 기회를 주려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진정훈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그렇게 생각하는 거야?”진유경을 위해서 원칙을 져버리고 고은영과 배준우의 관계를 파괴해서 자
고은영이 집에 들어서자 라 집사는 그녀에게 배준우가 서재에서 화상 회의를 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고은영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방으로 가서 샤워한 뒤 아기를 보고서는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배준우가 통화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배준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어냈다.“알겠어.”그렇게 말한 뒤 배준우는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고은영을 보고 배준우는 바로 표정을 풀었다.“왔어?”“네.”고은영은 방으로 달려 들어가 배준우의 품에 안겼다. 배준우는 무의식적으로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고은영은 정말로 피곤했다. 며칠간 고은지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써서 힘들었을 것이다.배준우는 많이 야위어 보이는 고은영을 보고 그녀를 안아 소파에 앉았다. 고은영도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배준우는 사랑이 듬뿍 담긴 손길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피곤해?’고은영은 응하고 대답하며 정말로 피곤해했다.사실 고은영은 단순히 피곤할 뿐만 아니라 고은지의 아픈 모습을 마주할 때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심적으로 부담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배준우의 품에서 그녀는 작은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아까 문 앞을 진정훈이 막고 서 있었어요.”그 말을 들은 배준우는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무슨 말을 했는데?”고은영은 배준우의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하고 말했다.“이번에는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고 그냥 조금 이상하게 굴었어요.”전에 봤을 때는 미친 듯이 그녀를 잡아당겼었다.그런데 방금 진정훈의 모습은 고은영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진정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고은영은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전에 배준우의 옆에서 일할 때 매번 외국 잡지 표지에 실린 진정훈의 기사를 봤기 때문이다.진정훈은 재계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냈다.그런데 자기 여동생에 관한 일에서는 어쩜 그렇게 무례하
“정말 아무 뜻도 없었어요.”고은영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심지어 약간의 불안함까지 섞여 있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배준우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고은영은 그날 밤 그와는 달랐다. 그녀는 최소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의식이 있었다.“은영아 착하지. 나한테 말해줘.”고은영은 배준우의 말을 듣고 머릿속이 더욱 윙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말해달라고? 뭘 말하라는 거야? 그때 몸에 마치 수천 마리의 개미가 갉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도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는 걸 말하라는 거야? 그러고 나서 결국 내가 대담하게 먼저 준우 씨를 덮쳤다고?’“은영아.”“아 그만 물어봐요.”그 일에 대해 고은영은 감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다.배준우는 고은영의 반응을 보며 더욱더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사실 그날 밤 배준우는 고은영인 것을 확인했을 때 기쁨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다. 평소 고은영은 항상 그의 옆에서 얌전히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고은영을 가장 얌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날 밤 고은영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배준우도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그런 용기를 주었는지 알 수 없었다.“응. 말 안 할 거예요.”고은영은 작은 입술을 꼭 다물고서는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결국 배준우의 수단 앞에서 그녀의 다짐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날 밤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모든 사실을 알게 된 배준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다.‘이 계집애가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고은영이 말했다.“난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맞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 참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참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눈 한 번 마주쳐도 울 것처럼 두려워하던 남자를 바로 덮쳐버렸다.배준우는 고은영의 작은 얼굴을 꼬집었다.“너 그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거야?”“그때 나도 술에 취해 있었어요.”술은 겁쟁이도 용기 있게 만든다는 말이 고은영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