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천옥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가 않았던 그녀는 다시 상자를 들고 걸어갔다."오늘 이 문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가출? 맘대로 해.하지만 량천옥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근데 내가 가출하는거 너한테도 나쁘지 않은 일 아니야?”배씨 가문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어떤 일에 부딪혀도 치욕을 참고는 혼자서 그 무거운 짐을 짊어졌었다.배항준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히든, 그녀는 항상 묵묵히 참아왔다.그러나 이번에는 제대로 끝장을 내고 싶었다.원래도 조용했던 배씨 가문은... 이젠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화가 난 배항준은 손에 든 물건을 냅다 땅에 내리쳤다."쾅!"수백만 원짜리 골동품 꽃병들이 산산조각 나버렸다.옆에서 지켜보던 집사와 하인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그렇게 량천옥은 아예 집을 떠나버렸다.......이튿날이 돼서야, 배준우는 이 소식을 접했다.평소에는 항상 고은영을 데리고 배씨 가문으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집으로 찾아갔다.데리고 오지 말라고 할 때는 같이 오더니, 데리고 오라 하니까 이번엔 혼자 온거라니! 밤새 화가 채 가시지 않았던 배항준은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집에는 배윤도 있었고, 모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오늘 배준우가 어떻게든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배준우는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꺼냈다."천의 때문에 나를 찾아온거야?"그는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떠보았다. 량천옥이 천의를 갑자기 고은영의 손에 넘긴 것 자체가 배씨 가문에게 있어서는 큰 사건이니까 말이다. 배준우의 무덤덤한 모습에, 배항준과 배윤은 어이가 없었다.이때 배항준이 입을 열었다."변호사한테 서류들을 준비하라고 하고 고은영한테 거기다 사인하라고 해."이것이 바로 그가 밤새 생각해낸 최후의 해결 방안이었다.천의는 량천옥이 일으켜세운 것은 맞지만, 배씨 가문의 돈을 쓴 것이기에 절대 빼앗기고 싶지가 않았다.심지어 천의는 현재 M국에서도 시가 2조를 자랑하고 있었
소문을 접한 배윤과 배항준은 어안이 벙벙했졌다.글쎄 배준우가 고은영을 지키려고 할 줄이야… 이대로라면 고은영의 손에서 천의를 뺏어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설마 량천옥이 이 상황을 예상한건가? 일부러 배준우를 이용하려고 고은영에게 천의를 준건가? 정말 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배준우는 자리를 떠났고,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배항준은 배윤을 매섭게 노려보며 화를 냈다."거 봐, 이게 다 네가 애초에 사업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후과라고.” "아버지, 그게 무슨...""네가 일찍이라도 철이 들었더라면, 천의는 진작에 네 명의로 되어 있었을거야. 아니면 어떻게 그런 여자의 손에 들어갈 수가 있겠어?"량천옥이 여태 천의를 키워온건 애초에 배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사실이었다.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건 아버지가 전부터 계속 형한테 천의를 주겠다고 고집 부린 영향도 있잖아요." 게다가, 어찌 보면 배항준이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서 미움을 산 이유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배윤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복수를 하면서 자신까지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안 그래도 짜증 나는 상황에서 배윤이 따박따박 대들자 배항준은 더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았다.......그렇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배씨 가문 전체는 순식간에 혼란스럽게 변했다.그리고 량천옥은 이 혼란 속에서도 배항준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고 재빨리 강성을 떠났다.......하지만 정작 고은영은 이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배지영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에도 그녀는 어리둥절했다."언니, 저희 아래층에서 만나요.""아가씨, 굳이 저희가 만날 필요 있을까요? 결국 저랑 준우 씨의 일은 아가씨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에요.""...""제대로 얘기를 하려면 이 일에 대해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가요?"이 일에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배준우
배지영이 말한대로, 고은영은 순수해보이긴 해도 절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영은 배지영이 자신을 찾아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가 말했듯이, 이 일에 있어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배준우 뿐이었다."더이상 할 말 없으면 먼저 끊을게요.""잠깐만요!"고은영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배지영이 급히 불렀다.이쯤 되면 배지영도 더이상 고은영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이 여자, 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야.곧이어 배지영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물었다."오빠는 지금 회의하고 있어요?""네.""그럼 제가 언니 찾으러 올라갈게요."배준우가 아직 회의 중이라는 말에 배지영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은 어떻게든 고은영을 만나 이 일을 해결하려 했다.근데 자신의 착각이였는지 아니였는지, 고은영에게는 확실히 전보다 많은 변화가 생겼다.예전에는 줄곧 모두에게 공손했던 그녀가 지금은 아예 배씨 가문의 사모님 행세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가? 설마 아예 작정하고 오빠 곁에 남아 있으려는건가?순간 배지영의 얼굴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그렇게 전화를 끊은 지 5분 만에 배지영이 정말로 찾아왔다.배준우가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한편, 고은영은 조용히 그를 위한 목도리를 짜주고 있었다.그녀의 손놀림은 누가 봐도 초보처럼 보였다.배지영은 곧바로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 두리번거렸다.이때 고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계속 망설일거예요? 준우 씨 회의가 곧 끝날텐데."그러자 배지영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바로 하고 싶었던 말들을 내뱉었다."이렇게 하면 평생 배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거예요? 량천옥이 이런 짓을 벌인건 단지 저희 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그런거예요."그 말을 들은 고은영은 뜨개질을 멈추고는 물었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복수라니? 량천옥이 뭘 어쨌다고?그녀는 며칠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지만, 단지 량천옥이 요즘 줄곧 배준우
배씨 가문은 여태 량천옥만 천의를 포기하면 무조건 자신들의 손에 다시 돌아올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 문제가 아니었다."제 명의로요?" 처음 듣는 사실에 고은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량천옥이 날 얼마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천의를 내 명의로 두었다는 거야? 고은영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줄 알았던 배지영은 더욱 화가 났다."여태 몰랐다는 뻔한 거짓말은 하지 마요.""정.. 정말 몰랐어요!"고은영은 억울한 표정으로 배지영을 바라보았다. 고은영은 어쩐지 배지영이 오늘따라 이렇게 막무가내였나 싶었는데, 바로 천의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런데, 대체 어떻게 내 명의로 된거지?배지영은 그저 아무것도 모른다는 고은영이 답답하기만 했다.지분까지 양도를 받아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말인가. "믿든 안 믿든 그건 아가씨가 알아서 판단하세요. 하지만 전 정말 이 일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어요.""몰랐어도 괜찮아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빨리 천의를 오빠 명의로 넘겨요."배지영은 뻔뻔하게 제안했다.그녀는 량천옥이 떠난 틈을 타 하루라도 빨리 모든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자신의 친 어머니가 다시 돌아왔을 때 반갑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량천옥이 이렇게 사고를 치고 빠르게 도망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배지영의 제안에 고은영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원래도 천의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딱히 가질 마음도 없었다.배지영은 생각보다 눈치 빠른 고은영의 모습에 마침내 화를 좀 가라앉히고는 제대로 본색을 드러냈다."저희 어머니께서 딱 사흘 후면 바로 돌아오실거예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죠?""..."사흘?이렇게나 빨리?고은영이 대답하려는 순간, 사무실 입구에서는 배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체 뭘 알아야 되는데?""...""..."언제 벌써 회의가 끝나고 나타났는지 두 사람은 그의 인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은
이렇게나 어마어마한 기업이 우리 가문도 아니고 어떻게 아예 바깥 사람한테 넘겨질 수가 있겠어?배지영이 계속해서 선을 넘는 발언을 하자 배준우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어머니가 돌아오시면 언니한테도 좋을 건 없어. 그러니까 오빠가 알아서 빨리 처리해.”"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당연히 오빠 명의로 넘겨야지!"배지영은 단호하게 말했다.누구의 명의로 하든 어찌 됐든 고은영의 명의로 하는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량천옥이 막무가내로 벌인 일 때문에 현재 모든 책임은 배항준한테 넘어간 상황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오게 되면 괜히 까다롭게 이 일에 연루될가봐 불안하기도 했다.노발대발하는 배지영의 모습을 보고도 배준우는 덤덤했다. 하지만 배지영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배준우가 답답하기만 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너가 이렇게까지 조급한건 단지 천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그러자 배지영의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그 여자가 강성을 떠난것도 애초에 다 네 계획이었나 봐?""...""그런데 그 여자가 떠나고 나서 이런 후과가 있을 줄은 몰랐나 봐?" 배준우가 날카롭게 물었다.그 깊은 눈빛으로 배지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그의 말에 배지영은 순간 허무함을 느꼈다."함부로 말하지 마! 그 여자가 스스로 떠난게 왜 내 계획이야?!""그래?"하지만 배준우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 했다.배지영은 지금 이 순간, 가슴이 몹시 떨려지기 시작했다.원칙대로라면 량천옥은 여태 배씨 가문에서 받아온 모든 것들을 전부 돌려내야 했다.배준우는 원래 그녀를 배씨 가문에서 직접 쫓아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그런데 배지영이 이렇게까지 조급해하는걸 봐서는, 암암리에 량천옥을 제대로 쫓아내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배지영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겨우 입을 뗐다."지금 그게 중요해..? 천의나 빨리 뺏어오라고."지금 그녀는 무엇보다도 천의가 하루 빨리 배씨 가문에 돌아오는
배지영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진씨 가문과 배씨 가문 사이의 혼약은 오래 전부터 이미 결정된 일이었어.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당장 혼약을...""그래서, 뭐?""진씨 가문의 다른 남자 아이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오빠랑 진유경 말고는 당장 혼약을 맺을 사람이 없어.”막무가내로 몰아가는 배지영의 모스에 배준우는 점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리고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진씨 가문인데 뭐 어쩌라고?"진씨 가문이 혼약을 진행하겠다고 하면 배씨 가문이 무조건 해줘야 되는건 아니기에 배준우 또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넌 일단 가.”그는 더 이상 배지영한테서 구구절절한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보아하니 진씨 가문과 배씨 가문은 확실히 보기 보다 쉬운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배지영은 생각보다 단호한 배준우가 답답했다. "오빠!""당장 나가!"배준우가 크게 호통 쳤다."엄마가 전에 말한거 벌써 잊었어? 엄마가 돌아오고 나면 오빠랑 진유경 사이의 혼약은 바로 진행시킬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하루 빨리 고은영이랑 헤어져.” "우리가 헤어질 것 같아?""뭐라고?!" 배지영은 어이가 없어져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정말 그 여자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아무것도 잘난게 없는 고은영이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거지?"엄마한테 전해. 우린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고은영은 이미 임신도 했다고!""..."임신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배지영은 순간 머리를 크게 얻어 맞은 듯 했다.임신? 고은영이 임신했다고?어쩐지 고은영이 전보다 조금 살이 찐듯 싶었다.그저 살 찐 줄만 알았는데 임신이었다니!그것도 오빠 아이를 가졌다니."임신?" 배지영은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그래.”배지영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발전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화가 나 뭐라도 욕하고 싶었지만, 단호하기만 한 배준우의 모습에 그녀는 감히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그녀의 무례한 태도에 마음 같아서는 침을 마구 뱉고 싶었지만, 굳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은영은 다시 말을 아꼈다.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고은영의 태도에 배지영은 더욱 화가 나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떠났다.배준우의 아이를 임신까지 한 상황에 배지영은 더이상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서로 갈 길을 갔다.고은영은 회사로 다시 돌아왔는데, 마침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배준우는 물건을 잔뜩 들고 들어오는 고은영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기숙사에 갔었어?""네. 잠시동안은 기숙사에 살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 방은 다른 직원한테 넘겨줘도 될 것 같아요."그녀가 여태 짐 정리를 하지 못해서 그동안 그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서 살지 않았었다.다행히 남은 물건이 많지도 않아 고은영이 직접 가서 물건을 들고 온 것이다.이때, “탁”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땅에 떨어졌다. 그 것은 바로 목걸이었다.그러자 고은영이 직접 몸을 구부려 주웠고 배준우는 순간 그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에 시선이 쏠렸다. 정교한 디자인이 한눈에 보아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언뜻 봐도 남성에서 만들어진 목걸이는 아닌 것 같았다.할 말을 마친 고은영이 다시 사무실을 나서려 하자 배준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왜요?""이리 와봐."그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은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갑자기 무슨 일이에요?"그러자 배준우가 손을 뻗었다."가져 와봐.""뭘요?""목걸이.""아, 네."그러자 고은영은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목걸이를 배준우에게 건넸다.머릿속에는 순간 남성에서 배준우가 이 펜던트 목걸이를 책상 위에 내던지던 그 상황을 떠올렸다. 당시 배준우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난동을 부렸다. 그 모습에 고은영은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다. 어딘가 모르게 이끌리는 이 목걸이에 관심이 생긴 배준우는 손에 들고 자세히 훑어보았다.펜던트는 그저 평범한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디자
바로 전날, 안지영은 장선명과 함께 예복을 고르고는 약혼 날자을 3일 후로 정했다. 또한 청첩장까지 준비해서 서로 나눠가졌다.안지영은 준비한 청첩장을 모두 자신의 동료들에게 건넸다.왕 사장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조만간 휴가 내겠네?""네. 일주일 정도는 휴가 낼 것 같아요."장선명의 입장에서는 비록 두 사람이 가짜 약혼이긴 하지만, 장씨 가문에게는 제대로 된 연극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특히나 할아버지가 의심을 하면 안되니까.그리하여 아무리 가짜 약혼이라도 그들은 신혼 여행까지 가려고 했던 것이였다.왕 사장은 안지영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면서 맡겨진 일을 최대한 잘 안배하라고 당부했다.한편 대표 사무실에서 책상 위에 놓인 청첩장을 본 나태웅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그러자 눈치를 챈 왕여는 조심스레 말했다."여기 장씨 가문 넷째 도련님이 직접 보내온 청첩장입니다.""직접 보냈다고?" 왕여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왕여의 말투를 듣고는 무엇인가를 알아챘다.자신의 대표님이 안지영한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태 나태웅이 안지영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는 왕여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름 교활한 방법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안지영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효과로 장선명과의 약혼까지 만들어냈다.난감한 상황에 왕여도 어쩔 바를 몰라 했다.오래동안 대표님의 손바닥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이젠 탈출을 해버렸으니 왕여는 가슴을 졸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게다가 안지영 씨도 회사 내부에 꽤나 많은 청첩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약혼식은 바로 3일 후고요."3일 후라면 주말이기에 일부러 주말이라는 좋은 날짜를 골라 많은 손님을 접대하려는 것 같았다. 나태웅은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안지영을 불러와."왕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그러고는 얼른 뒤돌아 사무실을 떠났고, 곧바로 청첩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수많은 축하 인
“내가 대신 가서 혼내줄게. 너는 여자니까 이미지 신경 써야지. 착하지?”“싫어요! 이미지 따위는 필요 없어요.”장선명이 바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서 그녀 앞에 내밀었다.안지영은 핸드폰 속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와 마치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얼어붙었다.그녀가 조용해지자 현장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그 남자 때문에 이런 모습 하려고?”안지영은 말문이 막혔다.‘젠장,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특히나 더 참을 수 없는 건, 나태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그놈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거지?’“집에 가자. 착하지?”장선명은 부드럽게 안지영을 달랬다.옆에 있던 구이준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장선명이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유명했다.그가 소유한 유흥 장소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미녀들이 넘쳐났다.여린 타입, 매혹적인 타입, 요염한 타입. 남자들이 환장하는 스타일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또한 유흥가에 들어오는 여자 중 장선명을 유혹하여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당시 구이준과 안열은 장선명 주위를 얼씬거리는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처리했지만 장선명이 여자들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구이준과 안열은 당시 장선명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 의심하기도 했었다.예쁜 여자들이 들끓는 곳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장선명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타입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구이준은 안지영을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다른 여자들이랑 비교해도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도련님께서 왜 이 여자를 좋아하시는 거지? 화끈한 성격? 아니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호쾌한 모습?’머리를 정리하던 안지영은 헝클어진 머리로 인해 손가락이 끼여버렸고 그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다.그로 인해 나태웅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
고은영은 분노에 휩싸인 채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가게를 나왔다.배준우가 간 줄 알았던 그녀는 가게에서 나와 배준우의 차가 원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화가 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통화를 하고 있던 배준우는 그녀를 보자마자 통화를 마무리했다.“그래. 그렇게 처리하고 끊어.”그는 곧바로 고은영의 부풀어 오른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화났어?”고은영이 말하지 않아도 배준우는 알 수 있었다.진성택이 분명히 또 진유경과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다.“계속 곧 죽을 거라는 얘기만 반복하고 있어요.”“도덕적 협박이구나?”배준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진성택이 진유경을 편애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양녀를 선택하고 친딸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평소 세심하지 않은 배준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은영에 대한 연민이 짙어졌다.고은영은 더 이상 진성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매번 만나면 진유경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배준우가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화내지 마. 어차피 너한테 중요한 사람도 아니잖아.”“그래도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그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슴 한구석이 쓰려왔다.‘네 명이 자식이나 낳았으면서 엄마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엄마가 나한테 남긴 마지막 사랑마저도 첫사랑의 딸에게 나누려고 하다니...’“저녁에 네 큰오빠네에 가서 밥 먹을까?”“오빠한테 전화 왔었어요?”말 돌리는 데 성공한 배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응. 아까 너 봤다면서 저녁에 밥 먹자고 하더라고.”“좋아요!”고은영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정훈과 진윤과 가까워진 후, 고은영은 두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진성택은 정말 무정했다.아니, 애정은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내와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언제 태현 오빠한테 물어볼 거예요?”“조금 있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가려고.”“좋아요!”고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고은지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윤은 밖에서 시간을 확인했고 배준우가 10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문득 고은영이 대문 쪽에서 들어오는 모습을 봤다.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에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진윤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고은영이 가까워졌고 그녀는 진윤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큰오빠.” ‘큰오빠’라는 단 한 마디에 진윤의 마음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우 찾으러 온 거야?” 고은영은 너무 오랫동안 뛰어왔는지 호흡이 가빠졌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안에 있어요?” “응, 안에 있어. 지금은 들어가지 마.” “왜요?” 고은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진윤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나태웅이랑 얘기 중이야.” “네? 나태웅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고은영의 말투도 달라졌다. 그녀는 전에 나태웅과의 영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가 최근 동안 안지영을 괴롭힌 일이 떠올랐다. 고은영과 안지영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이 안지영이 화가 나면 고은영도 같이 화를 내주었다. 진윤은 그녀가 나태웅을 언급할 때의 그 표정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나태웅을 싫어해?” “싫어해요!” 고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전에 그녀가 배준우와의 일에 그렇게 괴로워했던 건 대부분 나태웅 탓이었다. 정말 그땐 너무 힘들었다. 지금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고은영은 그 당시 어떻게 버텼는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배준우는 이미 안에서 나왔다. 고은영을 보고 잠시 멈칫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바로 왔어?” “준우 씨 찾으려고요. 급한 일이 있는데 전화도 안 받았잖아요.” 고은영은 불만을 섞어 말했다. 배준우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윤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것을 본
나태웅이 혼자 남았을 때 그의 세계는 조용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 고요함은 더 큰 괴로움이 되었다. 그는 전화를 꺼내어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전화는 바로 차단되었다. 그는 다시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사무실에서 안열은 겨우 안지영을 달래놓은 상태였다. 전화의 진동에 안열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리고 안지영도 전화를 확인하고 또다시 통제불능이 되었다. 안열은 안지영이 또 움직일 것 같아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흥분하지 마요. 바로 차단할게요.” “받아요. 이 미친놈이 뭐라는지 봐야겠어요.” 안지영은 이를 갈며 말했다. 안열은 입꼬리를 떨구며 말했다. “그냥 받지 말죠?” 안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받아요!” ‘이 사람은 진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을지 걱정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안지영의 말에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열은 안지영을 한 번 쳐다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지영 지금 옆에 있나요?” “없어요!” ‘없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지영은 나태웅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전화를 뺏으려 했다. 그녀는 그를 욕하고 나씨 가문이 망하길 저주했다. 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안열이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한 마디만 전해줘요.” “말하세요.” “안지영은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오늘 밤 킹덤 타운을 떠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늘 밤 하주원에게 사과를 하는 겁니다.” “이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안열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음을 바뀌었어요.” 안열은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안지영은 분노에 가득 찼고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안열의 손을 떼며 전화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태웅, 너 이 미친놈! 꿈도 꾸지 마!” “그래, 그럼 하늘 그룹이 네 손에서 얼마나 있을지 지켜보자고!” “너 이 자식, 내가 너의 조상을 건드렸나 보다!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는 거네!” 안열은 안지영의 욕설을 듣